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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역사순례를 떠나면서
1. 박제상 일대기와 그의 유적
(1). 박제상 일대기
(2). 박제상 관련 유적
(2-1). 치산서원(鵄山書院)
(2-2). 양산의 박제상 유적지
(2-3). 강동 정자의 박제상 발선 처
(2-4). 대마도의 박제상 순국 기념비
2. 충숙공 이예선생 일대기와 그 유적
(1). 충숙공의 성장배경
(2). 울주군수의 피납과 벼슬길의 진출
(3). 대일 사행의 시작
(4). 유구국에 간 충숙공
(5). 일본국왕에게 파견된 조선 최초의 통신사
(6). 문인제도와 계해약조의 체결
(7). 문화교류의 업적
(9). 문화인물 선정 및 기념사업
(9-1). 대마도 공적 비
(9-2). 충숙공 이예선생 동상
(10). 외교통상부가 선정한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 이예(李藝)
충절역사 순례의 목적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은 볼모로 간 왕자를 구하기 위하여 왜국에 가서 미해왕자(내물왕의 아들)를 구하고 자기는 잡혀서 발 가죽이 벗겨진 채로 쇄기 풀을 밟게 하는데도 항복하지 않자 불에 태워 화형을 당했다. 박제상공의 충절과 그의 부인 정렬국대부인 및 두 딸의 효심을 추모하기 위한 충.효.정 삼절의 위패를 모신 치산서원은 치술령 아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있다. 대마도에 있는 박제상공의 순국비를 답사하면서 그의 얼을 되새기고자 한다. 또한 울산 출신인 충숙공 이예 선생은 조선전기 대일 외교관으로 40여 차례 일본을 왕래하면서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찾아왔다. 일본인의 조선 입국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대일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 업적을 남겼는데 이러한 업무가 대마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또한 대장경을 일본 국왕에게 전달하고 일본식 물레방아와 무쇠로 만든 대포를 들여오는 등 문화와 경제 교류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충숙은 종2품 동지중추원사의 벼슬을 지내 조선 전기에 걸쳐서 울산 출신으로서는 가장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험난한 뱃길을 마다하지 않고 사행에 나섰던 충숙공의 충성심과 애족정신, 그리고 외교 및 문화교류에서의 뛰어난 업적은 오늘날 우리들, 특히 울산지역 시민의 문화적 긍지를 고취하고 젊은 청소년층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데에 큰 의미를 가질 것으로 생각한다.
본 행사는 사단법인 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에서 박제상과 충숙공의 얼이 담겨있는 서원의 순례와 서원에서 머물면서 옛 정취를 체험하고 임진왜란 때 가또기요마사(가등청정)가 축성한 서생 왜성을 답사하면서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는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대마도에는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멀고도 가까운 우리의 이웃 대마도를 다시 한 번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대마도 충절의 역사순례
1. 박제상 일대기와 그의 유적
(1). 박제상 일대기
박제상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9세손이고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이다. 신라 제 17대 내물왕(383년)때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 수학하기위해 경주로 이주하여 자랐다. 당시 신라는 고대 국가 형성기라 국력이 미약했고 고구려와 왜 및 백제의 잦은 침략에 시달려왔다. 이때 왜와 고구려에서 화친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있던 실성(實聖)이 돌아와 18대 왕이 되어있었는데 그는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앙갚음을 하기 위해 17대 내물왕의 아들인 미해(美海)<미사흔(未斯欣)>를 402년에 왜국에 보냈고 412년에는 미해의 형 보해(寶海)<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보냈다. 내물왕의 장자인 눌지 왕자가 성장하여 19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른 눌지왕은 볼모로 가있는 왕제 보해와 미해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고 하면서, 의견을 묻자 신하들은 삼라군 태수 박제상을 추천하였다. 왕이 제상을 불러서 물었더니 “신은 듣건대 임금이 근심을 하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만약 어렵고 쉬움을 논한 후에 행하면 불충이라 하고, 죽고 사는 것을 헤아린 후에 움직이면 용기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지만 원컨대 명을 받아 가고자 합니다.”하니 왕이 매우 기뻐하며 잔을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제상은 승려 복으로 위장하고 고구려를 들어가 보해를 만났다. 함께 도망할 날짜와 방법을 의논하고 고성(高城) 수구(水口)에서 배를 대기시키고 기다렸다. 박제상은 보해 왕자와 함께 왕 앞에 나타나자 눌지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마치 한 몸에 팔뚝이 하나뿐이고 한 얼굴에 눈이 하나 뿐인 것처럼 하나는 얻었으나 하나는 없으니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으랴?” 하였다. 박제상은 이 말을 듣고 재배한 후 하직하고 말에 올라 집에 들르지 않고 율포(지금의 정자 유포) 바닷가에 도착했다. 배를 타고 왜국에 간 박제상은 “계림의 왕이 무고한 내 부형(父兄)을 죽였기 때문에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렀습니다.”하니 왜왕이 믿고 편안하게 해 주었다. 제상은 미해를 만나 도망할 계획을 세우고 안개 낀 새벽을 틈타 미해 왕자를 배에 태워 신라로 보냈다. 미해가 박제상을 함께 가자고 하였으나 박제상은 “신이 만약 함께 가게 되면 왜인들에게 발각되어 뒤 쫓아 올까 염려되어 신을 남겨두고 추격을 못하도록 하소서”하였다. 제상은 미해의 방에서 있는데 이튿날 아침 날이 밝자 좌우가 들어오려고 하자 “어제 무리해서 사냥하느라 병이 났다.”고 거짓으로 말하여서 돌려보냈다. 그러다 해가 저물자 다시 물을 때 “미해는 이미 떠난 지 오래다.”라고 대답하였다. 좌우는 왕에게 보고하자 제상을 잡아 가두고 물으니 “나는 계림의 신하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요, 우리 임금의 뜻을 이루려고 한 것인데 어찌 그대에게 말 하겠소?” 하였다. 왜왕이 제상에게 회유하려고 하였으나 “계림의 개. 돼지가 될 지언 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며, 차라리 계림왕의 매를 맞을 지언 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지 않겠소.”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다리 아래 살갗을 도려낸 후 갈대를 베어놓고 그 위를 걷게 하면서, 뜨거운 철판위에 서게 하여도 굴하지 않자 불에 태워 죽였다. 이때가 신라 눌지왕 2년 서기 418년이다. 한편 박제상의 처 금교김씨는 남편이 곧바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남편의 뒤를 쫒다가 모래사장에 스러졌다. 친척이 뒤 따라와서 일으켜 세웠으나 두 다리를 뻗치고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이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한다. 박제상이 타고 간 말은 되돌아오다가 외동읍 북토리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어 주민들에 의해 묻어주었는데 이를 말 무덤이라고 전한다. 김씨부인은 남편이 떠난 율포가 내려다보이는 치술령 아래인 두동면 (박제상의 처가 소재지)에 이사하여 치술령 바위위에 올라가 남편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김씨부인은 어느 날 기도를 하다 잠이 들었는데 치술령 산신이 나타나 “그대 남편이 살아온다면 흰 구름이 동해에서 솟구칠 것이고 죽어 혼백이 돌아온다면 붉은 구름이 솟구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러준 말에 의해 바다를 바라보자 하늘도 무심하게 동해 바다위에 붉은 구름이 솟구치자 기진하여 바위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부인의 몸은 죽고 난 뒤 굳어서 바위(望夫石)가 되고 혼은 새가되어 남편이 있는 왜국으로 남편을 모시러 떠났다고 한다. 김씨부인이 죽고 망부석에 도착한 큰딸 아경(阿慶)과 막내딸 아기(阿奇)가 바위아래 어머니 시체를 보고 따라 죽자 그 혼 역시 두 마리 새가되어 두동면 만화리 비조마을을 몇 바퀴 돈 후에 국수봉 중턱 바위굴에 숨어들었다. 그 새들이 날았던 마을 이름이 비조가 되었고 새들이 숨어든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이라 한다. 어린 동생 문량(文良)이를 업고 뒤늦게 온 둘째 딸 아영(阿榮)은 어머니와 언니의 시신을 묻고 동생을 키워야 하는 의무감으로 따라 죽지 못했다. 왕은 은을암에 영신사를 세워 세 모녀에게 제사를 지내 혼령을 위로 하였다. 한편 눌지왕은 공의 충성을 애통해하며 공을 대아찬(大阿湌)이라는 높은 벼슬로 추증하고 충절(忠節)의 시호를 내렸다. 둘째딸 아영을 미해 왕자의 부인으로 삼고 김씨 부인을 정렬국대부인(貞烈國大夫人)으로 두 딸은 효녀로 추증하였다. 박제상일가의 충절. 정절. 효절에 감탄한 사람들은 금교김씨를 치술신모(鵄述神母)로 세 모녀를 호국삼여신(護國三女神)으로 추앙 칭송했다.
(2). 박제상 관련 유적
(2-1). 치산서원(鵄山書院)
충렬(忠烈) 박제상 공(公)과 그의 부인 정렬국대부인(貞烈國大夫人) 금교 김씨와 그의 두 딸인 효열(孝烈) 낭자(娘子) 아경(阿慶)과 아기(阿奇)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조 현종 때 공(公)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치술령에 충열묘(忠烈廟)와 신모사(神母祠)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봄과 가을에 향제(享祭)를 지내 왔는데, 이를 치산서원(鵄山書院)이라 하였다. 그 후 고종 무진년에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어 있던 것을 지역 유림들의 뜻을 모아 1991년에 복원하였고 그해 11월 23일에 충렬 박제상 공과 공의 부인 금교김씨와 두 딸의 위패를 모셔 매년 2월 중정일(中丁日)에 치산사보존회(鵄山祠保存會)와 지역 유림들이 향제를 지내다가 지금은 울주군에서 지내고 있다. 충. 효. 정. 삼절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유일한 사당이다.
(2-2). 양산의 박제상 유적지
박제상의 출생지로 전해오고 있는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에도 박제상을 모신 효충사(孝忠祠)라는 사당이 있다. 언양에서 국도 35호선을 따라 양산으로 가면 양산 통도사 톨게이트를 지나 약14km 지점 오른쪽에 효충마을이란 입간판이 있고 우회전하여 양산천 위 효충교를 지나 1km남짓 효충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뒤 논밭 가운데 효충사가 있다. 붉은 벽돌 속에 조그만 목조건물로 된 이 사당은 마을 사람들과 양산 유림들이 1946년, 1970년, 1988년에 각각 중건하였는데, 여기에는 박제상 부자의 위패와 영정이 없다고 한다. 나무로 된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서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고, 문틈과 담을 넘어 바라다 본 사당은 비교적 단청이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양산의 유림들이 현재 양산시 교동의 춘추공원에 있는 임진왜란 때 양산을 지키다 전사한 조영규와 안근의의 위패까지 효충사에 같이 모시려 하자 박제상의 후손들이 그 위패와 영정을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효충사는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어있다.
박제상의 양산유적은 교동리 교리의 춘추공원에도 있다. 양산 실내체육관 서쪽에 양산천이 있는데 그 건너 서쪽 소나무 숲속에 춘추공원이 있고 그 상단부 장충단 안에 박제상의 충절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 옆에는 앞에 말한 조영규, 안근의의 순국기념비도 같이 서 있다. 이 박제상 기념비는 전부터 있었던 것이 마모가 심하여 조선 헌종(1845년)때 당시 군수가 다시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효충마을에는 박제상을 기리는「효충마을 달 노래라는 노래가 지금껏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박제상의 후손은 영해박씨인데 그들은 양산지역에 많이 살고 있다.
(2-3). 강동 정자의 박제상 발선처
박제상이 왕제를 구하러 갈 때 돛단배의 출발지로 율포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곳은 현재의 울산광역시 북구 정자 앞바다이다. 강동의 어느 지점이 배의 출발지 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포구의 조건으로 보아 배가 출발하기에 가장 적합한 제전(정자 남쪽의 조그만 포구)으로 추측하는 이가 많다. 석굴암연구회(石窟庵硏究會)에서는 정자동사무소 북쪽 약400m 지점의 벽산아진 비치타워아파트 못 미친 언덕 위 지점(정자동 85번지)이 배가 출발한 곳이라 추정하고 1989년 10월 화강암 자연석 비석에「신라충신박제상공사왜시발선처(新羅忠臣朴堤上公使倭時發船處)라 기록하여 그 날의 박제상의 장도(壯途)를 기념하고 있다.
(2-4). 대마도의 박제상 순국 기념비
박제상의 일본에서의 활동상황은 서기 8세기경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나고 있다. 박제상의 일본에서의 활동은 일본서기에서도 삼국사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현재 대마도의 중심 항구 이즈하라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는 박제상의 순국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의 소재지는 대마도 상현부(上縣部), 상현정(上縣町)의 좌호진(佐護津)이라는 외딴 어촌 마을의 산기슭이다. 이 비는 치술령 답사를 마친 황수영, 정영호교수 등이 1988년에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의 앞면에는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여 「신라국사박제상 모마리질지 순국지비(新羅國使 朴堤上.毛麻利叱智 殉國之碑) 라고 새겨 두었다. 모마리질지는 박제상을 지칭하는 일본서기의 표기이다. 일본 현지인들은 지금도 박제상의 충절을 높이 기리고 있고, 한국인들 특히 울산인 들이 이곳을 많이 방문하고 있다.
2. 충숙공(忠肅公) 일대기와 그 유적
(1). 충숙공의 성장배경
충숙공(忠肅公) (李藝)선생의 본관은 학성(鶴城), 字는 중유(仲游), 아호는 학파(鶴坡)이며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충숙공은 1373년(고려 공민왕 22)에 울산에서 출생하여 1445년(세종 27) 2월에 향년 73세로 별세하셨다. 당시의 울산은 동해바다에 연하여 서쪽으로 언양, 남쪽으로 기장, 북쪽으로는 경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이었으며 지금의 울산광역시에 해당한다. 학성(鶴城)은 울산의 별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충숙공이 울산의 향리(鄕吏)였으며 그 직책은 기관(記官)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관이라 함은 행정기록을 맡은 지방 관아의 아전(衙前) 직책을 말한다. 아전은 중인(中人)계급에 속하였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문반 및 무반의 사대부 계층을 일컫는 양반과 일반백성을 뜻하는 상민(常民)으로 크게 나뉜다. 중인(中人)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을 형성하며, 대체로 기술직이나 사무직에 종사하였다. 충숙공이 여덟 살 되든 1380년(고려 우왕6)에 울산에 왜구가 침입하였고, 이때 충숙공의 모친도 왜구의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에 부친이 생존해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으며, 어머니를 잃은 어린 시절은 불우하였고 어머니를 찾으려 대마도를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2). 울산군수의 피납과 벼슬길의 진출
충숙공이 24세 나던 1396년(태조5) 12월에 왜적 비구로고 등이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울산 앞바다로 쳐 들어왔다. 왜적이 울산군수 이은 등 관리들을 인질로 잡아 돌아갈 채비를 했다. 울산의 여러 아전들은 모두 도망하여 숨었다. 그러나 기관 충숙공은 관아에서 쓰든 은그릇을 챙겨 가지고는 제일 뒤에 처진 왜선에 숨어들었다. 배가 바다 가운데까지 오자 갑판으로 올라와 군수를 모셔야하니 군수를 태운배로 옮겨달라고 청하였다. 사연을 들은 왜적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대마도에 이르러서도 충숙공은 군수에게 깍듯이 아전으로서의 예의를 지키며 정성으로 군수를 모셨다. 원래 왜적들은 군수와 충숙공의 일행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었는데 충숙공의 이러한 모습을 본 왜적들이, “이 사람은 진정한 조선의 관리이다. 이를 죽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주저하였다. 이때 충숙공은 몸에 숨겨 가지고 간 관아의 은그릇을 비구로고 등에게 뇌물로 주어 그들의 마음을 샀다. 의논 끝에 왜적은 군수와 충숙공의 일행을 죽이려는 마음을 바꾸고 이들을 대마도 화전포(和田浦)라는 곳에 억류하기로 결정하였다. 화전포에 억류된지 한 달이 지나 충숙공 일행은 비밀히 배를 준비하여 도망하여 돌아올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조정에서 통신사 박인귀(朴仁貴)를 보내어 왜적들을 달래고 화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듬해 1397년 2월에 충숙공의 일행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나라에서 충숙공의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아전의 역을 면제하고 벼슬을 주었다. 이로서 충숙공은 중인계층의 아전이라는 신분을 벗어나 사대부 양반으로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고 마침내 종 2품의 높은 벼슬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3). 대일 사행의 시작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던 1400년에 충숙공은 28세의 청년 관리로 성장하고 있었다. 때마침 조정에서는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을 대마도 부근에 있는 일기도(一岐島)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충숙공은 모친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조정에 청하여 윤명의 수행원 신분으로 동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윤명의 일행이 일기도에 가는 길목에 있는 대마도에 들렀을 때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대마도의 도주(島主) 영감(靈鑑)은 윤명과 개인적인 알력관계가 있었는데 이번에 윤명이 대마도에 들르게 된 것을 기회로 윤명을 억류하고 일기도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 사적인 일로 대마도에 억류되어 임금의 명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어 애가 탄 윤명은 충숙공에게 대신 일기도에 가서 외교업무를 수행해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충숙공은 일기도에 보낼 조정의 예물을 지참하여 일기도로 가서 회례사의 업무를 잘 수행하였다. 또 지좌전(志佐殿)과의 교섭을 통하여 조선 포로들을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고 일기도의 왜구가 조선을 범하지 못하게 일기도 정부 관리들이 조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정식 외교관이 아니고 수행원 신분으로 동행했던 충숙공이 뜻하지 않게 외교업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조정은 이일을 통하여 충숙공의 대일 교섭 능력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충숙공이 처음으로 사절의 책임을 맡은 것은 1401년(태종1)이다. 태종임금의 명에 따라 일기도에 파견되었다. 마지막 사행(使行)은 1443년(세종25) 이었다. 왜적이 변방에 도적질하여 사람과 물건을 약탈해 갔으므로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어 찾아오려 하니 충숙공이 자청하여 대마도 체찰사(對馬島體察使)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1401년(태종1) 29세의 충숙공은 드디어 태종 임금의 명을 받아 사절단의 정사(正使)로서 예물을 가지고 일기도에 파견된다. 공식적인 외교관으로서의 첫 발걸음이다. 상황에 따라 다소의 변화는 있으나 대일 사절단은 대표인 정사(正使), 정사를 보좌하는 부사(副使), 그리고 기록을 맡는 서장관(書狀官)의 삼사(三使)로 구성된다.
충숙공의 일행이 일기도로 가는 길목에서 대마도에 이르러 보니 마침 대마도 영감(靈鑑)이 일본 조정의 죄를 받아 귀양을 간 상황이었다. 이때 섬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왜구들이 사절단의 배를 훔쳐 달아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충숙공은 대마도에서 왜인의 배를 빌려 타고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일기도에 도달하였다. 결국 사절단은 왜인 나군(羅君)의 배를 빌어 조선 포로 50인을 찾아서 싣고 돌아왔다. 충숙공은 우여곡절 끝에 기지를 발휘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공식 외교관의 데뷔로서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조정은 그 공을 기려 충숙공에게 종5품 좌군 부사직(左軍副司直)을 제수하고 왜인 나군에게 쌀 3백 섬을 주었다.
실록에 의하면 1406년(태종6:34세)에 충숙공은 두 번째 사행에 나서게 된다. 5년 전에는 일기도에 파견되었으나 이번에는 일본 국왕에게 파견되는 사절단이라는 점에서 충숙공에게는 큰 의미를 갖는 사행이었다. 거리로나 사행 기간으로나 일기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본격적인 외교업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본 본토까지 사행은 왕복 약 1년의 기간이 소요되는 먼 길이었다. 이번에도 충숙공은 사절단의 정사였으며 그 명칭은 회례관 이었다. 충숙공은 이번 사행에서 조선인 포로 70여명을 쇄환해 오는 성과를 올렸다.
(4). 유구국에 간 충숙공
충숙공의 다섯 번째 사행은 1416년(태종16:44세)에 이루어 졌다. 사행의 목적은 왜적에 잡혀 유구로 팔려간 백성을 쇄환하는데 있었다. 조선 사람으로서 왜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유구국으로 팔려간 자가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태종께서는 충숙공을 유구국에 파견할 계획을 말씀하셨다. 이때 호조판서 황희(黃喜)가 아뢰기를 “유구국은 수로(水路)가 험하고 멀며, 또 이제 사람을 보내면 번거롭고 비용도 대단히 많이 드니 파견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정은 본래 귀천이 다름이 없다. 가령 귀척(貴戚)의 집에서 이같이 포로 된 자가 있다면, 어찌 번거롭고 비용 드는 것을 따지겠는가?” 태종은 당신 가족이라도 그렇게 말하겠는가하고 정승에게 물으셨다. 충숙공은 유구국에 가서 조선 포로 44인을 쇄환해 왔다. 그 중에서 경상도 함창현 사람 전언충(全彦忠)은 나이 14세에 잡히어 팔려갔다가 지금 충숙공을 따라 돌아오니, 부모가 이미 모두 죽고 없었다. 늦었지만 그 부모의 초상을 지내려하자, 임금이 불쌍히 여겨 겹옷 두벌, 홑옷 한 벌, 포목 10필과 쌀과 콩 15석을 하사하여 보냈다.
(5). 일본 국왕에게 파견된 조선 최초의 통신사
왕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왜국에 사명(使命)으로 가기가 무릇 40여 차례였으며 .....” 43년간 40여회 일본을 왕래했으니 충숙공은 거의 평균 일 년에 한 차례씩 일본에 왕래한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사실이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자. “신사년(1401년:태종1)부터....경인년(1410년:태종10)까지 10년 동안에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三島)에 왕래하면서.....” 그러나 충숙공이 수행한 40여회의 외교업무의 상세한 내용이 실록에 모두 기록된 것은 아니다. 40여회 중에서 13회의 경우는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으로 어떤 직책을 맡아 어디로 파견되었는지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이 실록에 기록이 되어있다. 정사(正使)혹은 부사(副使)로 파견된 13회에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온 1회를 포함하면 14회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26회에 대하여는 그와 같은 상세한 기록은 실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500년의 역사를 1592년 임란을 전후하여 전기 200년간, 후기 300년간으로 나누면 조선 국왕은 전기 18회, 후기 12회, 합계 30회에 걸쳐 일본 국왕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사절의 명칭은 조선 초기 약 50년간은 통신사(通信使),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등으로 다양하였다. 그러나 1439년부터는 사절의 명칭이 통신사(通信使)로 굳어졌다. 충숙공은 30회의 사절단 중에서 6회에 걸쳐 정사 혹은 부사로 파견되었고 30회의 사절단 중에서 통신사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사절단에 포함되었다. 최초로 통신사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428년(세종10)이며, 이는 파견목적이나 사행(使行)의 구성이나 형식면에서 볼 때 1665년(효종6) 이후 정형화된 대일 통신사의 본보기가 된다. 이때의 정사는 박서생 이었으며 충숙공은 부사로 참여했다.
(6). 문인제도(文引制度)와 계해약조(癸亥約條)의 체결
문인제도(文引制度): 문인(文引)은 무역 등을 목적으로 조선에 입항하려는 일본인이 지참해야 했던 도항증명서를 가리킨다. 세종대왕은 문인(文引)을 발급할 독점적인 권한을 대마도주에 부여하고 대마도주의 책임 하에 관리하게 함으로써 왜구로 인한 폐해를 줄이고 일본 각지로부터 조선에 입항하려는 일본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문인제도는 1438년(세종 20)에 대마도에 파견된 경차관(敬差官) 이 예(李 藝)가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과 정약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조선왕조의 개국과 명나라의 강성에 따라 동아시아의 정세는 점차 안정화하였으며 태조의 엄격한 대일정책이 실시됨에 따라 왜구의 침입이 감소하였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교역을 청해오는 왜사(倭使)의 왕래는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경제적 부담과 치안유지의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은 왜사의 왕래를 제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방법의 하나가 바로 문인제도(文引制度)로 일종의 입국허가증(오늘날 비자)을 발행하여 이를 제한함으로서 그들의 왕래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1419년(세종 1년) 대마도 정벌 이후 일본인의 합법적인 통교자가 급증하여 문인제도를 시행하였고, 조선으로 보내는 세견선을 제한할 필요성을 느껴 1443년 (계해, 세종25년)에 체결한 것이 계해약조이다. 계해약조는 문인제도와 함께 조선시대 대일 통교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고, 이는 임진왜란 후에 체결된 기유약조에 계속 유지되고 있다.
(7). 문화교류의 업적
근세 이전 조일 관계에 있어 민간의 국제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임금이 파견하는 공식 사절단은 일차적으로 정치, 외교적 기능을 수행하는 한편으로, 문화의 국제교류에 있어 거의 유일한 창구로서 기능하였다. 시문, 필담, 회화, 음악, 무용 뿐 아니라 농업기술, 광업기술, 무기, 음식 등에 있어서도 광범위한 문화교류가 사절단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한일 문화교류와 관련하여 충숙공은 다양한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특히 대장경 및 불경의 사급(賜給)을 통하여 불교문화와 인쇄문화를 일본에 전수하였으며, 일본식 자전 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였고, 일본과 같이 조선에서도 화폐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도록 건의하였으며, 사탕수수의 재배와 보급을 건의하였다. 충숙공은 또한 민간에 의한 광물채취를 자유화하고 이에 대해 과세함으로서 국가 수입을 늘릴 것을 주청하였다. 나아가 화통 및 완구의 재료를 동철에서 무쇠로 변경할 것과 일본의 조선기술을 조선에 도입 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수많은 사행에서 정부 간 혹은 사절 개인 간 예물의 교환과 물자의 교역을 통하여 양국의 문물 및 문화가 광범위하게 교류되는가 하면 양국 사절단의 상호 접대를 통하여 음식문화와 일상생활 문화가 교류된 것도 공식사절단의 문화 공적이라 하겠다.
(9). 문화인물 선정 및 기념사업
충숙공은 울산이 낳은 조선전기 외교사에 큰 획을 긋는 외교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충숙공의 발자취를 보면 충숙공은 임금의 명으로 일본에 외교사절로 40여 차례나 다녀왔으며 667명의 포로를 송환해 오신 큰 업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지극한 효성과 투철한 사명감, 임금을 향한 눈물겨운 충성심과 탁월한 외교협상, 그리고 뜨거운 애국애족의 정신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충숙공은 또한 불교 대장경과 조선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해주고 사탕수수와 물레방아, 선박 건조 기술을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등, 조선 전기 조일 문화 교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러한 훌륭한 업적을 바탕으로 문화관광부에서는 2005년 2월 「이달의 문화인물에 충숙공 이예를 선정하였다. 문화인물 선정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영정제작, 문화인물 선정기념 학술강연회, 전국한시백일장, 기념우표제작, 충숙공이예에 관한 국제학술대회, 대마도 공적비 건립, ubc방송국의 다큐멘터리 제작 방영, 동상 건립 등을 추진하게 되었다.
(9-1). 대마도 공적비(소재지: 일본국 대마시 미네쪼현 원통사 내)
대마도에는 박제상순국비, 최익현선생순국비, 조선통신사비, 덕혜옹주결혼기념비, 역관순난비, 김성일시비 등 한국인사가 설치한 기념비가 6개 있다. 2005년 1월 26일에 제1차 답사를 시작으로 6차례에 걸쳐 대마도를 답사하여 충숙공의 공적비 건립을 위한 장소 물색, 공적비의 규모와 예산 그리고 비문의 내용들을 협의 하였다. 대마도 방주회 회장인 나가도메 회장과 다찌바나 선생 등의 자문을 받아 장소는 원통사에 건립하기로 하였다. 여러가지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2005년 11월 21일 대마도 원통사에서 ‘통신사 이예 공적비’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두철 선양회장을 비롯한 80여명의 국내 참가단과 언론사 취재진, 현지 관리와 주민 등 200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제막행사를 가졌다.
(10) 외교통상부가 선정한 ‘우리외교를 빛낸 인물 이예(李藝)’
외교통상부는 2010년‘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에 울산 출신 충숙공 이예선생을 선정하고 그에 대한 업적과 리더십 고찰을 목적으로 다양한 행사를 하였다. 외교를 빛낸 인물 이예에 대한 공적과 외교 철학에 대하여 연구하고 발표하는 학술대회를 가졌다. 2010년 6월부터 시작된 연구결과를 11월 19일에 외교통상부 국제회의실에서 일본 학자들도 다수가 참여한 국제학술회의였다.
신각수 외교통상부 제1차관은 인사말에서 이예 선생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 지지 않은 분이였기 때문에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한 것에 대하여 처음에는 다소 우려를 했으나 그 분의 역할과 공적을 이해하고는 정말 잘 선정되었다고 생각한다면서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발제자들은 일본 현지를 답사하고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수집한 자료를 통하여 연구 논문집 제목을 ‘조선최고의 외교관 이예’라고 붙였다. 발표자들은 조선최고의 외교관 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하면서 세종대왕시대에 안정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교적 성공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기조연설에서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데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조선 왕조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예와 같은 투철한 정신력과 지식 그리고 깊은 철학을 가진 전문 외교관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다고 하였다.
KBS 방송은 이예의 외교 활동에 관한 내용으로 2010년10월23일 역사스페셜을 제작하여 방영하였다. 2010년에는 이예선생에 관한 도서가 세권 출판되었다. 일본에 서일본(西日本) 신문사 기자인 시마무라(嶋村初吉)씨께서 ‘玄界灘を越えた朝鮮外交官’이 출간되었고, 그리고 유종현 전 세네갈 대사께서 ‘통신사 길을 따라가다’ 와 박현모 이명훈 외 지음의 ‘조선최고의 외교관 이예’가 그것이다. 이예에 관한 신문기사로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 중앙지 보도는 물론 경상일보, 울산매일, 제일신문 등 지방지에서도 많은 보도가 있었다. 이것은 이예선생에 관한 연구가 현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참고자료>
반쇼인(萬松院)과 소우지가문
대마도의 역대 도주는 소우지가문(宗氏家門)이며 명치유신으로 폐번(廢藩)된 34대 요시아키라(義達)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 때는 대마도가 왜군의 전진기지였으며 번주 소요시토시(宗義智)는 그의 장인인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선발대로 부산포에 상륙하여 서울과 평양을 함락한 제1군의 선봉장이었다. 반쇼인은 조선과의 교역재개에 공이 컸던 제19대 번주 소요시토시를 위해 그의 아들 요시나리(義成)가 1615년 아버지의 명복을 비는 반쇼인을 창건한 것이다. 반쇼인은 소가문이 대대로 이어온 대마번의 원찰이다. 본당 정면에는 고미즈노오(後水尾)천황의 셋째 딸이 쓴 ‘반쇼세이샤노가쿠(萬松精舍之額)’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본당 우측에는 도쿠가와 역대 장군들의 위패를 안치하고 다른 한 쪽에는 조선 국왕이 하사한 삼구족(三具足)이 진열되어있다. 삼구족은 동으로 만든 대형 향로, 화병, 촛대 셋트를 말한다. 본당에서 산으로 돌계단을 올라가면 우측에 소가문의 묘지인 고래이야(御靈屋)가 있다. 산위에는 역대 도주들의 묘들이 줄지어있다.
1587년 제19대 도주였던 소요시토시(宗義智)는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규슈 평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에서 제1군의 선봉장으로 앞장섰으며 전란이후 조선 조정과 통신사 부활 교섭에 성공함으로서 7년간 단절된 국교를 수복하는데 공을 세워 막부는 그에게 스시마카미(對馬守)라는 관직을 내렸다. 이 관직은 근세에 들어서도 이어져서 요시토시 이후 제34대 마지막 번주 요시아키라(義達)까지 즉 1869년 명치유신으로 대마도가 폐번 될 때까지 스시마한슈(對馬藩主)로 승계하게 되었다.
대마도 관광 안내
- 위치 : 동경129' , 북위 34'
- 거리 : 대마도에서 한국까지 49.5㎞ (일본 후쿠오카까지 138㎞)
- 면적 : 708㎢ (울릉도 10배, 섬 전체 88%가 산림지대) 동서 폭 18㎞, 남북 길이 82㎞
- 구성 : 본 섬 외에 107개의 섬이 있으며 그 중 5개 섬이 유인섬이다. 본 섬은 두 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고, 이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 행정: 1市 6町 (쓰시마市, 이즈하라마치, 미츠시마마치, 토요타마마치, 미네마치, 카미아가타마치, 카미쓰시마마치)
- 전체인구 : 4만명
- 특산품 : 진주, 와카타 벼루, 타이슈 도자기, 카스마키, 토속주(시라타케, 야마네코), 오징어, 전복, 소라, 표고버섯, 메밀국수, 로쿠베 섬 전체의 88%가 산지이며 주민들은 주로 임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6개의 정(町)으로 구분된 지역 중 이즈하라가 제일 큰 도시이며 히타카츠가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대마도의 인구 중 약 1만2천여명 정도가 이즈하라에 거주하고 있다. 대마도는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어 대마도의 삼나무를 모두 베어내면 일본인구(1억2천6백만명)가 약 4년간 벌어들이는 외화수익과 맞먹는다고 한다.
<대마도 관광지안내>
⊙ 대마역사 민속 자료관
조선통신사 행렬도, 초량 왜관도 등 다양한 유물과 쓰시마 야마네꼬(산고양이), 쓰시마 사슴, 물수리 등 천연기념물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대마도의 포경어업(고래잡이)의 기록이 고스란히 그림으로 제작되어 전시되고 있어 옛 대마도인 들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다. 민속자료관 일대에는 "조선통신사비", "고려문", "성신지 교린 비" 등이 있다.
● 조선통신사 비
160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대마도에는 이곳 외에 수많은 조선통신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 을 가져다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1811년 일본의 역지빙례(易地聘禮)- 외국의 사신은 본국의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역에서 예를 다함- 정책에 의하여 12차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서 머물다 귀국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통신사의 왕래는 끊기고 말았다. 통신사는 원래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게 되었다.
● 고려문 (高麗門)
화재로 소실 된 것을 재건축 하였다. 조선통신사를 성대하게 대접하기 위해서 만든 것 이라고 한다.
● 성신지교린비 (誠信之交隣)
아메노모리호슈(1668-1755) 선생이 주창한 "성신지교린"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아메노모리호슈 선생은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서 생겨나기도 하였다.
⊙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녀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대마도 번주 소우 타케유키(宗 武志)백작과 결혼하였다. 이 비는 두 분의 성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대마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두 분은 딸 正惠를 낳아 서로 신뢰와 애정이 깊었으나, 양국의 관계는 갈등이 심화되어 1955년에 이혼하기에 이른다. 덕혜옹주는 1961년 귀국후,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 만제키(萬關)다리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써 인공적으로 굴삭한 해협에 다리를 세웠으며 이는 현재 둘로 나뉘어진 대마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만조시의 조류는 여러 겹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경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초대 만제키바시는 1900년 완성 : 옛 일본해군에 의해 건설된 철교로 길이 100m, 폭5.5m, 높이 약 36m이다. 2대 만제키바시는 1956년 완성 : 낙도진흥법에 따라 완성된 아치형 철교. 길이 약 81m, 폭 5.5m, 높이 약 30m로 이 다리의 완성으로 버스가 섬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3대 만제키바시는 1996년 완성 : 전체 길이 210m, 폭 10m. 섬 전체의 도로망도 정비되어 남북을 연결하는 심리적 거리도 가까워 졌다.
⊙ 미네쵸(峰町) 역사 민속 자료관
미네쵸에는 죠몬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유적이 분포되어 있어, 그 시대의 생활문화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선조가 남긴 귀중한 문화유산이 수없이 존재하며 그것을 집약시켜놓은 본 시설은 역사를 배우는 거점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 조선 역관사 조난 위령비
1703년 음력 2월 5일 아침, 108명을 태운 조선통신사 의 역관사 배가 대마도를 향해 부산을 출발하였으나, 기상의 급변으로 인해 와니우라를 목전에 두고 조난하여 전원이 사망하는 비참한 해난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의 역사적 배경이 선린우호를 바탕으로 한 국제교류였다는 것을 반영하여 1991년 3월 20일 위령비가 세워졌다.
⊙ 한국전망대
대마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카미쓰시마는 한국까지 49.5㎞의 거리로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시의 거리까지 볼 수 있는 그야말로「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한다. 지리적,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서울 파고다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고, 한국산 재료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 풍을 고집하였다.
⊙ 미우다(三宇田)해수욕장
1996년 「일본의 풍경, 100선」에 선정된 해수욕장. 대마도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 해변으로 에메랄드 그린의 얇은 바다는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캠프장 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 원통사(圓通寺) 무로마치시대 대마도주 종정무의 집무실로 알려지고 있는 엔슈지(圓通寺)에는 2005년에 건립한 통신사이예공적비가 서있다. 사찰 정문 오른쪽에 고려종이 걸려 있어서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위치 : 대마도시 미네마치 사가(峰町) 엔슈지(圓通寺)(히타카츠 항에 내려서 한국전망대를 보고, 박제상유적비를 거쳐서 이즈하라로 내려가는 미네에 있다.)
◉ 통신사이예공적비
『朝鮮前期 通信使 忠肅公 李 藝 一三七三~一四四五 “이예(李藝)는 학성이씨(鶴城李氏)의 시조로 벼슬이 종이품 동지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조선이 일본국왕에게 파견한 공식 외교 使行은 조선전기의 十八回와 후기의 十二回를 합쳐 모두 三十回였다. 公은 그 중 六回의 使行에 正使 또는 副使로 참여하였으니, 조선역사상 일본에 가장 많이 왕래한 조선 제일의 외교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公은 태종‧世宗 代에 일본‧유구‧대마도에 四十여회 파견되어 六六七명의 조선인 포로를 쇄환하였으며, 일본인의 조선입국 허가와 관련한 문인제도와 朝日 교역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를 정약하는 등 많은 외교업적을 남겼다. 또한 대장경을 일본에 전달하고 수력물레방아를 조선에 도입하는 등, 朝日 문화교류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公은 외교업무로 대마도에 자주 왕래하였으며, 島主 宗貞茂의 사망 시에는 왕명으로 원통사(圓通寺)를 찾아 조문하였다. 公의 업적이 한일 양국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二00五年 二月에는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온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니, 한일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는 오늘 公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현창하고자 이 碑를 세운다.』
* 대마도
대마는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신석기시대부터 한일문화의 중개지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선사시대는 물론 역사시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산이 많고 농경지가 협소하여 주민 생활품의 자급자족이 어려운 실정이었으므로 그 대부분을 다른 지역에서 구입하거나 의존해 왔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 남부 지역은 중요한 구입선의 하나였다. 기원전 2~3세기에는 일본에 농경문화가 정착되고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등 일본 역사상 중요한 시기이다. 마제석기, 무문토기, 관옥, 석관묘 등 한국 청동기 문화 내용이 대마에 일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남부지방에서는 이시기의 대마유물이 전연 나타나지 않고 있다.
대마는 일본에서는 과거부터 대륙문화 수용의 창구로서 역할을 다하는 곳이므로 중요지역으로 여겨 왔으나 한국입장에서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 지금도 일본에 속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려(919~1392)와 일본 사이에는 정식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 13세기 후반이 되면서 몽고 침입이 양국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1274년과 1281년의 두 번에 걸쳐 원나라(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공격하여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과 고려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 후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14세기 후반이다. 1350년 이후 일본 왜구가 한반도와 중국대륙을 약탈하였다. 고려 정부는 이것을 외교 교섭으로 해결하려고 해서 일본 室町幕府(무로마치 정부)에 왜구 단속요청을 위한 서신을 여러 번 보냈다. 이것에 대해서 주로 대응한 것은 금천씨 나 대내시 종씨 등 서일본의 대명 들이었다. 1392년 고려의 뒤를 이어서 성립된 조선왕조는 왜구 회유정책을 행하였다. 조선왕조의 대 일본인 정책에 대하여 대마도주였던 종씨도 민감했다. 종정무는 도주권 확립과 조선과의 외교에 힘을 쏟아서 왜구 금지를 위해서 노력했다. 이 결과 종정무는 조선왕조에서 깊은 신뢰를 얻어 한일 관계상의 중요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1418년 종정무는 병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왕조는 이예(李藝)를 대마도원통사(圓通寺)에 보내 조문했다. 종정무가 죽은뒤 왜구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1419년 중국을 향해가는 왜구들이 한국 연안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왕조는 대마를 토벌하는 것을 결정했다. 이 때 전 국왕인 태종에 의한 선전포고문에는 ‘대마는 원래 조선 땅 이였는데 벽지이며 좁은 땅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일을 묵인해 왔다.’ 라고하고 있다. 이 대마는 원래 조선 땅이다. 라는 인식은 한국국내에서도 오래 남아 있다. 드디어 조선은 17,285명의 조선군이 대마를 향해 출발했다. 소위 기해동정이다. 이 사건 이후 대마도와 조선 왕조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단절 되었다. 세종은 일본과의 평화외교를 추진했다. 대마와 조선 왕조 사이의 관계는 얼마 안돼서 회복되어 이번에는 대마가 일본과의 외교기점으로 되어간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도항 할 경우 반드시 대마를 들르고 종씨에게서 ‘문인’이라고 하는 도항 증명서를 받아오도록 하였다. 대마도주의 문인제도가 확립되는 것은 1438년의 일이다. 이 제도로 종정성의 지위는 한일관계상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게 되었다. 1443년에는 계해약조가 체결되었다. 조선왕조는 대마도주에게 연간 세견선 50척을 파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면서 삼포를 개항하게 되었다. 현재 대마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대륙계 문물인 불상, 경전, 청자 등이 수많이 남아있다. 이들 대부분은 주로 무로마치시대(실정시대 : 1338~1578)에 소오(종)씨가 한반도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예를 들어 대장경, 대반야경을 보더라도 1416년부터 1487년까지인 71년 동안에 종정무, 종정성, 종성직, 종정국 등의 도주 (제7대~제10대)에 의해 적어도 9세트가 대마에 도래 되었고 그 중 몇 점은 지금도 도내에 신사, 사원 등에 남아 있다. 소오(종)씨는 가마쿠라시대(鎌倉時代:1192~1333)중기부터 말기까지 약 230년 동안에 대마의 방대한 기록인 ‘종가문고사료’는 대마자료관 소장 자료 중 중심이 되는 사료이나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14~15세기 왜구의 시대를 거쳐 소오(종)씨가 조선 무역의 실권을 독점해 갔던 무로마치(1338~1578)에 일본과 조선은 대체로 평화로운 외교관계에 있었다. 이때의 대마도주는 종정성으로서 거처를 사가(峰町)에 두고 조선과 활발히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화로운 양국관계에 있어 조선국왕은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카가(足利)씨를 일본국왕으로 인정하고 1428년 이래 수차례에 걸쳐 일본으로 정식 사절단을 파견하였다.(통신사의 시초) 그러나 이러한 우호관계는 1590년 이후 일본 국내 사정에 의해 중단되어 버렸다. 그 후 단절된 조선과의 관계가 소오(종)씨의 노력으로 부활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에 의한 전쟁후인 1607년이었다. 이후 조선국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우호적인 정책을 이어받은 에도(江戶)幕府에 대해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를 보냈다. 엄격한 쇄국정책 하에 에도(현 도쿄) 막부에 들어올 수 있었던 유일한 외교사절이 조선통신사이다. 이러한 사절을 맞이하는 실무 담당인 대마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이다. 1719년에 건너간 제9차 통신사의 제술관인 신유한과 아메노모리 호슈와의 교류는 특히 유명하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싸우지 말며 진실을 가지고 교류하는 것 이 성신(誠信 의 交隣)의 교린’ 임을 강조한 호슈의 외교철학은 현대에 와서 더욱 빛을 발하는 보편적인 이념이다. [자료제공:(사)충숙공이예선생기념사업회]
* donga.com Jounalog: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286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