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동의 역사
좌동이라는 지명은 춘천의 왼편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 좌동의 지명유래는 우동과 같은 맥락에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진다. 춘천의 왼편마을이란 뜻에서 좌리, 좌동이라 부르던 것이 뜻이 좋은 글자를 택하여 좌동(佐洞)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춘천상류를 경계로 중동의 대천부락과 인접해 있는 좌동은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로 달맞이 길이 생기기 전에는 해운대에서 송정, 기장 방면으로 왕래하는 길목으로 김해김씨의 집성촌이었다. 광활한 농지에 수도작을 주업으로 오래전 부터 농경생활을 해온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이 마을 경노당에서 동하면 고문서가 발견되었으며 1924년에 작성된 고문서에는 수백년 전에 신당(神堂)을 창건하여 매년 정월과 유월 2차례 제사를 지내왔다고 되어있다.
장산폭포를 뒤로 하여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장산중턱에는 1925년에 중건된 신당이 돌담에 둘러싸여 있고 마고신위(磨姑神位)가 있는 신당 옆에는 돌샘에 물이 항상 흐르고 있다.
6.25 동란 후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철조망이 쳐지고 농경지 내로 출입이 통제를 받게 되었으며, 1952년에는 탄약 폭발 사고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군사시설 보호구역이 일부 해제되고 신시가지로 조성되면서 이곳에서 후기 구석기시대 유뮬이 발굴되어 해운대의 역사를 재조명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실 마을은 신시가지 조성공사로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지만 좌동마을에서 동쪽 군부대 내에 위치했던 마을로 부흥봉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던 마을이다. 지금 달맞이길인 해송교 밑으로 청사포까지 통하는 길이 있어 청사포 주민이 이곳까지 와서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세실마을은 청사포의 신기마을처럼 좌동마을에서 이주해온 주민들로 새로이 생긴 마을이란 뜻이다.
장산마을은 해발 634m인 장산의 중턱에 자리잡은 마을로 해발 450m나 되는 곳에 위치해 있어 해운대는 물론 부산에서 제일 높은 마을이다.
1960년대 초 이곳에 개간이 허락되면서 초창기에는 전역한 군인 등 40가구 정도가 이주해와 고랭지 채소를 가꾸어 생활해왔으며 한때는 장산마을 무는 크고 맛이 좋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였다.
이 마을의 주민들이 정착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1975년 초부터 일부 가구에서 시작한 젖소사육이다.
마을이 군부대 내에 위치하여 항상 출입에 통제를 받아온 이곳 주민들은 교통편이 없어 비포장 도로를 걸어서 해운대로 왕래하기도 하고 우유회사에서 하루에 2회 운행하는 우유수집 트럭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1985년에 전기가 가설되어 생활불편이 해소되기도 했지만 자녀들의 교육문제로 점점 가구가 줄었고, 특히 1985~1987년 우유파동으로 젖소사육 농가가 일부 폐농하여 이곳을 떠나기도 했다.
신시가지 조성 전 좌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