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광주 보은사 방거사회 사찰순례
사찰순례 : 은해사, 거조암, 불굴사 홍주암
일자 : 2022년 7월 16일(토)
은해사(銀海寺)-추사 김정희의 글씨 마력
일제강점기 조선 31본산, 경북 5대 본산, 조선 4대 부찰(富刹)의 하나 그리고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역사가 신라 헌덕왕 1년(809)까지 거슬러 오르는 은해사(銀海寺)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현존하는 암자만도 여덟 개나 거느린, 등 너머 동화사와 더불어 팔공산 안의 절집들을 대표하는 큰 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광객 아닌 답사객이라면 이렇듯 ‘화려한’ 명성에 주눅들지 말고 은해사 큰절은 담 너머로 대충 바라보고 산내암자의 어느 곳으로 곧장 발길을 향해도 무방하다. 큰 절집이기는 해도 아름다운 절집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은해사에 발걸음을 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는 있다. 추사의 글씨가 있기 때문이다. 추사는 1848년 12월 제주도 귀양길에서 풀려나 이듬해 64세의 나이로 한양에 돌아온다. 그리고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 무렵, 불과 2년 남짓의 짧은 서울 생활 동안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그의 글씨가 다섯 점이나 은해사에 전해진다.
1862년 지조(智照)스님이 지은 「은해사중건기」를 보면 “대웅전·보화루·불광각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상공(金相公)의 묵묘(墨妙)”라고 했으며, 그뒤 1879년 당시 영천군수이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의 편액인 은해사 銀海寺’, 불당의 대웅전 大雄殿, 종각의 보화루 寶華樓가 모두 추사 김시랑(金侍郞)의 글씨이며 노전(爐殿)의 ‘일로향각 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이다”라고 했다.
대웅전은 헌종 13년(1847)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로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아쉽게도 이 글씨 ‘은해사’와 ‘불광각’, ‘일로향각’의 세 편액은 그것이 걸렸던 건물들이 중건 또는 이전되는 과정에 있는 까닭에 절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으므로 당장은 볼 수가 없다. 그래도 은해사를 들어서면 두 점의 추사 글씨를 차례로 음미하는 안복을 누릴 수 있는 셈이다. 더구나 그 글씨들은 9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온갖 신산을 겪으며 한결 무르익고 원만해진 추사의 솜씨와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 차츰 노성함을 뛰어넘어 무심함의 경지로 다가가는 그런 글씨들인 것이다.
거조암(居祖庵)-지눌 스님의 정혜결사
거조암(居祖庵)은 영산전과 요사 두 채 그리고 작은 삼층석탑이 들어선 단출한 암자이다. 비록 은해사의 산내암자에 지나지 않으나 그 문화사적 비중은 은해사는 물론 팔공산의 절집 어느 곳에도 첫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이 있고, 후불탱화와 오백나한상이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역사의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그의 영향이 적지 않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거조사라는 이름으로 신라 효성왕 2년(738)에 처음 세웠다는 설과 경덕왕(742~764 재위) 때 왕명으로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지눌이 1190년부터 7년 간 머물면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정혜결사를 시작했다. 결사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신앙공동체 운동, 종교 운동이다. 정혜결사는 개경 중심의 보수화되고 타락하여 많은 모순을 드러내고 있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비판운동이자 이를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이었다.
지눌은 그 구체적 방법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 그는 결사를 시작하면서 그 취지를 밝힌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통해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하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선과 교로 나뉘고, 정과 혜로 갈려 그 두 가지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수행이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와 분열을 일삼던 당시 불교계에 대한 반성과 자각이자 그 혁신을 위한 실천이기도 했다. 거조암은 정혜결사가 1200년 조계산 송광사로 옮겨가기 전까지 그 중심 도량이었다.
요즈음은 3일만 지성껏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신도들의 발길이 잦은 나한기도도량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산전
영산전은 수덕사 대웅전의 뒤를 잇는 백제계 고려 건축이다. 그 동안 고려 말의 건축이라는 의견과 조선 초의 건물이라는 견해들이 오갔으나 해체·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해 홍무(洪武) 8년(1375)에 건립된 고려시대 건축으로 판가름났다. 이로써 우리는 몇 안 남은 고려건축에 거조암 영산전을 추가하게 되었다.
거조암 영산전은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춘 건물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을 극한 구성과 짜임새는 필요미의 극치이다. 나뭇결의 천연스러움이 그대로 살아나고 흙벽의 질감이 부드럽고 따스하게 전해오는 백골단청은 그 어떤 화려하고 정치한 단청보다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단순 소박하고 큰 맛’을 지닌 건물로 국보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넌지시 가르치고 있다. 영산전 앞에 서면 고요한 감동의 물결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른다.
영산탱
영산전 후불탱화인 영산탱(靈山幀)은 그 색조나 화품이 이채로운 불화이다. 많은 불화들, 특히 조선시대 불화들은 청·황·적·백·흑의 다섯 가지 원색을 주조로 그려지고, 그 가운데서도 녹색·청색·적색이 화면을 지배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류의 불화에 익숙한 눈에는 거조암 영산탱이 돌연변이처럼 놀랍게 보인다. 붉은 바탕에 호분으로 선묘만 하였을 뿐 청록색·흑백색 등은 극히 적은 부분에만 사용하고 있으며 바탕색의 농담 변화로써 모든 색을 대신하고 있으므로 붉은 색이 화폭에 가득하다. 그러나 이 붉은 색은 들뜨거나 튀지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다. 고유섭 선생은 영산탱의 색채를 두고 ‘명랑하고 침착하고 품위 있는 색조’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상식을 넘어선 색채를, 그것도 붉은 색을 거의 단색으로 구사하면서 깊은 맛과 전아한 기품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석조오백나한상
거조암의 대명사가 된 오백나한상이 영산전에 안치되어 있다. 영산전을 짓던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운부암의 영파스님이 오백나한 하나하나의 이름을 적은 사실이 있다 하니 적어도 19세기 이전에 이미 나한상들이 조성되었음은 분명하다. 오백나한이라고 몰밀어 부르지만 정확히는 526구이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뒤 호분을 입히고 얼굴과 머리에 칠을 한 나한상들의 자세와 표정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무릎에 올린 양 손으로 점잖게 염주를 돌리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며, 혹은 고요히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혹은 한쪽 어깨를 기울여 옆사람에게 무슨 말을 수군거리기도 하며, 어떤 것은 크게 웃는가 하면 어떤 것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과 우비고뇌와 어묵동정이 천변만화한다. 그대로 인간세상의 한 축도다.
거친 듯 무심한 조각과 천진한 채색이 빚어내는 푸짐한 명랑성이 돋보이는 나한상들로 자세와 표정이 천태만상이다.
조각솜씨가 빼어난 것도, 칠을 올린 재주가 남다른 것도 아니지만 거친 듯 무심한 조각과 졸렬한 듯 천진한 채색이 빚어내는 푸짐한 명랑성이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종교가 갖는 명랑성이란 얼마나 필요하고 귀한 것인가. 영산전의 오백나한상은 거기에 값하는 보배로운 유산이다.
불굴사(佛窟寺)-부처님 진신사리 친견하는 자리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건립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의 말사이다.
690년(신문왕 10)에 창건된 사찰로 알려져 있으며,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불굴사는 690년(신문왕 10)에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고, 옥희대사(玉熙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 원효대사가 불굴사 석굴에서 수행한 것을 계기로 옥희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이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데,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전각 50여 동, 부속 암자 12개, 물방아 8대를 갖추고 승려와 신도들을 공양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불굴사는 임진왜란 당시 훼손되었으며, 1723년(경종 3)에 이르러 중창하였다. 그러나 1736년(영조 12) 홍수와 산사태로 전각이 모두 매몰되었다. 이후 순천 송광사의 한 노승이 불굴사로 와서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1860년(철종 11)에 유혜(有惠)와 쾌옥(快玉)이 중창하였으며, 1939년에 은해사의 장경파백현(張鏡波伯鉉)이 다시 중창하였다.
1988년에 원조(圓照)가 대웅전의 본래 위치를 찾았는데, 그 자리에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적멸보궁을 완공하였다.
진신사리는 1988년에 1과, 1990년에 7과를 각각 사리탑에 봉안하였다. 2014년에 사리탑의 사리를 이운(移運)하였는데, 모두 25과로 증식되었다고 한다. 1990년에 약사보전을 신축하였으며, 2018년에 주지 덕관이 관음전을 신축하고, 2019년에 석등을 복원하였다.
불굴사는 적멸보궁, 약사보전, 지장전, 관음전, 산령각, 독성각, 부도전, 염불당, 범종각, 요사, 공양실 및 종무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심 불전은 적멸보궁과 약사보전이다.
적멸보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팔작기와지붕 구조이며,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법당이다. 불상을 두지 않고 법당 뒤편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법당 안에서 투명 유리창을 통해 사리탑을 바라보면서 예배를 올린다. 적멸보궁 앞에는 보물로 지정된 경산 불굴사 삼층석탑이 있다.
약사보전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팔작기와지붕 구조이며, 내부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불굴사석조입불상이 자연암반 위에 2단의 받침대를 딛고 서 있다.
산령각과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인 전각을 함께 사용하고 있으며, 지장전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염불당도 지장전 1칸, 염불당 4칸으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기와지붕 구조이다.
보물 제429호인 경산 불굴사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 석탑으로, 불굴사 적멸보궁 앞에 위치해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안정감이 있고 탑구(塔區)[탑 주변을 구분하는 구조물]가 마련되어 있어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 석탑으로 주목된다.
홍주암(紅珠庵)-원효대사 수도한 자연 동굴
홍주암은 불굴사(佛窟寺) 산내에 있는 암자이다. 불굴사 경내에서 북동쪽 절벽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면 나오는 자연 동굴이 홍주암이다. 동굴 입구 암석에 붉은 글씨로 ‘홍주암 紅珠庵’이 음각되어 있다. ‘홍주’는 붉은 구슬로 태양을 뜻한다. 홍주암은 원효대사[617~686]가 수도한 동굴이라 해서 원효암 또는 불암으로도 불린다.
홍주암의 역사는 불굴사와 궤를 같이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굴사는 690년(신문왕 10)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원효대사가 불굴사 석굴에서 수행한 것을 계기로 옥희대사(玉熙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찰에 대한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조선 전기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을 공양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홍주암 역시 사찰 내력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사찰과 관련하여 원효대사가 불굴사를 창건하기 전에 동굴에서 기도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동굴이 홍주암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며, 건립 연대는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된다.
1976년 석굴 내부를 보수하던 중 신라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 불상 1점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이관하였다.
홍주암에는 별다른 전각이 없고, 자연 석굴(石窟)과 독성전(獨聖殿)이 구성의 전부이다. 불굴사의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조금 가파른 경사면에 편석을 깔아서 만든 108계단이 나오고, 계단이 끝나면 다시 좁고 가파른 돌계단이 나온다. 이 돌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암석 사이에 ‘홍주암 紅珠庵’이 음각된 암석이 서 있는데, 이 곳에 위치한 동굴이 홍주암이다.
석굴 안에는 약수가 바위틈을 타고 내려와서 모이며 그 옆에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가 각자되어 있다. 원효대사와 김유신이 수행하면서 마셨다는 약수로 ‘장군수’라고도 한다.
약수 앞쪽에는 작은 동종이 바위에 매달려 있으며, 한 단 위에는 자연 암벽에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좌우에 금강역사상을 협시로 하는 불상이 양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홍주암에서 낮고 좁은 통로와 가파른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독성전이 위치해 있다. 독성전은 자연 암석을 뒷벽으로 삼아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지붕 구조로 된 작은 전각이다. 독성전에는 오백나한(五百羅漢) 가운데에서 신통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나반존자(那畔尊者)가 봉안되어 있는데, 삼매(三昧)에 빠지기를 좋아하여 천태산에 홀로 지낸다 하여 독성이라고도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