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 다리도 길고 목도 길고 부리도 길다. 길기만 한 새가 배 난간에 붙어 서서 수면을 노려본다. 수면에는 숭어새끼가 머리를 드러내고 몰려다닌다. 하도 많아서 물 반 고기 반이다. 새가 수면에 부리를 잽싸게 처박는다. 긴 부리에 채인 새끼가 꼬리를 파르르 떤다.
갈매기는 기겁이다. 낯이 선 새에게 다가가다 자기보다 몇 배는 긴 부리를 보고는 냅다 달아난다. 부리가 길고 짧은 거로만 따진다면 승부는 뻔하다.
"바닷새가 아닌 건 확실하네요." 방파제 어귀에서 해산물을 파는 아낙도 이름이 아리송한 새. 동행한 성수자 시인은 왜가리 같다고 하고 정인 소설가는 두루미가 아닐까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당산나무에 학이 많이 깃들어서 학리지요." 학리 박찬식 어촌계장(65)은 7대째 토박이. 학리 옛 이름은 항구포였는데 학이 서식하면서 학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포구 입구에서 횟집을 하다가 지금은 어장일만 한다. 갈치 배낚시도 좋고 갯바위 낚시도 좋고 해녀가 파는 해산물도 좋다고 학리 자랑을 늘어놓는다. 인상이 선하고 기품이 있다. 학 같다.
어촌계장 일은 7년째. 처음 4년 하고 재신임을 받아 다시 3년째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어른들에게 '너는 학리 뱃놈이니까 뱃놈답게 살아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뱃사람 자긍심 같은 게 읽힌다. 어촌계원이 136명인 학리 주 어업은 주낙. 주낙은 낚시도구의 일종이다. 한 줄에 여러 개의 바늘이 달려 있다. 인근 칠암이 그렇듯 이 일대는 장어가 주종. 그러니까 장어주낙이 학리 생계를 짊어진 어업이다. 가자미도 쏠쏠하다.
바다 사정은 어떨까. 대뜸 푸념이다. 한일어업협정으로 고기 다 뺏기고 연안에서 밀실조업을 한다고 한다. "밀실요?"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묻는다. 어업협정으로 바다가 좁아져 우리끼리 빽빽하게 조밀하게 조업한다는 것. 뱃사람이 귀해 혼자 뱃일 하는 사람이 많다고도 한다. 기름값 비싼 것도 걱정. 사람 사는 일이 어디라고 다르랴만 바다 사정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날씨마저 안 좋다. 비 올 듯 찌뿌드드하다.
포구 노천에는 아저씨 아주머니 손놀림이 빠르다. 차양막 그늘에 서너 명씩 모여앉아 낚싯줄과 바늘을 손본다. 장어주낙이다. 줄은 둥근 '뿔통'에 둘둘 담고 바늘은 통 테두리에 촘촘하게 꽂는다. 노천 어디에도 장어주낙을 담은 뿔통이 삼단사단 재여 있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고 바늘은 끝없이 이어진다. 저 바늘을 덥석덥석 물면 장어는 대체 몇 마리나 될까.
"백이십에서 삼백 킬로는 잡지요." 미끼는 멸치 아니면 오징어고 바늘은 몇 백 개 몇 백 개짜리가 있고 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는다. 손가락 마디를 잘라낸 실장갑을 낀 장인재(55) 씨. 삼십 년 넘게 배를 탔고 허리수술을 받은 뒤로는 배를 타는 대신에 주낙채비를 차리는 따위 거드는 일을 한다. 장어주낙을 '한 바꾸' 감고 받는 돈은 4천원. 3백 바꾸를 해야 하는데 사나흘은 걸린다고 한다.
뱃일은 배의 크기에 비례한다. 작은 배 뱃일은 당일치기나 일박이일이고 좀 큰 배는 삼박사일 내지는 사박오일이다. 어장은 장 씨 말로는 멀리 가면 일본바다와 맞물린 곳. 경비가 엄청나다고 한다. 사박오일의 경우 여섯일곱 명이 배를 타는데 들어가는 경비는 7백만원 정도. 경비에 선주 몫에 선원 몫에 엔간히 잡아서는 수지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5년에 한 번씩 풍어제를 지내지요." 고기 많이 잡히라고 사고 나지 말라고 지내는 풍어제. 학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지내는데 올해 했다고 조순복(50) 아주머니가 귀띔한다. 방파제 어귀에서 해산물을 파는 아낙이다. 방파제 어귀에는 해산물 횟집이 늘어서 있다. 해녀들이 하고 관리는 어촌계에서 한다. 해녀는 오십이 명. 공장이나 회사 나가느라 젊은 사람은 없고 오십대에서 '칠십 몇 살'이다.
'서(西)로 멀리 기차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며, 어쩌면 동해 파도가 돌각담 밑을 찰싹대는 H라는 조그만 갯마을이 있다. 더께더께 굴딱지가 붙은 모 없는 돌로 담을 쌓고, 낡은 삿갓모양 옹기종기 엎던 초가가 스무집 될까말까? 조그마한 멸치 후리막이 있고 미역으로 이름이 있으나, 이 마을 사내들은 대부분 철따라 원양출어에 품팔이를 나간다. 고기잡이 아낙네들은 썰물이면 조개나 해초를 캐고….' (-오영수 단편소설 '갯마을'에서)
오영수는 일광을 거쳐 간 소설가. 일제 말기에 여기서 살았고 부인도 여기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 바 있다. 그런 연유로 소설에서 언급되는 H리가 학리가 아닐까 추정한다. '갯마을'은 한 해녀의 고달픈 삶을 다룬 단편소설. 소설 주인공 해녀의 모친은 제주도에서 온 해녀다. 실제로 학리에는 제주에서 온 해녀들이 많았으나 지금은 다 토박이라고 어촌계장은 말한다. 세대가 '한 바꾸' 돈 것이다.
세월은 무섭다. 사람도 바꾸고 풍경도 바꾼다. 동해 파도가 찰싹대던 돌각담은 어땠을까. 포구는 매립되어 반듯하고 네모반듯하게 지어진 양식장 배수구에서 콸콸콸 쏟아지는 물줄기가 동해 파도를 얼씬도 못하게 밀어낸다. 굴딱지가 붙은 돌로 쌓은 담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몇 백 년은 됨직한 마을 뒷산 굵직한 소나무. 사람은 누구누구가 바뀌었고 풍경은 무엇무엇이 바뀌었는지 들려주려는 듯 한일자 입 같은 잎을 씰룩댄다.
방파제는 으레 그렇듯 낚시꾼 차지다. 텐트도 서너 동 보인다. 유모차에 태워진 아기가 보이고 초등학생 두어 명은 신이 나 있다. 감성돔처럼 생긴 고기가 네 마리 다섯 마리 쿨러에 담겨 있다. 아이들을 놀린다. "돈 주고 산 고기지?" 아이들이 펄쩍 뛴다. "아니요. 우리 삼촌들이 잡았어요." 아이들이 펄쩍 뛰니 잠자리도 펄쩍 뛰고 잠자리가 펄쩍 뛰니 참새도 펄쩍 뛴다. 네모반듯한 쿨러가 갑갑한지 감성돔처럼 생긴 고기도 펄쩍펄쩍 뛴다. dgs1116@hanmail.net
■ 일광 해수욕장에는 ... 유배된 윤선도의 詩碑 '갯마을' 오영수 소설碑
일광해수욕장에는 문학비가 두 기 있다. 고산 윤선도 시비와 소설가 오영수 소설비다.
윤선도와 오영수는 일광을 거쳐 간 문인.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가인으로 불리는 윤선도는 일광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오영수는 광복 전후시기를 일광에서 살았다.
윤선도 시비의 한 대목. '제일 무정한 건 이 가을해이니 헤어지는 사람 위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광해군 때 집권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을 거쳐 일광에 유배된 고산을 만나러 온 동생과 헤어지면서 그 감회를 읊은 시다. 지금이 가을. 해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가을 해다.
오영수 소설비는 해수욕장 왼쪽 이천리에 있다. 기장문인협회가 1997년 세운 비로 '갯마을' 한 대목이 각자돼 있다. 언양에서 태어난 오영수(1914~1979)는 1943년부터 일광에 살았다. 일제징용을 면하려고 일광면사무소 임시직으로 근무했다. 이곳에서 김동리와 교분을 쌓기도 했다. 판화가 오윤(1946~1986)이 그의 장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