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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시는 내게 쓸모가 있는가
저런 부모 밑에서 큰 것도 운을 타고났다고 해야하나 그 집안 공주로 컸다더니 아빠를 따라와선 맹랑한 티가 났다. 나에게 웃음을 흘리던 그 여자는 내 삶 가까운 곳까지 순식간에 밀고 들어왔다.
장동철은 자신에게 딸애를 들이미는 김사장의 검은 속내가 부담스럽다며 껄끄러워했다. 엉뚱하게도 걔가 내게로 굴러들어오겠다하니 신이나서 김여시를 내게 갖다 넘겼다. 적당히 데리고 있다 김사장과 틀어지면 그때 정리하면 그만이다. 볼모로 잡힌 신세인 김여시는 돌아가는 상황들이 지 뜻대로 흘러간다고 착각중이겠지.
김여시를 넘겨받았으니 김사장은 적극적으로 우리사업을 돕와 예상보다 일을 확장하는데 속도가 붙었다. 이럴 때 괜히 그 여자를 애들 손에 맡겼다가 탈이라도 나면 아무리 김사장이라도 가만있지 않을테니 내 곁에 두는게 확실했다. 김사장의 피가 흐르는데 의뭉스러운데가 없을리가, 데리고 온 첫날부터 김사장과 장동철 귀에 들어가게 방을 함께 썼다.
날 마주보며 가짜고백을 하던 맹랭한 구석은 어디가고 조금만 겁을줘도 발발떨며 내 눈치를 살폈다. 곱게 컸다더니 여태 하는 일이라곤 없는지 집에서 내 눈치를 보다 정해준 외출시간에 맞춰 혼자 돌아다니다 쇼핑을 하는 것 말곤 가까이 지내는 친구도 없었다. 등 뒤로 따라오는 날 관찰하는 시선이 귀찮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대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이 여자가 내 집에 들어온지 며칠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모든게 서서히 흐트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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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깥에 얘기하고 다니지 말 것.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올 것. 백창기가 알려준 동거규칙은 간단했다. 그래도 이 집에선 내가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으니 매일이 지루하고 심심해 나가봐도 쇼핑말곤 뭘 할 수 있나 싶었다. 쇼핑마저도 지겨워졌다. 답답해..
잠결에 백창기에게 들러붙은 날은 해가 질 때까지 집에 들어가기 싫어 한참을 밖에서 시간을 죽였다. 백창기의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볼 자신이 없었다. 그와 마주쳤을때 막상 그가 어떤 반응을 할 지 예상할 수 없었고 그 일이 실수라 쳐도 너무 부끄러웠다. 야속하게도 귀가 시간은 어느새 다가왔고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떼 집으로 돌아가자 백창기가 먼저 와있었다. 그도 방금 들어왔는지 외출한 복장 그대로 물잔을 들고 주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한 손은 허리춤에 다른 한 손으론 물을 마시면서 날 쳐다보는 백창기를 애써 외면했다. 오늘은 정말 곁눈질도 힘들어 그가 어떤 표정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일찍 다녀"
"..네"
무심한 말투는 여전했고 잽싸게 대답하자 이후로 내게 와닿는 시선은 없었다. 내게 더이상 할 말은 없는지 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백창기는 언제나처럼 거실에서부터 셔츠 단추를 풀어제쳤다. 내가 있어도 늘 혼자인 듯 행동했다.
그가 저러는 건 이제 익숙한데 새벽에 있던 일 때문인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화들짝 놀라 몸까지 돌리며 그를 피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씻으러 들어간 지 한참된 거 같은데 나는 어쩐지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달리기를 한 듯 뛰었다.
그가 모르고 있는 건지 알지만 신경도 안 쓰는 건지 몰라도 변한 건 없었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백창기 옆에서 자는게 다시 어려워졌다. 어쩌다 선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며칠이 지나도 이 증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잠든 사실에 놀라서 깨면 다시 잠들기가 힘들었고 옆에 조용히 잠든 그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밤을 새워야했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어둠속에서도 들킬까 실눈을 뜨고 그를 구경하는 일이다.
그가 일어날 시간이 되면 그때부터 눈을 감고 잠든 연기를 하다 그가 집을 나가고 나서야 낮잠으로 부족한 잠을 채웠다. 하지만 수면의 질이 낮아서였을까 며칠가지않아 체력이 바닥나 버렸다. 오늘은 마사지 받으러 나갈 기운조차도 나지않고 몸은 찌뿌둥하고 축축 처지는게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자는 연기를 하다 나갈 준비를 하는 그를 불렀다.
"욕조에 샤워밤 써도 돼요?"
대답이 없길래 뻑뻑한 눈을 떠 그를 찾았다. 그가 나가려다말고 나를 돌아보고 있었고 나는 이불에 파묻혀 그를 마주봤다. 서로 쳐다만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샤워밤을 몰라서 대답을 안해주는가 싶어 말을 급히 덧붙였다.
"물에 풀어서 쓰는건데 목욕할때요...써도 돼요?"
"어"
뭐 그런 걸 묻냐는 듯 귀찮게 대답한 백창기의 찌푸린 미간을 보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욕조를 아예 안쓰시길래 예의상 물어본거죠 누군 말 걸고 싶어 걸었나. 웃을 일도 아닌데 웃고 있으니 제정신처럼 안보이겠지. 어쨌든 허락 받았고, 기지개를 켜다말고 누에고치마냥 이불을 온 몸에 둘둘 말았다. 좀 더 자고 일어나서 나중에 써야지. 그런 나를 보는 백창기의 눈엔 한심함이 담겨있다. 그렇게 쳐다봐도 난 아무렇지도 않지롱
"다녀오세요"
나 누구한테 인사하니? 무시를 해도 뭐 저렇게까지 하냐 내가 먼저 말 걸어놓고 그래도 출근한다는 사람 그냥 보내기 민망해서 인사를 했건만 그는 반응조차 해주지 않았다.
좀 푹 자고 싶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누구도 없는 고요한 집. 나는 그가 쓰지않는 빈 방에 혼자 서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백창기 집에는 쓰지도 않는 빈 방이 많다. 답답하면 집을 나서 습관처럼 사다모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사온 쇼핑백 그대로 이 곳에 처박아뒀다. 그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숨겨뒀다는게 더 정확한 의미겠다.
군인출신이라 그런가 백창기는 깔끔했다. 물건은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둬야 직성이 풀리는 듯 했다. 각자가 있어야 할 위치가 있었다. 청소하는 메이드가 와도 그가 정리해둔 물건은 손도 대지않았다. 방을 따로하나 주면 서로 신경쓸 일도 없을 걸 물건을 사도 어디에 둬야할지 은근 스트레스였다. 발에 채이는 쇼핑백들을 다 뒤집어 엎으며 샤워밤을 찾아다녔다.
내가 이런 걸 샀었나 싶은 초면인 물건도 있어 이미 사서 재놓은 걸 꺼내 새로 구경하느라 정리가 늦어졌다. 혼자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목욕물을 받아 몽글몽글한 거품에 들어가 앉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노곤노곤하게 만들어서 오늘은 그냥 일찍 자야겠다. 조용한 욕실에서 작게 비눗방울 터지는 소리를 듣자 졸음이 몰려왔다. 좋네
드륵
미닫이로 된 욕실문이 조금 열렸다. 욕조에 거의 누워있던 나는 깜짝놀라서 몸을 일으켜 무릎을 끌어모으고 몸을 숨겼다. 욕실문만 열어서는 욕조가 보이지도 않지만 노크도 없이 열린 문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까지 있을건데"
백창기였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예민했다. 가끔 일에 관련된 전화를 받을때나 들었지 나한테 그런 적은 없어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왔는지도 몰랐네. ㄱ자로 꺾여있지만 그가 가까이에 있다 생각이 들자 나는 몸을 더 웅크렸다.
"어...한..10분요? 아니 5분요."
욕조에 물 빼고 대충 헹구고 나오면 그쯤 되지 않을까 싶어 대답했는데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기다렸나보네. 그때 욕실 미닫이문이 확 다 열렸다.
"그럼 그냥 있어"
미친 인간아. 피랑 먼지랑 흙이랑 아무튼 지저분한 백창기가 나체로 들어왔다. 욕조에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내려다보는 백창기의 눈은 평소에 보던것보다는 날카로웠다. 무서워. 그는 나를 쳐다보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샤워부스에 들어간다. 나는 그의 용건이 아니니까.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아까 내 눈에 들어온 광경에 순간 얼었다. 이렇게까지 사고가 정지되는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방금 상황들을 이제야 뇌가 인지 한 것 마냥 뒤늦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몸을 더욱 웅크리고 타일에 맺힌 물방울만 쳐다보았다. 그가 샤워하는 소리만 욕실에 가득했다. 세차게 튼 물소리와 피부를 마찰시키는 소리는 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의 샤워시간은 짧았다. 물을 잠구고 머리를 손으로 턴 백창기가 샤워부스를 나왔다. 수건도 없이 물이 뚝뚝 떨어진 채 나간다. 나를 다시 스쳐지나가던 백창기의 시선이 한껏 구부린 내 등에 닿는게 느껴졌다.
"마저 해"
손발이 쪼글해지고 물이 식고 거품이 사라질때까지 나는 욕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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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백창기에게 혼나는 일이 종종 생겼다. 내가 낯선 자와 함께 사는 고충이 있는만큼 그도 당연하겠지....내가 저번에 말했었나? 백창기는 깔끔한 편인데다 물건의 위치가 다 정해져있다고. 하루는 파우더룸에 선 백창기가 나를 불렀다.
"정리 좀 해"
"한건데요...."
백창기가 나를 내려다보자 괜히 쫄렸다.
"아니...말 대답하는게 아니고요..."
진짜 나름 정리해둔건데 혼났다. 안되겠는지 직접 물건을 재정렬하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원래 다들 제자리가 있던 것처럼 척척 들어갔다. 내가 한 것보다 낫긴 한데...그한테 혼나니 머쓱해져서 입이 괜히 샐쭉해졌다. 4글자를 혼낸다고 표현하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튼 그에게 불려서 혼나는 건 싫었다. 핸드폰을 들고와 그가 정리해둔 걸 찍었다. 죄다 내 물건으로 점령된 파우더룸 선반들에 집주인인 백창기 물건은 몇 개 없었다. 좀 그렇긴 하네.. 다음부턴 실수 안해야지.
"내일부터 잘할게요"
그가 받아주지 않으니 그냥 허공에다 말한거나 다름없다. 이 정도 무시는 이제 무시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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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사건 이후로 목욕시간을 옮겼다. 그가 올 거 같지 않은 시간에 미리 씻기로. 그런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 개운해진 몸으로 어제 마저 읽던 책을 읽으려고 펴자 백창기와 조부장이 들어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시계를 보자 그럼 그렇지 그들의 귀가가 너무 빨랐다.
"어? 일찍 오셨네요"
거실에서 안 마주쳤으면 이런 인사도 안했을것이다. 원래 안한다. 내 나름 생각으로 그래도 백창기랑 같이 사는 사람인데 퇴근한 보스한테 맞이도 안해주는 동거인이 있다? 얼마나 그의 체면에 상할까 싶어 한 것이다. 반긴 게 아니다. 어쩐 일인지 백창기도 내 인사를 받아줬다.
"씻고 다시 나갈거야"
"예..."
씻으러 들어간 그를 바라보다 책을 읽으려는데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서있는 조부장이 거슬렸다. 고개를 들어 애매하게 웃어보이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지 않았다. 참고로 난 조부장 웃는거 한 번도 본 적 없음. 서로 대화할 마음은 없으니 그냥 어색하게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거다. 그래도 샤워하러 간 사람이 나오려면 몇 분은 더 있어야 할건데 이렇게 불편하게 있어야 한다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책을 덮고 어정쩡하게 일어난 나는 천천히 조부장에게 다가갔다. 집이 시원한데 밖에서 많이 더웠는지 셔츠를 펄럭이며 땀을 식히는 조부장을 보니 가만히 있기 그랬다.
"밖이 덥죠? 시원한 물 드릴까요?"
냉랭한 조부장은 대답이 없었다. 백창기에게 단련돼서 이정도 무시야 껌이다. 나는 니가 씹던가 말던가 일단 주방으로 간다는 마인드로 그를 지나쳐갔다. 냉장고 문을 열며 다시 물었다.
"쥬스도 있어요"
그런 내 말에 콧웃음을 흘리는 조부장이 내게 말했다.
"안주인 행세 하지마"
유리잔에 물을 따르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솔직히 인정한다.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어쩔 수 없네, 주인 잃은 찬물은 내가 마셔야지. 나는 유리잔을 든 채 주방에서 다시 나와 조부장 옆을 스쳐지나가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싫음 말고"
그의 앞에서 약 올리듯 시원한 물을 한모금 마시곤 그대로 지나쳐 쇼파에 앉았다. 그래도 내가 김사장 딸로 산 세월이 얼만데 웃기지도 않네 니까짓 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책을 피는데 책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의 신경전은 계속되었다. 습관처럼 머리를 말리지않고 털털 털며 나오는 백창기를 보자 생각이 바꼈다. 나는 내려놨던 물잔을 다시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백창기다.
"늦게 들어오세요?"
왜 안하던 짓을 하냐 싶겠지. 백창기가 나가려다가 멈추고 날 쳐다봤다. 나는 내 립밤자국이 진하게 찍힌 물잔을 그대로 그에게 건넸다. 내가 잘할게요 제발 받아주세요. 조부장이 날 무시했단말야.
"여기 물"
안하던 짓을 콤보로 하긴 했다. 백창기의 눈이 물잔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내 얼굴로 올라왔다. 아닌 척 했지만 눈으로 그에게 사인을 보냈다. 받아서 마셔주세요 함만요. 간절함이 통했는지 그도 이런일이 종종 있는 것처럼 익숙해 보이는 동작으로 내가 건넨 물을 받아들고 한 입에 털어넣고 다시 물잔을 내게줬다. 와 나도 이런 일이 자주 있었던걸로 착각할 뻔..역시...역시 기민한 사람.
"다녀오세요"
"그래"
백창기는 그대로 집을 나섰지만 조부장은 그를 뒤따르다 말고 살짝 나를 뒤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재밌네 그 안주인행세.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아까부터 부르던 콧노래를 부르며 물잔을 설거지해서 엎어놓았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 내용에 집중을 해보는데 책 속 낯익은 글자가 이상하게 눈을 사로잡는다.
정리...정리?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씨....책을 쇼파에 던지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씻고 나와서 머리 말리니 지쳐서... 진짜 진짜 좀만 쉬다가 정리 하려고 했는데... 백창기가 일찍 들어온건데....그한테 전에 지적당한 파우더룸에 물건을 널부러 놓은게 생각났다. 호다닥 뛰어 들어간 파우더룸에 도착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엉망을
으로 둔 화장품들이 깨끗하게 제자리에 들어가있었다. 뭐야...찌르르한게 심장이 아렸다. 상표들이 이쁘게 보이게 물건들을 돌려가며 그가 한 대로 다시 해보며 이걸 정리하는 백창기를 상상해봤다. 이 남자 갑자기 왜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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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가 좀 이상하다. 백창기 앞에서 브래지어를 안하고 돌아다녀도 아무렇지 않은건 지금도 여전하다. 근데 자꾸 혼자있을때면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집에 도착하면 곧장 샤워하러 가면서 옷을 벗어던지는 백창기의 등. 내 허벅지에 맞닿았던 그의 단단해진 몸의 느낌과 샤워실에 갑자기 들어와 마주하게 된 그의 전신나체가 자꾸 오버랩됐다. 그러다보면 이상하게 다리가 꼬이고 목도 마른 것 같았다. 나 욕구불만인가. 에이 아냐 백창기가 고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놀래서 그런거지.
혼자 있으면서 자꾸 생각이 거기로 빠지니 나 스스로가 웃겨서 혼자서 헛웃음을 수시로 흘렸다. 나 또 생각하네. 아 웃기다 김여시. 백창기는 언제나처럼 같은 모습인데 나혼자 수시로 들끓었다 스스로를 비웃었다 차분해졌다 난리였다. 그 웃음도 며칠가지 못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어둠 속에서 잠든 백창기의 모습을 한참 감상하다 나의 변화를 발견했다.
그가 여기에 있는 사람중에서 능력이 뛰어나고 가장 센 사람인 것도 있었지만 그를 원했던데에는 여자에게 흥미없고 고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욕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가 가장 컸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잠결에 그와 몸이 맞닿았던 짧은 순간에 알게 되었다. 그러면 그와 있는 공간도 순간도 불쾌하고 역겨워야했다. 평소에 남자를 생각하면 그랬던 거 처럼 알고보니 백창기도 그냥 남자니까. 하지만 그 날 이후부터 나는 그를 남자로 욕망하고 있었다. 나는 저사람과 그 새벽밤보다 끈적하게 맞닿아 흥분하고 싶었다. 나에게 관심도 없는 저 남자와. 짝사랑도 아닌 이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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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정의 변화를 인지한 이후 자꾸 충동이 들었다. 오늘밤은 특히 더 그랬다. 잘 시간이 됐으니 그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아예 그를 바라보며 옆으로 누웠다. 그는 언제나처럼 잠을 그 시간에 자야하니까 자는 사람처럼 숨만 고르게 내쉬고 있다.
"백창기씨.."
"....."
"자요?"
"어"
자는 사람이 어떻게 대답을 해. 내가 쳐다보는 걸 알텐데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을 보다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조금 옮겨 그가 누운 곳 가까이로 가 엎드려서 대놓고 감상했다. 조금만 더 기울이면 내 머리카락이 쏟아져 그의 얼굴을 간지럽힐수도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뭐하냐는 듯 천천히 눈을 뜬 백창기의 매마른 눈을 마주봤다. 쿵쿵쿵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심장이 아까보다 세게 뛰었다. 우리는 결코 이럴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키스해도 돼요?"
못들었나 싶을 정도로 놀라지도 않는 감정 없는 그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더 가까이 가져갔다.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그의 얼굴을 중심으로 커텐처럼 쳐진 머리카락이 갑자기 웃겼다. 그를 바라보며 웃으니 뭐하는거냐, 그의 눈이 내게 말했다. 나는 이미 마음을 먹었기에 머리카락을 쓸어 한쪽 어깨로 넘기며 그 날 밤처럼 몸의 절반을 그의 몸에 올라탔다.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체중을 실으며 그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붙였다. 따뜻한 입술과는 달리 인형처럼 아무 반응이 없는 그의 입술을 츕츕 빨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걸 떠올리며 그냥 내 충동이 이끄는대로 했을 뿐이다. 보면 입술을 벌리고 혀도 섞던데 눈도 감지 않고 가만히 누워 날 보는 남자는 반응이 없었기에 어설픈 키스는 그렇게 끝났다.
팔에 힘을 줘 몸을 조금 일으키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좋았는데 그는 지루했나보다. 키스하기 전이랑 똑같은 눈빛에 머쓱해졌다. 아니 오히려 재미없다는 눈빛이었다. 상당히 민망했다. 나는 그냥 민망할때 자주하는 습관처럼 배시시 웃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겹쳐져 있었다.
"그거 아세요?"
대답이 없는 그의 입술을 다시 바라보다 몸을 더 깊게 갖다붙였다. 적당히 하라는 듯 그제서야 그의 손이 내 팔을 살며시 잡았다. 나는 그대로 몸을 더 기울여 비밀얘기를 그의 귀에 속삭였다. 둘 밖에 없는 집에서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거 내 첫키스에요"
"...."
"...진짜로"
나는 그를 바라봤고 그도 나를 바라봤다. 이미 키스 실력이 형편없었으니 알았으려나 여전히 놀라는 기색이 하나도 없는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이대로 물러나긴 아쉬웠다.
"저한테 키스 해주시면 안돼요?"
어이가 없다는 듯 하, 짧게 헛웃음을 흘리던 그가 내 입술을 바라봤다. 내 입술을 바라보는 남자 좀 야하네. 그도 아까 내 시선이 야하다고 느꼈을까. 백창기가 아까부터 잡고 있던 내 팔을 세게 그의 몸 쪽으로 당겼다. 반만 걸쳤던 몸이 주욱 따라 올라와 아예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순식간에 서로의 몸이 완전히 겹치자 나는 두 팔에 힘을 줘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가 완전히 자기 몸을 올라탄 내 허리를 한 쪽 팔로 감더니 남은 한 손으론 다시 흘러내리려는 머리카락을 전부 그러쥐었다. 뜯길 만큼 세지는 않았지만 짧고 강하게 쥔 머리카락땜에 나는 내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의 손길에 그대로 맡겨져야 했다.
그가 선호하는 키스각도일까 고개가 한껏 옆으로 꺾였다. 긴장으로 들숨과 날숨이 오가기 위해 입술이 벌어지자 그가 그대로 내 머리를 눌러 입술을 삼켰다.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그의 혀에 놀라 고개를 물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이지 말라는 듯 머리카락을 더 세게 그러쥐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숨을 쉬기 어렵다 느껴질 때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뜨거워서 감당이 안되는 여자와 나를 헤집어놓고도 차갑기만 한 남자의 눈이 마주치면 그가 다시 머리를 당겨 입술을 삼켰다. 어설프게 그가 하는 것처럼 따라해봤으나 모든 게 엉망이었다. 흡입하는 힘과 타액으로 퉁퉁불은 입술이 떨어졌다. 버둥거리느라 어느새 그와 다리가 깊이 얽힌 것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차갑고 권태로운 눈빛과는 달리 그의 몸도 나의 몸만큼 뜨거워져 있었다. 머리를 그러쥔 손과 허리를 감은 팔의 힘이 풀리자 나는 겨우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짧게 숨을 내뱉은 걸로 호흡을 바로한 그는 고개만 고쳐 누운채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기가 해준 봉사가 마음에 드냐는 듯....나는 여전히 호흡을 가다듬지 못하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에서 내려올 생각은 않고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그를 마주보자 웃음이 피식 나왔다.
내가 부탁을 한 건 맞지만 자기에 의해 흐트러진 날 보는 그의 눈이 지금 조금은 흥미를 띄고 있다고 느껴졌다. 나와의 행위가 재밌었을수도 있지만, 내 꼴이 우스워보여서 그럴수도 있겠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보란듯이 손으로 훔치면서도 나도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내 얼굴은 붉어져 있었겠지만 그를 평가하듯 눈썹을 들썩이곤 아까의 키스를 복기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키스는 이런거구나. 생각보다 난잡하네.
"음..."
그대로 그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몸을 비켜앉을때까지 우리의 시선을 계속 맞부딪혔다. 내가 완전히 내려가자 그도 자세를 풀어 자기 머리를 두어번 쓸어 넘기다가 그대로 자기 팔을 뒤통수까지 넘겨 팔을 베고 누웠다. 여태 그를 본 이후 처음보는 느슨한 자세였다. 그의 흥분한 몸을 보고싶었지만 시선이 그의 가슴 밑으로 내리긴 영 민망했다. 충분히 온 몸으로 느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털썩 힘이 없는 듯 내 자리로 돌아가 눕자 그도 어느새 팔베개를 풀고 평소에 자던 자세를 갖췄다. 저 남자는 잘 준비가 벌써 끝났구나.
"이제 자라"
"네. 잘자요"
그는 여전히 인사를 돌려주는 법이 없었다. 눈을 감고 정해진 일정처럼 잠이 드는 그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만지며 아까의 여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