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 선포자 프란치스코
김 영 배(안드레아)
1. 첫 제자들
1207년 4월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수바시오 산에서 도둑에게 한 “나는 위대한 왕의 사신이다!”란 말이 그의 미래의 표어와 목표가 된다. 이 사자로서의 임무는 포르치운쿨라에서 성 마티아 축일 미사 후부터 시작하였다. 이렇게 복음 선포자로서의 일을 시작하며 그는 언제나 평화에 관한 말을 하였다. 이러는 동안 제자들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역사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첫 제자는 퀸타발레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프란치스코처럼 가난해지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을 입고 함께 살고 싶어 했었다. 뒤이어 카타니의 베드로도 그를 따르게 되면서 그들이 함께 기도하며 미사경본을 펼칠 때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불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 19,21)란 말씀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그리고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셨다”(마르 6,8)라는 구절을 보고 이것을 그들의 회칙으로 삼고 말씀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후 탐욕스런 사제 실베스텔, 자선행위를 실행한 에지디오형제를 받아들이고 선교 여행을 하면서 사바티노, 모리코 그리고 요한이라는 세 제자를 얻게 된다. 그는 선교여행을 하며 설교를 하되 극히 단순한 것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라, 하느님을 사랑하라, 악에서 선으로 돌아오라” 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실천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서 세상으로 보냈다.
2. 수도회의 기초들
그들은 가진 것을 다 내어 놓고 탁발을 하며 형제들이 늘어나자 포르치운쿨라의 오두막에서 약 20분 거리의 헛간(리보토르토)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형제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으나 프란치스코는 그날의 양식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버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하늘나라를 잃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하며 자주 그의 동료들에게 엄격한 가난 생활을 지켜나가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고 엄격함 때문에 그들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차츰 돌아오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가난하였지만 언제나 가진 것을 나누었고, 청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줄 것이 있었다.
또한 프란치스코는 당시에 정치적 색깔을 띤 이단들에 맞서 조용히 기도와 삶(행실)으로, 거룩한 복음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며 모든 일에서 복음의 완덕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의 신앙을 새롭게 하시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노첸시오 교황은 무너지려는 라테라노 성당을 받치고 쓰러져가는 교회를 다시 세우는 꿈을 통하여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구해낸 사람은 바로 작고 가난한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라는 것을 알고 그가 원하는 그의 회칙을 인준해주고 성직자들이 받는 삭발을 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부터 직접 받은 그 영예로운 소명을 돌아가 실행하기 시작하였다.
3. 리보토르토
리보토르토는 꼬불꼬불한 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수바시오 산에서 흘러나와 성당 옆을 지나가는 개울에서 그 이름을 취하고 있다. 처음에 리보토르토에는 양우리가 있었는데 성 프란치스코는 1209년 4월 16일 퀸타벨레의 베르나르도, 베드로 카타니 형제와 함께 그의 거처로 삼았다. 4월 23일 성 죠르죠 축일에 아시시의 에지디오가 새로이 합류하였다. 프란치스코는 여기서 에지디오 형제와 함께 마르케 지방으로 첫 사도적 선교를 떠났다. 그리고 1209년 여름 선교를 마치고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왔을 때 사바티노와 모로코, 카펠라의 요한 필립보 통고가 그에게 합류하였다. 이어 그들은 같은 해 가을 또는 겨울에 리에티 계곡에서 제 2차 선교 활동을 하고 1210년초에 포르치운쿨라로 돌아왔다. 이 때 산 코스타노의 요한, 바르바로, 베르나르도 비질란테, 안젤로탄그레디가 합류하여 12명이 되었다.
그들은 리보토르토에서 극도의 가난과 형제애를 추구하면서 머물렀다. 그들은 스스로를 '아시시의 회개자'라 불렀다. 리보토르토에 모여 사는 최초의 그룹은 세상의 걱정에서 해방되고 불타는 신심과 열성으로 성령의 열정을 뚜렷하게 체험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형제들은 그들의 젊은 창립자가 성령의 계시로 자기들의 숨은 행동과 생각까지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1210년 봄 형제들의 수가 증가했을 때 프란치스코는 생활양식의 인준을 교황에게 청하기 위하여 리보토르토로부터 형제들과 함께 로마로 갔고,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구두 인준을 얻은 뒤 형제들은 새로운 거쳐를 찾아야만 하였다.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 이후에도 외피다의 코라도 형제와 에지디오 형제는 여러 해 동안 여기서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1300년대 후반에는 사라센인들에게 순교당한 세베니코이 복자 니콜라오도 여기에 거처했었다.
초기 움막은 1455년 프란치스코 사카르도 형제에 의해 경당으로 옮겨졌다. 그 경당은 성모님께 봉헌된 한 성당 주변에 건축되어진 것이다. 1491년 교황 식스토 5세는 좀 더 큰 성당의 건축을 요구하였고, 그것은 1640년경에 완공된다. 이때까지 아주 조그마한 수도원이 있었는데 5년 뒤에 큰 수도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어 1854년 2월 11일의 지진 피해로 베르나르도 티니 형제의 설계에 따라 신 고딕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1909년 세 개의 주랑을 가진 현재의 성당이 이전의 잔재 위에 지어졌다. 1926년에는 옛날 모양에 따라 움막이 복구되었다.
4. 포르치운쿨라와 초기 제자들
포르치운쿨라를 초기 전기들은 작은 집이라고 불렀으며, 여기에 그와 첫 동료들이 갈대와 진흙으로 지은 움막에서 머물렀다. 포르지운쿨라는 프란치스코 생애와 형제 공동체의 중요한 사건들은 이 장소와 연관되어 있다. 1211년 프란치스코는 수바시오 산의 베네딕토회의 아빠스인 테오발도로부터 포르치운쿨라를 영구히 점유할 허락을 공식적으로 얻게 된다. 프란치스코 사후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 주변에 여러 건물들이 덧붙여졌는데 그 가운데 반원형 후진에 맞붙어 있는 형제들의 기도를 위한 가대의 주름진 선, 오른쪽의 한 경당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새 대성전의 초석은 1569년 3월 25일 아시시의 주교 필립 제리에 의해 놓여졌다. 공사는 트리덴티노 공의회 폐막 때 밝힌 도미니코회 출신 교황 성 비오 5세의 원의에 따라 건축되었으나 1832년 지진으로 경당의 둥근 천장을 흠 없이 남기고는 대성당의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다.
1836년 2월 26일 교황 그레고리오 15세는 교황서한을 통해 루이지 폴레티에게 복구공사를 위임했고 루이지는 1840년에 완공하였다. 대성당 정면은 성 프란치스코 서거 700주년을 맞아 건축가 체사레 바싸니가 설계한 현재의 신 바로코 양식의 회랑이 건축되었다. 교황 성 비오 10세는 이 대성당을 위해 “전 작은 형제회의 머리요 어머니”라는 칭호를 확인하였고, 교황 경당과 더불어 이 성전을 총 대성전의 지위로 부상시켰다.
작은 경당 포르치운쿨라(4m 7m)는 작은 형제회의 못자리요 이 대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가장 사랑했던 이곳은 그만큼 그분과 초기 동료들, 작은 형제회의 삶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던 곳이다. 성당 전면은 프레스코화로 되어 있으며 위쪽에는 “프란치스코야, 너의 청을 받아들인다”라고 적혀있고, 아래쪽에는 “이것은 영원한 생명의 문이다”라고 적혀있다.
5. 성녀 글라라와 산 다미아노
진정 프란치스칸 삶의 꽃이었던 성녀 글라라의 삶은 한마디로 가난과 겸손의 삶이었다. 가난과 겸손의 삶은 사랑이 그 시금석이 됩니다. 사랑은 성녀 글라라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의 완덕의 정상이요, 목표이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시는 주님의 당부는 평생 동안 글라라의 뇌리에서 떠나 본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성녀는 딸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여러분이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랑을 행동을 통해 외적으로 드러내십시오. 이렇게 자매들은 이 표양으로 자극을 받아 하느님 사랑과 서로간의 사랑 안에서 언제나 자라게 될 것입니다」(유언 18).
성녀 글라라는 참으로 가난할 때만이 큰 사랑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였다. 「현세의 것들을 사랑하는 자는 사랑의 열매를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편지 1,25). 여기서 성녀가 말하는 사랑의 열매는 온전한 봉헌으로 하느님과 하나 됨이다. 영혼의 가장 내밀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에 의한 하느님과의 결합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성녀는 권고한다.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골로 3,14) 서로간의 사랑의 일치를 항상 유지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회칙 10,5).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성녀는 순명과 가난의 수도 생활 중에서도 각 자매가 외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가능성이 보존되기를 바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진실한 사랑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분께 바탕을 두는 영적 사랑의 반영이다. 순명과 가난, 겸손 그리고 몰아적인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따르는 삶은 매일, 매순간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새로운 기회가 된다. 그리고 이 안에서만 인간은 참된 행복을 발견한다. 성녀 글라라와 그 자매들의 생활은 목가적인 소녀의 꿈과는 거리가 먼 엄격하고 고달픈 것이었지만 그 삶은 결코 음울하지 않았다. 또, 우울한 불평불만으로 지새우는 나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깊은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는 구원된 인간의 복된 평화와 기쁨, 그러한 인류의 구원을 돕는 ‘하느님을 거드는 짝’(참조: 성녀 글라라의 편지 3,8)에게 주어지는 기쁨의 생활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성녀 글라라는 영적 아버지, 성 프란치스코를 깊이 이해하였고 그 완전한 기쁨의 신비에로 점점 깊이 인도되었다. 이 기쁨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시작되고 자라나기 때문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다. 성녀의 편지에서 뚜렷이 찾아 볼 수 있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업적을 감사의 정으로 고백하는 성녀의 유언에서는 구구절절이 이 기쁨이 베여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과 겸손의 길을 가도록 부르심을 받고, 간택됨에 대하여 기뻐 용약하는 성녀의 모습은 그 임종의 순간에 절정에 달했다.
성녀 글라라의 죽음은 그 생애의 어떤 순간보다도 탄복하여 마지않을 거룩한 순간이었다. 고귀한 귀족의 혈통과 성품, 마음과 정신 나아가 그 존재 본질, 이 모든 것보다 더 고결하고 거룩하였다. 이 순간은 타고난 고결한 기품과 성덕을 마저 태워, 보다 고귀한 은총의 품위를 남기고 사그라져, 그 시각에 성녀를 두르는 모든 것은 승화되고 투명한 빛으로 감싸여 천상의 향기가 품어 나오는 듯하였다. 임종하기 전에 17일간이나 아무것도 입에 댈 수 없었는데도 주님의 힘으로 성녀는 조금도 기진하지 않은 듯 병상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이 성녀로부터 위로와 용기를 얻어 돌아갔다. 성녀에게서 받은 힘은 각자가 소명을 충실히 사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지막 시간이 다가올수록 성녀는 더욱 내적 잠심 상태에 들어가는 듯 하였는데 침상을 에워싸고 있던 이들은 성녀가 가만히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자매가 몸을 성녀의 얼굴 가까이 굽히고 물었다. “어머니, 누구와 말씀을 나누셔요?” “저의 축복 받은 영혼과 이야기하지요.” 죽음을 앞둔 성녀의 이러한 대답과 또 계속되는 다음 말에는 듣는 이의 호흡도 멎어 버리지 않았을까? 이렇게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말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녀는 자기 영혼에게 계속하여 속삭였습니다. “안심하고 가거라. 좋은 안내자가 너를 동반하리라! 너를 창조하신 분이 또한 너를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제 떠나거라. 마치 어머니가 아가를 보살피듯이 그분은 너를 항상 보살펴 주고, 엄마의 사랑으로 너를 사랑해 오셨단다. 저를 창조하셔서 이 삶으로 부르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동정녀 글라라 전기 46). 죽음을 목전에 둔 성녀 글라라의 마지막 말이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사회적 보호와 가정의 아늑함 등등, 세상에서 행복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과는 거리가 먼 병고와 고난의 삶을 평생 동안 살아 간 성녀의 마지막 말이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와 권리 주장을 완전히 포기한 채로 평생을 산 후에 한 성녀의 마지막 말인 것이다.
성녀 글라라가 평생토록 숨어살던, 아씨시 근교의 산 다미아노 수도원에 가면 오늘날에도 성녀와 자매들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비좁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수도원, 수녀들이 시간경을 기도하던 궁색한 가대, 식당으로 이용되던 거실은 못이 빠져 흔들거리는 탁자와 다듬어지지 않은 돌로 바닥을 깐 방이며, 지붕의 들보와 석가래가 거칠고 앙상한 그대로 천장 구실을 하는 수도 가족의 침실이었던 지붕 아랫방... 이런 생활마저 성녀에게는 과분하였던지, 거친 돼지털 가죽을 안에다 두른 고행복을 수도복 아래 받쳐 입었다. 맨 빵과 물이 성녀의 식사 전부였으며 잠자리는 맨 땅이거나 겨우 짚을 깔았고, 베개는 나무 그루터기였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성녀가 ‘지극히 높은 가난’의 침상 위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기쁜 미소를 지으며 속삭인다. “저를 창조하셔서 이 삶에로 부르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이 얼마나 의식적이고 긍정적인 죽음의 자세인가!
1253년 8월 11일 성녀 글라라는 돌아가셨다. 사람들은 시신을 아씨시 성내로 모셔 가서, 성 프란치스꼬의 시신을 임시로 모셔 둔 적이 있었던 성 제오르지오 성당에 안치하였다. 1850년, 성녀를 석관에 모셔 묻은 지 600년 후, 관을 열자 성녀는 마치 잠자듯 누워 있었습니다. 사후 2년 만에 글라라를 시성한 교회는, 그 거룩함을 증명할 표적이나 자료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글라라에게는 하느님께서 자기 삶의 타당성을 확증해 주신 표시가 되어 주었다. “저를 창조하신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 마치 성녀의 이 임종 기도가 찬란한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인장이며 영원한 아멘이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