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本紀)』에서 말하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었는데, 환웅(桓雄)이라고 하였다. (환인이 환웅에게) 이르기를 내려가서 ‘삼위태백(三危太白)에 이르러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고 하였다. 이에 환웅이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고 귀신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정상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그를 일러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하였다. (단웅천왕은)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고 사람의 몸이 되게 하고 단수신(檀樹神)과 혼인케 하여 남자 아이를 낳았으니, 이름을 단군(檀君)이라 하였다. (단군은) 조선(朝鮮) 지역에 웅거하여 왕이 되었으니, 시라(尸羅)•고례(高禮)•남옥저(南沃沮)와 북옥저(北沃沮)•동부여(東夫餘)와 북부여(北夫餘)•예(穢)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후손이다. (단군은) 1038년을 다스리다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으니, 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료는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1287년(고려 충렬왕 13년)에 편찬한 『제왕운기(帝王韻紀)』 중 단군 신화에 관한 내용이다. 이승휴는 당대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왕운기』를 지었다고 밝혔다. 그는 원(元)나라의 지배 속에서 신진 관료로 활동하며 권문세족을 비판하다가 결국 파직을 당한 후 은둔하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제왕운기』를 통해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널리 알려 국왕 중심의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제왕운기』는 『삼국유사』와 함께 단군 신화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 기록이다. 비록 『제왕운기』에 수록된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보다 내용은 소략하지만, 그와 다른 전승을 담고 있어 단군 신화의 원형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두 책의 큰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단군의 표기가 다르다. 『삼국유사』에서는 ‘壇君•神壇樹’라고 하였지만, 『제왕운기』에서는 ‘檀君•神檀樹’라고 하여 단(壇), 단(檀)의 한자 표기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단순히 판각상의 오류일 수 있고 음차(音借)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단군 신화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은 제단(祭壇)•제정일치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제왕운기』에 따르면 수목 신앙(樹木信仰)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단군의 계보와 건국 연대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계보 측면에서 보면,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부모를 환웅(桓雄)과 웅녀(熊女)라고 하였지만, 『제왕운기』에서는 단수신(檀樹神)과 단웅천왕(檀雄天王)의 손녀라고 하였다. 모두 단군을 상제 환웅의 혈통으로 설명하지만, 그와의 혈연 계보가 부계(『삼국유사』)와 모계(『제왕운기』)로 다르게 나타난다. 또한 단군의 건국 연대 역시 『삼국유사』에서는 ‘요(堯) 50년 경인(庚寅)’이라고 하였으나 『제왕운기』에서는 ‘요 원년 무진(戊辰)’이라고 하였다.
셋째, 단군의 후계에 대한 인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부여와 고구려만을 들고 있지만, 『제왕운기』에서는 부여와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와 옥저(沃沮)•예(穢)•맥(貊)까지 거론하고 있다. 고조선의 역사적 계승이 한국사의 여러 나라로 확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여러 가지 내용상의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점도 많다. 한국사가 단군이 세운 조선에서 시작되며, 그 건국 연대는 중국 요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는 점, 단군은 신성한 하늘의 혈통으로 이후 산신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고조선이 이후 여러 나라의 기원이 되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일연(一然, 1206~1289)이 승려였고 이승휴가 유학자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비록 고려 후기 단군에 대한 전승은 여러 갈래가 있었지만,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단군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에 대해 상당히 폭넓게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