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조직력과 인화 도모 손화중(孫華仲, 1861~1895)
손화중은 동학농민혁명 3대 지도자로 꼽힌다. 그가 재판을 받고 죽을 때에도 이 기준이 적용되었다. 곧 온건파인 전봉준, 강경파인 김개남, 중도파인 손화중을 두고 평가하는 것이다.
그의 <판결선고자 원본> 에는 “개국 503년(1894년) 3월부터 해당을 모아 전라도 고부군아로 들어와 작경을 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또 그곳에서 전라감영 관군을 항적하여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지를 지나 전주로 들어가 초토사 홍재희(홍계훈으로 개명)가 거느린 관병을 항적함인데...”라고 했다. 곧 1893년 원평집회부터 고부봉기, 황토현전투, 전주 점령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수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부 봉기가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여느 민란과 그 질이 다름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새로이 군수로 박원명을 임명하고 그 조사관으로 이용태를 보냈다. 고부 군민들은 신임 군수의 회유에 일단 원한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각기 흩어졌다. 그러나 뒤늦게 온 이용태는 골골을 누비며 주동자를 잡아 족치기도 하고 무고한 양민에게서 약탈을 일삼았다. 고부의 민중은 다시 분노로 치를 떨었다.
전봉준․최경선 등 지도자들은 고부의 농민만으로는 운동의 단계를 고양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재빨리 몸을 날려 이웃 고을 무장으로 내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했다. 무장은 전봉준의 고향인 당촌과 가까운 곳에 있기도 했거니와 절친한 동지 손화중이 활동하면서 기반을 다진 곳이었다.
전봉준은 손화중에게 즉각 봉기할 것을 설득했으나 손화중은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제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동학에 입도한 뒤인 1880년 후반부터 무장을 중심으로 동학 포덕에 열중했다 한다. 마침내 전봉준과 손화중은 손을 잡았고 여기에 김개남의 합류까지 이룩했다. 이렇게 해서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가 탄생을 보게 된다.
이들은 밀사를 시켜 충청도와 금산 지역에 격문을 보내 호응할 것을 요구하는 등 연합전선 형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식 선전포고(포고문)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조정에는 간신들이 모여 온갖 부정을 일삼으면서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외방에는 수령들이 갖은 수탈을 일삼아 백성이 살 수가 없으며, 나라에는 국비로 쓸 재물이 없고 탐관오리들은 호사롭게 살고 있어서 ‘광제창생(廣濟蒼生)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선다는 것이었다. 그 끝에는 창의소의 이름 아래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의 서명이 있었다.
이들은 다시 고부로 진출하여 백산에서 더욱 큰 규모로 모였고 이어 황토현에서 전라감영의 무남영 군대과 보부상패를 여지없이 깨부쉈다. 이 연합전선의 형성에 절대적 공로자가 손화중이다.
손화중은 정읍 꾀다리(지금의 정주시 과교동)에서 대대로 지주 행세를 하는 밀양 손씨 집 큰아들로 태어나서 어릴 적 이웃 마을인 음성골(지금의 정주시 상평동)로 이사를 했다. 지금 음성골에는 그의 고택 터가 있다. 그의 이름 한자도 화중(化中) 또는 화중(和中)으로도 표기한다.
부유한 환경에서 글을 익히던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남달라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대가 자못 컸다고 전해진다. 그가 나이 몇에 혼인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여섯 살 위인 고흥 유씨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십대 때 처남 유용수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으로 승지(피난처)를 찾아 나섰다가 동학에 입도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본명인 정식보다 자인 화중으로 널리 통한 것으로 보인다(밀양 손씨 세보 참고).
손화중은 관헌의 눈을 피해 부안․정읍․무장 등지로 돌아다니며 동학 포교에 열중한다. 그는 키가 9척 장신이요, 인상은 부드럽고 설득력이 아주 뛰어났다 한다. 이런 그였으니 그의 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어느 때인지 그는 무장현 성송면 괴치리 사천마을로 옮겨 본격적인 포교에 나선다. 그는 1892년에 선운사 뒤 도솔암의 비결을 꺼낸 것으로 유명해진다. 그 석불은 검당 선사라는 중의 모습이라 한다. 석불의 배꼽에는 비결이 하나 들어 있는데 이 비결이 세상에 드러나는 날에는 서울이 망한다는 전설이 끈질기게 전해졌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이를 꺼내 보다가 벼락이 쳐서 얼른 뚜껑을 닫았다는 일화까지 보태져 돌았다.
손화중이 바로 이 비결을 자기 주도 아래 꺼내서 어디론가 가지고 가버렸다고 한다. 이 사실이 관가에 고발되어 손화중 포의 여러 사람이 잡혀갔으나 손화중만은 몸을 숨겨 잡히지 않았다 한다. 이 사건은 삽시간에 소문이 퍼졌고 손화중은 더욱 유명해졌던 것이다. 더욱이 민중은 이 석불을 미륵 출현과 같은 의미를 붙여 신앙하고 있었다(오지영 <동학사>에 나옴. 프랑스인 뮈텔 주교가 수집한 <뮈텔문서>에는 석불의 배꼽에서 비결이 아닌 금덩이를 꺼내 갔다고 기록돼 있다).
아무튼 손화중은 무장․고창․부안 일대에서 조직을 넓혔고 명성도 높았다. 뒷날 일본군 쪽에서 각지의 유명한 접주를 정탐하여 보고하면서 무장에는 손화중이란 ‘대접주 거괴’가 있고 성동면 양실에 거주하는 한학삼과 엄동이나 호동에 거주하는 김경도를 우두머리로 꼽고 있다(<일본공사관 기록>).
전봉준은 이런 손화중의 조직과 세력을 이용하였다. 전봉준은 손화중이나 김개남보다 훨씬 늦게 동학에 입도했고 포교활동은 하지 않았으니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려면 손화중 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손화중은 위에 소개한 판결문대로 전봉준․김개남과 손을 잡아 황토현 전투에 이어 장성 전투, 전주 점령에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는 집강소 기간에 김개남보다 전봉준과 노선을 같이하면서 남쪽의 장성․광주 등지에서 활동을 벌였다. 그는 집강소 기간에 농민 또는 하층민들이 불법을 저지르거나 약탈하는 경우를 목격하고 대사를 그르치겠다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바로 이 점이 김개남의 행동과 다른 점일 것이다.
전봉준이 9월 대일 전면전을 펼칠 적에 그는 광주 일대를 지키며 군수전(軍需錢)이나 군량미의 조달에 앞장섰고, 또 일본군이 남쪽 바다로 올라온다는 정보에 따라 남쪽 방어 임무를 맡고 있었다.
전봉준의 주력 농민군이 공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어 원평․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해산하자, 그는 잔여 농민군을 이끌고 광주․나주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그러나 또다시 패배를 거듭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옛 연고지인 홍덕현 안현리(지금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 이씨 재실에 부하 두 명과 함께 몸을 숨겼다.
그런데 일을 그르쳤음을 알고 재실지기인 이봉우에게 “그동안 너에게 진 빚을 갚겠으니 네가 나를 고발해서 큰 상을 받아라”하고 부탁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아들 응수의 증언.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 참고).
이봉우는 뒷날 손화중을 잡은 공로로 황해도 증산 현령이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믿을 수가 없다. 우선 이봉우는 재실지기가 아니라 ‘유학’이라는 양반 신분이었다. 또 손화중을 잡는 데에 다른 고을인 고부․순창의 민병 10여 명이 동원되었고 이들은 그를 잡은 공로로 포상을 받았으며 잡힐 적에 그의 부하 두 명이 포살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손화중은 일본군에게 인계되어 나주의 초토영 감옥에 갇혔다. 좁은 초토영 감옥은 몸도 움직일 수 없는 초만원이었다. 이보다 먼저 잡혀 온 전봉준 등 여러 동지들과 만나게 된다. 이때의 정경을 두고 이런 기록이 전해진다.
“처음 전봉준이 잡혔을 적에 손화중과 함께 나주에 갇혔다. 손화중이 목사 민종렬을 보고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이라며 자신을 낮추었다. 이에 전봉준이 꾸짖어 ‘어떻게 소인이냐? 민종렬 앞에서 소인이라고 일컬으니 참으로 축생과 같구나. 내가 사람을 몰라보고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할 수밖에’라고 했다”(황현의 <오하기문>).
이 일화는 뒤집어 말하면 손화중의 성격이 부드러움을 보여준다. 어쨌든 두 사람은 서울로 끌려와 함께 재판을 받고 한날 처형당했다. 손화중은 전봉준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태어난 시기는 달랐으나 뜻을 같이하다가 죽음에까지 동반했던 것이다. 재판과 사형될 때의 여러 관계 기록에는 한날에 선고를 받고 처형된 동학농민군 지도자 5명은 모두 너무나 당당해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화중의 동생 익중과 처남 유공선도 잡혀 처형당했고 조카뻘인 손여옥 등 많은 손씨들이 처형당하거나 체포령이 내려져 정읍의 손씨들은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후손들은 손화중의 주검을 찾지 못해 혼장(魂葬)으로 살던 마을 뒷동산에 뫼를 써 놓았다.
손화중의 손자 손홍렬씨는 “할아버지께서 서울서만 처형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시신이라도 수습했을 텐데. 모두들 피해 다니시느라….”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손화중의 손자 홍렬(전 정주시 농협조합장)씨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주검을 모시지 못한 죄송함을 먼저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