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강산 연수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금강산
2002년 12월 3일. 「현대 속초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내가 금강산 체험 연수를 손꼽아 기다렸던 건 금강산의 아름다운 자태보다는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이 솔직히 더 궁금하여서였다.
출입국 심사와 세관 검사가 시작되었다. 내 나라 내 땅에 가는데 해외여행 가는 것보다 더 수속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 기분이 씁쓸하였으며, 출국이나 입국이라는 말 자체도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설봉호의 출항이 시작되자 지정받은 좌석에 짐을 내려놓고 객실에서 나와 점점 멀어져 가는 속초항과 갈매기 등을 바라보며 새로운 흥분과 감회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천하제일 명산인 금강산이라 할지라도 단순한 등반 혹은 관광의 성격보다는 북측 사람들을 생생하게 만나고 그 분들의 생활모습을 실감하면서 따뜻한 동질성을 느낄 수 있는 진정한 북한 체험 연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였다.
오후 4시 30분. 12시에 출발한 설봉호가 드디어 정박할 장전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공기조차도 썰렁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확성기에서는 ‘반갑습니다’라는 귀에 익은 북측 가요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입북 통관 수속 및 심사」를 준비하면서 ‘여기가 정말 북쪽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며 조금 떨렸다. 관광증을 확인하는 검사원은 사진과 얼굴을 뚫어지게 확인하여 주눅이 들 정도였다. 중국, 일본 그 어느 나라보다도 통관 절차가 까다롭게 느껴졌다.
호텔 해금강으로 들어서자 20여 명의 남녀 종업원들이 양쪽으로 나누어 서서 손뼉을 치며 우리를 환영하였다.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던 모습에 기분이 참 묘했다. 웃으며 국적이 어디냐고 물어보았더니 모두 연변 조선족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쪽에선 밴드에 맞춰 필리핀계 여가수가 생음악을 들려주었다. 숙소의 전자열쇠를 받은 후 각자의 짐만 내려놓고 곧장 나와서 버스에 승차했다. 각반 조별로 32인승 차량에 탑승하여 ‘온정각’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온정각’은 한마디로 ‘현대가 만든 현대촌’이었다. ‘온정각’은 외금강 휴양소 일대를 포괄하는 금강산 관광의 중심지로서 '온정리' 등의 마을이 가까이 있다. 이곳엔 기념품점을 비롯한 휴게소와 뷔페식 식당, 문화회관, 온천장 등이 있었는데 우리는 항상 이곳에 머물러있다가 일정과 시간에 맞춰 각각의 장소로 옮겨가곤 하였다. 이곳 기념품점의 판매원이나 버스 운전기사 그리고 식당 종업원, 문화회관 매표소 등 우리가 주로 이용한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 다 현대 측에서 고용한 연변 사람들이었다. 임금이 저렴하기 때문에 그들을 고용한 것이라 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와 3일 동안 함께 했던 기사분은 월급이 70만 원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휴가를 주어도 비행기 값이 아까워 2년에 한번 정도 집엘 다녀온다고 하였다. 임금에 대한 불만도 표시하였다.
오후 6시경. ‘온정각’에서 버스를 타고 가까운 금강산 온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강산 온천탕은 8천여 평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세워져 있었으며, 지하 203m에서 솟구쳐 오르는 수온이 40℃인 100% 천연 온천수만을 사용하는 최신 시설의 온천시설임을 자랑하고 있었고, 무색무미의 중탄산나트륨이 주성분인 온천수는 피부병과 미용은 물론 신경통, 스트레스 해소, 노화 방지 등에 신비스럽고 탁월한 효능이 있음을 강조하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냉온탕을 포함한 야외 노천탕도 있었다. 조금 춥긴 하였지만 하얗게 내린 눈이 군데군데 그대로 쌓인 것을 감상하며 즐기는 노천탕의 묘미도 있었다. 온천수는 정말 부드럽고 미끈거리며 좋았다.
온천이 끝난 7시. 저녁 식사를 하기 전 2층에 전시회가 열린다고 하여 그곳으로 갔다. 이산가족 사진전과 편지글, 북한 화가들의 멋진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품 밑에 소개되어 있는 화가들의 명칭이 제각각이어서 그곳 안내원께 물어 보았더니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 ‘1급 예술가’의 순이란다. 작품 가격은 300불에서 1000불까지로 크게 비싼 것 같지는 않았다.
온천탕에서 온정각까지는 버스를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걸어올 수도 있었다. 좀 더 북한 사정을 알아보려면 걸어오고 싶었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 버스를 탔다. 저녁은 ‘온정각’의 뷔페식 식당에서 먹었는데, 북한식 음식이 아니라 그냥 우리네가 평소에 먹는 식단 편성이었고, 북한쪽에서 무공해로 재배하였다는 싱싱한 생야채가 인기를 조금 끌었다.
객실로 돌아와 TV를 켰는데, 북측 방송은 나오지 않고 남한에서 보던 채널이 그대로 잡혔다. 놀랍기도 했지만 실망 또한 컸다. 도대체 북한 방송은 어떨까 하고 얼마나 고대하고 기다렸던 일인가? 억지로 잠을 청하였지만 마음이 심란했다. 그러나 너무 평화로워서 북측에 왔다는 느낌보다는 꼭 내 집에 있는 것만 같았다.
12월 4일. 둘째 날.
6시 기상하여 일찍 밥을 먹어야 했다. 아침 식사는 해금강 내에 있는 뷔페식 식당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졌는데 어제 온정각에서와 비슷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버스로 다시 온정각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른 아침 시간답게 출근하는듯한 북한 주민들을 볼 수 있었다. 거리가 약간 있긴 하였지만 전연 신경 쓰지 않고 못 본척하였다. 무관심과 무표정 그 자체였다. 어쩜 관심을 가져 주었음 하는 내 바람이 더 호화스러운지 모르겠다.
첫 날 장전항에서 처음 본 것도 그랬지만 온정각으로 이동 중 도로 양쪽으로 보이는 큰 바위에는 저마다 하얗거나 붉은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런 암각서(巖刻書)를 ‘글빨’이라고 불렀다. 금강산에는 총 4,800여 개의 ‘글빨’이 더 있다며 조장은 금강산 산행 시 북측 사람들 앞에서는 싫은 내색을 하거나 사상적 발언을 해서는 안되며, ‘글빨’에 손가락질을 한다거나 그 앞에 올라서는 등의 행동은 절대 금물이라고 하였다.
버스가 온정각 휴게소에 다다르자 우리는 하차하여 휴식을 취하면서 8시 50분이되기를 기다렸다. 오늘 관광할 금강산에 북측 관리원들이 8시 50분이 되어야 출근하므로 그 시간 이후 이동하려는 것이었다. 온정각 휴게소는 분명 북한 땅이었지만 북한 주민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남한 사람들뿐이었다. 그래서 북한 냄새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가 관광을 하기 위해 온정각을 떠날 때 모든 종업원들이 나와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감히 상상키도 어려운 일이 이곳에선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야 우리가 떠나고 나면 다시 돌아올 때까지는 할 일 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이니 손을 흔들어 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조장으로부터 금강산 관광 시 지켜야 할 기본 수칙에 대해 들은 바에 의하면 금강산은 북한 땅이므로 북한의 규정을 어기면 모든 여행이 중단되거나 소지품을 압수당할 수가 있으며, 버스로 이동시에는 카메라 휴대는 가능하나 촬영은 불가하고, 산행 중에는 촬영은 가능하지만 북한사람(안내원 포함)의 촬영은 불가능하고 금강산의 흙이나 돌도 가져올 수 없으며, 흡연은 정해진 장소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금강산에는 두 가지가 없으므로 특히 유의해야 한다. 두 가지 중 하나는 쓰레기통이고 하나는 화장실이다. 금강산 내에는 쓰레기통이 아예 없으므로 모두 되가져와야 하며(어기면 벌금부과), 화장실의 경우는 이동식 화장실이 딱 한 군데 있기는 하지만 소변은 1불(약 1,200원), 대변은 4불의 사용료를 반드시 내야만 사용이 가능하므로 혹여 급한 볼일이 생겨서 나무나 바위 뒤에 숨어 딴전을 피우다가는 역시 벌금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금강산 초입에 마지막 화장실이 있으니 꼭 다녀와서 달러를 아끼라는 당부의 말에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론 그렇게 철저히 관리하여 오염되지 않은 환경을 그대로 보존하는 그들이 무척 부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좋은 경관을 망치는 것이 있었으니 수없이 새겨놓은 섬뜩섬뜩한 글씨들이었다.
금강산 구룡연 코스의 첫 발을 내딛던 순간은 정말 기분이 묘했다. 하늘은 너무나 푸르고 높고 맑았으며, 바람은 신선했다. 온정리에서 서남쪽으로 신계천을 끼고 올라가는 구룡연 코스는 만물상 코스에 비해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오르기가 수월한 편인데, 금강산 최고의 비경인 옥류동 골짜기가 있는 곳이다. 옥류동의 입구에는 사방을 둘러싼 세존봉, 옥녀봉, 관음연봉 등을 잘 볼 수 있는 양지대가 있으며, 비봉폭포, 한 덩어리의 바위에 8개의 웅덩이를 파며 흐르는 상팔담(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장소)을 지나 옥류동 골짜기를 다 올라서면 개성의 박연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로 아홉 마리의 용을 보는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구룡폭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 폭포는 벽과 바닥이 한 덩이의 화강암인데, 그 위에 얼어붙은 폭포수는 마치 비단을 걸쳐놓은 듯한 폭포 밑의 구룡연(깊이 13m)까지 이어져 가히 볼 만하다고 하여 내심 기대가 컸다.
등산로를 따라 구룡폭포로 향했다. 철제인 목란 다리와 목란관 지나 계곡의 왼쪽 등산로를 따라 올라 가노라면 계곡 건너편, 즉 오른쪽에 하관음봉부터 중관음봉, 상관음봉이 이어졌다. 바위산에 소나무가 자라는 모습이 절경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삼록수’가 우리를 맞이했다. 산삼과 녹용물이 흘러내린다는 삼록수는 그냥 비스듬한 바위 위로 흘러내렸다. 물맛이 참 좋았다.
등산로를 오르다 보니 무대 바위가 나타났다. 벌써 먼저 발길을 재촉한 관광객들이 기념촬영 하느라 넓은 바위 위에 가득 찼다. 무대바위에서 바라본 옥류동 계곡은 절경이었다. 옥류동 계곡의 에머랄드빛 못들을 발아래 두고 계속 오르자 연주담과 비봉폭포 그리고 구룡폭포에 이르렀다.
비봉폭포는 한자 이름 그대로 봉황이 나르는 모습이라고 한다. ‘비봉초등학교’ 선생인 내가 이곳에서 ‘비봉’이란 낱말을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그러나 얼어 있어 그러한 모습을 상상하기에 무리가 있는 듯하다. 폭포수의 움직임과 물이 부서지면서 일으키는 물보라 속에서만 봉황이 날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구룡각에서 바라본 구룡폭포와 구룡연은 겨울 날씨에 얼어 버렸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길이 74m의 대형 폭포는 얼어붙었지만 지난여름 그리고 내년 여름에 우렁찬 소리와 함께 부서지는 포말을 상상하기에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폭포의 우측에는 <彌勒佛>이라는 대형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산다는 구룡연은 수면이 얼어붙은 채로 단순해 보였지만 수많은 사연과 전설이 서려 있는 듯 했다.
일부는 ‘상팔담’을 올랐지만 나는 작심하고 온 일이 있었기에 서둘러 오던 길을 되돌아섰다. 내려 올 때는 자유 시간을 주었으므로 올라오면서 보아 두었던 유일한 북한 주민인 환경감시원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기 위해서였다.
구룡폭포까지 올라가는 길목 길목에, 즉 표지석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북측 사람들이 남녀 짝을 이뤄 서 있었다. 그들을 ‘금강산유원지 환경보호 순찰원’이라고 부른단다. 그들은 다양한 금강산 관광객들을 수시로 접해야 하므로 누구보다도 주체사상이 투철하고 동시에 출신성분도 굉장히 좋은 엘리트급에 속한다고 했다.
조장으로부터 북측 사람들을 만나거나 대화할 때의 주의사항을 너무 열심히 들었던 탓일까? 오히려 선생님들 가운데 북측 사람들이 무섭다고 의식하며, 얼굴 표정이 경직된 분들이 있었지만 지금이 어느 때인데 하며 내 글 속의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겁없이 덤벼든 것이다.
난 교직생활 25년쯤 된 초등학교 교사이며, ‘작가’라고 소개를 하고 여자 환경 감시원에게 얘기 좀 나누어도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 사실 얘기하기가 겁납니다. 워낙 조장들이 겁을 주었고, 또 우리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점이 많아서…….
- 너무 겁내지 마세요. 선생님과 우리네 사상이 다른데 그걸 어떡하겠습니까? 선생님이 우릴 첨부터 욕하려는지 아님 무의식중에 실수로 하는 건지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 (보통이 아니어 보였고,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용기를 냈다.) 아가씨도 연애하나요?
- 그럼요. 우리라고 왜 연애 못합네까?
▲ 매일 이렇게 산만 지키면서 언제 연애를 해요?
- 선생님들 내려가면 우리도 바로 내려가지요. 저녁에 하면 되지요. 또 쉬는 날도 있고요.
▲ 여행도 함부로 못한다는데 어디로 가나요?
- 그럼 그 쪽에선 어떻게 하는데요? (별 할 말이 없는 듯 나에게 반문했다.)
▲ 우린 일하다가도 어디 가고 싶으면 휴가 내고 자가용이나 기차 또는 버스 타고 즉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달려가지요. 경우에 따라선 결근을 할 수도 있고.
- 연애하자고 직장을 안갑네까? 참 별나네요.
▲ 여기선 여행도 맘대로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요.
- 그렇지 않습니다. 1년에 15일 휴가가 있는데 신고하고 가면 그 곳에서 모두 숙식을 제공해 주지요.
▲ 그럼 비밀스런 행동은 아예 못하겠네요. 가령 좋아하는 사람과 호텔을 간다거나 하는 건.
- 별일도 많네요. 그런 걸 왜 합네까?
▲ 자가용은 있어요?
- 만보 걷기 운동을 하는데 자가용이 뭐 필요합니까?
▲ 지난 번 부산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렸는데 이곳에서도 알고 있나요?
- 그럼요. 우리 취주악단들이 그쪽에 가서 인기를 많이 받았잖아요. 그것도 우리 장군님이(김정일 위원장을 장군님이라 칭했음) 직접 지도하신 것이라요.
▲ 에이, 설마.
- (정색을 하며) 왜 믿지 않지요?
▲ (순간 아차 싶어 빨리 수습에 들어갔음) 나라의 최고 지도자라면 할 일이 엄청 많을 텐데 아무리 장군님이라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가 있겠어요? 우리 대통령은 모든 분야를 나누어 그 부분에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맡겨요.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지요. 가령 취주 악단 같은 건 유명한 대학교수나 전문가가 따로 있어서 그들이 지도합니다. (이거 억류되는 게 아닌가 하고 간이 콩알만해 졌음. 나중에 그의 해명은 옷이나 동작 같은 걸 지시했다고 했음. 솔직히 그 날 호텔에 와서도 엄청 쫄았음.)
- 왜 그쪽에선 우릴 얼굴이 빨갛고 머리에 뿔 달린 사람이라고 헐뜯고 비방을 합네까?
▲ 이렇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초등학생부터 하루에도 수 백 명씩 북한을 와서 보고 가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도대체 누가 그런 얘길 합디까?
- 할머니들이 그러던데요.
▲ 혹 그들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그 동안 우린 서로 단절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너무 잘 알아서 그런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 그 쪽 사람들은 주체사상이 없어요. 머리 색깔 요상스럽게 하고, 이상한 바지 같은 것 입고, 유행만 찾으며 자기 것 중한 걸 몰라요.
▲ 그걸 주체사상 없다고 하면 곤란하지요. 사실 나도 그런 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자유스럽고 개성이 강하다는 증거 아닐까요?(사실 좀 캥겼음)
- 선생님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 누굴 뽑을 건가요?
▲ (갑작스런 질문에 깜짝 놀랐음) 이회창 후보를 찍을 겁니다.
- 노무현 선생님(또 놀람)은 못하나요?
▲ 그런 건 아니고 현재 민주당이 잡고 있으니 한나라당으로 바꿔보았음 하고요.
- 김대중 대통령이 되고 나서 북한 관계도 좋아졌고 잘 한 것 아닌가요?
▲ 상당 부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당이 바뀌면 또 새로워 질 수도 있거던요.
- 그러다 실패하면 5년 동안 어떡합니까?
▲ 국회의원이 150여 명이나 있는 당인데 실패야 하겠습니까? 또 대통령 후보로 나온 분들은 모두 그만큼 훌륭하신 분들이니까요. (자꾸 심각해지는 것 같아 화제를 재빨리 바꿈). 지난 6월에 월드컵이 열렸는데 알고 있나요?
- 그럼요. 우리도 텔레비전과 신문으로 다 보았지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결혼관, 교육 이야기, 경제 이야기 등 1시간 이상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의 사정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고 말도 조리 있게 참 잘했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이 허전했던 건 교육받은 선전요원이라는 인상을 깊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지나치면서 볼 수 있는 많은 북한 주민들과 그들은 전혀 생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후 2시. 산행이 끝나자 온정각 휴게소로 돌아왔다. 새벽밥을 먹었던 우리들은 점심을 바로 먹은 후 각각 쇼핑 또는 휴식, 사진촬영, 휴게소 의자에 앉아 잠시 잠을 자는 등 두어 시간을 보냈는데, 기념품점은 선물을 준비해 가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북한산 송홧가루와 들쭉술이 단연 인기였다. 그 외 여러 종류의 북한산 술과 담배, 자연산 표고․목이버섯과 함경도 명천 앞 바다의 명물인 금태의 수요도 많았다.
우리가 구룡연을 오를 때 두어 곳에서 사진 기사가 나와 사진을 찍었는데 어느 새 사진을 뽑아 전시하며 찾아가라고 하였다. 나는 아예 사진기를 가져가지 않았기에 나도 몇 장 찍었던 사진을 찾으러 갔다. 1장당 5불이었는데 사진은 아주 잘 나왔다. 상술이 여간 아니었다. 그것도 모두 현대 것이겠지만.
4시가 가까워지자 오후 일정으로 잡혀 있던 교예단 관람(특석 30불) 입장권을 구입하였다. 『종합교예공연』을 보여 줄 평양모란봉 교예단은 총 12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교예단 내에서도 인민배우, 공훈배우 등 초일류 배우들만 엄선하여 교예단을 구성하였으며 동포애의 심정으로 최선의 기량을 선보이겠다는 의지와 열의가 매우 높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공중2회전’, ‘널뛰기’, ‘공중 3단 그네뛰기․공중비행’ 등은 상상을 뛰어넘는 놀라운 묘기로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목숨 건’ 묘기들을 경험하니 예술이라는 차원보다는 너무나 위태롭고 경이로운데 대해 안타까웠다.
12월 5일.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이라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많은 분들이 해금강을 배경으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듯 어제까지 멀쩡하더니 때 아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해금강으로 가는 길에 차창 밖을 통해 북한 주민들과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책을 싸맨 책보를 허리에 동여맸거나 빨간색 가방을 등에 짊어지고 가는 모습의 단색 패션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키와 몸집이 매우 작아 보였다. 도로에는 나무막대 기둥에 분홍 테두리가 있는 동그란 모양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주 간단한 한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 ‘섯’이라고. 정말 북한다운 재미있고 과묵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멈춤도 아니고 ‘섯’ .
해금강에 도착하였다. 해금강은 아름다운 호수와 바닷가의 경치로 이름난 곳인 만큼 정말 아름다웠다. 이곳은 원래 골짜기였으나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만(灣)이 된 것이며, 그 만 입구에 모래 기둥이 생기면서 만을 막아 버려 호수가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바다 위에 자리잡은 기묘한 바위 기둥과 푸른 소나무와 어우러진 수많은 작은 섬들로 해안 지형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해금강에서 장소를 옮겨간 삼일포 역시 단아하고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삼일포는 호수로서 신라시대 4국선(四國仙)이 뱃놀이를 하다가 절경에 매료되어 3일 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삼일포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오후 1시. 우리는 다시 온정각 휴게소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출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시 반쯤 각자의 짐을 챙겨들고 통행검사소를 거쳐 출국 수속을 마친 후 설봉호에 모두 승선하였다. 스피커에서는 ‘우리 모두 다시 만나요. 잘가시오 잘있으오’라는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떠나와야 하는구나 싶은 아쉬움과 슬픈 감정에 사로잡혀 기분이 참 묘했다.
‘북한체험연수’라고는 하였지만 북한의 일반 주민들과의 접촉이 엄격히 통제되었고, 비록 우리가 보았던 지역이 농촌이긴 하나 생각했던 것보다도 의식주의 여러 면에서 너무나 형편이 어려워 보였다. 이렇게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통일 이전 혹은 그 이후에 풀어나가야 할 분야별 갈등과 차이를 해소하기 위한 문제가 얼마나 많이 산적해 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단지 금강산의 의미가 오늘날 한갓 고급 관광문화․돈벌이의 상징이 되거나 사회적 지위와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향민을 위한 북녘 땅 밟기’ 라거나 ‘통일세대의 통일교육’ 이라는 최소한의 명분마저 희석되고 있는 현실에서 아름다운 금강산의 의미는 재음미돼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02. 강원교육. 아동문학가. 양구 비봉초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