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낙형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졸업
● 독일 레겐스부르그 대학교 석사학위
● 레겐스부르그 대학교 박사학위(Dr. phil.)
● 독일 세계선교교회 담임
● 現 성결대학교 신학부 교수(기독교 윤리 전공)
◈ 하나님의 통치 :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막 1:14-15)
하나님의 통치 : 왕으로 오신 예수
막 1:14-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의 왕권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반역의 역사이며,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편에서 반역자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의 근원이 되시고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왕권 찬탈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자신의 생존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는 모른다 하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왕권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간에게는 뼈를 마르게 하는 정신적 질병,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육신의 질병과 전쟁으로 인한 대량 살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스스로 생존의 원천이 되시는 아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고 자신의 파멸과 사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에 대한 주권을 자신이 갖고 있는 자가 가는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망의 행렬을 영생의 행렬로 바꾸어 놓으시려고 왕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통치권을 예수님께 반납하라고 강권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합시다. 그 순종의 길이 영생과 부활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이 하나님의 왕권에 대해 도전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한 분을 제외하고 땅 아래, 땅 위 그리고 공중에 거하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다스림의 방법은 사랑과 지혜입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사람 안에 있던 모든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계속하여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에 대한 통치권을 움켜쥡니다. 그 결과 다툼이 생기고 전쟁이 발생하여,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피로 얼룩집니다.
2. 아브라함의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멸망의 역사를 끊으시기 위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선택합니다. 그와 계약을 맺고 그로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 구원의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3.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이 된 야곱을 택해 그의 후손 열 두 지파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 했습니다. 열 두 지파는 모든 이방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즉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형성이 되고, 그들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며 애굽 왕인 바로의 억압 아래서 살게 됩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구 언약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사건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심으로 모세에게 비로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알게 하시고(출 3:4-5; 6:3-8), 역사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전능하심을 이스라엘과 이방 민족에게 알리고자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을 좇던 바로의 군대는 갈라진 바다 속에서, 그들의 진행을 심히 어렵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간섭을 경험합니다. 그 때에 애굽사람들은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라고 (출 14:15)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께서 애굽사람들에게 행하신 이 큰 일을 보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출 14:31). 출애굽기 15장 1-15절에서 모세는 열방, 즉 블레셋, 에돔, 모압 그리고 가나안의 거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돌 같이 고요하였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라합 역시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서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심을 알았고(수1:8-11), 추적하는 병사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행위를 통한 인도하심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구원행위를 상기시키시면서 모세를 통해 은혜언약을 이스라엘에게 제시합니다(출 19:5)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시에 응답하므로 계약이 맺어집니다(출 19: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을 담은 십계명과 그들이 지켜야할 법도를 전달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므로 은혜의 언약에 응답해야했고, 그 응답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5.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재도전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여 살게 되면서, 다시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권을 왕을 세워 그에게 주라고 졸라댑니다. 하나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그들에게 사람을 세워 왕이 되게 하고 그를 통한 이스라엘의 통치를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통치권은 칼 위에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된 이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왕들에게도 늘 착취를 당하고 억압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자식들은 전쟁터에 내보내져서 늘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셨습니다.
6. 다윗 왕권 계승의 언약과 성취
사무엘하 7장과 열왕기상 2장은 다윗 왕권 계승을 중심으로 하는 언약과 성취의 역사를 기술합니다.
주전 10세기에 발생한 가까운 미래에 있을 다윗의 왕권 계승에 관한 기록인 사무엘하 7장은 다윗의 후손이 보좌를 계승할 것이며(삼하 7:12), 다윗 왕가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 언약이 성취됩니다(왕상 2:1-4). 이스라엘인들은 이 같은 언약과 성취의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다윗의 위는 사람의 왕통을 제한적으로 의미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7. 예언자들의 예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대한 응답으로 체결된 언약의무를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우상들을 섬겼고, 이스라엘의 정치가들은 백성을 억압하였으며, 법관들은 뇌물을 받고 판결하는 등, 신앙적으로 정치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은혜계약을 파기했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났습니다(렘 2:5).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계약을 파기한 불의한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임박한 심판을 선포했으나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던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과 587년 하나님께서 행하신 두 번의 심판으로 멸망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의 나라로 포로로 끌려가면서 하나님과 관련된 이스라엘 역사의 제 1단계가 끝납니다. 구원사는 단절됩니다.
제 2단계는 예언자들의 심판과 위로의 선포와 함께 새롭게 시작됩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을 침범한 이방민족들은 단지 신적 진노의 도구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임박한 파국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전혀 새로운 구원을 경험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예언자들이 임박한 파국에 대한 선포와 함께 전해지는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 선포에서 나타납니다(사 49:25이하; 52:10).
이 새로운 소망은 우선 현실적인 위기로부터의 해방이며, 결국 궁극적인 구원의 때를 바라보게 합니다(사 52:7).
이 선포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구원사는 한 아기의 출생으로부터 그려집니다. 그 아들은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 불리 울 것이며(사 9:6-7),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그 때부터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보존하실 것이며(사 9:7), 하나님의 열심히 이를 이루실 것(사 9:7)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볼 것이며(사 40:5),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실 것이고, 그 결과로, 고레스(사 45:3)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사 43:10), 모든 육체(사 49:26)에게,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에 이르기까지(사 45:6)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통하여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그리고 창조주로서의 그의 신성이 인식될 것이라고 전합니다.
원래 마지막 때의 궁극적인 하나님 통치의 알림은 전적으로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역사의 틀 속에서 되어졌었습니다(사 52:7; 슥 14:9).
이렇게 오바댜와 스가랴는 이러한 사상을 이중적 의미에서, 옛 다윗 왕국의 지상적 - 민족적인 재건의 희망의 의미에서 그리고 다가오는 시대와 연결된 초월적 의미에서 표현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렇게 왕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단 4:31)
결정적인 것은 보편적으로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8. 왕이신 하나님의 출현, 하나님의 통치의 현재와 미래
이제 전적인 변화의 때가 도래했습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의 출생은 마태복음 2장 1절에서 4절까지의 예수님의 출생에 관한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또한 공생애 가운데 자신이 만유의 왕이 되심을 주장하셨습니다.
1. 예수님의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좇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눅 11:21 ; 마 12:28)고 하셨습니다.
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외칩니다.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눅 19:38)
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하여 말합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 안 할지어다 하며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막 27:29)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왕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에, 왕이셨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왕되심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죽였으나,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게 하셔서 예수님의 왕권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신분상 왕으로 태어나셨으며, 왕권을 가지고 사셨으며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버지의 왕권이 그 안에서 현재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며 왕으로 다시 오실 것을 확신케 합니다.
맺는 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성만찬에 참여하므로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라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를 왕의 자리에 올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자는 왕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을 기꺼이 왕과 제사장으로 대우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통치를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이기적 통치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통치권을 예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노윤식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졸업
● 한국 외국어대학교 독어과 졸업
● 서울 신학대학원 졸업
● 미국 Alliance 신학대학원 졸업(신학석사)
● 미국 Asbury 신학대학원 졸업(선교학박사)
● 現 성결대학교 신학대학원 선교신학 주임교수
◈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눅 10:1-2)
◈ 선교명령 (마 28:19-20)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눅 10:1-2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70인을 세우시고 세상을 향해 전도하러 보내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에는 “추수의 비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곡식이 익어져 추수할 때”가 된 곳에 70인의 제자들을 보내신 사실입니다. 주님은 전도대를 빈들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또 곡식이 있기는 있어도 덜 익은 곳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추수할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곡식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추수할 때가 된 곳은 툭 건드리면 알곡이 나올 정도로 “익은”사람들이 많은 곳을 가리킨다. 한 마디 말로 전도를 하자마자 “왜 이제 오셨어요? 기다렸습니다"라고 복음을 수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추수할 때가 된 곳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가장 필요한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잘 익지도 않은 사람들한테 온갖 정성을 다 쏟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9절에서“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하셨고, 12-13절에서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한탄하셨습니다. 이들은 아직 익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선교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종족은 선교사에게 “우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가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하며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얀마의 카렌족의 경우, “잃어버린 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830년대 선교사가 복음전파를 하자마자 그들이 찾던 “잃어버린 책”이 성경임을 받아들였습니다. 미얀마의 카친족도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한 권의 책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믿고 그 책을 언젠가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중국의 리슈족과 태국의 쿠이족도 이 “잃어버린 책”을 기다려왔습니다.
이들에게 선교사가 갔을 때 수 천명씩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곡식이 익었던 것입니다. 여기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는데 “사람들이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물론 비신자들에게 계속 전도 선교해야 하지만 “추수할 곳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전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곡식은 바람과 햇볕에 의해 하나님이 여물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바람, 햇볕에 의해 하나님이 여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바람과 햇볕을 성령이라고 부르며 성령께서 사람들을 준비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선행적으로 사람들을 죄, 의, 심판, 복음 등에 대하여 듣고 응답할 준비를 먼저 시키는데 그때가 어떤 사람은 좀 빨리 올 수가 있고 어떤 사람은 좀 늦게 올 수 있는 데 이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수년간 선교학자들의 연구 결론은 “곡식이 익은 때”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한 것처럼 사람들이 복음을 수요할 가능성과 적합한 때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의 수용성은 보통 오랫동안 있던 이웃보다는 새로운 이웃에게 더 수용성이 높고 기존 거주민 보다 새로운 이주민이 새로운 교인이 되는 비율이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수용성은 한 가족의 성원에게 인생의 중요한 변화가 주어지는 때, 즉 결혼, 출생, 성년, 죽음 등의 전이 기간(transitional period)에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인생의 변화 주기에 맞추어 한 가족 전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져 주는 교회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는 앞으로 개인전도에서 공동체 가족 중심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교회는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확장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익은 곡식”들을 찾아 나서야만 합니다. 그리고 초대해야 하고 그들이 일할 수 있도록 환영하고 융합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방법 즉, “추수할 일꾼”으로 꼭 필요한 곳, 익은 곡식이 많은 곳으로 제자들을 파송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추수할 곳으로”파송하는 지혜가 오늘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을 향해 떠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지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오늘 이러한 그리스도의 보내심의 지혜가 졸업생 여러분들이 앞으로 일할 사회와 직장, 교회에 적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졸업생 여러분들!
여러분들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 중에 찾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사역하시기를 바랍니다.
선교명령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한국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 유명해졌습니다. 6,000여명의 한국인 선교사가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태평양 연안국 등 전세계적으로 사역하여 한국은 명실상부 선교 대국으로 변모했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의 열풍은 8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발전과 해외여행 자유화의 바람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한국 선교가 세계선교 영역에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감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여러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습니다.
한 예로 동남아 지역을 비롯해 많은 제 3세계권의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선교의 가부장적(paternalism)이고 밀어 부치는(aggressive)선교에 대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들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은 한국사람들의 급하고 무례한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 동남아 지역의 교회 사모님이 복부 수술을 해서 아파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약속을 하지도 않은 한국에서 온 교회 선교 방문객 여러분이 한 떼로 몰려왔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국 목사님이 기도를 해준다고 하면서 아픈 곳을 말하라 해서, 배가 아프니 기도해 달라했더니 한 목사님이 그 수술한 배를 막 치면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그 사모님은 배가 끊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한국사람들은 너무나 공격적이고 상대방의 인격을 무시하고 있다고 토로하였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목사님들의 얘기는 더욱 가관입니다. 한국에서 선교 방문단이 오면 손목시계를 뿌리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명령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선교라는 것이 외국에 나가 물건을 주고 돈주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오히려 선교에 역효과를 내게 되며 선교의 장애가 되어지는 요소로 작용되어 집니다. 태국의 경우, 어느 한국 선교사가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에서 불상을 제거할 때 대낮에 망치를 들고 와서 불상머리를 깨부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이 신고를 해서 그 선교사는 구속되었고 곧 추방되었고 이 사건은 태국신문에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여기에 선교방법의 문제가 있습니다. 너무 과격하다는 것이며 생각이 부족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생 섬겨오던 불상을 깬다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또한 그 마을 사람들에게 큰 심리적이고 영적인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것을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그저 실행하면 인심을 잃게 되고 오히려 복음 선교에 역효과가 납니다. 만일 그 마을 사람들까지도 선교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맞는 방법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현지 태국 목사들의 경우, 그 불상을 제거할 때에 밤중에 마을 사람들 몰래 그것을 차에 실어 산에 가서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교명령이란 무엇입니까?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하고 무례하고 경우가 없고, 혼자 잘 되려고 하는 이기주의 모습으로 변질되어 비추어진다면 하나님의 복음 선교의 본래적인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태국에서 120년 이상 선교역사가 있지만 실패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전체인구의 1%만이 기독교 신자입니다. 선교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복음이란 요한복음 3장 16절인데 태국에는 하나님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사랑이란 말 역시 육체적인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태국불교에서는 이 사랑, 욕망을 없애는 것이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적 욕망, 사랑을 하라고 하니 예수 안믿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60평생 태국 선교를 한 미국 선교사는 자기 방법만으로 고집을 했으나 그 결과가 미미했습니다. 그는 “예수 안믿으면 지옥갑니다”라고 평생을 외쳤습니다. 어느 태국 여인이 “다 지옥가면 저만 혼자 천국 가느니 지옥갈랍니다” 하며 복음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서양식 기독교, 개인주의 기독교 방법이 동양의 그리고 성서적인 공동체적인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실패한 단적인 예인 것입니다.
선교명령을 어떻게 잘 수행하겠는가? 하는 것은 복음을 그 나라의 풍토에 맞게 토착화시켜 나가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그 나라의 문화적 관습들과 종교들을 잘 알고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그 종교 문화의 이해 바탕 위에서 참된 성서적 기독교 공동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되 그 나라 민족에게 적합하게 전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졸업하는 졸업생 여러분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한국교회와 사회 일선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정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분이 살고 있는 현실의 삶속에서 어떻게 전하며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라며 삶에 적용시키시기를 바랍니다.
박종명 목사 편 ∙∙∙∙∙∙∙∙∙
● 성결대학교 4회 졸업
● 삽교교회 원로목사
● 홍성군 갈산면 가곡리 48 (0451-631-3730)
● 자녀 5남 1녀 <1남 / 박기영 목사, 군목
2남 / 박창영 목사, 성결대학교 교수,
3남 / 박찬영 목사, 참좋은 교회 담임,
4남 / 박소영 목사, 반촌교회 담임
5남 / 박요섭 성결대학원 1회,
녀 / 박난영, 유아교육과 1회
사위 / 양준기 목사, 군목>
◈ 부모가 남길 최고의 유산 (신 6:1-9)
◈ 누구의 잘못입니까? (삿 19-20이 주는 교훈)
부모가 남길 최고의 유산
신 6:1-9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기업을 얻고 안식의 복을 누릴 것이지만, 모세는 그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요단 이편에서 부르심을 받아 세상을 떠나게 되는 모세의 마지막 유언적인 권면의 말씀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많은 자녀들이 번성케 될 것이지만, 너희는 육적으로 자식을 기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식을 양육하여 신령한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키워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시는 모든 축복 중 가장 큰 축복은 사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부모된 자들이 자녀 귀한 것만 알지 그 책임이 막중한 것은 생각지 못합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모님들은 항상 자녀를 위하여 준비하고 살아가는데, 유아가 탄생 전부터 아이를 위해 유아용품점을 가며 유치원에서 대학 그후 성년에는 결혼준비 그리고 최후에는 많은 유산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재산을 물려받고 꼭 지킬 것인지는 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화근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복이 되고 성공으로 이끌 수 있는 최고 유산이란 무엇입니까? 정말로 좋은 유산을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비밀을 알고 훌륭한 부모가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1. 훌륭한 기억의 유산을 줍시다.
어렸을 적의 생각과 기억들이 즐겁고 좋은 추억들로 남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두 가지 기능을 주셨습니다. 기억과 망각을 가진 인간만이 추억을 간직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이란 가장 달고도 가장 쓴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과거의 쓰고 단 것을 지워 버리지 못합니다. 특별히 부모님의 신앙생활은 가장 중요한 기억으로서, 성경공부, 기도생활, 전도활동, 교회와 사회에 봉사활동 등 모든 미담들은 최고의 유산들이 되어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줍시다.
2. 훌륭한 습관의 유산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보여주고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품성과 습관이 인격 조성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심리학자의 말을 빌릴 것 없이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어느 사람이 하는 말에 생각을 심어서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어서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어서 품격을 거두고, 품격을 심어서 평생의 운명을 거둡니다.
그만큼 습관은 중요한 것입니다. 습관은 유년시부터 필요하니 좋은 습관에 노력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평범하지만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 예의바르게 행동하는 것 혹은 교회가 놀이터가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라든지, 대인관계는 겸손하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고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희생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신앙 생활 전반이 습관화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교육을 통해서 사람은 만들어집니다. 내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을 가르쳐 주고 있는지 생각을 해봅시다.
3. 아이들에게 고상한 이상을 심도록 노력하라
아이들 스스로가 장래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자리 잡히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고귀한 인격, 성모 마리아 같은 거룩하고 순결한 성품 이런 높은 비전과 이상을 갖도록 부모가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고귀한 인격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결국은 부모가 고귀한 성격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지 아니하면 자녀들이 성스러운 모습을 어디서 보겠습니까? 고상한 품격을 모범으로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기억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엄숙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본 적 있습니까? 여러분이 경건한 생활의 모습들을 아이들이 본적이 있습니까?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받은 인상은 크나큰 영향력을 좌우합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받은 인상은 평생 사라지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고 고귀한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모는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은 가정에서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생애는 어린 자녀에게는 영화필림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잘 성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님 자신들이 먼저 충성스런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 론
우리 자녀에게
1. 훌륭한 기억을 주도록 합니다.
2. 좋은 습관을 길러주도록 합니다.
3. 이상과 꿈을 심어주도록 합니다.
누구의 잘못입니까?
삿 19-20장
삿 19:1~20장이 주는 교훈
삿 19장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의 날을 보내매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라 … …
삿 20장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 이스라엘 자손의 미스바에 올라간 것을 베냐민 자손이 들었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로되 이 악한 일의 정형을 우리에게 고하라 … …
19:1 /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더니(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는 레위 사람이 첩을 두었다는 것은 불법이며, 그만큼 재산이 넉넉했음도 볼 수 있습니다.)
2절 / 그 첩이 남편과 다툰 후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의 날을 보냈습니다(여인으로서는 이미 자기의 위치를 잃었기에 이혼을 당하여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3절 / 그 남편이 그 여자에게 다정히 말하고(레위 사람이었지만 여인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다시 집으로 데려오려는 것은 좋은 행위입니다) 그를 데려오고자 하여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데리고 그에게로 가매 여자가 그를 인도하여 아비의 집에 들어가니 그 여자의 아비가 그를 보고 환영하니 거기에서 3일을 묵게 되었습니다. 계속 붙잡는 장인의 호의에 5일째 되는 날 저녁에야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때로는 상대의 호의조차 뒤로 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기회를 놓치면 그로 인하여 화를 겪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레위 사람은 자기의 직무시간을 지키려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너무 시간 빠뜻하게 출발한 것은 그리 좋은 일은 아닙니다. 아침 일찍 출발을 하였더라면 아무런 사고 없이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10절 / 그 사람이 다시 밤을 지내고자 아니하여 일어나 떠나서 여부스 맞은편에 이르렀으니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
11절 /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웠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자고 하였습니다.
12절 / 레위 사람인 주인은 그에게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외인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가자고 하였습니다(레위 사람이 재물과 첩을 취하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래도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자세는 바람직합니다).
14절 /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15절 /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이켜 들어가서 성읍 거리에 앉았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었더라(여부스에 머물 것을 이스라엘의 땅에서 머물기 위하여 기브아로 왔는데, 이스라엘의 따뜻한 온정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러한 온정이 어디에 가고 그네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는 그만큼 강퍅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절 /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었다
17절 /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거리에 행객이 있는 을 보고 유다 베들레헴에서 에브라임 산지 구석으로 가는 사람인 것을 알자 그들을 영접하였는데, 노인은 아브라함처럼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영접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영접이었습니다.
22절 /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비류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주인 노인에게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고 하였으나 집주인 노인은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절을 하였다. 나그네를 보호하자는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결혼하지 아니한 자기 딸까지 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 이상스러울는지는 몰라도 나그네를 보호하는 노인의 마음만큼은 대단한 것입니다.
25절 /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로 붙들어 내매 그들이 그에게 행음하여 밤새도록 욕보이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26절 / 동틀 때에 여인이 그 주인의 우거한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누웠다가 죽었습니다. 레위 사람은 이에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갔습니다.
29절 /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취하여 첩의 시체를 붙들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냈습니다(여기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정식 아내도 아닌 재산 목록에나 들어가는 첩의 죽음으로 인하여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복수하기 위하여 시체를 12동강이를 내어 사방에 보냈다는 것은 앞뒤를 생각지도 아니한 행동입니다.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여 원수 갚겠다는 불타오르는 복수심 때문이었습니다).
30절 /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무슨 일이든지 한 쪽 말만 듣고 행동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작은 의협심에서 전쟁이 발생되는 일이 종종 있음을 생각할 때에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것이 아닌 자기 속에서 나오는 열심이었다면 자숙할 필요가 있습니다).
20:1 / 이에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와 길르앗 땅에서 나왔는데 그 회중이 일제히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으니(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곳에 모였지 하나님 앞에 모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2절 / 온 백성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은 하나님 백성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사십만이었으며(여호수아 이래 이렇게 모여 싸우려고 한 적은 없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정작 해야 할 일인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모였더라면 얼마나 유익한 모임이 되었을까 말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임은 쓸데없는 모임이며, 죄를 짓는 모임이었습니다).
7절 /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가 다 여기 있은 즉 너희의 의견과 방책을 내라
8절 /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가로되 우리가 하나라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며 하나라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이렇게까지 행한 일이 과거에나 앞으로도 얼마나 있었을까요? 의의 일이 아닌 이러한 모임에 모두가 동참하겠다는 것은 의아한 일입니다. 결코 복된 모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1절 / 이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합심하여 그 성읍을 치려고 모였더라(레위인으로부터 한족 이야기만을 전해들은 이스라엘 회중들은 기브아 사람을 치려고 그것도 기브아 사람 전체가 행한 것이 아닌 몇 명 안 되는 깡패들이 한 일을 가지고 이스라엘 회중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난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마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란 말을 듣고자 했던 사람들처럼 작은 일을 큰 일로 비상시켜서 일을 크게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 일이 그렇게도 없느냐는 말을 듣기에 알맞는 행동들이었습니다).
12절 /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 온 지파에 사람들을 보내어 두루 행하며 이르기를 너희 중에서 생긴 이 악이 어찜이뇨
13절 /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 하나 베냐민 자손이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14절 / 도리어 각 성읍에서 기브아에 모이고 나가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고자 하니
15절 / 그 때에 성읍들에서 나온 베냐민 자손의 수는 칼을 빼는 자가 모두 이만 육천이요 그 외에 기브아 거민 중 택한 자가 칠백인데
16절 / 이 모든 백성 중에서 택한 칠백 명은 다 왼손잡이라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베냐민 사람들이 기브아 사람 곧 비류를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자는 이스라엘 회중의 말을 무시한 체 자기네 동향 사람이라고 편을 들어 거절하므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베냐민 사람들이 이스라엘 회중의 말이 옳은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을 내세우며, 자기네들의 힘을 믿고 전쟁을 하자고 덤벼든 것입니다. 설령 숫자적으로 베냐민이 우세할지라도 또는 군사력으로 월등할지라도 이번 일은 몇 사람의 비류에서 비롯된 일로서 도저히 명분이 서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회중의 1/10도 안되는 숫자를 가지고 싸우려고 덤벼든 것은 겁없는 어린아이의 행동일 뿐입니다. 명분도 없고, 의로운 일도 아니며, 숫자적으로도 안되는 싸움을 싸우려고 한들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18절 /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먼저 일지니라
19절 /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여기에서 집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총회 기간 동안 언약궤가 있는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이번 전쟁을 여호와의 이름과 능력으로 수행되는 聖戰이라고 보고 전쟁을 여호와와 함께 시작하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행동입니다. 누가 먼저 올라가서 싸우리까?라는 질문에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유다 지파가 선발대로 공격하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전쟁의 결과는 어떻게 판정이 나왔습니까?
20절 /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가서 항오를 벌이고 거기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절 /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완전한 이스라엘의 패배였습니다. 40만명의 이스라엘 회중이 26,00명 밖에 안되는 베냐민 사람들에게 22,000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패배였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패배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회중은
22절 /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항오를 벌였던 곳에 다시 항오를 벌이니라
23절 /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절 /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절 /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일만 팔천을 땅에 엎드러 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스스로 용기를 내어 다시 전투에 임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 저물도록 울며 다시 나가 싸울 것을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시 18,000명이 전사를 했습니다. 막대한 손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하나님께 묻고 나갔는데 말입니다. 첫 번째 전투에서나 두 번째 전투에서나 모두 그들 자신의 죄악을 제거하지 아니하고, 자기네들 욕심과 분노에서 나온 전쟁이었기에 이렇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신 것은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깊은 섭리였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죄에 대한 심판일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형식적으로 구하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자 했던 그들의 신앙적인 잘못, 또한 자신의 욕심에 의하여 응답해 달라고 부르짖은 잘못된 기도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간구를 올려야 합니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하니까 무조건 앞뒤를 가리지 않고 구했다고 하였을 때에 과연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습니까?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은 저주이지만, 무응답은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우리의 기도에 응답치 않으신다고 하여 쓸데없이 불평․불만하지 마십시다).
26절 /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서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고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절 /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절 /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셨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묻자오되 내가 다시 나가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이제야 이스라엘 회중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번제를 드린 결과 하나님께로부터 그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는 응답을 받게 됩니다).
29-47 / 이스라엘이 기브아 사면에 군사를 매복하여 전투한 결과 3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앞에서 베냐민을 쳐서 파하게 하시매 46) 이 날에 베냐민의 칼을 빼는 자의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이니 다 용사더라 47) 베냐민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완전한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결국 베냐민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기브아의 깡패 몇 사람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어서 장정 중에서 6백 명만이 목숨을 부지하여 림몬 바위에서 넉 달을 지내는 큰 패배를 겪게 되었습니다).
48절 /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
21:1 /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든지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아내로 주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라(작은 불꽃 하나가 온 이스라엘을 전쟁으로 몰아 이스라엘 사람 38,000명이 죽고 베냐민 사람 25,100이 죽는 큰 내란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누구의 잘못인가를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1. 내란의 원인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레위 사람이 첩을 취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첩이 남편과 싸우고 문란을 일으켜 친정으로 간 것도 원인이 된 것입니다.
2. 레위 사람이 장인의 집에 가서 문제가 잘 해결되는 듯 하였지만 장인의 지나친 호의에 레위 사람이 푹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직무를 소홀히 하고 빢빢한 시간에 맞춰 돌아오려는 잘못된 생각에 그만 하루 밤을 머물게 된 것이 화근을 조성시키는 원인 제공을 하였습니다.
3. 여부스 성읍에 거하지 않고 베냐민 사람 기브아 성에 거하려고 온 레위 사람과 그 일행을 영접치 않고 쫓아낸 기브아 사람과 그들이 갖고 있는 돈과 재물을 약탈하려고 한 비류들의 잘못은 가장 큰 죄악입니다. 물론 기브아 사람 천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인이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영접한 사실은 훈훈한 정을 느끼게 합니다.
4. 첩을 죽음에 대하여 분개한 나머지 시체를 12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보낸 레위 사람의 행위는 있어서는 아니될 잘못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전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단순하게 자기의 기분대로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가 됩니다. 레위 사람으로서는 근본적인 원인이 자기에게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조용히 문제를 종결지어야 했을 터인데, 그러한 일은 생각지도 않고 오직 남의 잘못만을 지적하여 분개하다보니 복수심에 불탄 행동밖에는 나올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복수를 한다고 하여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요,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5. 내 편, 네 편을 가릴 것 없이 기독교인들은 항상 의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편에 서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정에 끌리거나 기분에 끌리면 반드시 그에 대한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회중은 레위 사람의 말만 듣고, 베냐민 사람은 기브아 깡패라 할지라도 자기네 사람이라는 점에서 끼리끼리 함께 동조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만일 조금씩만 냉철하게 생각하였다면, 나의 입장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하였다면 의외로 문제는 쉽게 끝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네들을 대표할 사람이 나와서 좀 더 냉철하게 생각하였다면 하는 아쉬운 점을 남깁니다. 이렇게까지 지도자가 없었는가 말입니다.
6. 이스라엘 회중이 전쟁에서 누가 선봉장이 될 것과 울면서 2번째 전쟁에 나가기를 바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뜻을 들어주셨지만 오히려 그들은 2번씩이나 소수의 베냐민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내 편만은 아니십니다. 우리가 의의 편에 섰을 때에는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시지만 그렇지 않고 불의한 편에 서있다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응답은 오히려 재앙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삼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기도할 때에 말을 먼저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편이 더 유익할 것입니다.
7.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이스라엘의 내분으로 인하여 수많은 귀한 목숨을 잃게 된 점에 대하여 모두가 다 잘못되었음을 공감케 됩니다. 역시 잘못된 점은 많았지만 역시 하나님다운 면이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의 몰락은 이스라엘 회중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이미 때늦은 아픔이었습니다. 남은 600명에 대한 특별한 배려로 베냐민 자손은 종족의 멸망은 면하지만 오랜 동안 소수의 지파로 남는 가슴 아픈 역사가 남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내분을 틈타서 외부의 침입이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까요? 오늘 삿 19-20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여러 모로 유익한 교훈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