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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양, 백학 되어 날다 - 장성 백암산 산행기
백양사 가는 길
풀이 죽은 동자승이 쭈뼛거리며 선사 앞으로 나서더니 선사에게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하면서 대답했다. “큰 스님, 이제 다녀오십니까?” (……) 선사의 목소리는 노기에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예법을 몰라 저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았겠소? 천진한 저 모습이 하도 좋아 때묻지 않게 정성껏 가꾸고 있었는데, 스님이 그 천진성을 깨뜨리고 말았고. 이제 나하고 인연이 다 됐으니 지금 당장 스님이 데리고 가시오.” “큰 스님, 설법은 언제 해 주시겠습니까?” “동자승이 바로 설법이오.” 선사가 굳게 입을 다물자, 객승은 할 수 없이 떠날 차비를 차렸다. 동자승은 객승의 손에 끌려가며 혜월 선사를 자꾸 뒤돌아보았다. 그때마다 선사는 깊이 허리를 숙이고 합장하며 동자승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선사가 동자승에게 보내는 목소리만이 그들이 산그림자 속에 완전히 파묻힐 때까지 메아리가 되어 백양사로 떠나는 두 스님의 먼 발길 앞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 큰 스님, 공부 잘 하십시오….
문형렬의 콩트 ‘백양사 가는 길’의 결말이다. 어느 해질녘, 백양사에서 객승이 혜월선사를 찾아온다. 혜월은 11세에 출가하여 경허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고승으로서, 객승은 백양사 법회에 혜월 선사가 설법을 맡아달라는 백양사 주지의 심부름도 할 겸 혜월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자 혜월 선사를 찾아 온 것이다. 그런데 동자승이 무례하기 짝이 없다. 혜월 큰 스님께 반말을 하고, 혜월은 동자승 앞에서 쩔쩔 매는 것이 아닌가? 어느 날 혜월이 출타한 틈을 타서 객승은 동자승의 버릇을 고쳐놓는다. 예법을 가르친 것이다. 인위적인 예법으로 인해 동자승은 부처의 천진성을 잃고 말았고, 혜월은 안타까워하며 객승에게 동자승을 데리고 백양사로 가라 한다.
많은 날들을 나는 길 위에 있었다. 내게 여행과 산행, 떠남은 늘 백양사 가는 길, 혹은 실상사 가는 길이었다. 진여실상(眞如實相), 자성(自性), 본성(本性), 참나, 흰 양처럼 순결한 본래의 내 모습(이를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한다)을 되찾고자 길을 나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곳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오곤 했다. 동자승의 길 떠남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떠돎은 훼손된 본래의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부단한 구도적 행위일 때 더 의미가 있다. 백양사, 실상사에 이르지도 못한 채 해가 저물어가는 이 계절에, 그래서 백양사는 늘 그리운 공간일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이르고 싶은 곳,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곳, 돌아가야 할 곳.
장성재 넘기, 몽계폭포를 찾아서
2013년 11월 5일. 전남 장성 백암산(741m)으로 단풍산행을 떠난다. 산행 코스는 전남대수련원-사자봉(723m)-상왕봉(정상,741m)-도집봉-백학봉(651m)-약사암-백양사-주차장으로 5시간 30분을 잡았다.
내장산과 백암산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한다. ‘봄 백양, 가을 내장’이란 말이 있다. 봄에는 백양사의 신록, 가을에는 내장사의 단풍이 최고라는 뜻이다. 봄날 갈참나무와 단풍나무, 비자나무가 빚어내는 백양사 신록의 절경은 아름답다. 하지만 내장산과 백암산을 함께 남금강(南金剛)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백암산의 기암과 단풍 또한 명물이 아닐 수 없다. 내장산의 경우에는 자생하는 단풍나무가 30여 종에 이르고, 나무가 내는 빛깔은 40가지에 이른다고 한다. 백양사도 다양한 단풍나무가 서식하고 있지만, 백암산 백양사 단풍의 경우에는 애기단풍이 유명하다. 어린아이의 작은 손처럼 작고 붉어 앙증맞은 단풍나무가 유독 많이 자생하기 때문이다.
09:00 전남대 수련원에 도착하여 간단히 몸을 풀고 기념촬영을 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계곡에 쌓인 단풍잎들이 늦가을 정취를 자아낸다. 산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은 숲으로 들어가 있고,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다.
전남 장성과 전북 정읍, 순창의 경계를 나누는 장성재, 백암산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전북 김제․정읍 들판과 전남 나주 들판을 가로막고 있어 높이에 비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오르는 산은 오르지 않는 산보다 높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이 고개를 넘게 하고, 이 산야를 물들게 하는가? 옛 시조 한 수를 떠올리며 산길을 오른다.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 구름이라도 쉬어 넘는 고개 산지니(山眞) 수지니(水眞) 해동청(海東靑) 보라매라도 다 쉬어 넘는 고봉(高峰) 장성령 고개 그 너머 임이 왔다하면 나는 아니 한 번도 쉬어 넘으리라.
야생매, 길들인매, 송골매, 사냥매라도 쉬어 넘을 수밖에 없는 높은 장성재를 시적 화자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넘어가리라 노래하고 있다. 순창 구암사에 들르고자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장성재 너머 구암사에 임이 왔다고 생각하고 이 고개를 넘어 가파른 길 0.9km를 내려갔다 되돌아오리라 생각한다.
사자봉 가는 길을 조금 비끼어 오른쪽에 위치한 몽계폭포(蒙溪瀑布)에 들르기로 했다. 소리새 대장님, 설산 운영위원장님, 솔바다 총무님, 수호신님 등 선두 그룹 남자 회원 몇 분이서 폭포를 향한다. 최근에 비가 내리지 않은데다가, 백암산이 바위산이라서 안구건조증에 걸린 것처럼 몽계폭포는 메말라 있다. 비류직하삼천척으로 쏟아지는 폭포는 아니지만, 여름철에는 상황봉과 사자봉 사이에서 흐르는 계류가 20m 높이의 물줄기를 이루며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졌으리라. 곧은 소리를 내며,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지는 몽계폭포를 상상하며 발길을 돌린다.
붉은 파도, 그냥 젖으리
정상을 향할수록 단풍은 메말라 시들어 있다. 비가 내리지 않아 단풍이 곱게 물들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 듯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붉게 파도치는 백암산 단풍에 젖은 지 오래다. 정갈한 암자마저 잠시 젖어드는 이 가을에, 나 또한 절로 붉게 물들어 가는 것을 어찌하랴.
상왕봉(상옥봉, 741m) 정상에 오른다. 많은 수의 회원들이 함께 올라 단체 사진을 찍게 되었다. 북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정읍 입암산성 삿갓바위가 우뚝하게 솟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입암산 아래에는 차천자(차경석)가 이끄는 보천교 본부가 있었다. 한때는 신도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상해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다 적발되어 혹세무민의 사교로 몰려 해체되었다고 한다. 경복궁 다음으로 조선에서 큰 한옥건물이었다고 하는데, 해체된 보천교 법당은 서울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순창 쌍치 봉룡재를 지나 추령에 이르러 노령산맥은 방향을 왼쪽으로 틀어 유근치에 이르고, 내장산 장군봉(696m)-연자봉-문필봉(675m)-신선봉(763.2m)을 이루고 다시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까치봉(717m)-연지봉(670m)-망해봉(679m)-불출봉-서래봉(624m)을 이루고 월영봉(427m)으로 잦아든다. 내장산 까치봉 앞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린 노령의 산줄기는 순동근재, 순창새재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백암산 상왕봉을 향해 가파르게 솟구친다. 순창 쌍치와 내장산 백암산이 휘돌아 굽이치는 곳에 순창 복흥면이 있고, 그 중심에 화개산이 자리하고 있다. 백학봉 북쪽을 조망하며 회원들은 지형을 이야기한다.
순창 구암사의 거의 정북 방향에 내장산 신선봉이 있고, 바로 그 오른쪽에 문필봉이 있으니, 구암사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고 걸출한 문인들이 길러진 것은 우연이라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구암사, 절로 가는 절
백제 무왕 37년(636년)에 창건한 순창 구암사는 전북과 전남의 경계에 있으면서, 규모도 작고 교통의 접근성이 떨어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절집이다. 후미진 백암산 산자락 영구산(靈龜山)에 있는 작은 절에 불과할 수도 있는 구암사는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습니다>란 책을 생각나게 하는 절이 아닐 수 없다.
얼핏 보아, 구암사는 거대한 불상도 없고 법당도 그리 크지 않으며, 법당과 요사채들이 한국전쟁으로 전소되고, 현재의 대웅전은 2002년에 복원된 것이기 때문에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없는 절집일 뿐이다. 스님과 공양주 보살마저 눈에 띄지 않고, 관광객이나 등산객조차 별로 찾지 않는 고요한 절, 절의 역사를 소개하는 관광책자조차 없는 보잘 것 없는 절이다. 가파른 산자락에 자리한 대웅전에 닿으려는 듯, 은행나무 두 그루가 높이 솟아 불타고 있어 이 절의 연륜을 짐작케 할 뿐. 백파선사나 완당 김정희의 흔적이 담긴 비문도 지나치기 십상이고, 근대의 고승 박한영(朴漢永, 1870∼1948)과 그의 제자 만공의 흔적도 이제는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설파(雪坡)대종사, 백파(白坡)대종사의 부도탑이 있는 구암사 부도전에 서면 찬란했던 구암사의 역사가 돌이끼로 피어나고 있다. 조선 영조 때 구암사에는 화엄종주인 설파대사가 주석했으며, 이로부터 100여년 간 화엄종택의 법손이 계승된 전통적 사찰이었다. 당시만 해도 승려가 100여명이었고, 임진왜란으로 전소되기 전만 해도 강원(講院)과 선원(禪院)까지 갖춘 규모 있는 절이었다. 또 구암사에서 회정(懷淨)의 법통을 계승한 백파선사 긍선(兢璇, 1767~1852)이 백양사 운문암에서 선강을 한 후, 1830년 다시 구암사로 돌아와 선강법회를 열었다.
백파선사는 조선 후기 불교의 참신한 중흥을 일으킨 화엄종주였다. 휴정(休靜)의 법맥을 이은 분으로서 율과 화엄, 그리고 선의 정수를 모두 갖춘 거장이었다. 평소에 백파와 교유가 깊었던 추사는 백파의 초상화를 그린 뒤 그를 ‘해동의 달마’라고 격찬했다. 초의선사와 백파선사의 논쟁은 한국 불교사의 중요 논쟁 가운데 하나로서, 후학들에 의해 100년 이상(1790~1926) 지속되었다. 한국 근대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논쟁이었다. 성리학과 불교의 접점을 찾고자 했던 추사와 초의는 함께 백파를 공격했고, 이 논쟁은 초의선사의 승리로 끝난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추사는 백파를 몹시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파 비문에 추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가난해서 송곳 꽂을 곳도 없으나 기(氣)는 수미산을 제압했고, 어버이를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듯 하여 가풍이 아주 진실했으니, 그 이름 긍선이여, 더 할 말이 없구나!”
그런가 하면, 구암사에 20세기 최고의 학승으로 평가되는 영호당(석전) 박한영 스님이 불교를 강의했고, 구암사에서 만공스님이 이를 계승했으며, 만공의 간화선은 서옹(西翁)의 무차선(無遮禪)으로 계승되고 있다.
일찍이 추사는 선운사의 백파스님을 찾아와 ‘석전(石顚, 돌이마)란 아호를 주었고, 백파는 이를 간직하고 있다가 1852년 입적하면서 후세에 임자를 찾아주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이 호가 일제강점기에 영호 박한영 스님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이 아호를 받은 석전 박한영 스님은 30년 간이나 조선 불교의 대종정이 되어 불교의 한일합병을 막아내게 된다. 석전은 이광수, 신석정, 서정주, 조지훈 등의 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청담, 일붕 서경보, 운허, 만암 등 걸출한 출가 제자를 두게 된다.
구암사에서 구한말 전북 최고의 성리학자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선생은 불학을 연구했고, 병오년 의병창의 때 구암사는 내장사와 더불어 의병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또 만해 한용운이 고승을 만나기 위해 구암사에 들렀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구암사는 마음의 눈으로 보면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절,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는 절집이다. 그 절집에 이끌려 나는 백학봉으로 가는 능선길을 버리고 0.9km나 가파른 산길을 내려가고 있다. 구암사 등산로를 찾지 못해 한 차례 산길을 헤맨 나는, 또 다시 무모한 사랑에 빠진 듯 무엇엔가 이끌려 구암사를 향해 홀로 하산을 하고 있다. 산길이 가파라질수록 덜컥 겁이 난다. 이 길을 되짚어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을 혼자 내려가다가 구암사에 들렀다가 산길을 올라오는 순돌님 등 3분의 회원을 만나게 되었다. 홀로 가파른 길을 내려가고 있던 중에 일행을 만나서 그러한지 와락 반가움이 밀려온다. 문득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게 불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노익장을 과시하시는 알프스선두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구암사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산중턱 단풍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다.
구암사 빈 절집을 은행나무(전북기념물 제121호) 홀로 지켜주고 있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에 비견되는 구암사 은행나무는 1392년에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700여 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저 은행나무는 얼마나 많은 중생을 보듬어 주었을까? 1950~53년 한국동란 때 절이 소실되던 해에도 저토록 노랗게 물들었을까? 구암사 절마당 빈 뜨락에서 잠시 소요한다. 만다라 꽃비처럼 은행잎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가을날이다.
내장산을 향하고 있는 애연재(僾然齋)에 걸린 곶감을 바라본다. 바람과 공기에 풍장(風葬)되어 가는 붉고 흰 속살을 생각하며, 내 숨결 또한 거친 숨결이 많이 잦아들었음을 느낀다. 대웅전 법당 기둥에 중국의 도인 방거사의 선시가 써 있고, 스님이 화이트보드에 그 의미를 친절하게 해설해 놓았다. 무심하라, 집착을 내려 놓아라 한다. 번뇌의 근원인 집착을 떨치면, 나무조각이 새를 바라보듯 무쇠로 만든 소가 사자의 포효에도 두려워하지 않듯 두려움과 걸림이 없는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구암사는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월인석보>(보물 제745-10호)가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초기(세조 5년, 1459년 초간본) 훈민정음으로 간행된 귀중한 문헌이다. 희방사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것처럼, 종종 궁벽진 절에서 귀한 문헌이 전쟁의 화를 입지 않고 보관되었다가 전해지곤 한다. 한국전쟁으로 구암사 법당과 요사채는 소실되었지만 귀한 문화재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보존되었다가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산을 오르기 전에 ‘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지방문화재 제122호)에 서서 잠시 비문을 본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대가 백파선사의 비문을 추사(완당 김정희)가 쓴 글로서, 추사가 쓴 고창선운사 부도전의 백파선사부도탑과 연결지어 생각하게 된다. 추사는 백파선사를 우리나라에서 율사라 부를만한 이가 없는데, 오직 한 분 백파선사가 율사라 부를 만하다, 하여 ‘대기대용- 큰 인재는 크게 쓸모가 있다’는 말에 걸맞는 분이라 평가하고 있다. 또 백파선사가 어버이를 섬기되 부처를 섬기듯했다고 적고 있다.
환양선사, 진묵대사를 떠올리며
11:40 구암사를 뒤로 하고 다시 가파른 산길을 혼자서 오른다. 문득 시장기가 몰려오지만 식사를 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금쯤 알프스 산우회 회원들이 백학봉을 넘었으리라 생각하니 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조금은 무모한 산행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구암사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기에 발걸음은 그리 무겁지 않다.
능선을 오르니 구암사에 들렀던 산우회 선두그룹 회원들이 식사를 거의 마치고 쉬고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노라 한다. 허기진 내게 사과 등 과일을 건네며,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려준다. 가슴이 뭉클해서 김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몇 개만 먹고 다시 길을 나서기로 했다.
백학봉에서 영천굴, 약사암에 이르는 계단에는 단풍이 한창이다. 영천굴은 불사 중이라서 관음보살상을 볼 수 없었고, 굴 속 바위틈에서 나오는 석간수를 맛볼 수도 없었다. 영천굴의 석간수는 만병통치의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약사암 애기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회원들을 이곳에서 많이 만나게 되었다. 애기단풍의 아름다움에 취해 좀처럼 하산을 못하고 있는 듯했다. 불타는 애기단풍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법당을 둘러본다. 환양선사의 전설을 형상화한 벽화가 눈에 띈다.
1574년 환양선사는 정토사를 백양사로 개칭하게 된다. 전설에 따르면, 백학봉 아래 약산(약사암 자리)에서 스님이 경을 읽고 있는데, 7마리 양이 무릎을 꿇고 독경을 듣고 있었다. 그 양들이 스님의 꿈에 환몽하기를, 스님의 독경으로 축생인 자신들이 후세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튿날 일곱 마리 양은 죽어 있었다. 그 스님은 양을 부른다는 의미로 자신의 이름을 환양(喚부를환 羊양양)으로 바꾸고 절 이름도 아예 백양사로 고쳤다고 한다. 어머니가 양을 안은 태몽을 꾸었다는 환양선사, 그는 백암산 산자락에서 축생을 인간으로 환생시키고, 본연의 자아를 잃버버린 훼손된 인간들을 양처럼 순결한 영혼으로 거듭나게 했던 것이다.
백제의 고찰 백암사는 삼국시대의 종말 이후 고려에 들어서(1034년) 정토법문을 선양하기 위해 중연(中延)선사가 정토사(淨土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고, 이 시기에 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긴다. 하지만 조선 선조 7년(1574년) 백양사로 개칭되고, 백암산이란 산 이름도 백양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약사암을 뒤로 하고 발길을 재촉한다. 운문암(雲門庵) 갈림길을 만나 발길을 떼지 못한다. 운문암은 우리나라 선원의 3대 성지 중 하나로서 서산(西山), 소요(逍遙), 백파(白坡), 만암(曼庵) 등 많은 고승들이 수도한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임란 이후 호남 최고의 고승, 부처의 화신으로 평가되는 진묵대사의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알프스 회원 중 한 분이 내게 다녀오라 한다. 하지만 막수동 계곡의 끝, 사자봉(723m) 바로 아래 에 있는 운문암은 1시간 이상 올라가야 한다. 왕복 2시간 이상이 소요되니 불가능하다. 후일을 기약하고 진묵대사의 전설을 생각해 본다.
진묵대사(震黙大師) 일옥(一玉)은 임진왜란 직전 이 암자에서 차를 끓이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법회에 모인 전체 대중이 차를 달이는 운문암의 승려를 조사(祖師)로 모시라는 현몽을 하게 되어 진묵을 조실로 앉혔다. 어느 날 진묵은 “내가 올 때까지는 이 불상을 도금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로 진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도 빛바랜 모습으로 불상이 모셔져 있으면서 진묵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쌍계루에서 만암(曼庵)을 만나다
국기단(國基壇) 은행나무가 발길을 붙든다. 조선 영조 때 호남 지방에 큰 유행병이 돌자 전라감사가 상소를 올려 이곳 영지에서 천신에게 제사를 드린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양사를 향해 좀 더 내려가니 청량원(淸凉院)이 나타난다. 서옹대종사의 참사랑 운동을 실천하는 도량이라 표방하고 있다. 백학봉을 보고 계신 아미타불, 법당 뒤에 모신 산왕대신(단군) 등이 특이했다. 하지만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여성 대통령의 출현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는 말에 기분이 씁쓸해 발길을 돌렸다.
“만암 대종사 고불총림 도량(曼庵大宗師古佛叢林道場) - 이 뮛고” 사천왕문 입구에 하늘을 찌를 듯 큰 비석이 세워져 있다. 만암 대종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화두를 던지고 있다. 조사전, 대웅전, 진신사리 8층석탑 등을 둘러보면서도 ‘이 뭣고’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쌍계루의 풍광이 절정에 달해 사진작가들이 쌍계루와 백학봉을 함께 담아내기에 여념이 없다. 쌍계루에 올라 현판들을 바라본다. 고찰의 누각이 그러하듯이, 백양사 쌍계루는 고려와 조선조의 문인 묵객들의 자취가 가득하다. 쌍계루도 화재로 인해 옛 현판은 불타 없어졌지만, 변시연이 쓴 ‘쌍계루중건기’를 보면 삼봉 정도전과 목은 이색이 기(記)를 썼고, 포은 정몽주가 시를 지었는데, 이를 차운하여 하서 김인후, 노재 노수신, 이재 황윤석, 노사 기정진 등 많은 문사들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 쌍계루를 중수했을 때 면암 최익현이 기(記)를 적었다는 내용도 있다.
목은 이색이 ‘쌍계루기’를 쓴 이후 포은 정몽주가 정토사를 찾아 ‘정토사’란 시를 남긴다.
지금 백암사의 중을 만나 시를 쓰라 청하는데 붓을 잡고 생각하다 재주 없어 부끄러워하네 청수가 누각을 세워 이름이 비로소 빛나고 목옹(이색)이 기를 지어 그 가치 더욱 더했네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랫동안 속세에서 시달렸는데 어느 날 옷을 떨치고 그대와 함께 올라볼까?
쌍계루. 백암산의 산봉우리 백학봉 좌우에서 흘러내린 물이 냇물이 되어 만나는 곳이다. 이 물을 만암 선사(1876~1957)가 막아 보를 쌓아 오늘의 풍경을 만들었다. 백양사는 예부터 가장 가난한 절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만암은 주지가 되자 죽을 쑤어먹을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하촌의 집들에 곡식을 나눠주었다. 이 때 신세를 진 마을 사람들이 가을 추수 때 흉년인데도 곡식을 지고 되갚으려하자 다음해부터 보막이 공사를 벌여 노임을 줘서 구제사업을 펼쳤다. 일거리가 사라지면 멀쩡한 보를 다시 터서 또 공사를 벌여 노임을 주곤 했다한다.
‘이 뭣꼬’(이것은 무엇인가)란 화두를 들고 7년 동안 정진하다 득도하여, 마침내 운문선원에서 당대의 선지식 학명 스님을 등에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받는 불교’에서 ‘주는 불교’가 되어야 한다며 스님들에게 산에서 칡넝쿨과 싸리나무를 베어다 소쿠리를 만들고, 대나무를 베어다가 바구니를 만들게 하고, 또 곶감을 만들고 벌을 치게 해서 불자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농선일여(農禪一如, 노동과 참선을 동일시)를 강조했던 분답게, 만암대종사는 일이 많다고 수행을 게을리 하는 것을 그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새벽과 저녁 예불에 참여하지 않는 중은 밥도 주지 말라고 엄명했다. 만암은 향적전 옆에 조그만 방에서 거처하며 늘 대중생활을 했으며, 열반하기 며칠 전까지도 늘 대중들과 함께 발우공양을 하며 조석예불에 참석하고, 방에 돌아와서는 밤새 좌선 정진하곤 했다고 한다. 자신에겐 철저하고 대중에겐 관대했던 분이었다. 어느 날 대중들과 함께 죽로차를 마시다 “눈이 저렇게 오니 풍년이 들겠구나”고 기뻐하며 그대로 입적했다.
일주문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다 잠시 부도전에 들러 만암 대종정 사리탑비, 백양사방장이자 조계종 5대종정이셨던 서옹 대종사 사리탑비를 우러른다. 불타는 단풍 너머 백학봉이 유난히 희다. 산속에 핀 매화의 향기가 절 아래 마을에 번지듯,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살았던 분들로 인해 정토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분들의 삶의 자취를 더듬으며 많은 양들이 이 산골짜기로 몰려들고, 마침내 순결한 영혼으로 대각견성해 양이 되고 백학이 되어 마침내 하늘에 닿으리라.
여행이 끝나자 길은 시작되었다
전화가 울린다. 나를 제외하곤 모두 주차장에 모인 모양이다. 집결시간 2시 30분이 되지 않았지만, 산행에 5시간 30분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버스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하산주를 마시기 위해 오래 기다리고 있을 알프스 회원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바쁘다.
산사음악회가 열리는 듯, 팝송이 흘러나온다. 백양사박물관 앞에서 무상(無相)스님이 콘서트를 열고 있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받아 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양희은의 노래 '가을 편지(고은 시)' 등을 부르고 있다. 신세대 스님에게 박수가 쏟아진다. 나 또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분위기에 젖어본다. - 수처작주 입처개진(어느 곳에서나 마음의 주인의 되라, 서 있는 곳이 진리의 자리니라) 만법귀일 일귀하처(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 데, 하나로 돌아가는 법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가르침을 음미하며 다시 산문을 나선다.
버스에 오르니 피로가 몰려온다. 깜빡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장성호 상류지점 길가에 버스가 멈추어 선다. 공교롭게 하산주 장소 바로 위에 예술공원이 있어 회원님들과 함께 둘러보기로 했다. 한국의 시인, 명시를 소재로 조각작품을 만들어 전시해 놓은 곳이다. 백암산 산자락을 둘러치고, 장성호를 바라보는 곳에 예술성이 뛰어난 조각품들을 조성해 놓았다.
쌍계루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포은 정몽주의 시와 이를 형상화한 조각을 만나니 새삼 반갑다. 선죽교의 절개와 쌍계루의 아름다움이 잘 형상화되어 있는 조각품이다.
백양사 송만암 대종사의 글을 다시 접한다. "하늘꽃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사자는 드러누워 뒹글뒹글하고 있으나 마음은 늘 구르고, 의로운 사람은 법륜을 굴리는 것과 같다."라고 새겨 놓았다.
면앙정 송순의 시를 형상화한 조각 작품도 눈에 띈다. 면앙정 송순이 백양사 청계루에 걸린 정몽주의 시를 읽고 차운하여 지은 시를 돌에 새겨 놓은 것이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자연가’ 앞에 선다. 장성에서 글(학문)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성 필암서원 하서 문하생 중에는 송강 정철 등 걸출한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런가 하면 나옹화상의 어록도 있다. 고려말 국사이신 나옹화상 혜근은 조계종의 원조로 평가되는 고우, 이성계의 정신적 스승인 무학대사와 더불어 고려말의 3대 고승으로서 대단한 존경을 받아 공민왕으로부터 견제를 받고, 밀양의 작은 절 주지로 임명되어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신 분이다. ‘서왕가’라는 가사를 남겼는데,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이를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로 평가한 바 있다.
시 조각공원은 서예 전시장이라 할 만큼 다양한 서예가의 서체를 볼 수 있었다. 신라 명필 김생을 비롯하여 한석봉, 양사언, 원교 이광사 등의 글씨가 조각품에 녹이 있다.
"산수는 정을 품고 늙어도 다시 새로워지는데, 어찌 인간은 오래도록 되돌아오지 못하는가." 조선시대 4대 명필 가운데 한 분인 양사언의 시를 초서체로 썼다.
조선의 명필로서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의 초서 글씨도 보인다. 알프스의 두륜산 산행 때 해남 대흥사에서 이광사의 글씨는 3점을 만났는데, 다시 보니 정겹기만 하다. 전북 서예의 시조격인 창암 이삼만은 원교의 동국진체를 받아들여 유수서체(흐르는 물처럼 유연한 초서체)를 보여주고 있다.
예술공원에서 허소치의 문인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 단원과 혜원의 풍속화를 감상하고 김소월, 김수영, 김춘수, 김영랑, 박용철 등의 현대 시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산행에서 덤으로 주어진 행운이었다.
가을이 깊어간다. 흩어진 양떼들을 모아야 한다. 가을 물처럼 정신은 더 차가워지고 맑아져 백학봉으로 솟구쳐야 한다. 세상의 복판을 가로지르며 길 없는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닿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 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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