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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은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부암동 &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338.2m).
원래, 인왕산은 인왕사(仁王寺)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조선 초기, 태조가 경복궁 수호 호국도량으로 창건.
인왕사는 선바위 국사당과 함께 특이한 가람을 구성.
5개 종단의 11 암자가 인왕사 단일 명칭 아래 공존한다.
인왕사는 500년 전에도
현재도 경복궁 수호 도량.
조선 개국 초기에,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궁궐 내원당 조생 스님을 주지로 보내 창건.
대부분 태고종 조계종 스님들로 4년에 한번씩
각 암자의 암주들이 인왕사 주지를 맡고 있으며
인왕사 대웅전 대표적인 전각 외 염불암 송림사
기원정사 관음암 용해사 미타정사 서래암 보덕암
용천암 대원암 성불암 등이 인왕사를 외호하고 있다.
선바위는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인왕사 국사당에서 5분 도보거리에 위치.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영험한 기운이 있다는.,선바위.
일제 강점기인 1925년 6월 15일
남산 국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진 후
사람들의 믿음이 더 굳어졌다고 전한다.
조선 개국 후, 태조가 궁궐터를 정할 때,
북악주산론에 대한 인왕산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궐터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 차천로 '오산설림'을 보면,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삼았다.
그러나, 정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라며 극력 반대하여 무학대사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무학대사는 탄식하며, ‘나의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라고 하였다.
또 신라 말, 도선대사 산수비기(山水秘記) 기록에 의하면
“국도를 정할 때 스님의 말을 들으면 국기가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 될 것.”
과연 5대 만에 세조의 계유정난이 발생,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 내용은 19세기 '한경지략'에 실려 있다.
또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 색문동에
왕의 기운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그 왕의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지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인경궁, 자수궁은
옛 문헌 상에서만 존재할뿐
그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인왕산 자락에서
인경궁 & 자수궁은
어디에 있었던걸까?
원래,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많았던 곳
태종 5년(1405) 7월 경복궁 안까지 다녔고
세조 10년(1464) 9월 창덕궁 후원에 들어왔고,
연산군 11년(1505) 5월에는 종묘에 침입하였다.
그밖에도 민가에 호랑이 피해가 수없이 많아서
세조는 친히 세 번 백악에 올라 호랑이를 잡았고,
양주 수락산과 고양 버리고개에 가서 호랑이 사냥.
명종 때에도 양근에서 30여 명이 해를 입고
선조 때 고양 등지에서 흰 이마 호랑이가 횡행하여
400여 명이 해를 입어 군대를 출동시켜 호랑이를 잡았다.
속설에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고 전했다.
"서산", "필운산"이라고도 불렀던.,인왕산.
필운대는 인왕산 별칭 필운산에서 유래되었다.
선조 때 재상 이항복 집터에 암각 유적인.,필운대.
현재, 필운대는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
필운동은 태조실록에 의하면 태조 5년(1396) 4월 1일
한성부 5부 방명 표지를 세울 때 한성부 서부 인달방 지역
영조 27년(1751)에 간행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에 의하면
서부 인달방의 분선공내계・사직동계・수성궁내계・내수사계 일대.
필운동은 仁王山 별칭 弼雲山(필운산)에서 유래.
조선 중종 때 명 사신 龔用卿이 손님 접대의 예로
중종의 청을 받고 지은 경복궁 서쪽 인왕산의 별칭.
이는 ‘右弼雲龍’에서 따온 것,
경복궁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인왕산은 오른쪽에 위치한 운룡.
운룡은 임금을 상징,
경복궁의 오른쪽에서
임금을 보필한다는 뜻.
인왕산 기운은 국운을 움직이는 힘이였고
인왕산에 올라서면 그 시람의 기운에 따라
산의 기운이 움직였고 옛부터 전해온.,인왕산.
옛부터 서대문구는
황해도· 평안도.,길목.
서울 북서쪽.,관문 역할.
한양 주산을 정할 무렵.,인왕산 왕기설
광해군은 인왕산 왕기를 억누르기 위하여
인왕산 기슭에 경희궁, 자수궁, 인경궁을 건설.
선왕 후궁들의 거처.,옥인동 자수궁.
(광해군 8)에 인왕산 기슭의 민가를 헐고
승군을 징발하여 자수궁(종로구 옥인동)과
인경궁(사직동 부근), 경덕궁(훗날, 경희궁).
인경궁(仁慶宮)· 자수궁(慈壽宮)과 함께
건축 시작 후, 1620년 10월 완공한 경덕궁.
인경궁은 태평관 건물을 허물어 재목과 기와를 사용.
인조 10년 인목대비가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 서거.
인조 26년 인경궁 재와(材瓦)로 홍제원(弘濟院)을 지었다.
이후부터 인경궁의 자취는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615년 광해군이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이후 창경궁 중건 진행 중 풍수승 성지(性智)에 의하여
인왕산 왕기설이 제기되어 1616년 창건된 인경궁(仁慶宮).
인경궁은 경희궁 영건과 병행
재정적 어려움이 가중되었지만.
광해군은 공사를 강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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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대 궁궐로 현재 남아 있는 궁궐은
경복궁 ,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 경희궁이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중 유일한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은 1405년(태종 5년)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
경복궁 동쪽에 위치해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
임진왜란때 불타 광해군 때 재건 후 정궁 역할을 했다.
태종 5년(1504년) 응봉산 아래 완공
태종때 왕자의 난 영향으로 주로 기거
태종6년 1505년 인소전, 광연루 건축
1511년 해온정, 금천교 건립
1512년 정문 돈화교 건립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소실
1607년(선조 40년) 소실된 궁궐 중 먼저 복구
1611년(광해군 3년) 완공 후, 창덕궁의 법격 상승
경복궁 복구를 포기한 채 창덕궁을 법궁으로 결정
보조궁궐로 건립한 경덕(희)궁(이궁), 인경궁(소실)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조선의 법궁 구실.
조선 역대왕이 가장 오래 머문 창덕궁.
창덕궁은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 회국사신 접견장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신정전.
왕과 왕족 거처.,희정당, 대조전
창덕궁 비원은 일제가 붙인 지명.
조선시대에는 창덕궁의 후원
궁궐 북쪽에 있어 북원 혹은 금원.
창경궁은 조선초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였다.
성종 14년(1483)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 거처.
당시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
통명전 등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등이 있었다.
조선 궁궐 중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 창덕궁과 함께 불탄 후, 창덕궁과 같이 재건.
창경궁은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다가 처형 당했는데,
그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궁궐 안 선인문 안뜰에 8일동안 두어 죽었다.
창경궁은 순종 즉위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 건물들을 헐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 이름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안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장조· 정조· 순조· 헌종 등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
광해군 때 재건한 정문·정전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 옆 창덕궁과 더불어 조선시대 궁궐의 중요한 유적.
경복궁은 1394년 창건을 시작하여 그 이듬해 완성.
조선 초기에 사용하였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
그후, 1867년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
현재, 경복궁의 건물들은 그 때 지어졌거나
1980년대 이후 복원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조선 초, 왕자의 난으로
방번, 방석 형제가 시해당했고
명성황후가 사해당한 곳도 경복궁.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1593년 행궁으로서 사용.
선조의 뒤를 이은 광혜군은 1608년 이곳 행궁에서 즉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고쳐 부르고 7년간 왕궁으로 사용.
1615년 창덕궁으로 이어하며 이곳에는
선왕인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 만 거처.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 폐위,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270년간 별궁.
1897년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그리고,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 후,
왕궁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에도 이곳에서 거처
이때부터 고종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명명된 덕수궁.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운명.
현재, 18,635평 경내에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중화전,
광명문,석어당, 준명당,즉조당,함녕전,덕홍전,및 석조전 등.
덕수궁은 구한 말 고종이 일제 압박으로 양위를 당하고
한많은 여생을 마감해 3.1운동의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창덕궁은 별궁이었으나 사실 상 정궁 역할.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임시궁궐 광해군 때 정식 궁궐.
광해군 때 지어진 별궁으로는 서궁으로 불리운 경희궁.
경희궁이 법궁인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한 궁이라.,서궁.
경희궁은 1988년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종로구 신문로 2가에 일부 만 복원되었다.
1617년(광해군 9) 인경궁·자수궁과 함께 건축을 시작
1620년 10월에 완공후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원래 경희궁 자리는
인조 생부 정원군 잠저였는데, 광해군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
일제강점기 전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숭정전은 1826년 동국대학교 구내로 이전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은 1823년 사직단 뒤로, 흥화문은 1832년에
박문사 산문으로 이축되고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
1988년 경희궁 복원작업에 착수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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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에는 다섯 개의 큰 궁궐이 있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아울러, 창덕궁의 권역에는
궐보다 중요한 종묘가 있었고,
경복궁 서쪽과 경희궁 북쪽에 사직단.
현재, 경복궁 부지 만 중국 자금성의 60%에 해당
여기에 실제 궁궐 부지였던 청와대 일대와 궁궐 주변에
궐외각사와 6조 관아, 별궁, 군사시설까지 합하면 더 크다.
‘궐외각사는 궁궐에 들여놓지 못한 관아.
경복궁 동쪽 건춘문과 서쪽의 영추문 일대의
궁장 밖에 궐외각사에 소속된 각종 관청이 있었다.
왕실족보 관리 기관인 종부시,
공주· 옹주· 군주(郡主)· 현주(縣主) 등과
혼인한 부마(駙馬)에 관한 일을 관장했던 의빈부.
중추부, 종친부, 의금부, 사헌부, 사간원,
내시부, 사직서, 체부청, 전의감, 한성부,
돈녕부, 비변사, 승문원, 소격서 등의 관청.
특히, 경복궁 동쪽과
안국동 쪽 각종 관청은
창덕궁과 가교 역할을 했다.
광화문에서 현재의 광화문 사거리까지
세종로 6조 관아는 궁궐과 한몸 같았다.
현재 서울시청 옆 경운궁은
북쪽으로는 경희궁과 연결되고
대한문 앞쪽 소공동 환구단 자리는
남별궁터로 경운궁 영역에 속해 있었다.
서울시청을 포함하는 덕수궁에서 6조 거리,
경복궁, 경희궁, 사직을 크게 한 덩어리로 보면,
사대문 중앙과 서북쪽을 거의 다 차지하는 규모.
경복궁 서쪽 경희궁(서궐)과 덕수궁은 연결
러시아 대사관에서 언덕만 내려오면 경희궁.
구한말 두 궐 사이에 홍교라는 다리를 있었다.
경희궁은 다시 북쪽문을 통해 사직단과 이어졌다.
경희궁과 경복궁 사이 사직단 북쪽에 인경궁이 있었고
경희궁과 경복궁 사이에는 각종 별궁과 정부 시설, 숲이 조성.
경희궁 정문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6조거리를 통해 경복궁과 연결된다.
덕수궁 북쪽 현재 경기여고 터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선원전 터.
선원전에서 바로 길 만 건너면
6조 거리를 통해 경복궁과 연결.
이밖에도 중구 저동에는 영희전이 있었다.
태조·세조·숙종·영조·순조 어진을 모신 전각
영희전은 1900년에 창경궁 앞 경모궁터로 이전.
조선시대 5대 궁궐이
만약 그대로 남아있다고
가정하면, 중국 자금성 규모.
자금성(紫禁城)은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면적만 축구장 100여 개 크기인 72만㎡며,
그 안에 약 800채 건물과 8800개 방이 있다.
하지만 막상 자금성에 들어가면
좁은 통로와 높은 벽에 가로막혀
그 규모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데,
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경산(45.7m).
바로 자금성 북쪽의 경산공원(景山公园).
이곳에선 자금성뿐 아니라 종고루(钟鼓楼),
북해공원의 백탑(白塔), 중남해(中南海)까지
베이징 시내를 사방으로 내려다볼 수 있는 명소.
대부분 평지인 베이징에서
보기 힘든 산이며 인공산이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낮지만,
자금성을 감상하기에는 충분한 높이.
북해공원 호수와
자금성 해자를 판
흙을 쌓아 만든 산.
사람의 손으로 쌓아 올린 산이
아파트 20층 높이에 맞먹을 정도.
원래, 경산은 원나라 황궁의 일부분이었으나
명나라 영락제(1360~1424)가 자금성 건립 때
이곳의 건물들을 해체해 봉우리만 남게 되었다.
훗날 청나라 건륭제가 이곳 5개 봉우리에 정자를 건립.
주상정(周赏亭), 관묘정(观妙亭), 만춘정(万春亭),집방정(辑芳亭),
부람정(富揽亭)로 불리며 가장 높은 곳은 중간에 있는 중봉(中峰)이다.
이외에도 공원 내에는 공자를 모시는 기망루(绮望楼)와
청∙명대 황제 시신 보관처 수황전(寿皇殿), 영사정(永思殿),
관덕전(观德殿), 호국충의묘(护国忠义庙) 등의 건물이 있다.
또 공원 동쪽에는 명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베이징 함락때 목매 자살했다는 고목 한그루
조선왕조 500년 역사와
관련 깊은.,자금성(紫禁城)
중국 북경 자금성은
명·청시대에 500여 년간
24명 황제가 살았던 궁전.
자금은 천자가 거처하는 곳.,자금.
베이징 내성(內城)의 중앙에 위치.
북두칠성 북쪽의 북극성이.,자금성.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할 때
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한.,자금성.
.....................자금성.......................
베이징 중심에 있는 명 청 왕조의 궁궐.
자금성은 궁궐로는 세계 최대 규모이다.
1925년 10월 고궁 박물원으로 용도 변경.
동서 760m, 남북 960m, 72만 m² 넓이 규모.
자금성 주위에는 해자와 성벽들로 싸여 있다.
해자의 너비는 52m이며 깊이는 6m에 이르며
동서남북으로 해자를 건너는 4개 다리가 있다.
궁궐 주위 장벽의 길이는 4km에 이르며
높이 10m 성벽에 4개 출입구가 뚫려 있다.
1644년(인조 22년) 3월 농민군을 이끈 이자성.
북경을 점령하자 명나라 최후의 황제인 숭정제는
황후와 공주들을 죽인후 자금성 뒤편 경산에서 자결.
경산(景山)은 베이징 중심축이며 자금성 북쪽.,인공산.
남쪽으로는 자금성 신무문(神武门), 서쪽으로 북해(北海).
원래 황실 정원이며, 근래에 와서 일반인에게 공개된 공원.
경산공원(景山公园) 면적은 약 23헥타아르,
송백(松柏)이 울창하며, 모란이 많이 피었다.
경산(景山)은 진산(镇山) 만세산(万岁山)
매산(煤山) 등 이름으로도 불리우고 있으며
13세기 중엽에는 원나라 황궁의 일부분이었다.
경산은 황궁을 둘러싸는 해자와 인근 연못에서
퍼낸 흙을 쌓아 만든 45.7m 높이 인공산으로 조성.
산상에 송백을 원내에 학과 사슴이 무리를 이루었다.
북쪽 부근에 수황전 등 황궁 누각 & 다양한 과수.
중양절마다 황제는 경산을 올라 연음을 베풀었다.
명나라가 베이징 천도 당시 산이 없었기에
인공산을 만들어 풍수산(风水山)이라 불렀다.
숭정(崇祯) 17년(1644년) 구력 3월 19일,
이자성의 군대가 베이징으로 쳐들어오자,
명 마지막 숭정황제(33세)는 신무문으로 나와
경산 동쪽 비탈 홰나무(槐树) 밑에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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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은 '고려 말~ 조선' 시대
궁궐 건축 양식 및 규모의 롤 모델.
연산군 때 경회루 뒤에 조성한 만세산.
경복궁 후원 교태전의 뒷산 아미산 등
자금성 경산의 궁궐정원 양식을 모방한 것.
창덕궁은 종묘와 이어졌고,
흥선대원군 사저였던 운현궁은
구한 말, 경복궁과 종묘 사이에 위치.
'옛 창경궁 후원'.,함춘원.
서울대병원 & 경모궁 자리.
그 부지 만 덕수궁보다 크다.
창덕궁· 경희궁· 경모궁 문묘· 종묘 만
연결하면 그 면적이 자금성과 유사하다.
조선시대 수없이 많은 별궁이 있었던.,한양.
인왕산 안쪽에 선희궁과 경우궁을 비롯,
현재의 경복궁 서편을 중심으로 자수궁,
창의궁, 어의궁, 어의동 본궁 등이 있었다.
종로와 안국동 쪽에 수진궁, 용동궁, 안동별궁.
이들 별궁과 궁외에 있던
여러 전각 부지만 합해도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
궁궐을 이야기할 때,
흔히 궁궐 담장을 기준으로
궁궐의 담장 안쪽을 지칭한다.
하지만 기능이나 여러 가지 부대시설과
업무 공간이 궁장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경복궁의 경우, 공식적인 영역은
남쪽의 광화문에서 북쪽 신무문까지.
그러나 실제로는 현재의 청와대 자리와
비서실, 경호실 모두 궁궐에 속하는 영역.
후원(상림원), 농사일 관장(경농재),
군사훈련(경무대) 등 다양한 궐밖 공간.
조선시대 궁궐로서
현재, 복원되지 않은 궁궐은
인왕산자락에.,자수궁과 인경궁.
광해군때 궁궐로., 옛 문헌에 만 존재.
현재, 옛터에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광해군 재위 때 건축한 자수궁과 인경궁은
조선 후기에 왜 흔적조차 없이 멸실된걸까?
수창궁은 태조 이성계가 즉위, 정종, 태종도 이곳에 임어(臨御).
조선 성종 연간에 이미 허물어져 개성부 창고로 사용되었던.,궁궐.
고려왕조가 원에 항거하며 강화천도 당시 사용한 궁궐 명칭에서 유래.
강화 천도 당시에 사용되었다는
수창궁 역시 위치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개경 수창궁은 옛터를 보존.
오늘날, 대중가요 '황성옛터'가 수창궁 터.
그러나, 자수궁과 인경궁은 옛터 흔적조차 없다.
조선 후기에 인위적으로
철저하게 멸실한 결과이다.
조선 개국 초,
태조 이성계가
정사를 펼쳤던.,곳.
신덕왕후 거처.,자수궁.
사실 상, 조선 태조가
한양천도 후 거처한 궁.
조선시대 '한성 북부 순화방'에 있었던 궁.
(종로구 자하문로 19길 36 군인아파트 등)
태조와 신덕왕후,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곳.
그후 자수궁에 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으며
이때부터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게된.,'자수궁'
그후, 선왕의 후궁들이 비구니가 되어 한때 여승방.
그후로는, 명나라 여인이던 굴씨 부인이 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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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광해군 8년) 풍수설에 의하여
인왕산 아래 현재 종로구 사직동, 누각동에
궁궐을 창건하면 태평성대가 온다는 주장이 제기.
광해군은 인왕산(仁王山) 아래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16대 인조 아버지의 사저에 인경궁(仁慶宮)을 지었으며.
인목대비를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으로 폐출시켰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수성궁(壽聖宮)은
원래, '세종대왕 3남' 안평대군의 집.,비해당 터.
광해군 재위 때 수성궁 터에 자수궁(慈壽宮)을 건축.
자수궁은 인경궁의 뒤쪽에 지었다고 하며
인경궁은 1616년 인왕산 왕기를 누르기 위해
경희궁과 남북으로 이어.,인왕산 아래에 창건.
인조는 서궁(西宮) 인경궁(仁慶宮)의 전각을 철거.
창경궁에 옮겨지었고 인경궁은 영조 대에 완전 철폐.
1630년(인조 8년) 경운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
인조는 인경궁에서 폐출된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풍정(豊呈)을 거행.
인목대비는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승하(昇遐).
이러한 기록에 의하면.
경복궁 서쪽에.,경희궁.
경희궁 북쪽에.,인경궁.
인경궁 뒤쪽에.,자수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은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궁궐.
자수궁은 수성동계곡에 위치.
광해군은 왜 3 궁궐을 남북으로 배치한 것일까?
3궁궐은 '조선 개국의 산실' 수창궁을 복원한듯 하다.
혹, 고려 개경의 남북으로 배치된 수창궁을 모방한걸까?
'고려 도읍'
개경 도성의
서소문 안에
송악산 자락에
있었던.,수창궁.
조선건국 후 고려의 종묘를 부수고,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를 탄압하는 등
고려왕실의 흔적까지 지우려했던 혁명 공신들.
고려 사직을 막내리게 한 쿠데타 현장.,선죽교.
서울에서 불과 50km거리에 위치한 개성의 고적(古蹟)들
936년 후삼국 통일후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망할 때까지
개성은 고려 도읍지이자, 우리나라 중세역사의 중심무대였다.
개성은 찬란했던 불교의 무수한 유산을 간직한 곳이자
대각국사 의천 등 수많은 고승 대덕들이 거쳐갔던 장소.
고려 말, "송악산이 세 번 울면, 국운이 트인다."던.,개성.
1392년 7월 17일 고려(918-1393) 34왕 공양왕이 선위(禪位)
이성계가 개경(開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 태조에 즉위.
태조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정종2년(1400년) 11월13일에 세자 이방원이 예궐하여
조복을 갖추고 명을 받고, 연을 타고 수창궁에 이르러 즉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수창궁.
그후, 정종이 즉위 후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
태종 즉위 후, 태조가 태상왕, 정종은 상왕이 된 곳.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령.
한양천도를 실행하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건축.
태조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간,
이어, '8월 6일~ 9월 24일' 49일간, 충 98일 간 축성공사.
19만7천4백명을 동원해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축성.
북 : 백악산~ 동 : 낙산 ~남 : 남산 ~ 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축성한 공사 전체구간.,5만 9.500여척을
600척씩 97구간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명명했다.
'조선건국 한양천도'
산실인.,개경 수창궁.
............................
............................
조선 개국 초에서 중기까지
동서로 배치된 한양의 궁궐들.
조선시대 궁궐 외조는 궁궐 안 관청이 자리하는 공간,
치조는 신하들의 조하를 받고 집무를 하던 궁궐의 정전.
조선시대 정전은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 왕의 권위를 강조.
연조는 왕의 침식과 휴식을 위한 개인생활공간.
연조 영역에는 왕과 왕비, 왕대비의 침전이 자리하고,
그 옆에 궁궐 안에 필요한 제반시설과 관계자들 생활시설.
왕세자 거처는 주로 동쪽에 자리하여 동궁(東宮)이라 부른다.
경복궁은 조선 개국 초, 법궁이자 정궁이다.
광화문은 경복궁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국왕이 드나드는 경복궁의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 경복궁의 정문이었기에 웅장하다.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한 궐문 형식.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뤄졌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했다.
광화문 문루(門樓)에 종을 걸어 때를 알렸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단 위에 문을 세우지만
경복궁의 문은 성곽의 문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경복궁 창건 당시 광화문은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불렀고
세종 8년(1426)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광화문이라 불렀다.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졌다.
광화문이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것.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청사 축에 맞춰 복원.
원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m 뒤로 물러나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공된.,광화문.
세종로 경복궁(景福宮)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 낙산과 인왕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1865년(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경회루.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건물을 질때 많은 전각들이 훼손.
1990년대 총독부 건물을 철거후, 현재 부분 완료된 상태다.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면적은 432,703㎡이며, 동서 500m, 남북 700m 규모로 남아 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273년 간 방치.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광해군이 일부 복원.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가자 백성들이 태워버린 것.
하여,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임시궁궐이었고
광해군 재위 동안에 덕수궁은 정식 궁궐이었다.
그러나, 덕수궁은 비좁아 이전할.,새 궁궐이 필요.
광해군은 임진왜란 7년 전쟁 동안에
성난 민심이 태웠던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다시 중건하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곳은 이미 민심이 왕실을 떠난 곳.
조선왕실의 실추된 권위를 되찾으려면
아예 새 궁궐터로 이어하려 했던 광해군.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를 위한 새 궁궐 터를 모색.
풍수설에 의해 찾아낸 곳이.,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덕수궁 북쪽으로 인왕산 자락까지.,남북으로 궁궐을 신축.
국가 재정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난 후라
3곳 궁궐의 건축을 위한 재원 조달이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과다조세, 매관매직 등 부작용도 발생.
광해군이 새로운 궁궐을 건축하는 동안에
매관매직 자금조달 등 악역을 맡은.,김개시.
그러던 와중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된.,광해군.
광해군은 새로운 궁궐을 3곳에 건축하던 도중에
권좌에서 쫓겨났기에 궁궐 공사는 중단되었던 것.
그무렵, 경희궁은 거의 완공 단계.
광해군은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나
인조반정 후, 인조가 첫발을 딛게 된.,경희궁.
인조는 창덕궁을 복원한 이후에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 하였지만
인조 2년 이괄의 난때 또 다시 불탄 창덕궁.
창덕궁은 선조 말년에 복원공사.
광해군 재위 때에야 복원공사 완료.
인조 재위 2년 '이괄의 난] 때 불탄 후
또 다시 복원되는 등 수난의 역사를 반복.
조선 후기에는 경복궁을 대신하여
동궐 창덕궁은 '법궁이자 정궁'의 역활.
경희궁은 '창덕궁 서궐이자 정궁'의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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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은 연산군때 중종반정을 전환점으로
조선 중기에 법궁의 역활을 사실 상 마감한다.
고종 때 복원되었지만, 곧 국결이 기울었던 때문.
그러한 비운의 역사를
품고있는.,인왕산 치마바위.
서촌 수성동계곡 위에.,치마바위.
조선왕조 519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경복궁을 품은 '북악산'은 상징적인 곳.
인왕산 수성동은 사실 상, 조선왕조의 산실.
한양 도성의 축성공사
경복궁 궁궐 공사를 포함
한양 신도시 건설 주역들이
조선 개국 초 모여 살았던 곳.
서촌 세종마을 옥인동 수성동 등.
조선시대 '청운의 큰 뜻을 품고.,'
8도의 인재들이 모여든 곳.,청운동.
인왕산 자락 청운동은 조선 역사의 산실.
인왕산.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에서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지나
서촌, 통인시장 지나.,수성동계곡.
그곳에서 위로 더 오르면
인왕산석굴암으로 가는 길이다.
인왕산 치마바위 아래에 있는.,석굴암.
그곳에서 위로 더 올라가면.,석굴암 약수터
석굴암약수터는 치마바위로 오르는 등산로 초입.
치마바위에 오르면, 경복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치마바위에는 중종의 원비였던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 전설이 전한다.
신씨는 중종이 된 진성대군의 원비이자,
연산군의 측근이었던 '신수근'의 딸이다.
성희언, 박원종 등이 신수근 형제를 죽이고
연산군 폐위 후, 연산군의 아우 진성대군을 옹립.
이른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진성대군.
중종은 장인 신수근 등이 살해된 와중에
즉위 직후 부인이 걱정되어 중전에 봉하였다.
그러자, 반정공신들이 신씨를 내쫒을 것을 주장.
반정공신들은 중전 신씨가 친정아버지 신수근과
그 형제들을 이미 죽였기에 훗날 보복이 두려웠다.
중종은 중전 신씨를 지키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신수근(1450년 ~ 1506년)은 문신이자 왕실 외척.
신승선과 중모현주의 아들로 임영대군의 외손이요,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며, 세종의 외증손.
따라서, 왕실과는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그 외에도 그의 부인은 권람의 6째 딸로 남이의 처제.
1506년 중종반정 때 반정 참여를 거절해 살해 당한 것.
중종은 중전 신씨 폐출론을 잠재우기 위하여
연산군 측근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나눠주고,
기녀 300여명을 노비로 보내 주었지만 허사였다.
유자광 같은 반정공신은 대비전에서까지 으름짱.
"중전 신씨를 폐출하지 않으면 임금을 폐출하겠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신씨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인왕산 아래 옛날 살던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신씨는 궐을 나오며, 살아있는 동안에 인왕산 치마바위에
붉은 치마를 걸어 남편을 그리워하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한다.
그후,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일찍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함께 살때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널었다.
중종도 경회루에 올라 그곳을 보며 신씨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런 중종을 반정공신들이 가만 둘 리 없었다.
결국, 중종은 계비 장경왕후에게 새 장가를 들게 하였고,
그후 중종은 10여 후궁을 맞이하며 원비 신씨를 잊어갔다.
원비 신씨는 남편이 사직단 제사를 지내러 올 때마다
말죽을 쑤어 사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가 중종이 탄 말에게
먹이는 등 부부애를 과시했지만, 끝내 궁궐로 돌아오지 못했다.
원비 신씨는 71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51년 간 인왕산 치마바위에 붉은 치마를 널었다.
그러다가, 영조 15년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권되었다.
단경왕후는 왕비로 있었던 기간은 일주일.
당시 20세 단경왕후는 71세로 죽을 때까지
자식 한명 없이 중종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중종에게 단경왕후는 조강지처였지만
옛 여인 중 하나로 잊혀진 여인이었다.
중종은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488년(성종 19) 성종 & 계비 정현왕후 사이에서 출생.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역(懌), 자는 낙천(樂天).
실록에는 그의 성품에 대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청단(聽斷)을 잘했다."라고 기록.
성종은 서열 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없었으나
반정으로 1506년(연산군 12)에 왕위에 올랐지만
본인 스스로는 전혀 반정의 뜻이 없었던 군주였다.
반정하던 날에 군사들이 그의 집를 애워쌌는데,
반정 공신들은 누가 해칠 것을 염려해 보호했던 것.
진성대군은 놀라 자결하려 하자 부인 신씨가 만류했다.
"군사들의 말 머리가 이 집을 향해 있으면
우리가 죽지 않고 무엇을 더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군사들의 말 머리가 집 밖을 향해 있으면
우리를 호위할 뜻이니, 그때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신씨는 진성대군의 소매를 붙잡고 말리며
사람을 내보내어 살피게 했더니,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 - 연려실기술 권7, 중종 조 -
반정 군사들이 자신의 집을 호위할 때까지도
자신이 왕으로 추대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반정 세력은 궐 안을 장악 후 대비인 정현왕후에게
진성대군을 왕으로 삼는다는 교지를 내리도록 종용.
처음엔 반대한 정현왕후가 결국 허락해, 그날 즉위식.
얼마나 급하게 진행되었는지
예식에 갖출 면류관이 없어서
익선관을 쓰고 즉위했다 한다.
이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왕위에 오른 중종은
한동안 반정 세력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중종이 얼마나 힘 없는 왕이었는지는
단경왕후 신씨의 폐비 문제에서 드러난다.
중종과 신씨는 자식은 없었으나 금슬이 좋았다.
첫부인 신씨가 폐비된 후
중종은 윤여필(尹汝弼)의 딸을
두번째 왕비로 맞이한.,장경왕후.
장경왕후는 1남 1녀를 낳았으나
1515년(중종 10)에 원자(12대 인종)를
낳은지 엿새 만에 죽자 신씨를 복위를 시도.
그러나, 반정공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중종은 1517년(중종 12)에
세번째 부인 문정왕후 윤씨를 맞이.
윤지임 딸로, 13대 왕인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는 명종 외 4 딸을 더 낳았다.
중종은 이 밖에도 경빈 박씨가 낳은 복성군을 비롯하여
9 후궁에게서 아들 7명과 딸 6명을 더 낳아, 총 9남 11녀.
반정이 성공한 후 반정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공신 지위.
특히, 반정의 핵심 3인방인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각각 이조판서, 우의정, 병조판서에 올라 정권을 장악.
연산군 학정으로 문란해진 국가기강을 바로잡는데 성공.
그러나, 왕도 어찌하지 못하는 막강한 세력을 이용해
뇌물을 받고 훈공 등급을 정하고, 관작을 남발하였으며
역적 유자광에게조차 반정공신 자격을 준 잘못을 범했다.
즉위 초, 반정 세력에게 휘둘리던 중종은
점차 국왕으로서의 권한을 되찾으려 했다.
그래서, 등용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趙光祖).
그러나, 결국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의 사림들을 유배했다가 사사하였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 개혁정치도 실패로 끝난 것.
그후, 중종 역시 개혁을 포기했고
조정은 훈구권신들이 여전히 득세.
중종실록에는 원비 신씨를 폐위 할 때
중종이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고 기록.
1698년 숙종은 연경궁 내 사당을 세워
춘추로 제사지내게 하고.,한식에는 묘제.
1739년 영조는 그녀를 왕후로 복위시키고
익호를 단경(왕후), 능호를 온릉으로 추봉하고
왕비릉 '정릉, 사릉' 예를 따라 새로이 상설을 설치.
........................
........................
1510년(중종 5)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부산포(동래), 제포(薺浦, 창원), 염포(鹽浦, 울산).
삼포 왜구들이 조선의 통제에 반발해 폭동을 일으킨 것.
삼포를 개방한 시기는 세종 때였다.
1418년(태종 18)에 단행한 대마도 정벌로
조선과 일본의 교섭중단 한참 후 개방된 삼포.
조선 조정에서 삼포 개방은
일종의 유화 정책이었던 셈.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삼포 왜인의 수가 증가.
불법체류, 정해진 규정을 위반, 거래 행위가 문란.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 백성에게 돌아갔다.
성종 조에 이르러 이러한 폐해를 없애고자
삼포 왜인들에 대한 단속과 통제가 강화되고,
중종 때 더 강화되자 왜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
'삼포왜란' 폭동을 일으킨 왜인의 수가 4~5천 명.
조선 약탈을 노리던 대마도주가 이들을 지원했다.
폭도들은 제일 먼저 부산포와 제포를 연달아 공격
그 여세를 몰아 웅천과 동래 지역까지 치고 들어왔다.
그 과정에서 부산진첨사인 이우증(李友曾)이 죽고
제포첨사 김세균 납치 등 민간에 대한 약탈이 자행.
조정은 좌의정 유순정을 도순찰사에 임명해 반란 진압.
진압군이 수륙 양면으로 파상공격을 펼친 결과
6일 만에 왜인 폭도들의 거점이 모두 초토화되고
대마도주 아들이 전사하자 왜인들은 대마도로 도주.
이 일을 계기로 중종은 삼포왜관 폐쇄 및 교역 단절
그러나, 2년 후인 1512년(중종 7)에 임신조약을 체결.
국교는 다시 정상화되었고, 제포 한 군데만 다시 개항.
.
삼포왜란을 계기로 중종은 비변사(備邊司)를 신설.
당시까지 국방업무는 의정부와 병조에서 맡아서 했다.
그러다 보니, 삼포왜란과 같은 변란에 대처하지 못했다.
비변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초법제적 임시기구.
이후, 비변사는 변란 때마다 대처하는 기관으로 발돋움했다.
임진왜란 후, '군사 행정 외교· 통상' 최고 의결기관으로 승격.
그러나, 비변사의 확대와 강화는
국가의 기능이 한 기관에 지나치게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해 국정이 문란.
결국, 비변사는 1864년(고종 1)에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을 때까지 계속 그 기능과 권한을 유지.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기능을 대폭 축소시켰고
사실 상으로, 폐지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만들었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제 사이 한일합방(韓日合邦) 조약.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로도 호칭.
을사조약 이후 급격하게 기울던 대한제국은
결국 일제에 편입되었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
그후, 황현, 민영환, 한규설, 이상설 등은 반대해
자결하거나 독립운동을 전개해 14만 명이 독립운동.
대한제국의 마지막황후였던.,순정효황후.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 폐위 당하면서
순종이 즉위하자 14세 나이에 황후가 되었다.
자신보다 두 살 어린 장인을 둔 순종과
‘채무왕’ 윤택영 아버지를 둔 황후의 수난.
“황태자 가례때 윤택영 부채가 200만 냥에 달해
매일 그의 집 앞에 빚쟁이들이 몰려온다는 소식.
순종은 어제 10만원을 특별히 하사하셨다고 한다”
윤택영의 빚이 200만 냥, 즉 20만 원이었으니
당시 웬만한 기와집이 1만 원이었으니 20채 값.
요즘 서울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60억 원.
물론 기사에서는 결혼비용으로 진 빚이라고 했지만,
고종의 후궁 엄비에게 황태자비 간택뇌물까지 포함된
빚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난 것이 조선 '채무왕'이 된 요인.
순정효황후는 1910년 9월 28일 국권 강탈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 진행을 엿듣고 있었다.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병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황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춘 것.
그러자 큰아버지 치마 속 옥새를 빼앗아 이완용에게 바쳤던 것.
윤덕영은 강제 병합 후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 5만 원을 받았다.
1940년 죽을 때까지 친일 기관인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 등의 요직.
총독부 전시정책 자문기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과 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아우와는 달리 재물을 모아, 1920년 설립된
해동은행의 초대 은행장에 선출되기도 한 친일파.
그러나 고종 황제 국장 때 ‘분참봉 첩지’를 위조해
판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곧바로 하차하는 수모.
‘분참봉 첩지 위조 사건’은 윤덕영이 주동이 되어
몇몇 다른 귀족과 함께, 고종 황제의 장례식을 주관.
임시직 ‘분참봉’ 임명 첩지를 위조해 판매한 사건이다.
분참봉 첩지가 있으면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던 시절
황후의 백부 지위를 이용한 웃지 못할 사기극이었다.
윤택영은 강제 병합 후 황후의 친정아버지에 대한 예우로
후작 작위와 현금이 아닌 매국 공채 504,000엔을 받았지만
귀족 작위처럼 세습되며 은행이자 만 받을 수 있는 ‘세습 공채’
당장 현금이 필요한 윤택영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래서 그는 빚 갚으라고 독촉하는 빚쟁이들에게, 은사금이
공채로 나와 재산이 300원뿐이라 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11년 빚쟁이들에게 소송을 당했고,
4월 11일에는 집 안에 있던 물건에 경매가 붙여져
그 부인의 옷, 고종이 하사한 꽃병까지 경매되었다.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몰락한
황실 친인척들 뒤치다꺼리 여생을 보냈다.
한국전쟁 때는 정부에서 손을 써주지 않아
피난을 가지 못한 채 인민군에게 둘러싸였지만
“내가 조선의 국모”라며 호통쳤던 일화가 전한다.
시누이인 덕혜 옹주가 기억상실증에 걸려
돌아오는 모습까지 지켜봐야만 했던 황후는,
1966년 낙선재에서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곡을 하지 말라는 유언
슬하에 자녀는 없었지만,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모’.
60만 인파가 지아비가 있는
순조의 유릉 가는 길을 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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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인왕산 치마바위에 새겨진 각자.
오른쪽 대형각자는.,天皇陛下萬歲(천황폐하만세)
가운데는 파악불가, 왼쪽은 昭和(소화 : 일본 연호).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1874~1955)
그가 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각자.
1939년, 가을에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경성에서
‘대일본청년단대회(大日本靑年團大會)’가 개최.
이를 기리기 위해 치마바위에 새긴.,각자(刻字).
매일신보 1939년 9월17일자,
그 전날 인왕산 현지에서 거행된
기념각자 기공식 장면을 전하고 있다.
“이 기념문자는 인왕산 높이 39m,
폭이 40m 되는 큰 치마바위에다가
사방 9자에 새긴 각자.,‘동아청년단결’
동아(東亞) 오족(五族)을 대표한 청년들은
더욱 단결을 굳게 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것.”
1939년 시작하여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
1937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등을 강요하기 위해 만든 맹세문의 내용을 새기고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 마감한.,치마바위의 각자.
첫째 열., ‘동아청년단결(東亞靑年團結)’,
둘째 열.,皇紀 二千五百九十九年 九月 十六日’
셋째 열.,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朝鮮總督 南次郞).
그리고, 이보다 약간 왼쪽으로
사이를 띄어 ‘한 열에 28글자씩,
네 줄 길이’로 대일본청년단대회를
개최한다는 사실과 조선총독부 학무국장
시오바라 토키사부로’ 한자 글귀가 새겨졌다.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인왕산 치마바위.,각자.
1962년 결성된 인왕산악회 요람.,치마바위.
인왕산은 수도 서울을 대표하는 진산 중 하나로,
조선왕조 519년 역사를 태동케 한 역사의 산이다.
태조는 한양 도읍에 내사산을 이어 성곽을 세운다.
인왕산(仁王山 : 338m)
1392년 조선이 건국된 후,
1394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1395년 9월에 경복궁 종묘 사직을 완공.
1396년 20만 백성을 동원해 98일만에 축성.
총 59,500척(18.6km)에 이르는 한성 축성 공사.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는 석성(石城)으로 쌓았다.
2차에 걸친 대공사로 4대문과 4소문을 잇는 성벽 완성.
1422년 세종(재위 1418년 - 1450년) 때에는
32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무너진 곳을 보수.
기존에 있던 토성을 모두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공사는 철저한 구간별 책임제로 실시하였다.
천자문 순서대로 전체를 97구간으로 나누고
각각 담당 군현을 정해 사후 보수까지 맡겼다.
책임제 흔적은 구간명,
담당 군현명을 새겨놓은
당시 성돌에서도 확인된다.
한양도성은 나라의 안정과 왕권을 보여주는 상징물.
한성을 외부와 연결하기 위하여 모두 8개의 문을 설치.
동서남북 4대문, 그 사이 4소문은 도성 백성들의 통행로.
4대문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유교의 덕목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담아 작명.
도성에는 사람이 아닌 하천을 위한 문도 있었다.
오간수문(五間水門)과 이간수문(二間水門)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에 위치한 수문이다.
한성을 동서로 가르는.,청계천.
남산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이
수문 지나 도성 동쪽 밖으로 나갔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개경으로 환도.
1405년 태종 때, 완성된.,한양 천도.
백악산(白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목멱산을 남산,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
백악산 아래에는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궁궐이 들어섰다.
이때문에 인왕산은 본래 서산(西山)이라 불렸다.
서산이 인왕산이라 불리기 시작한 시기는 세종 때.
인왕산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화강암 바위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장안 5대 명승지 중 하나.
일제강점기에는 인왕의 표기를 인왕산(仁旺).
1993년 민간인의 출입구역이었던 인왕산을 개방.
1995년에 이르러 본래 지명 인왕산(仁王)으로 환원.
1933년 인왕산 개방은 김영삼 대통령 취임일에 시행.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 부대 청와대 습격사건 후,
25년 만에 인왕산과 청와대 앞길을 국민들에게 선물한 것.
그 전까지 서울 시내 대형호텔의 청와대 방향 창문은
열지도 못하고 북악스카이웨이 출입조차 통제되던 시절.
그후,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때 청와대 곁에 조선시대 칠궁과
북악산 개방으로 이어져 청와대 문턱을 낮추는 물꼬가 되었다.
칠궁(七宮)은 역대 왕들의 생모(生母)이면서도
왕비에 오르지 못한 7 후궁의 신위를 모신 사당.
처음에 영조 생모 '숙빈최씨' 사당 육상궁(毓祥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