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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일손(金馹孫) |
호 |
탁영(濯纓) |
파명 |
삼현파 7세손 |
자 |
계운(季雲) |
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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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조선 |
정보 |
조선시대의 학자 ·문신 |
자료1
본관 김해. 자 계운(季雲), 호 탁영(濯纓), 시호 문민(文愍).
1486년(성종 17)에 생원(生員)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직필하고,
그 뒤 헌납(獻納) 때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화(禍)를 입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戊午史禍)라 한다.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한 신진 사림(士林)은 집권층인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거세되었다. 중종반정(1506) 후 신원(伸寃)되고,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해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환로(宦路)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의 박사·부수찬·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홍문관의 부교리·교리 및 사간원헌납·이조정랑 등을 지냈는데, 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중종 때 홍문관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 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한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지향하는 다른 한 계열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대응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는데, 소릉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그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실세(失勢)를 가져다 준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자료2
청도를 빛낸 역사적인 사람들
김일손(金馹孫)탁영선생의 고절
선생의 휘는 일손(馹孫)이오 자는 계운(溪雲)이며 호는 탁영(濯纓)이고
본관은 김해로 절효 김 극일(節孝 金 克一) 선생의 손자이고 남계 김맹 (南溪 金孟)선생의 아들이다.
1464년. (이조 세조 10년)에 청도 운재리(지금의 서원동 )에서 태어났다
출생당시 앞내에서 서기가 무지개 같이 뻗쳐 선생이 나신 후에도 서기가 오랫동안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이 우주간기 (字宙間氣)로 태어난 선생은 천성이 총명하여 점필재 김 종직 (金 宗直) 선생의 문인으로
교우로는 동문인 한훤당 김 굉필(寒暄堂 金 宏弼)선생, 일두 정 여창 (一두 鄭 汝昌)선생과 친교가 있었다.
선생은 1486련 (이조 성종 17년 ) 8월에 식년문과 갑과로 각각 장인급제 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알성대과(謁聖大科)에또한 장원급제 하였다.
시관이었던 사가정 서 거정 (四佳亭 徐 居正)선생의 추천으로 홍문관, 예문관 등의 청환직을 거쳐
1488년 (이조 성종 19년)왕의 특혜로 호당 (湖堂)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호당은 대과급제한 젊은 문신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왕의 특명으로 뽑아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여 조정에 기용해서 장차 국사를 맡기기 위한 요원 양성기 관으로 이씨조선조 최고의 학당이다.
그후 이조정랑 (吏曹正郎)이 이었으며 1490년 (이조 성총 21년)에 질정관 (質正官)으로 명 나라에 다녀오니 외교 사신으로 다녀왔고 다음해 28세 때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니 외교사신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 (下賜)한 많은 서예품(書藝品)과 특히 소학집설(小學集說)등도
선생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져와 보급된 것으로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한바 있다.
또한 명나라에 머물때 명나라 명현(名賢), 정유(程愈)와 주전 (周銓) 등과 교결하였으며
후세에 우암 송 시열(尤庵 宋 時烈)선생 같은 분은 선생의 문집서문에 말하기를 선생의 문장은 양양대해 같고
중국의 문호 한 창여 (文豪 韓昌黎)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이 와 같이 선생은 약관 20여세때 이미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있었다.
선생은 성종때 춘추관(春秋관)좌 사관(史官)으로 있을때 전라도 관찰사 이 극돈(觀察使 李 克墩)의 비행을 사초에 직필하고 그뒤 이 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고하여 이 극돈의 친근을 샀고 실로 권신들의 부정 부폐를 직필하였다.그리고 스승 점 필재 김 종직(점 畢齊 金 宗直)선생이 쓴 조의 제문(弔義 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이 극돈은 자기의 비행이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선생에게 빼주기를 비밀히 간청하였으나 선생은 네 목숨이 다해도 뺄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이에 앞서 유 자광(柳 子光)이 함양 학사루(咸陽 學士루)에 놀러가서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걸어 두었는데
그후 점 필재 김 종직 선생 이 함양군수 (咸陽郡守)가 되어 이것을 보고 소인배 (小人輩)의 글이라 하여 떼어 불살아 버렸다.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훈구파의 이 극돈이 사국당상관(史局堂上官 )이 되어 사초를 정리하다 선생이 쓴 사초속에 세조의 찬위(築位)를 풍자(諷刺)한 김 종직 선생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자신의 비행은 물론 궁중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비롯 훈구파의 비행들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보았다. 원래 사초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왕도 볼 수 없는 것인데 이 극돈이 사원(私怨 )을 풀기 위한 것과 훈구파 권신들의 비행이 후세 영원히 남게 되자 이 극돈이 같은 훈구파의 유 자광 및 당시의 중신들인 윤 필상(尹 弼商), 노 사신(盧 思愼), 한 치형(韓 致형), 신 수근(愼 守勤) 등에 공개하여 평소 학문과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충동시켜 더디어 1498년 (이조 연산군 4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士禍)인 비참한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이로서 일어났다.
무오사화(戊午史禍 : 士禍인데 史草에 의해 비롯되었다 하여 史禍라 쓴다)에 점 필재 김 종직 선생은 부관참시(剖棺斬屍)케 하고 선생은 향년 35로 능지처참(陵지處斬)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이 처형을 당하던날 갑자기 친지가 어두어지며 폭풍우가 일어나서 나무가 넘어지고 향리인 운계천 물은 3일이나 벌겋게 흘러내려 세인들은 선생의 충절과 기개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다. 그 당시 권 오복 (權 五福), 권 경유(權 景裕), 이 목(率 穆), 허 반(許 盤) 등 여러 선생들은 처형되었으며 김 굉필(金 宏弼), 정 여창(鄭 汝昌), 박 한주(朴 漢柱), 이 주(李 胄)등 선생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류가 유배되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한 신진사림 (新進士林)인 영남학파(嶺南學派)는 집권층인 훈구파에 의해 거세되었다.선생은 또한 1494년(성종 25년)에 단종의 후사(後嗣)와 소능(昭陵 : 성종 왕후)의 복위 등 전후 3회나 상소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1496년 (연산군 2년)에 선생이 충청 도사 (都事)로 있을 때 왕의 난정과 간신들의 부정부패 등을 간하는 상소를 여러번 올렸다. 선생은 이와 같이 문장과 충절의 선비이며 정서와 풍류도 즐겼으며 거문고는 신금 (神琴)으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연산군의 반정때 하야한 후 일 두정 여창 선생과 더불어 탐승유람(探勝遊覽)과 악양 (岳陽)의 뱃노리 등으로 서정과 낭만을 찾기도 하였다.
1506년 (연산군 12년 : 중종 원년)에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후 신원(伸寃 )되어 복작하고 도승지(都承旨)와 이조판서 (吏曹判書)를 추증 받고 1830년 (이조 순조 30년)에 문민(文愍)의 시호를 내렸으며 선생의 출생지인 청도 서원동에 자제서원(紫溪書院)의 사액을 내리고 도승지 홍 처량(都承旨 洪處亮)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선생은 목천 (木川)의 도통서원(道東書院), 남원(南原)의 사동서원 (社洞書院),
함양(咸陽)의 청계서원 (淸溪書院)등 에도 봉안하고 있다. 선생의 유물은 사화 때 없어지고 생시 애용하던 벼루와 유묵 몇장, 교지 등이 종가에 가보로 보존되어 있다.
※ 무오사화(戊午史禍)의 원인과 민심
훈구파와 영남학파(사림파)의 분규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근인은 이 극돈 과 유 자광의 사원 (私怨 )이 크다할 것이다. 이 극돈은 탁영 김 일손 선생이 평소 말을 끝까지 하기를 좋아하고 권세 있고 귀한 사람을 피하지 않은 곧은 성품을 못 마땅하게 여기왔다. 또 선생은 헌납 (獻納)의 자리에 있을 때 소를 올려 이 극돈과 성 준이 서로 모해해서 당쟁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이 극돈이 크게 노했었다. 뒤에 사국(史局 )을 열게 되자 이 극돈이 당상관이 되었는데 이에 선생의 사초가 자기의 악한 것을 몹시 심하고 자세히 쓴 것과 또 세조조(世祖朝)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 극돈은 이것을 가지고 자기 원한을 갚아 볼 마음을 먹었다.
유 자광은 그가 일찌기 함양군에서 놀 때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에 새겨 현안을 만들어 여러벽에 걸도록 한 일이 있었다. 뒤에 점 필재,김 종직 (金 宗直)선생이 그 고을 군수로 왔다가 이 것을 보고 『어떤놈이 자광의 현판을 감히 여기에 걸게 했느냐』하고 걷어다가 불태우게 했다.
이 말을 듣고 자광은 몹시 성을 내면서 한스럽게 여적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때는 김 종직 선생이 임금에게서 받은 은총이 융성했기 때문에 원한을 감추고 오히려 그와 사귀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연산군은 시기하고 포악해서 글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더욱 문사를 미워 했었다.
이에 말하기를 『명예를 요구하고 웃사람을 업신여기며 나로 하여금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이 무리들이다』 하고 항상 답답해 하고 즐거워하지 않아서 한번 쾌하게 마음을 풀어 보려고 했지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중에 자 광 등이 아뢰었다는 말을 듣고 자광에게 상 주고 옥사(獄事)가 시작된 것이다.
이날은 낮에도 어둡고 비가 물붓듯이 쏟아지면서 곧 바람이 동남 쪽으로 부터 일어나서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나니 성안 사람들은 모두 쓰러지고 다리를 떨지 않은 이가 일었다. 그러나 자광은 의기가 양양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 부터 그의 위엄이 안팎에 진동하여 그를 마치 독사처럼 보고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또 유림들은 기운을 잃고 겁을 내어 글방이 쓸쓸하여 두어 달 동안 글 읽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때 부형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학문은 과거에 급제할 만하면 그만둘 것이지 많이해서 무엇에 쓰겠느냐" 했다.
이에 자광은 바야흐로 자기 마음데로 되었다 하여 다시 뒤를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었다.
또 그에게는 이를 즐기는 염치 없는 무리들이 모여들어 문에 가득하니 식자들은 이를 깊이 탄식해서 말하기를
"무술의 옥사는 정당한 사람이 간사한 무리를 공격했었는데 이제 무오의 옥사는 간사한 무리가 정당한 사람을 공격했으니 20년 사이에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패해서 치란이 서로 따랐도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쓰는 것은 항상 관대하고 늦추는 것이 실수이고 소인의 원수를 갚는것은 반드시 잔인하게 없애고 그만두는 법이다.
만일 무술년에 군자들이 그 형벌을 다 써서 소인들을 없앴드라며는 어찌 오늘날과 같은 화가 있었겠느냐 " 했다.
남곤(南袞)의 유 자광(柳 子光 )전에서 선생은 고결한 학자였다고 안정 신 영희 (安亭 辛 永禧 ) 선생의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서 말 하기를 교리 김 일손(校理 金 馹孫)의 자는 계운 (溪雲)이다. 그는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소장(疏章)과 차자(箚子)는 글이 커고 넓어 큰 바다와 같았고 그가 나와 일을 의논하는 것과 사람의 시비를 말하는 것은 마치 청천백일과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폐왕 연산은 어찌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여 시장에 버리는 형벌(刑罰)을 배풀었던가 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도주지, 도주문화, 해동야인)
자료3
직필사관 김일손(金馹孫)
[해동야사(海東野史)]에 '김계운(金季雲)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이다.
그러나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해 화를 당하여 죽고 말았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신영희(辛永禧)의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교리 김일손(金馹孫)의 자는 계운(季雲)이다. 그는 참으로 보기드문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상소문은 크고 넓어 큰 바다와 같았고, 일을 의논해보면 사람의 시비를 말하는것이 마치 청천백일과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폐왕 연산은 어찌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였는가' 라고 개탄하고 있다.
김일손은 1464년(세조 10년) 판도판서 김관(金管:김해김씨 삼현파 중조)의 6세손인 김맹(金孟)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며칠전 운계리 맑은 냇물에 붉은 서기가 무지개처럼 뻗치어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 한다.
맹이 하늘에서 내려온 준마 한 마리가 품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었다하여
아들을 준손(駿孫),기손(驥孫), 일손(馹孫)으로 이름지었다 한다.
그는 5세때 벌써 천자문에 능통하였고, 당대의 석학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되어 20세에 생원에 장원급제하고
23세에 문과에 제2인으로 등제하여 벼슬이 이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뛰어난 문장과 판단력을 겸비하여 사관(史官)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초기의 거유 길재(吉再)의 학맥을 이은 김종직에 사사하여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등
당대의 신진사류들과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성종의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관학파로 알려진 훈구대신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이극돈(李克墩), 그리고 유자광(柳子光)등이 이들 사림파를 몹시 두려워하고 시기하였다.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이 편찬될때 이극돈이 역사편찬의 당상관이 되었는데, 김일손이 쓴 사초(史草)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과 훈구파의 비행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보고 이를 연산군에게 고하여 영남학파의 신진 선비들을 대거 숙청한 이른바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이 사화로 이미 고인이된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당했고, 공은 처형되었는데
당시 신진사류 70여명이 처형되고 혹은 귀양가는등 역사상 유례없는 대 참사였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였다. 그의 묘를 이장할때 영상 지정(止亭)은 다음과 같이 만시를 지어 슬퍼했다.
오직 딱한것은 이 세상에 큰 그릇으로 이름 빛내는자의 나타남이 언제나 더디고 더딘것,
오래 수백년 지나는 사이에야 비로소 한번 만나볼수 있네,
그러나 나타났것만 그 뜻 이루지 못했으니 잘 다스려질 세상 어찌 기약하리.'
그는 만시의 말미에 이르기를, '붓 잡고 들은바를 쓰는것은 사가(史家)의 떳떳함일세 들은말이 옳고 그른것이 있으면 이는 곧 한사람의 사사로움일세, 역사를 편찬하는것은 사국(史局)에 있으니 잘못한것이 있으면 삭제만 하면 될것이 아닌가' 라고 개탄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 이 있다.
출처 garakkim.net
자료4
馹孫 字 季雲 號 濯纓 伯 兄第二子 爲 後 字 季雲 號 濯纓 子 成化十七年丙午秋中 生員第一進士第二其年冬捷中與策第二科歷翰苑三司賜暇湖堂校讐綱目官吏曹正郞又拜 忠淸道護莩事嘗掌史事取고華齊弔義帝文載國史 戊午禍實(빌미)수於此身棄東市卽七月所居前川血流三日 配 貞夫人 丹陽禹氏 父 護軍克寬祖 監察元 玉會祖安靖公 玄寶 玄孫 天順六年 壬午生 丁未四月十七日卒 墓 羅福山 節孝公兆 下壬坐 成化六年 庚寅 十二月二十五日生 |
http://kr.blog.yahoo.com/enaksehd8
자료5
김일손(청도 자계서원)
훈구파와 사림파의 첫 충돌:1498년 무오사화
신병주(중세2분과)
1498년 7월 사림파의 핵심인물이자 사관으로 활동한 김일손(1464~1498)이 의금부 낭청에 의해
체포된 후 국왕인 연산군 앞에 섰다. 연산군이 분노한 모습으로 캐물은 것은 세조의 행적을 비판적으로 사초에 실은 경위였다.
문제가 된 사초는 김일손의 스승이자 사림파의 영수였던 김종직(1431~1492)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초나라 항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한 의제를 조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수양대군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감을 표시한 내용이었다.
1. 갈등의 쟁점, 사초 사건
사림파의 기본적인 인식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부정이었다. 의리와 충절이라는 성리학의
명분으로 무장한 사림파에게 있어서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성종 때 점차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힘을 얻어가는 사림파였지만
공개 석상에서 선왕인 세조를 비판할 만큼의 힘은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간접적인 비판의 방식을 취하였다.
영원히 역사로 기록될 사초에 세조의 행적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로 작정하였고 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때가 좋지 않았다. 언관직에 주로 진출한 사림파의 왕권 견제에 싫증을 내고
있는 연산군 시대가 아니었던가? 여기에 더하여 자신들을 타도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림파에게
이를 갈고 있던 훈구파로서는 사림파 공격의 빌미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던 시기였다.
조선의 역사에서 15세기 후반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으로 요약된다.
성종대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사림파는 기존에 정치적, 사회적 특권에
대해 견제를 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들은 언관이나 사관과 같이 조정의 훈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직책에 포진되어 훈구파의
기득권 비리에 서서히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사림파 중에서도 김종직을 보스로 하는 영남사림파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고, 연산군대에 오면 김일손이 영남사림파의 중심인물로 김종직의 바통을 이어받게 된다.
성종대 사관으로 활약한 김일손은 역사 기록을 통해 세조와 훈구파의 잘못된 정치 형태를 고발하려 했다.
그의 이러한 역사의식은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에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의 비행을 적나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싣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비밀리에 부쳐져야 하는 것이 원칙인 사초가 훈구파들에 의해 입수되어 연산군에게까지
보고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1498년의 무오사화로 비화되었다.
무오사화는 50년 가까이 지루하게 전개되는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인 ‘사화’의 서막을 연 사건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2. 유자광과 이극돈 VS 김종직과 김일손
무오사화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사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림파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의 갈등에서 비롯된 정쟁이다.
그리고 이후 4번에 걸친 사화의 신호탄이 된 사건이 되기도 했다.
무오사화의 시작은 성종 사망 후 실록청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사망하면 바로 실록청을 구성하고 전왕이 생존해 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대로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을 사초로 기록해 두었다.
그런데 이 사초를 토대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당시 실록청 당상관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이극돈은 광주 이씨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을 누려온 전형적인 훈구파였다.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중에는 이극돈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정희왕후의 상을 당했을 때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 때 불교중흥책을 편 세조의 눈에 띄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것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었다.
김일손의 위험한(?) 사초를 입수한 이극돈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일손을 찾아가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김일손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이 때 유자광이 다시 한 번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경주부윤을 지낸 유규의 서자로 이시애의 난 정벌에 기여한 공으로 세조에 의해 발탁되었고
예종 대에는 남이의 역모를 고변한 공으로 무령군에까지 봉해지면서 승승장구했던 유자광. 이번에도 그의 활약은 시작된다.
이극돈은 ‘검증된 정치공작꾼’ 유자광을 찾았다. 유자광은 궁중에 자신과 연계하고 있던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김일손 등이 사초에 궁금비사(宮禁秘史)를 써서 조정을 비난했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연산군을 자극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연산군은 사초를
마침내 왕에게 올리게 하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다.
연산군 또한 이를 기회로 평소 언관과 사관직에 주로 포진하여 자신의 독재적인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사림파를 제거할 구실을 찾으려 하였던 것이다.
당시 김일손은 모친상으로 청도에 내려가 있었지만 바로 서울로 압송되었다.
인조무인사초(仁祖戊寅史草)
인조대 사관이 작성하여 집안에 보관했던 가장사초(家藏史草)의 원본이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37책으로 구성되었으며,
1636년 6월 13일부터 9월 17일까지의 사초를 날짜별로 1책씩 묶어 놓았다.
3. 끝나지 않는 세조의 망령
김일손의 사초에는 세조가 신임한 승려 학조(學祖)가 술법으로 궁액(宮掖)을 움직이고,
세조의 총신이자 훈구파인 권람(權擥)이 노산군의 후궁인 숙의 권씨의 노비와 전답을 취한 일 등 세조대의
불교 중흥책과 훈구파의
전횡을 비판한 글과,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死節)로 기록하고 이개, 박팽년 등 절의파의 행적을
긍정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세조의 왕의 찬탈을 부정적으로 보고 그 정책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사림파의 입장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진나라말 숙부 항우 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이 글은 바로 선왕인 세조의 단종 시해를
중국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글이었다.
훈구파들은 김일손의 불손한 언행이 스승 김종직의 영향 때문이라 주장하였고
사망한 김종직 마저 사화를 피해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죽은 김종직은 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고 다시 처형하는
최악의 형벌인 부관참시(副棺斬屍)를 당하였다.
유자광이 사화의 주모자가 된 데는 김종직과의 악연도 큰 작용을 했다.
김종직은 함양군수 시절 관내에 유자광이 쓴 시가 적힌 현판을 발견하고, 대번에 불태워 버리도록 지시를 했다.
유자광과 같은 소인배의 글이 자신이 관할하는 곳에 있는 것이 치욕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즉시 사초 사건에 연루된 김일손을 비롯하여 권오복, 권경유 등을 능지처참하고,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거 유배시켰다.
이것이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서 김종직으로 구성된 영남사림파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후 유자광은 김종직의 문집과 친필 현판들을 찾아 남김없이 없애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20년 전에 당했던 모욕을 철저한 복수로 앙갚음한 셈이었다.
무오사화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대한 사림파의 부정적인 인식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그들만의 ‘과거사 바로잡기’가 훈구파의 저항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확보한 훈구파들의 입장에서는
세조의 왕통을 부정하는 사림파들의 입장은 이제까지 승승장구한 그들의 존재 기반을 박탈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이에 훈구파들은 이극돈, 유자광 등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사림파들의 약점을 파헤쳤고,
혼주(昏主) 연산군 또한 자신의 전횡에 제동을 거는 사림파들의 제거에 적극 협력했던 것이다.
4. 김일손과 직필(直筆) 정신
1498년 김일손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
‘자계(紫溪: 붉은 시냇물)’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를 배향한 사당도 자계사(紫溪祠)가 되었다.
자계사(紫溪祠)는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구현된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661년(현종 2) ‘자계(紫溪)’라는 편액을 하사받았다.
자계서원
청조 지역 사림들이 김일손이 모신 사당을 세우고 자계사로 하였는데,
선조대에 자계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김일손의 조카인 김대유는 40세 때 청도의 사림들과 함께 자계사를 건립하였으며, 유일(遺逸)로
천거를 받아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거듭 사직하고 숙부의 뜻을 받들며 처사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김대유는 41세 때는 김일손의 유고(遺稿)를 모아 자계사에서 판각(板刻)을 했으며,
70세 되던 해에는 숙부인 김일손의 연보를 편집하였다.
그만큼 숙부를 존경하고 그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김대유는 경상우도 사림의 종장의 되는 남명 조식이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김일손의 사림파 정신은 김대유를 거쳐 조식으로
이어지면서 영남사림파의 학맥에 큰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조식은 김일손에 대해 ‘살아서는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凌霜之節)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사림파의 젊은 기수로서 훈구파의 전횡에 맞섰던 김일손은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은 사림파의 성장이라는 도도한 역사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훈구파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상,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가 새로운 조선을 이끌어 가는
주역으로 부상하기까지에는 많은 희생이 따랐다.
무오사화를 포함한 네 번의 사화는 힘든 역사의 여정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사관의 직필(直筆)을 실천하면서 현실의 벽을 넘어서고자 했던
김일손과 같은 인물의 죽음을 넘어 16세기 조선의 역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필진 : 신병주 | 등록일 : 2007-02-21
자료6
濯纓先生墓碣銘
탁영선생묘갈명 병서(휘일손, 1802년 임술보 載錄)
解釋; 2005. 6. 7. 金順大
燕山世戊午士禍 至今談者 必哽涕而濯纓金先生 爲之首 先生天固生之也 旣生而又殺之 天曷故焉 噫 先生文章節義 迫隘宇宙 東褊之所不能容則先生 可无及乎
연산조의 무오사화를 지금 말하면 반드시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른다. 탁영 김선생이 <무오사화의> 시초이다. 선생은 하늘이 내신 사람이나 내면서 문득 죽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선생의 문장과 절개있는 도리는 우주라도 좁으니, 동쪽의 좁은 곳(조선)이 선생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깝다.
盖先生 爲史官 嘗取其師佔畢金公 吊義帝文 載國史 又於史 直書李克墩醜行 克墩掌史事 見而啣之 遂引諸不逞 亟持義帝文而曰是不敢作 是不敢書 俱大逆 遂按佔畢公 禍其瘞 先生亦身棄東市 爲世大戒 豈不悲哉 然先生之死 固已動神明而激耳目矣
선생이 사관이 되어 일찍이 그 스승 점필재 김공의 조의제문을 취하여 국사에 실었고, 또 역사기록에 이극돈의 추행을 있는 그대로 썼더니, 극돈이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장악하여 이를 보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의제문을 공박하되 이것은 감히 만들어서 안되고 감히 써서도 안될 것이니 모두 대역이라 하였다. 드디어 그 죄를 물어 점필공의 묘에 화를 미치고(부관참시하고) 선생도 주검을 길거리에 버려서 세상에 알렸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그러나 선생의 죽음은 진실로 천지의 신령도 음직일 만큼 눈과 귀를 떨게 했다.
及 中廟改玉 首洗寃枉 褒寵赫然 顯廟朝儒臣 又白其事實 特擧貤典 士大夫誦慕 日星河漢 不可梯及而彼鼓掌相慶 自快私意者已皆爲螟䘌爲孤 蠱鬼誅於无窮 鳴呼 非天意 詎至此乎
또 중종으로 왕이 바뀌어 결백함이 알려지고 원통함이 벗겨져 포상과 은혜가 융숭했고, 현종조에 유림의 신하들이 또 그 사실을 진정해서 특별히 <죄상을 적은> 책을 찢어버렸다. 사대부들이 의논하여 사모하기를 해와 별과 은하수(河漢)와 같이 하였으나 <이제는> 따를 수 없게 되었다. 또 손뼉을 두드리고 서로 좋아하며 개인적인 생각으로 기뻐하던 사람들은 이미 모두 벌레(螟䘌)가 되었거나 홀로 악귀가 되어 영원히 죽게 되었으니 오호라! 하늘의 뜻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되겠는가.
先生金海人 諱馹孫 字季雲 爲文章 下筆千百言 奔放雄博 讀者皆呿舌 華人目之曰此 韓子也 少從佔畢公學 又與金文敬 鄭文獻 友善 常伉厲奮發 有遠大之慕
선생은 김해사람으로 휘는 일손(馹孫)이고 자는 계운이다. 문장가가 되어서 글을 쓰면 천백마디의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웅장하고 박식하여, 읽는 사람들이 모두 입을 벌려 혀를 내두르고 중국 사람들도 <이를> 가리켜 한자[1]에 비하더라. 어릴 때 점필공(김종직)을 따라서 배우고 또 김문경[2] 정문헌[3] 공으로 벗삼아 서로 겨루어 분발해서 원대한 포부를 길렀다.
[1]韓子; 한유(韓愈,768∼824)를 말하며 자는 퇴지(退之)로서 당나라 중기의 시인이며 정치가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사람이다.
[2]김굉필 (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자는 대유(大猷)이다. 그리고 호는 사옹(蓑翁) ·한훤당(寒喧堂)으로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 등이 있다.
[3]정여창(鄭汝昌, 1450~1504).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저서로는 《일두유집》이 있다.
成化丙午 魁生員 幷中進士第二 冬又闡大科 自翰苑 歷華踐 卒官吏曺正郞 間爲養補{輔}晋州學 以質正官 赴京師 己又 賜暇湖堂 選隸綱目校讎廳 聲譽出等夷 諸名公 皆折節相下 奸黨 己多側目者 及禍作 一時士流 坐先生鉤黨 死徙殆盡 先生死時 年三十五 所著詩文 經禍散佚 只若干卷 行于世
성화 병오년(1486년)에 생원에서 빼어나게 진사시에 2등을 하고, 겨울에 또 대과에 급제하여, 한원(翰苑; 한림원과 예문관)에서 시작하여 화려한 벼슬을 거쳐, 벼슬이 이조정랑으로 마쳤다. 그 사이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진주에서 가르치고, 묻거나 따져서 바로잡는(質正) 관리로서, 경사(京師;서울)에 올라가면 또 호당(湖堂;독서당)에 있으면서 강목[1]을 선택하여 교정하고 바로잡으니, 명성이 뛰어나 같은 동년배(等夷)와 여러 명공(名公)들이 다 절개나 의지를 굽혀(折節) 서로 낮추었으나, 간당 중에 곁눈질하는(시기하는) 자가 많더니, 화가 일어나 한때 선비들이 선생과 같은 무리로 연좌되어, 죽거나 위태로워졌다. 선생은 돌아가신 때가 35세였다. 지은 시문이 환란을 겪으면서 잃어버리고 단지 약간의 책만이 세상에 남아있다.
[1]綱目; 사물의 대략적인 줄거리와 자세한 조목
曾祖諱湑 縣監 祖節孝先生 諱克一 不仕 喪親廬墓 誠感猛獸 事載郡誌中 是生執義孟 執義公 生三子 伯駿孫 仲驥孫 並登一榜 仲先夭 伯官直提學 先生其季也
증조 휘서(湑)는 현감이요 조부 절효선생은 휘극일(克一)이니 벼슬을 하지 않고, 모친[1]의 상을 당하여 묘소를 지킬 때 정성을 맹호도 감동했다는 사실이 군지에 실려 있다. 이 분이 집의 맹(孟)을 낳고 집의공이 아들 셋을 두었으니, 맏이 준손(駿孫)과 다음 기손(驥孫)이 함께 과거에 급제했으나 기손은 일찍 죽었다. 맏이(준손)는 벼슬이 직제학이고 선생은 그 막내이다.
[1] 조모, 조부, 두 서모임, 호랑이가 감복했다는 말은 조부의 시묘 때라고 함
娶禮安金氏尾孫女 无嗣 直學公 有子大有 號三足堂 經術才行 大爲靜菴諸賢所獎 擧賢良科 拜正言 至北門變起 廢斥歿世 鳴呼 小人之不懲前禍又何甚也 學者卽先生所居淸道郡 爲建祠 幷與節孝三足二公而享享祀之 三世俎豆于光 有耀 先生之道豈无所來而亦豈无所傳哉 雖先生與三足公 其世俱不幸而報施之必於後者非在斯歟
예안김씨 미손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나 자손이 없었다. 직제학공(준손)은 아들 대유를 낳았으니 <대유의> 호는 삼족당이다. 경술(사서삼경)과 재능 및 행실이 뛰어나, 정암[1]같은 현인들의 권장을 받아 현량과에 올라 정언을 지냈으나, 북문의 변고(사화)가 일어나 폐하고 내쫓겨져 세상을 마쳤다. 슬프다! 소인들이 근거 없이 화를 불렀고 또 어찌 이같이 심한가. 학자들이 선생이 사시던 청도군에 사당을 세워 절효, 삼족, 두 공과 함께 제사지내고 향사하니 3세 제사가 더없이 빛난다. 선생의 도가 어찌 찾아오지 않겠으며 어찌 전함이 없으랴. 비록 선생과 삼족공의 세대가 함께 불행했으나 그 보답이 반드시 후손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천(賤)함이 없을 것이다.
[1]조광조(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先生葬 在本郡上北先墓側 歲久無顯刻 過者皆齎咨太息 今上乙巳 尹君鳳九宰是邑 慨然曰是 余之責也 遂與邑士 謀將伐石樹徑 觀察使兪公拓基亦樂聞而相其役 後人之爲先生寄慕者至此而益无憾矣
선생의 묘소가 본군(청도)위의 북쪽 선영 옆에 있으나, 세월이 흘러 표석이 없어서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탄식하며 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임금의(今上) 을사년(1725) 윤봉구[1]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나의 책임이라 하고, 드디어 읍의 선비들과 같이 계획을 세워, 돌과 나무를 준비하니, 마침 관찰사 유척기가 또한 기쁜 일을 듣고 서로 협조하니, 후세 사람들이 선생을 사모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니 더해지니 남은 한이 없다.
[1]윤봉구(尹鳳九, 1681~176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호조참판 비경(飛卿)의 손자로, 명운(明運)의 아들이다. 저서로 《병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2]유척기(兪拓基, 1691~1767).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전보(展甫)이고,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기계(杞溪)로 서울 출신이며, 유명악(兪命岳)의 아들이다. 저서에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있다.
余竊念先生 秉直觸邪 不攝不撓 雖其心百死靡悔而只是畢齋之文意義 有不可知者 先生 又必載之史乘何也 此不免後來之起疑也 抑其間 自有權度 非淺識所可論歟 惜不及先生之世而講質也
내가 곰곰히 생각건대 선생의 곧은 붓은 기가 꺾이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비록 그 마음이 백번 죽더라도 쓰러지거나 후회하지 않았으며, 다만 이 점필재공의 글이 의의(意義)는 있으나 <자세히> 알 수가 없어 선생이 또 어찌 반드시 사책(史乘)에 실어야 했는가? 이러한 알수 없는 일이 후세에 의혹을 자아낸다. <물론> 그 사이에 따라야할 규칙이나 법도(權度)가 있다는 것을 <나의> 얕은 지식으로 논할 바 못되거니와 선생이 계실 때 물어보지 못한 것이 애석한 일이다.
尤庵宋文正 嘗論此曰豈定哀微辭 非聖人達權則不可法而秉史筆者 惟直是職歟 噫 此可謂知先生微意而爲 後世之堯夫也歟 鳴呼 此不可與不知者道也 銘曰
우암 송문정공[1]이 일찍이 이를 의논하여 말하기를 “어찌 정해진 슬픔과 자질구레한 말들을 성인(聖人)의 일 처리하는 솜씨(達權)가 아니면 법대로 따를 수 있겠느냐. 역사의 일을 기록하는 자는 오직 곧게 쓰는 것이 직책이다.” 하니 아! 이것은 선생의 숨은 뜻을 알아낸 후세의 명언인가? 오호라! 이는 무식한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새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송시열(宋時烈, 1607~1689), 자는 : 英甫(영보)이며 호는 尤庵(우암)이고 본관은 은진이다. 아버지 송갑조로서 벼슬은 진선, 장령, 찬선, 이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를 지냈다.
桑榟翳然 是惟先生之宅里 丈五 先生是埋 數架 先生是祠 巀嶭乎道之山 湯湯乎道之水 將先生與俱永存兮 其死也異乎人之死
뽕나무와 가래나무가 <무성하고> 햇볕이 가려진 <이곳은> 선생의 고향일세. 5장 길이의 저 높은 봉분은 성생의 무덤이요, 두어칸 집은 선생의 사당일세. 높고 가파른 청도의 산과 흐르는 청도의 물이 선생과 길이 함께하리니,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죽음과는 다른 것이 있다네.
崇禎紀元戊辰後再丁巳六月 日
숭정기원 무진후 재정사(1737년) 6월 일
嘉善大夫禮曺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藝文館提學尹鳳朝撰
가선대부예조참판겸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예문관제학윤봉조[1]찬
[1]윤봉조(尹鳳朝, 1680~176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鳴叔), 호는 포암(圃巖). 직장 명원(明遠)의 아들이다. 저서로는 《포암집》이 있다.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鎭商書
통정대부홍문관부제학지제교겸 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김진상[1]서
[1]김진상(金鎭商,1684~175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字는 여익(汝翼) 또는 태백(太白), 호는 퇴어자(退漁子), 아버지는 증판서 만채(萬埰)이며, 문원공(文元公) 장생(長生)의 현손, 어머니는 증정부인 전의이씨로 집의 항(抗)의 딸이다. 저서로는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가 있다.
資憲大夫行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都巡察使大邱都護府使兪拓基篆
자헌대부행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도순찰사대구도호부사유척기[1]전
[1]유척기(兪拓基, 1691~1767).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전보(展甫)이고,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본관은 기계(杞溪)로 서울 출신이며, 유명악(兪命岳)의 아들이다. 저서에 『지수재집(知守齋集)』이 있다.
□濯纓先生 記實(탁영선생 실기)
原文 : 1876년 丙子譜 實記, 解釋 : 2005. 7. 28. 金順大
先生以 皇明天順甲申降焉卽 我世祖十年也 年十七聞 佔畢金先生宗直 丁憂在密陽乃往 從之得聞爲學之方 成化癸卯丁外憂 丙午中 生員進士 其年十月 登第 丁未爲晋州學時 仲氏驥孫乞養昌寧 先生每自晋往來省母 戊申秋先生以 病辭 晉學還淸道 己酉冬以非罪幽金寧 未幾蒙恩赦尋 被召以遼東質正官 赴京師
선생은 명나라 천순 갑신(1464)년에 나셨으니 즉 우리 세조임금 10년이다. 나이 17세에(1480년) 점필 김선생종직께서 모친상[1]을 당하여 밀양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밀양으로 가서 그 에게서 수업하였다. 성화 계묘(1483)년 부친(맹)이 별세하시고, 병오(1486)년 생원과 진사가 되고, 그해 10월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미(1487)년 진주의 교수가 되고, 이때 둘째형 기손이 모친을 모시기 위해 창녕현감이 되어 왔다. 선생은 매일 진주로부터 왕래하며 모친을 돌보았고, 무신(1488)년 가을에 병으로 진주 교수직을 사임하고 창도로 돌아왔다. 기유(1489)년 겨울에 무고하게 탄핵을 당했으나 얼마 후 은혜를 입고 풀려나와 요동의 질정관으로 부름을 받고 명나라의 서울(북경)로 갔다.
[1]김종직(1431~1492) 선생의 부친은 김숙자로서 1389~1456, 모친은 밀양박씨로서 1400~1479.12.21
是時在 烏蠻館脫所穿衣換得周旺所藏古書十四帖 辛亥元正又朝京(是時見周銓程愈又得小學書) 是年夏以龍驤司正 校讎綱目 壬子秋 遭仲氏喪有祭文 是秋又 佔畢齋訃以兄喪 不得往哭有鴒原方急鱣堂莫及之文
이 때 오밀관(이전의 옥하관)에 있으면서 구멍 뚫린 옷을 벗어 주왕이 가지고 있던 고서 14권과 바꾸었다. 신해(1491)년 설에 또 북경에 있었다. (이때 주전과 정유를 만나고 소학집설을 구하였다) 이해 여름 용양위사정에 있으면서 강목을 교정하였고, 임자(1492)년 가을 작은형(기손)이 돌아가시자 제문을 지었다. 이해 가을에 또한 점필제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있었으나 형님의 초상으로 가지 못하고 곡만 한 것은, 형제간의 우애[1]가 더 급하여 선생님의 부고[2]에는 어찌하지 못하였다.(영원[1]이 급하여 전당[2]의 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1]鴒原(영원); 詩經의 小雅편의 常棣장에 令原으로 처음 나오고, 이후 두보의 시에 나오는 단어로서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한다.
[2]鱣堂(전당); 後漢書 의 54권 楊震傳에 나오는 단어로서 학문의 강의를 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癸丑奉 旨頒諭本道 是年冬秋沮書堂餘力學琴之語 丙辰三月丁內艱 戊午仲夏外除是時燕山 亂政史獄大起先生 戮于市是年七月二十七日也
계축(1493)년에 경상도의 반유어사[1]가 되었고, 이해 가을과 겨울에 독서당[2]에 있으면서 여력을 공부하고 거문고를 타는데 보냈다. 병진(1496)년 3월에 모친이 별세하시고, 무신(1498)년 5월(仲夏) 벼슬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로 사옥(史獄)이 크게 일어나 선생은 참형되어 주검이 시장에 버려졌으니 이해 7월 27일이다.
同時 並首死者有晝四人 權五福 權景裕 李穆 許磐先生之伯兄提學公諱駿孫及提學公之子 三足堂諱大有亦以先生之故俱 配湖南逮 中廟登極得釋 先生兄弟三人幷仕淸顯而仲兄早歲無箕裘先生身後亦寂寞焉 善人報施之理安在而獨 提學公後先生卒三足堂賢而有文曺南溟許以盖世之雄
동시에 목이 베여 죽은 사람은 그림에 4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이다. 선생의 큰형인 제학공 휘준손과 제학공의 아들인 삼족당 휘대유도 또한 선생의 친족이므로 함께 체포되어 호남으로 유배되었다. 중종이 임금으로 올라 억울함을 풀어 선생의 형제 3명은 나란히 높은 벼슬(淸顯)에 봉해졌다. 작은형(기손)은 일찍 별세하여 자손(箕裘)[1]이 없었고, 선생의 사후(死後)도 역시 쓸쓸하고 조용하였다. 선한 사람을 보답을 받는 다는 이치가 아직 살아 있어 혼자 남은 제학공(준손)의 이후에 선생이 돌아가시자 삼족당이 덕행이 뛰어나 남명 조식이 그를 세상의 영웅이라고 말한 글이 있다.
[1]箕裘(기구);箕裘相繼(기구상계)의 줄임말로서 원 뜻은 ‘대장장이의 아들’ 즉 가업을 물러 받을 자제를 뜻하나 여기서는 그냥 자식 또는 후손이라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先生娶丹陽禹氏兵曹參判克寬之女無育而早卒繼配禮安金氏參奉尾孫之女今居湖西木川地 故 先生常往來或遊息及卒夫人因居木川以終墓於縣東十五里許觀先賢墳墓錄則金馹孫墓在淸道郡西水也峴淸道本先生之桑榟而松楸亦在此焉
선생은 단양우씨로서 병조참판을 지낸 극관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자식이 없이 일찍 죽자, 둘째 부인으로 예안김씨인 참봉 미손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니 지금 호서의 목천에 살고 있어서 선생은 왕래할 때마다 마음편히 쉬었다(遊息). 또 부인이 돌아가시자 목천에 살고 있었으니 묘를 목천현의 동쪽 15리쯤에 썼고 이는 선현분묘록(先賢墳墓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김일손의 묘는 청도군의 서쪽 수야산에 있다. 청도는 본래 선생의 상재[1]이라 묘(松楸)를 여기에 썼다.
[1]桑榟(상재); 警世通言(경세통언) 제3권에 나오는 桑榟之邦(상재지방)의 줄임말로서 고향을 의미한다. 옛사람들은 누에를 많이 쳐서 뽕나무를 길렀고, 마을 어귀에는 가래나무(榟)를 많이 길렀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先生身居海外之褊荒志慕中華之君子 上自程朱下至金許常恨不同時而不相見又念當今賢士之在中國者思有以一見而到京之後果得二人一則好道之程愈一則博學之周銓聞有李東陽者文望高世欲介周一並而歸期己迫未能也
선생이 해외에 나가있을 때에는 비좁고 거친 그 뜻으로 중국의 군자를 숭모하였다. 위로는 정자(본명;程頤)와 주자(본명;朱熹)로부터 아래로는 김허[1]에 이르기까지 이며, 항상 같은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서 서로 만나지 못함을 아쉬워하였다. 또 당시 현재의 중국에 있는 현명한 선비들도 외우면서 한번 만나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여 북경에 도착한 후 과연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한명은 도학을 좋아하는 정유이고 한명을 아는 것이 많은 주전이었다. 들어보니 이동양[2]이라는 사람이 학문이 높다고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어 주전에 부탁하여 한번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돌아올 날짜가 임박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1]金許; 김씨와 허씨, 즉 일반사람들?, 또는 금나라의 허상? 정확한 의미해석 불가
[2]李東陽(1447-1516); 명나라의 대학자
他日送人赴京傳致不忘之意於二人焉 其好賢樂善之誠出尋常萬萬而所謂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者其近之矣
그 후에 사람을 북경에 보내어 잊지 못한다는 뜻을 두 사람에게 전했으니 그 현자와 즐거움과 선을 좋아하는 정성이 평소에 아주 컸으며, 소위 천하의 선한 선비는 그의 친구이고 천하의 선한 선비와 같은 사람은 그의 가까이에 있었다.
朱先生小學書行於我東久矣 而至於歸愈集說則初未聞也 先生之入京也 程愈 贈集說先生以爲是范子勸橫渠學中庸之意 而持印還刊布國中集說之行於東方盖自此始而學者之所賴者爲如何哉
주선생(주자, 본명 주희)의 소학이라는 책은 우리나라에서 오래 전부터 읽혀졌으나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정유의 집설은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선생이 북경에 갔을 때 정유는 선생에게 집설을 선물했으니 이는 범자(范子)의 위대한 학문과 중용의 뜻을 권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간행하여 나라 안에 널리 퍼트리니 집설의 가르침이 우리나라에서 이것으로 비롯되었다. 배우는 사람으로서 이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前後赴京行色蕭然囊橐所有盡買經籍先生在書堂也 上賜四十八詠使之和進先生遂跋文以獻盖所謂四十八詠卽咏四十八種花卉也
여러 번 북경에 갈 때에 행색은 검소하였으나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경서와 서적을 사들여(囊橐)[1] 선생의 서당에 보관하였다. 임금이 48영을 내리자 선생이 발문을 지어 바쳤으니 소위 48영은 48종류의 꽃에 대해서 노래부른 것이다.
[1]囊橐(낭탁);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
先生姑舍花卉之鮮明推廣物理之無窮因此著彼以小喩大或進君德或言治道戒以玩物喪志勸以主敬達順此實陳善閉邪因事納忠之意而亦觀他一箇大胸襟包得許多也
선생의 옛 집에는 꽃들이 선명하여 꾸밈없이 만물의 이치(?)가 끝이 없어, 이 때문에 두드러지게 그가 어렸을 때부터 깨우침이 컸으니, 혹 임금에게 덕이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혹 도로서 다스려야한다고 말하였으며, 노리개를 죽을 정도로 싫어하였고, 윗사람에게는 순리를 깨닫기를 권하니 이는 실제로 선을 펼치고 사악한 것을 폐하라는 뜻이며, 이것을 보더라도 충성된 그의 뜻을 또한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많은 것의 하나에 불과하다.
출처 cafe.daum.net/kimcero
자료7
김덕원 (鍾德) / 三賢派 翰林公 勇派 23世
---> 이 글은 김해김씨 서원대동세보(金海金氏璿源大同世譜), 김해김씨 삼현파 계보해설(三賢派
系譜解說), 가락총람(駕洛總攬) 등의 문헌과 자료를 참고하였음
7세(世) 일손(馹孫) : 탁영선생(濯纓先生)
탁영선생 김일손(金馹孫)은 중조(中祖) 김관(金管)의 7세손(世孫)으로, 집의공(執義公) 김맹(金孟)의 아들이며 절효선생의 손자(孫子)이다.
선생은 세조(世祖) 10년 서기 1464년 정월 7일 오시(午時)에 경북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雲溪里) 소미동(少微洞: 오늘날의 이서면(伊西面) 서원동(書院洞))에서 출생하였고, 휘(諱)는 일손(馹孫)이요 자는 계운(溪雲: 처음의 자는 순우(舜佑))이다. 호는 탁영(濯纓) 또는 이다(伊堂) 또는 운계은사(雲溪隱士)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또는 영귀학인(咏歸學人) 또는 와룡초부(臥龍樵夫) 또는 반계거사(磻溪居士)이고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운계리는 일찍이 증조부 둔옹(遯翁) 김항(金伉)이 정포은(鄭圃隱: 정몽주)과 더불어 늘 승유(勝遊)하던 곳인데, 선생이 태어나기 며칠 전부터 운계리 청계 위에 자기(紫氣)가 무지개처럼 뻗치고 그 서색(瑞色)이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 한다.
부친 남계공(南溪公) 김맹(金孟)이 경기도 용인(龍仁) 이씨(李氏) 사돈집에서 며칠을 지내는데, 어느 날 저녁 꿈에 하늘에서 내려온 준마(駿馬) 한 마리가 푸른 구름을 타고 공(公)의 품안으로 뛰어들었으므로 장자는 준손(駿孫: 준마 駿), 둘째는 기손(驥孫: 천리마 驥), 셋째는 일손(馹孫: 역마 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3형제 중에서 선생은 출생 전에 이조(異兆)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면모(面貌)가 단정하고 굉후(宏厚)하며 비범(非凡)하였다.
5세 때 천자문(千字文)에 능통(能通)하였고 기억력이 매우 좋았으며, 어릴 때에도 그릇된 일을 보면 참지 못하였다. 서기 1471년 8세 때 부친 남계공이 예문관봉교(藝文官奉敎: 정7품)로 부임하자 선생은 모친인 용인이씨(龍仁李氏) 친정인 용인 압고리(鴨皐里) 외가(外家)에서 지내면서 비로소 소학을 배웠다. 이때 선생은 옥수정사(玉樹精舍)에서 형제와 더불어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 옥수정사의 현액(懸額: 현판)은 김시습(金時習: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이 써 주었다. 지금은 정사는 없어졌으나 이곳 사람들은 그 장소를 탁영대(濯纓臺)라 부르며 뒷산을 탁영봉이라 부른다. 그리고 선생과 동종(同宗)인 금산공(琴山公: 구손(龜孫), 한림(翰林), 대사간(大司諫))과 함께 용인에서 숨어 살았기 때문에 포곡면(浦谷面)에 한림대(翰林臺)가 있고 늘 넘어 다녔다는 탁영치(濯纓峙)가 있다.
서기 1478년 15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학행(學行)이 뛰어나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였다. 같은 해 3월에 단양우씨(丹陽禹氏)를 부인으로 맞았는데 부인은 병조참판(兵曹參判: 종2품) 우극관(禹克寬)의 딸이며, 역동(易東) 우탁(禹倬)선생의 6세손이며 형조참의(刑曹參議: 정3품) 이양(李讓)의 외손(外孫)이다.
16세 때 중형(仲兄)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한성부(漢城府)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하였다. 17세 때 부친 남계공이 노환(老患)으로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 종4품)을 사임하고 동창공(東窓公),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전 가족이 귀향(歸鄕)하였다. 9월에는 밀양(密陽)으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을 찾아가 그 문하(門下)가 되어 수학하게 되었는데 동문(同門)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목계(木溪) 강혼(姜渾) 등과 이때부터 도의(道義)로서 친교하게 되었다.
1481년 18세 때 추강(秋江) 남효온과 함께 용문산(龍門山)에서 동유(同遊)하였고 원주 주천산(酒泉山)에 가서 원자허(元子虛=원호(元昊):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선생을 찾아뵙고 돌아 왔다. 19세 때 동창(同窓), 매헌(梅軒) 두 형이 함께 정시(庭試: 과거(科擧)의 하나로 나라에 경사(慶事)나 중대사(重大事)가 있을 때 대궐 안마당에서 보던 시험) 에 壯次(장원과 차석)로 급제(及第)하였다. 선생은 이때 형(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응시(應試)하지 않았다 한다. 20세 때인 서기 1483년 9월 11일 부친 남계공(南溪公)의 상(喪)을 당했다.
1486년 23세 때 영남좌도(嶺南左道) 감시(監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의 초시(初試)에서 양장(兩場: 초.종장(初.終場))에 합격하고 복시(覆試)에서 생원(生員)에 장원(壯元)으로, 진사(進士)에 제 2(第二)로 합격하였다. 같은 해 식년정시(式年庭試)의 문과 초시(初試)의 3장(場)을 모두 장원하였고 복시(覆試)에도 장원, 전시(殿試)에서는 제 2로 합격하였다. 고관(考官)인 대제학(大提學: 정2품) 서거정(徐居正)은 ‘김일손은 비범한 사람으로 그의 언론(言論)은 삼엄(森嚴)하고 추상(秋霜)같다. 문장(文章)은 왕양대해(汪洋大海)요 거칠 것이 없다. 나라를 위해 인재(人材)를 얻었도다’라고 극찬하였다.
같은 해 11월 승문원(承文院) 무공랑(務功郞: 정7품)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 종9품)로 관직(官職)에 들어가서 12월에 정자(正字: 정9품)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이때 동창공(東窓公)이 중시(重試: 이미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다시 시험을 보게 하는 승진시험)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정5품)에 오르고 매헌공(梅軒公)이 이조좌랑(吏曹佐郞: 정6품)이 되어 3형제가 함께 벼슬을 하니 세인(世人)이 김씨 3주(珠)라 하였다.
1487년 24세 때 홍문관정자(弘文館 正字) 겸 경연전경(慶筵典經: 정9품),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이배(移拜)되고, 4월에 안인(安人) 우씨(禹氏)가 별세하였다. 9월에는 노모(老母)를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싶다고 간청(걸양(乞養))하여 진주목학(晉州牧學)의 교수(敎授)로 제배(除拜)되어 약 2년 동안 진주에 머물게 되었다. 진주학관(晉州學館)은 영남우도(嶺南右道)의 상학(上學)기관이기 때문에 나이 들고 청렴한(청직년부(淸職年富)) 상직(上職)에 있는 문신(文臣) 중에서 선발하여 보내는 상례(常例)를 깨고 24세의 젊은 나이로 부임하게 되었다. 서기 1488년 25세 때 진주목사(晉州牧使: 정3품) 경대소(慶大素)를 비롯한 문인 등 30여 명이 촉석루(矗石樓)에 모여 진양수계(晉陽修稧: 문인명사(文人名士)들끼리 모은 계)를 맺고 서(序)를 지었다.
다음은 진양지(晉陽誌)의 기록이다.
「김일손이 진주학관에 교수로 왔다. 솔선하여 규율이 엄하고 예의에 밝으며 의리(義理)와 성(誠)과 경(敬)을 근본으로 삼으니 배우는 자가 모두 따랐다. 진주목사 경대소와 더불어 유생(儒生) 등 32명이 난정고사(蘭亭故事)를 추모하여 촉석루에서 난정수계(蘭亭修契)를 결성하니 풍류가 문아(文雅)하고 덕업(德業)이 떨쳐 문무(文武) 인사들이 왕사와 더불어 교류(交流)를 가졌다.」
선생은 유생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法道)는 반드시 엄하게 하고 예법(禮法)은 반드시 명확하게 하고 의리(義理)에 힘쓰고 성경(誠敬: 존성(存誠)과 거경(居敬))을 깨우치게 하고 학문을 강문(講問)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하여 교도(敎導)의 책무를 다하였다. 독서(讀書)의 순서는 주자가 정한 주자성규(朱子成規)에 따르도록 하여 먼저 소학(小學)을 다 읽고, 다음에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읽은 다음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순응(順應)해 따랐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이 말하기를 ‘계운(溪雲)은 교수하는 근본을 깊이 체득하여 교학(敎學)에 임했다’라고 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선생의 출생지인 운계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세웠다(현재의 자계서원(紫溪書院) 경내(境內)).
서기 1489년 26세 때 3월에 선교랑(宣敎郞: 종6품) 예문관검영(藝文館檢閱: 정9품) 겸 경연전경(經筵典經),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4월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두류산(頭流山: 현재의 지리산(智異山))을 탐방하여 속두류록(續頭流錄)을 지었다. 이 속두류록은 현전(現傳)하는 수필(隨筆)문학의 백미(白眉)이며, 속두류록으로 표제(表題)된 것은 스승인 점필재(佔畢齋)선생이 17년전에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썼기 때문에 그에 계속하여 썼다는 뜻이다. 7월에는 목천(木川)에서 예안김씨(禮安金氏)를 다시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9월에 성종(成宗)에게 차자(箚子: 간단한 서식으로 올리는 상소문(上疏文))로 치도(治道) 12항을 올리니,
1. 군주(君主)는 학문에 부지런할 일이며
2. 놀이를 좋아하는 욕심을 절제(節制)하고
3. 명령을 간결(簡潔)하게 할 것이며
4. 궁중(宮中) 안을 엄숙하게 하며
5. 간(揀)하는 일을 용납할 것이며
6. 헤프게 쓰는 일을 배격(排擊)하고
7. 충성함과 간사(奸邪)함을 판별해서 행하며
8. 학교를 세워 교육을 진흥(振興)케 하며
9.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며
10. 요사스러운 미신(迷信)을 막으며
11. 지방(地方)의 장관을 가려서 쓰며
12. 백성의 헐벗고 굶주림을 보살피라고 열거(列擧)하였다.
선생은 인품과 문명(文名)이 뛰어나 학문을 좋아하는 성종의 총애(寵愛)를 받아 31세 때까지 8년간 청요(淸要)의 직(職)에 있으면서 경연(經筵) 자리에서 성종에게 고금(古今)의 시정득실(時政得失)과 사관기사(史官記事)의 규(規)를 논하여, 무릇 역사는 사실(事實)을 기록함이 귀한 것이니 옛 역사를 상고(上考)하면 임금의 표정(表情)도 쓰고 있는데 군주의 용색(容色)을 바로 보지 못하면 어찌 그 참모습을 기록하오리까. 중국의 사관(史官)은 붓을 들고 제왕(帝王)의 좌우(左右)에 서 있거늘 우리나라 사관은 엎드려 기사(記事)함이 심히 불가한 일이라고 진언(進言)하였다. 성종은 이를 옳게 여겨 그로부터 사관들이 바로 앉아서 기록하게 하였다. 또 성종은 일찍이 경연 자리에서 참찬관(參贊官: 정2품) 조위(曺偉)에게 ‘김일손이 문학에 구우(俱優)하고 재기(才器)가 겸비하여 기질(氣質)과 언론(言論)이 가히 조정의 책(責)이 될 만하다. 장차 크게 쓰고자 하니 지금은 연소(年少)하여 예기(銳氣)가 준엄하므로 마땅히 노성(老成)을 기다려 보상(輔相: 대신을 거느리고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하리라’하였다. 성종은 또 선생에게 두 번이나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문신에게 휴가(休暇)를 주어 독서하게 함)를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1월에는 왕명으로 요동(遼東) 질정관(質正官)에 제수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서기 1490년 27세 때 3월에 통선랑(通善郞: 정5품),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정7품) 겸 검열(檢閱)에 제수되고 곧이어 사관(史館: 춘추관의 옛 이름)에 입직(入直)하여 사초(史草)를 닦아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하였다. 5월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가야산(伽倻山)에서 동유(同遊)하였고 약현당(約賢堂: 해인사(海印寺)에 있음)에서 5일간 강학(講學)하고 약현당기(約賢堂記)를 지었다.
7월에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정7품) 겸 경연사경(經筵司經: 정7품),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세자(世子) 시강원설서(侍講院設書: 정7품)에 오르고, 8월에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종4품),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종6품),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檢討官: 정6품), 춘추관기사관에 오르고, 10월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6품)에 제수되고, 11월에는 본직(本職)으로 진하사(陳賀使: 중국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 파견하는 사절)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또 명나라에 갔다.
서기 1491년 28세 때 3월에 명나라에서 돌아와 명나라에서 얻은 제사경적(諸史經籍)과 소학집설(小學集設)을 조정에 상정(上呈)하였고, 성종은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인포(印布)하게 하니 그로부터 소학집설이 국내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저명한 학자 정유(程愈: 소학집설(小學集設) 찬술(撰述)), 주전(周銓) 등과 교유(交遊)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선생의 뛰어난 문장을 일러 동국(東國: 조선(朝鮮))의 한창여(韓昌黎) 퇴지(退之)라고 극찬하였으며 이로부터 국내외에 선생의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졌다.
3월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정6품)에 제수됨에 따라 선생은 정언(正言)이란 이름으로 부정언(不正言)을 할 수 없다 하고 차자(箚子)로 다음 네 가지를 아뢰었다.
1. 왕의 면예학(勉叡學: 면학)에 대해서는 정심성의(正心誠意: 대학(大學)의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말하였고,
2. 조정을 바르게 함에 대해서는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간신배를 멀리하는(친현원간(親賢遠奸)) 계책을 말하였으며,
3. 동궁(東宮)의 양육(養育)을 돕는 일(보양동궁(輔養東宮))은 관관(官官)을 가려 써서 국본(國本: 세자(世子))을 튼튼히 하는 길을 논하였고,
4. 인재를 양성(작성인재(作成人才))하는 일은 학교를 일으키고 풍속(風俗)을 바르게 하는 방법을 논하였다.
성종은 이에 대해 따뜻하게 비답(批答)하고 칭찬하며 차례대로 시행하리라 하였다.
8월에는 병조좌랑(兵曹佐郞: 정6품)에 제수되고 겸하여 교수강목청(校讐綱目廳) 일을 맡게 되었다. 9월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제수되고 10월에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종3품)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정5품) 겸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문종비(文宗妃: 현덕왕후(顯德王后)) 소능(昭陵)의 위호(位號)회복 상소문을 올렸다. 11월에는 김해에 가서 시조왕릉(始祖王陵)을 참예(參詣)하고 회노당기(會老堂記)를 지었다.
서기 1492년 29세 때 3월에 다시 이조좌랑으로 소명되었으나 상소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게 되었다. 7월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 종3품), 홍문관부교리(副校理: 종5품),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시독관(試讀官: 정5품), 춘추관기주관(記注官: 정5품), 예문관봉교(奉敎: 정7품)에 올랐다. 동년 9월 16일 중형(仲兄) 매헌공(梅軒公)이 별세하였다. 9월에 사간원헌납(獻納: 정5품)으로 제수되어 차자(箚子)를 올려 이극동(李克墩), 성준(成俊) 등이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며 반대세력을 배척하여 조정을 분열시키므로 과감히 이를 논핵(論劾)하였다.
서기 1493년 30세 때 정월에 홍문관교리(정5품)에 올라 반유어사(頒諭御使: 조정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파견하는 어사)의 소임을 맡아 각지의 민정(民情)을 살폈다. 3월에는 하동(河東)을 지나다가 섬진강변(蟾津江邊)에 유거(幽居)하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방문하여 하루를 유숙하면서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하였다. 5월에 사헌부지평(持平: 정5품)에 배명(拜命)되고 곧 이어 통훈(通訓)대부(정3품 당상관), 홍문관교리에 배명되었다가, 7월에는 수(守: 자신의 품계(品階)보다 실제 관직이 높은 경우 수(守)를 붙이고, 반대로 자신의 품계보다 실제 관직이 낮은 직을 겸할 경우 행(行)을 붙인다) 예문관응교(應敎: 정4품)로 사가독서하게 되었다.
서기 1494년 31세 때 2월에 사간원헌납(獻納)에 제수되니 천재시변(天災時變)을 상소하였고, 3월에 병조정랑(正郞: 정4품)에 이배되고, 5월에 다시 홍문관교리, 지제교, 수(守) 예문관응교(應敎) 등의 문신 겸 선전관(宣傳官)에 배명(拜命)되고, 9월에는 이조정랑, 지제교 겸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양관(兩館;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응교, 경연시강관(侍講官: 정4품), 춘추관편수관(編修官: 정3품), 춘방(春坊: 세자시강원)필선(弼善: 정4품)을 겸하게 되었고, 12월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 임금 앞에 나아가 강론)하여 어온(御醞: 임금이 내리는 술)이 내렸고 동월 24일 성종(成宗)이 승하(昇遐)하였다.
서기 1495년 32세 때 연산(燕山)이 왕위에 오르니 조정에서는 군소(群小)가 난정(亂政)을 이루었고 한 사람도 바르게 진언(陳言)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은 혼자서 계사10조(戒辭10條) 등을 상소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상소로 자핵(自劾: 자기의 죄(罪)를 스스로 탄핵)하고 직명을 깎아 고향 청도(淸道)로 내려갔다. 그 후 몇 번 부름을 받았으나 모친(母親)의 병환도 있고 해서 응하지 않았다. 12월에 이조판서 어세겸(魚世謙)이 난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선생을 사간원헌납(獻納)으로 천거하므로 다시 입조(入朝)하게 되었다. 선생은 곧 난정의 주동인물(主動人物)인 임사홍(任士洪), 윤필상(尹弼商), 이극돈(李克墩) 등의 간사함을 논핵(論劾)하였다. 또 연산초(燕山初)의 난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구구절절 위국충절(爲國忠節)의 경륜을 내용으로 한 26조목의 단독(憺) 상소문을 올렸다. 서기 1496년 33세 때 정월에 간료(諫僚)들과 더불어 소릉복호(昭陵復號) 상소를 두 차례 올렸으나 윤허(允許)되지 않으므로 사임(辭任)하였고, 3월에 다시 이조정랑 겸 지제교에 제수되었으나 친질(親疾)로 취임하지 않았는데, 동월(同月) 29일 모친 정부인(貞夫人) 용인이씨(龍仁李氏)가 별세하였다. 서기 1498년 35세 때 6월에 모친상(母親喪)의 복(腹)을 마치고 김해에 가서 성묘하고 함양(咸陽)으로 가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을 방문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선생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있을 때 이극돈(李克墩), 성준(成俊) 등이 새로운 분당(分黨)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한 바 있었고, 또 이 무렵 조정에서는 성종(成宗)의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춘추관사(春秋館事)당상관이 되어 있어 선생이 쓴 사초(史草)를 보니 자신이 전라도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성종이 상(喪: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을 당했음에도 향화(香火)는 올리지 않고 장흥(長興)의 기생과 놀러 다녔다는 것이다. 또 다음에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의제는 중국 초(楚)나라 회왕(懷王)인데 김종직이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항우가 회왕을 죽인 고사(故事)를 비유한 글이라 해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됨)으로 선생에 대한 원한을 갚으려 생각하고 실록청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유자광(柳子光)을 시켜 문제를 삼았다. 유자광은 일찍이 함양에 놀이 갔다가 시(詩) 한 수를 지어 그곳 학사루(學士樓)에 달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뒤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내려가서 보고 ‘유자광이 감히 시를 현판에 달았다는 말인가’하고 철거시켰다. 유자광은 분하였으나 김종직이 살아있을 때에는 도리어 찾아가서 문안드리고 문하생(門下生)이 될 것을 간청하는 등 아첨을 하였지만, 이제 와서는 보복의 선두에 선 것이다. 연산(燕山)은 왕으로서 체통을 잃은 분방한 그의 행동을 늘 간섭해 오던 사림파(士林派)를 귀찮게 여겨오다가 마침내 많은 사류(士類)가 화(禍)를 입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7월 5일 선생은 함양에서 정여창과 마지막 이별을 나누고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홍사호(洪士灝)에 의해 피체(被逮)되었고, 7월 12일 궁중(宮中) 수문당(修文堂)으로 압송(押送)되어 연산이 친국(親鞫)하였다.
연산: “조의제문을 수록하면서 충분(忠憤)함을 느낀다고 하였는가.”
탁영: “선왕(先王)의 선악과 신자(臣子)의 충(忠)함과 간사함을 기록하여 권장시키고 징계함은 후세(後世)에 거울로 삼고자 하는 일입니다. 조의제문은 신(臣)의 스승 김종직이 지은 것인데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의 일에 깨달은 바가 있어 사초에 수록하여 공론(公論)을 천재(千載)에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연산: “앞서 상소하여 소릉(昭陵: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을 복위하고자 요청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탁영: “국조보감(國朝寶鑑)을 보니 조종(祖宗)께서 왕씨(王氏)를 의절(義絶)하지 않고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 이하 9대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신 사당)을 건립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의 자손까지 수령(首領: 목숨)을 보존토록 하였으니 이는 다 조정의 미덕(美德)으로 의당(宜當) 만세에 계승해야 할 일이옵니다. 임금의 덕은 인정(仁政)보다 더한 것이 없으므로 소릉(昭陵) 복위(復位) 요청은 군상(君上)께서 인정(仁政)을 베풀도록 하기 위함이옵니다.”
연산(燕山)은 선생의 답(答)을 듣고 이어 사초(史草)에 수록할 때 동의(同意)한 사람을 물었으나 선생은 끝까지 혼자서 한 일이라 말했을 뿐 다른 사람을 끌어넣지 않았다. 조의제문은 성종(成宗)이 조위(曺偉)에게 명하여 김종직의 문집(文集)을 찬집(撰集)하게 할 때 이미 문집 첫머리에 수록되어 성종도 잘 알고 있었던 글이다.
1차 국문(鞠問)이 있을 후 5일 후에 2차 국문이 연산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극돈, 유자광이 맡았다. 그러나 선생은 전후(前後)의 사리(事理)가 정연한 답으로 첫 번째 말과 한 마디의 틀림도 없이 되풀이하였다. 이극돈과 유자광은 초조한 나머지 머리를 맞대고 모의(謀議) 끝에 김종직은 세조(世祖)를 헐뜯었으니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연산에게 쉽게 풀이하여 알리려고 한 것은 김종직의 가르침이라 하여 그 제자 김일손을 대역(大逆)의 죄(罪)로 다스리도록 하자는 계획을 짰다.
26일까지 계속 신문(訊問)한 뒤 연산은 다음과 같이 선포(宣布)하였다.
「김종직은 화심(禍心)을 품고 음(陰)으로 붕당(朋黨)의 부류와 손을 잡아 흉모(凶謀)하고자 한지 날이 오래 되었노라. 그래서 그는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시해(弑害)한 일을 빙자하여 무자(文字)에 드러내어 선왕(先王)을 비방하였으니....... 대역(大逆)으로 논단(論斷)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죄를 짓고 죽은 사람을 뒤에 관(棺)을 꺼내 쪼개고 송장의 목을 베는 극형)하고, 그 무리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권경유(權景裕)는 간악(奸惡)한 붕당을 이뤄 동성상제(同聲相濟: 같은 소리로 서로 도움)하여 그 글을 찬양(讚揚)하되 충분(忠憤)이 움직여지는 바라고 사초에 적어 불후(不朽)의 문자를 남기고자 했으니 그 허물이 김종직과 아울러 같으므로 능지처참(陵遲處斬: 죽인 뒤에 다시 사지(四肢)를 토막 내어 각지(各地)에 돌려 보이는 극형)하게 하였노라. 그리고 김일손이 이목(李穆), 허반(許磐), 강겸(姜鎌) 등과 함께 선왕의 무근(無根)한 사실을 허위로 날조(捏造)하여 서로 고하고 사(史)에까지 적었으므로 이목(李穆), 허반(許磐)도 같이 참형(斬刑)에 처하고, 강겸(姜鎌)은 곤장 1백대를 치고 집 재산을 적몰(籍沒)하여 극변(極邊: 지극히 먼 변방)으로 내쳐 노비(奴婢)로 삼노라. 그리고 표연말(表沿沫), 홍한(洪瀚), 정여창(鄭汝昌), 무풍부정(茂豊副正) 총(摠: 태종의 증손(曾孫)) 등은 허물이 난언(亂言)을 범했고 강경서(姜景敍), 이수공(李守恭), 정희량(鄭希良), 정승조(鄭承祖) 등은 난언임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았으므로 더불어 곤장 1백대를 쳐서 3천리 밖으로 내쫒고(정여창은 함북 종성(鐘城)에 귀양 갔다가 이어 형(刑)을 받음) 이종준(李宗準), 최단(崔漙), 이원(李黿), 이주(李冑), 김굉필(金宏弼), 박한주(朴漢柱), 임희재(任熙載), 강백진(姜伯珍), 이계맹(李繼孟), 강혼(姜渾) 등은 전부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붕당을 이루고 피차 칭송하였으며 혹은 나라의 정사를 기의(譏議: 헐뜯고 비난함)하고 시사(時事)를 헐뜯었으므로 임희재는 곤장 1백대를 쳐서 3천리 밖으로 쫒고, 이주(李冑)는 곤장 1백대를 쳐서 극변으로 부처(付處: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게 하는 형벌)하고, 이종준, 최단, 이원, 김굉필, 박한주,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곤장 80대를 쳐서 원방(遠方)으로 부처함과 동시에 내친(內親: 마음속으로 친하게 여김)자들은 모두 봉수군(烽燧軍: 봉화를 올리는 일을 맡던 군사)이나 정료(庭燎: 밤중에 입궐하는 신하를 위해 대궐 뜰에서 화롯불을 피우는 일)의 일에 배정하였고(김굉필은 평북 희천(熙川)으로 귀양 감), 수사관(修史官)이 사초를 보고도 빨리 주달(奏達)하지 않았으므로 어세겸(魚世謙), 이극돈(李克墩), 유순(柳洵), 윤효손(尹孝孫) 등은 파직(罷職)하고 홍귀달(洪貴達), 조익정(趙益貞), 허침(許琛), 안침(安琛) 등은 좌천(左遷)시켰다.(이하 생략)」
선생은 서기 1498년 7월 27일 정오에 능지처사(陵遲處死)되고 말았다. 선생이 형(刑)을 받던 그날 장안에는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풍을 몰고 와 나무가 부러지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사람들은 모두 숙연해져 어쩔 줄을 몰랐다. 고향 청도(淸道)에서는 운계(雲溪)의 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으로 흘렀다. 또 하늘과 땅은 선생의 죽음을 예고나 하듯 이에 앞서 경상도에서는 큰 천재지변(天災地變)이 있었다. 즉 선생이 함양(咸陽)에서 의금부(義禁府)에 의해 피체(被逮)되기 하루 전 경상감찰사(監察使) 김심(金諶)은 조정에 제출한 그의 사직서에서 “삼가 아뢰옵니다. 금 6월 11일, 13일, 20일에 도내(道內) 열 일곱 고을에 지진(地震)이 있었는데 간혹 하루에 두 차례도 하고 네 차례도 하였습니다. 신(臣)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요(妖)란 망령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이 초래하는 바이온데... 이번에 재변(災變)이 있었는데도 신이 뻔뻔스럽게도 직책을 감당하고 있음은 실로 감연(敢然)히 할 수 없사온즉 청하옵건대 신의 본직(本職)을 갈으시어 천견(天譴: 하늘의 꾸짖음)에 보응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연산(燕山)은 자신을 두고 비유(比喩)라도 되는 듯 “이는 반드시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미약한 소치일 것이다...”라고 전교하였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동창공(東窓公)은 홍문관 직제학(弘文館 直提學)을 하시다가 연산군 초(初)에 걸양(乞養)하여 고향 가까운 함양군수로 내려와 있었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남원(南原)으로 귀양 갔고, 선생의 부인 예안김씨(禮安金氏)는 목천(木川)에서 비보(悲報)를 듣고 10여 일이나 단식(斷食)하며 여러 번 가사(假死)상태에 빠졌다. 그 후 3년간 상복(喪服)을 벗지 않고 조석(朝夕)으로 곡제(哭祭)하더니 연산 6년 7월 27일, 3년 탈복(脫)의 날에 옷을 갈아입고 바르게 앉아 자결(自決)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있은 지 6년이 지나서 연산군 10년 서기 1504년 3월에 또 한 번 큰 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의 생모 윤비의 죽음에 관한 일로 형(刑)의 집행이 1년 이상이나 계속된 대옥사(大獄事)로 이른바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이다. 성종비(成宗妃)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왕비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성종 10년 서기 1479년에 폐출(廢黜)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원래 폐비 윤씨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기무(起畝)와 부인 신씨(申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연산군의 생모(生母)이다. 성종 4년 서기 1473년에 숙의(淑儀)로 봉해진 후 서기 1476년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그러나 질투가 몹시 심하여 여러 가지 부덕(不德)한 일을 많이 했고, 서기 1477년에는 비상(砒霜)으로 왕과 후궁을 독살(毒殺)하려는 혐의(嫌疑)가 발각되어 왕과 모후(母后)인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미움을 더욱 받게 되었다. 그 뒤에 서기 1479년에는 투기로 왕의 얼굴을 할퀸 일로 왕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진노를 사서, 서기 1479년 성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만든 뒤 친정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신하들은 원자(元子:뒤의 연산군)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되므로 나라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관청에서 생활비 일체를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를 그치지 않았다. 결국 이는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고, 원자가 성장하면서 인심(人心)도 폐비 윤씨를 동정하게 되었다. 이에 성종 13년 서기 1482년 8월에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의 대신(大臣), 육조(六曹), 대간(臺諫)을 모아 의논하게 한 다음 좌승지(左承旨)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사사(賜死)했다. 윤씨가 폐출 사사된 것은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와 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그 후 서기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에 오르게 된 후,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功臣)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沒收)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任士洪)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런 계제에 폐비윤씨의 생모인 신씨(申氏)가 폐비의 폐출과 사사된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密告)하여 일이 크게 벌어졌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 사화로 선생은 부관참시형(剖棺斬屍刑)을 당했으니 두 번이나 화를 입은 셈이다. 정여창은 그 해 4월에 유배지(流配地)에서 죽었는데 같이 부관참시형을 당했고, 김굉필은 유배지에서 사약(賜藥)을 받았고 남효은, 조위 등 많은 유신들이 부관참시형 또는 갖가지 중형(重刑)을 당하였다.
선생의 묘(墓)는 화를 입은 후 양주(楊州) 석교원(石橋原)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중종(中宗) 원년(元年) 서기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신원복관(伸寃復官)되어 10월에 목천의 작성산(鵲城山)에 개장(改葬)하여 종자(從子) 대장(大壯)이 묘주(廟主)로서 봉사(奉祀)하였고, 서기 1508년에 청도 수야산(水也山)에 반장(返葬)하였다.
선생은 중종반정으로 그 해 9월에 신원복관되고, 중종 7년 서기 1512년 9월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홍문관직제학(直提學) 겸 예문관은교(應敎), 경연시강관(侍講官), 춘추관편수관(編修官)으로 추증(追贈)되고, 현종(顯宗) 원년 서기 1660년 3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도승지(都承旨) 겸 경연참찬관(參贊官), 춘추관수선관(修撰官), 예문관직제학(直提學), 상서원 정(正)으로 추증되고, 순조(純祖) 30년 서기 1830년 11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知)경연 의금부사(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大提學),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손좌빈객(世孫左賓客),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가증(加贈)되었다.
서기 1834년 6월에 문민(文愍)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는데, 「학문을 많이 듣고 많이 알며 문장이 넓고 빛나시어 글월문(文)자와, 죽음에 백성들의 울분과 참혹함을 당하여 슬플 민(愍)자」로 하사(下賜)받았다.
선생은 35세의 젊은 나이로 화(禍)를 입었지만 뛰어난 대문장가(大文章家)이며, 선비의 도리를 다하여 사관(史官)으로서의 본연의 자세를 지켰으므로 조정에서는 절사신(節史臣)이라 경칭(敬稱)하였고, 전국의 유림(儒林)들은 선생의 숭고(崇高)한 뜻을 기리기 위해 도처에 서원(書院)과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향(祭享)을 받들며 추모하고 있다. 중종(中宗) 13년 서기 1518년에 선생이 수학하던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청도 유림에서 자계사(紫溪祠)로 하여 제향해 오다가, 선조(宣祖) 11년 서기 1578년 11월에 영남 사림이 사우(祠宇)를 중수하여 서원으로 개칭(改稱)하였고, 서기 1608년에 절효(節孝), 삼족당(三足堂) 양선생(兩先生)을 병향(並享)하였다.
현종(顯宗) 원년 서기 1660년에 자계서원으로 사액(賜額)이 내려져 도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또 서기 1676년에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사액이 내려졌다. 이 두 서원을 비롯하여 청도의 차산(車山)과 석강(石崗), 함양의 청계(靑溪), 남원의 사동(社洞), 김제의 벽산(碧山), 익산의 동산(東山), 광주의 두암(斗岩)과 임계(臨溪)서원 등이 있고, 사(祠)로는 순천의 옥산(玉山), 무주의 연화(蓮花)와 유천(裕川), 여천의 화산(華山), 부여의 부풍(扶風), 함평의 유음(柳陰), 광주의 장열(壯烈), 순창의 왕산(王山), 화순의 숭의(崇義), 하동의 덕은사(德隱祠) 등이 있다.
선생의 높은 학덕(學德)과 충직(忠直)한 기개(氣槪)를 칭송하는 유생(儒生)들의 변(辯)은 다음과 같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군(君)은 글을 짓는데 능하지 않은 바가 없고 나의 학문을 전할 사람은 군 외에는 없다.」
정유(程愈), 주전(周銓)-중국의 저명한 학자: 「동국(東國: 조선(朝鮮))의 한창여(韓昌黎) 퇴지(退之)다.」퇴지는 당(唐). 송(宋) 8대가(大家) 중의 한사람)
허봉(許篈): 해동야사(海東野史)에서 「김계운(金季雲)은 실로 세상에 드문 선비이다. 그러나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해서 화를 당하였다.」
신영희(辛永禧):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서 「김일손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상소문(上疏文)과 차자(箚子)는 글이 크고 넓어 큰 바다와 같았고, 그가 나라 일을 의논하는 것과 사람의 시비(是非)를 말하는 것이 마치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았다.」
남명(南冥) 조식(曹植): 「살아있을 때는 권세(權勢)를 꺾을 만한 절기(節氣)가 있었고, 죽은 후에는 하늘을 뚫을 만한 억울하고 원통함이 있었다. 문장(文章)은 강과 바다처럼 넓고 성하였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선생은 희세(稀世)의 재(材)요 묘당(廟堂: 조정)의 기(器)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탁영문집(濯瓔文集) 서문에서 「선생은 우주간기(宇宙間氣)로 태어났고 문장절행(文章節行)은 당대의 명문이다.」
지정(止亭) 남곤(南袞): 「세상에 다시 탁영선생과 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까.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니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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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락왕손총람
탁영공(휘 일손) |
아버지 諱 孟(사헌부 집의), 어머니 용인이씨의 三子로 세조 10년(서기 1464년)에 청도 운계리(지금의 서원동)에서 生하시어, 자는 溪雲(계운)이며, 호는 濯纓(탁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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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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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의 귀감으로 후세에 알려지는 김극일(金克一 1382~1456?)의 손자이며 집의를 지낸 김맹(金孟 1410~1483)의 아들이다. 어려서〈소학〉·〈통감강목〉·사서(四書) 등을 배웠다. 1478년 15세 단양 우씨와 혼인하고, 선산의 이맹전을 찾아 배알하였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이맹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함양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 1483년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정여해·강혼(姜渾)·남곤·정광필 등과 사귀었다. 이 중 남곤은 또다른 동문인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하기도 한다.
2년간 이맹전과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이맹전이 병사하자 김종직의 문하에서 생활하다시피 하며 그에게서 성리학과 글, 사물을 배웠다. 그 당시 사림의 대표적 으뜸이던 김종직의 문하생인 그는 오래 스승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6년(성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상경한 뒤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올랐다.
그뒤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을 거쳐 1489년 음력 11월 요동질정관으로 1차로 북경을 다녀왔다. 1490년 음력 3월 노산군 입후치제를 주장하고 음력 4월 《육신전》을 첨삭하였으며 음력 11월 진하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그도 서장관으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1]
1491년(성종 2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주서(注書)·부수찬·장령·정언·이조좌랑·헌납·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비판하였고, 한치의 굽힘이 없었다.
성종 때 춘추관 헌납(獻納) 재직시에 이극돈과 성준(成俊) 등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원한을 샀다. 그뒤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을 때는 정유(鄭愈) 등의 중국 학자와 교유하며 사상을 주고 받고, 정유가 지은 〈소학집설 小學集說〉을 가지고 귀국하여 조선에 전파했다.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또한 세조 찬위(世祖纂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었다. <조의제문>은 그의 스승 김종직이 항우(項羽)가 초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죽이고 찬탈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초 의제를 조상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은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한 것이었다. 이 조의제문과 기타 여러가지 사건이 빌미가 되어 후일 1498년(연산군 4년) 유자광·이극돈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 사림파 여러 인물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된다.
그의 언행 가운데 훈구파에서 문제로 삼았던 것은 덕종의 후궁인 소훈 윤씨(昭訓尹氏)에게 이유 없이 지나치게 많은 전민(田民)과 가사(家舍)를 내렸다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했고, 세조가 소훈 윤씨와 소의 권씨 등 장남 덕종의 후궁을 범하려다가 실패한 것을 기록했으며, 〈조의제문〉을 그대로 사초에 기록하였다.
1496년 음력 1월 소릉복위 상소를 올리고 음력 3월 모친상을 당했다. 3년상을 마치고 1498년초 공직에 복귀했다.
학조가 왕실의 위세를 업고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수하로 갈아치운 사실을 기록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2] 또한 학조가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의 땅과 백성들을 사취한 사실도 문제가 된 기록이었다.[2] 승려 학조는 세조의 불사에 참여하여 총애를 받았고, 세조의 측근인 공신 김수온의 형제였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3] 그는 학조와 대방군부인 송씨의 간통 사실을 성종의 면전에서 직접 언급하며 이를 비판하였다.
또한 무오사화 당시 이 사실도 사초에 들어 있었다.[3]
그는 세조의 꿈 때문에 어이없이 부관참시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였고,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을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하고, 숙의권씨(淑儀權氏)의 노비와 토지를 권람(權擥)이 가로챘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그의 비판은 동료들로부터도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정광필이나 남곤, 김굉필, 김전, 김안국 등은 그런 신랄한 지적을 한 그에게 되도록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충고하거나, 오히려 그를 나무라고 질책했다.
그의 직언을 비판한 정광필과 김안국, 남곤, 김전, 김굉필 등은 살아남았지만, 그의 직언에 동조했거나 긍정적이었던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대부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희생된다.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상중에 전라도관찰사 이극돈이 기생을 불러다가 술을 마신 것을 사초에 기록했다. 이것이 동료 사관을 통해 이극돈에게 알려지면서 그는 사초에서 상중에 기생과 어울린 내용을 빼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일손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만년의 그는 풍병(風病)을 앓고 있었다. 그런데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 유자광 등을 통해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그 내용인 즉, 세조를 비방하고,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다. 곧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대역죄로 음력 7월 광통방(廣通坊 : 조흥은행 본점이 있던 광교 네거리 근처)에서 능지처참되고, 권경유 · 권오복 · 허반 등 다른 많은 사류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라 한다. 이를 계기로 세조 때 등장하여 성종 때에 날개를 펴며 세력을 확장해나가던 신진 사림은 집권층인 훈구파에게 거세, 숙청되었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윤필상·이극돈(李克墩)·임사홍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과 학조 등 승려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신랄하게 지적, 규탄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증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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