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의 돌담
안규수
제주는 꿈의 섬이다.
짧은 가을 해가 설핏한 날, 나는 제주 한라산 중산간에 있는 수필가 K의 고향 마을을 찾아갔다. 작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에서 뜻밖에 넓은 밭에 수없이 얽히고설킨 돌담을 만났다. 마침 밭에서 일하시는 마을 어르신을 만나 이런 돌담은 언제 어떻게 쌓았는지 물었다.
“이런 돌담은 이 마을이 생긴 지 300년쯤 되니 그때부터 쌓은 거지.
화산섬 제주도는 돌의 고장이다. 돌은 제주 사람들의 생활 구석구석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제주도에서는 사람들이 사는 집이나 울타리는 풍부한 현무암을 이용해 돌담을 만들었다. 최근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올레길도 거친 바람을 막기 쌓은 돌담을 따라 걷는 경우가 많다. 곶자왈로 이루어진 섬의 특성에 물을 저장하지 못해 농사짓기에는 불리한 환경이지만 섬사람들은 돌을 활용하여 슬기롭게 살아왔다.
제주에서는 돌담 쌓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돌챙이’라고 부른다. 담장 높이가 대개 성인의 허리춤, 높아도 가슴께 정도로 낮다. 얼기설기 대충 쌓은 듯 보이지만 제대로 된 돌담은 반드시 돌챙이의 손을 거쳐야 한다고. 돌챙이는 일도 고되고 박한 대우에 삶을 지탱할 수 없어 점점 사라져 간다고 한다.
돌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돌과 돌 사이의 구멍이다. 그 구멍이 너무 크거나 작으면 담이 무너진다. 바람에 맞서려면 안된다. 바람이 지나도록 길을 터줘야 무너지지 않는다. 섬사람들의 삶의 지혜는 더 있다. 잦은 태풍이 몰려오면 창문을 조금씩 열어 바람길을 터 준다고 한다. 바람이 지긋지긋하지만, 바람이 없으면 못 견더 하는 것이 섬사람들의 생리이다. 바람은 정복이 아닌 숭배의 대상이다. 따라서 바람 신에게 무사와 풍어를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섬사람들은 쌀 한 톨 생산되지 않는 땅에서 오직 조 옥수수 고구마 등 밭작물로 생계를 유지했다. 힘든 삶을 헤쳐나가려면 돌담처럼 유연해야 한다. 너무 고지식하게 맞서면 무너짐을 자초하고 만다. 섬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 온갖 격랑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일은 바로 돌담에 있었다.
내가 제주 돌담에 관심을 두고 찾는 곳이 조천면 ‘돌 문화 공원’이다. 제주의 돌 문화를 집대성한 역사와 문화의 공간이면서 숱한 억압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살아온 섬사람들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돌 문화 공원은 크게 돌 박물관과 돌 문화 전시관, 그리고 야외 전시관으로 나뉜다. 돌 박물관 지하에서는 섬의 형성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물이 있다. 이곳에서는 우주와 지구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내부 구조, 제주의 화산 활동을 알기 쉽게 보여준다. 특히 섬의 지질학적 형성 과정과 암석의 기원에 대해서도 자세히 볼 수 있다. 섬에는 현무암 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화성암과 화산재가 쌓여 생긴 퇴적암이 분포하고 있다. 특히 제주도의 현무암은 마그마가 지표로 분출하여 빠르게 식어 마그마 속의 거품이 빠져나가 생긴 구멍이 많다. 지하 전시실에는 제주돌의 특성을 말해 주는 듯 갖가지 기괴한 형상의 수석이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섬에서 바닷가나 중산간 숲에서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은 검은 줄로 길게 뻗은 돌담이다. 돌담은 화산성 바람이 함께 만든 대표적인 상징적 경관이다. 나는 섬에 체류하는 동안 산골 마을을 찾아 돌담길을 자주 걸었다. 곶자왈 숲길, 머체왓 돌담길 산책도 아주 좋은 힐링의 장소이다. 그런 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돌담을 보면 인공물임에도 자연미를 풍겼고 질서 있는 부드러운 곡선에 정감을 느끼며 삶의 흔적, 마을의 연륜을 읽을 수가 있었다.
섬 전체에 널려있는 돌. 제주 삼다 중에서도 돌이 으뜸이다.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적 지표가 돌이다. 사람이 사는 집, 짐승이 사는 집, 신이 사는 집, 모두 돌담을 두른 것을 보면 돌은 생존을 위한 구조물이다. 돌담은 바람을 막아주고 경계를 확정하며 기르는 동물을 보호해주고 주거와 농업, 목축, 어로 생산력을 담당했던 역사적 의미를 갖는 대표적인 미학이고 문화경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고향 시골 담장은 시멘트로 둘러친 집들이 많다. 얼마나 삭막한지 모른다. 내가 어릴 적 돌담은 말 그대로 돌로 만들어져 바람과 달빛이 드나들 수 있도록 열려있었다. 돌담 곁에는 사계절 꽃이 피고 돌담 아래는 늦게 핀 청초한 수선화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는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섬 제주 돌담은 오랜 세월을 걸쳐 대대로 선조들이 쌓은 노동의 축척, 이름 모를 사람들의 대지의 예술이다. 한라산 중산간 ‘치유의 숲’이나 선흘리 ‘동백동산’에 가면 지금도 태풍에 이 빠진 듯 무너진 돌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돌담에는 섬사람들의 정서와 얼이 배어있다. 돌담은 민중 문화의 산실이다. 그들의 손으로 탄생시킨 돌담이고 그들은 돌담과 함께 살아왔다. 무심한 시간의 힘은 실로 무섭다. 제주 4.3사건은 이들의 삶을 모조리 앗아갔다. 중산간 숲속 돌담은 그들 삶의 흔적이다.
조천면 너분숭이에서 군인 두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학교 운동장에서 남녀노소 400명 이상을 학살한 현장에서 돌담은 그날의 아픔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다. 돌담은 이렇게 흘러간 시간과 현재의 공간을 이어주고 있다. 낭만 분위기로만 바라볼 수 없는 돌담은 내 감성을 자극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다.
그 섬에 돌담은 언제나 찾고 싶은 힐링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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