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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설
섬세한 에코페미니즘과 현실을 투사하는 예리한 서정
이지엽(시인ㆍ경기대 교수)
김덕남 시인의 첫 시조집 『젖꽃판』에는 아주 다양한 세계의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임종찬 시인은 「사랑, 염원, 그리고 자연과의 호흡」이라는 평문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동경과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애써 배우려하고 실천하려고 하는 시조로 짜여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서정과 의미, 이 양자를 조화롭게 조정하여 시조를 차원 높게 만들었다고 상찬한 바 있다. 다양하면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어 상당한 숙련의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도」, 「아버지, 길을 가다」, 「숭례문, 검은 불꽃을 타고 가다」, 「갈증」, 「아픔은 아픔을 낳는다」, 「백두산에 올라」 등의 작품에서는 조국에 대한 관심과 자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젖꽃판」, 「달의 눈빛」, 「마중물」 등의 작품에서는 가족사에 대한 애틋한 정서가, 「숲, 정리해고되다」, 「점자로 읽는 세상」, 「구제역」, 「황소개구리 유감」 등의 작품에서는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 의식이, 「삼별초의 바다」, 「영릉을 바라보다」, 「한, 청령포에 갇히다」 등의 작품에서는 역사에 대한 자주적 인식과 비극성이 잘 형상화 되어 있으며, 「대의 기원」, 「얼음새꽃」, 「풍란, 향을 품다」 등의 작품에서 시인의 자유의지와 미래지향의 긍정적 삶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번 두 번째 시조집 변산바람꽃은 이러한 다양한 시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한층 세밀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형상화되고 있어 주목해볼 만하다.
1. 섬세한 생태 묘사의 에코이즘과 빛나는 서정
호륵 호륵
호로리요우
숲속의 초록 방언
분수가 솟구치듯
실로폰을 딛고 간다
온 산이
가슴을 푸는
탱탱한
오월 한낮
― 「꾀꼬리」 전문
깔끔한 작품이다. 초장 첫 구를 새 울음소리로 제압한다. 사실 새 울음소리를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김형경 소설가가 일찍이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라고 했듯 ‘꾀꼬리’는 고작해야 ‘꾀꼴 꾀꼴’ 정도인데 이를 아주 이채롭게 잡아내었다. 새 한 마리의 울음은 실로 역동적이다. “분수가 솟구치듯/ 실로폰을 딛고” 가면서 숲들이 깨어나고 종국에는 “온 산이/가슴을” 풀고 있다. “탱탱한” 시적 긴장이 느껴진다. 「노루귀꽃」에서 보듯 “찌르르” 젖이 도는 듯하다.
너를 보면 젖이 돈다
찌르르 길을 낸다
서둘러 방울지는 옷섶을 풀어내면
솜털로
쫑긋 서는 귀
새끼노루 꽃잎 번다
― 「노루귀꽃」 전문
「노루귀꽃」은 우리나라 각처의 산지에서 자라는 다년생 초본으로 나무 밑에서 자라며 끝이 둔하고 솜털이 많이 나있다. 꽃이 피고 나면 잎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노루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너를 보면 젖이 돈다”는 표현은 노루귀의 설화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지만, 이 꽃의 소담하면서도 복스런 이미지와도 잘 연결되고 있다. 관능적으로 흐르기 쉬운 부분을 “찌르르 길을 낸다”라는 세밀하고 정감 있는 표현으로 받쳐주면서 시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방울지는 옷섶을 풀어내”는 표현은 “젖이 돈다”라는 초장의 표현을 이어받고 있는데 방울지며 피어나려고 하는 노루귀꽃의 모습을 형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솜털로/쫑긋 서는 귀”는 노루귀에 잎이 올라오는 모습을 아주 실감있게 잡아낸 표현이다.
제 멋대로 자라나도 때 되면 연지 찍는다
엉덩이와 엉덩이가 춘화를 그리는데
노린재 더듬어간다
발칙한 더듬이
도화살 뻗쳤는가 단내 폴폴 풍겨댄다
풋고추 약오르는 칠월 땡볕 열기 속
풍뎅이 헉헉거린다
속살을 파고든다
― 「복숭아 탐하다」 전문
「노루귀꽃」에 보이는 관능적인 표현은 「복숭아 탐하다」에서는 복숭아라는 과일의 특성을 잘 묘파해내어 이를 섬세하게 형상화시키기도 한다. 노린재의 “발칙한 더듬이”도 더듬이지만 “도화살 뻗쳤는가 단내 폴폴 풍겨댄다/ 풋고추 약오르는 칠월 땡볕 열기 속/ 풍뎅이 헉헉거린다/ 속살을 파고든다”라는 풍뎅이의 투신은 욕망이 꿈틀거리는 생생한 생의 의욕을 실감나게 보여주기도 한다.
웃음을 가득 담은 솜털이 뽀송한 뺨
차마 손댈 수 없어 무릎 꿇고 맞는다
눈두덩 스치는 감촉
눈을 감을 수밖에
꺾일 듯 연한 숨결 지쳐 잠든 아가야
긴긴밤 바라보는 눈물을 보았느냐
한 삼년 널 품을 수 있다면
귀먹어도 좋으련만
바람도 때로는 가슴을 벤다는데
매섭고 차가운 세상 헤집고 올라오다
변산의 어느 골짜기 잔설을 녹이려나
― 「변산바람꽃」 전문
변산바람꽃은 노루귀, 복수초와 더불어 봄의 전령사다. 특히 눈밭에서도 피어나는 꽃들이기에 더욱 던져주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꽃을 통해 봄을 본다는 것은 한국일보 최흥수 기자의 고백처럼 사실 그 봄이라는 게 과장을 좀 보태면 손톱보다 작은 것이어서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해도 보일락말락한 작은 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웃음을 가득 담은 솜털이 뽀송한 뺨/차마 손댈 수 없어 무릎 꿇고 맞”을 수밖에 없으며 “눈두덩 스치는 감촉/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변산바람꽃은 작은 꽃 하나에 다양한 색을 담고 있다. 돌무더기 틈새로 톡톡 튀어나온 모습이 앙증맞고도 기품이 넘친다. 사실 꽃잎처럼 보이는 5장의 하얀 이파리는 꽃받침이고, 퇴화한 꽃잎은 암술과 수술의 가장자리에 노랗게 둘러져 있다. 작은 꽃 하나에 흰색과 노랑, 파랑과 연둣빛 작은 우주를 품었다. (최흥수 기자, <노루귀·복수초·변산바람꽃… 여수 돌산의 봄 전령 3총사>, 2016년 3월 2일자 한국일보)
시인은 이 작은 우주를 간절히 품고 싶어한다. “한삼년 널 품을 수 있다면/귀먹어도 좋으련만”하는 표현
을 통해 그 간절함을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백 년 순례의 길 마침내 돌아와
벼루에 먹을 갈아 물 위에 선시를 쓴다
뼛속을 텅 비운 소리,
새들도 잠잠하다
저렇듯 하늘 품어 몸통 내린 물속이다
손발이야 짓물러도 날마다 빗는 머리
한 세월 삭여낸 가슴 구멍마다 화엄이다
눈비도 달게 받고 달빛도 고이 받아
향기는 나비에게 뿌리는 버들치에게
마지막 남은 한 획에 물잠자리 앉힌다
― 「주산지 왕버들」 전문
또 다른 생태 묘사의 진수는 「주산지 왕버들」에서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장중한 깊이가 느껴진다.
주산지는 조선 경종 원년 1720년 8월에 공사를 시작, 땅을 파고 주위에 둑을 쌓아 그 이듬해 10월 완공됐다. 이후 약 3백 년 동안 주위 산골에서 내려온 물이 여기에 고였으며, 이렇게 모인 물은 농민의 농업용수로 사용되면서 이후 한 번도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 보인 적이 없다고 하니 “몇 백 년 순례의 길 마침내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수백 년 수령의 왕버들과 능수버들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는 “벼루에 먹을 갈아 물 위에 선시를” 쓰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를 “뼛속을 텅 비운 소리”라 했다.
“뼛속을 텅 비운 소리”라니!
주산지의 왕버들은 고색창연하면서도 물 위에 비친 왕버들 그림자를 보면 마치 물속에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 있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하늘과 땅이 마치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낮은 구름과 안개는 인간의 마음 속, 아니 뼛속까지를 시리게 한다. 너와 나의 구별도 없어지고 욕망과 자아도 다 내려놓게 된다. 초록의 물빛이 뼛속까지 스며든다. 마음을 사로잡아 오래 머물게 된다. 별바위에서 서쪽으로 열린 계곡을 따라 맑은 물이 끝없이 흘러내려서 그득하게 고인 산중호수는 울창한 수림으로 둘러싸여 고요하기만 하다. 가히 “뼛속을 텅 비운” 정적만이 거기 남아 있는 것이다. “뼛속을 텅 비운 소리”라 할만하다. 그러니 “한 세월 삭여낸 가슴 구멍마다 화엄이”들어 찬다는 것도 어찌 과장된 표현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더 주목이 되는 것은 이러한 주산지 왕버들을 그냥의 풍광으로 보지 않는 시인의 시선이다. “눈비도 달게 받고 달빛도 고이 받아/ 향기는 나비에게 뿌리는 버들치에게“에게 준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한 획에 물잠자리 앉힌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몸을 다른 생명체를 위하여 다 나눠준다는 것이다. 어설픈 생태시들이 가지고 있는 계몽성 차원과 는 전혀 다른 갈앉히고 묵힌 농도 깊은 에코이즘 시를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꾀꼬리」에서의 “탱탱한” 시적 긴장과 「노루귀꽃」에서의 정감있고 관능적인 표현, 「주산지 왕버들」에서의 깊이 있으면서도 차원이 높은 시적 형상화는 기존의 에코이즘 시가 갖는 단점들을 말끔하게 보완하고 있다. 기존의 에코이즘 시들은 추수주의적인 성과에 급급한 나머지 설익은 서정으로 성급하게 독자들을 주제 측면으로 몰아가려는 난삽함이 없지 않았다.
2. ‘모지랑숟가락’과 ‘냉이’와 ‘빨래판’의 극기적 여성성
여름엔 감자 등을
겨울엔 호박 속을
쓱쓱 긁다 제 살 깎아
껍데기만 남은 당신
한평생
닳은 손끝엔
반달꽃이 피었다
― 「모지랑숟가락」 전문
김덕남 시인의 작품에 많이 드러나는 심상은 오래되고 낡은 것들에 대한 따뜻하고 잔잔한 이미지다.
「모지랑숟가락」에서는 “긁다 제 살 깎아/ 껍데기만 남은 당신”을 얘기한다. ‘모지랑숟가락’이란 끝이 다 닳아서 무디어진 숟가락을 말한다. “껍데기만 남은 당신”은 누구인가. 시인의 어머니이고, 나아가 이 땅의 어머니고, 여자다. 말하자면 여자의 삶이 안고 있는 비극성을 이렇게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비극을 참담하게 그려내지 않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숟가락의 다 닳아서 무디어진 그 끝을 “반달꽃”에 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소 보소 그기 뭐라꼬! 하나 더 얹어주꾸마
건천장 난전에서 호객하는 고란댁
반시도 엉덩짝 들썩
단물을 뿜어댄다
첨부터 줄끼지 와그라요 할매도 참,
뭐라카노 밀고 땡기는 이 맛에 사는 기라
장바닥 질펀한 웃음
꼬인 매듭 다 푼다
― 「건천장날」 전문
「건천장날」에 등장하는 시적 주인공인 고란댁은 나이가 지긋한 할매다. “보소 보소 그기 뭐라꼬! 하나 더 얹어주꾸마” 호객을 하고서 덤으로 주는 것도 “밀고 땡기는 이 맛에 사는 기라”에서 보듯 정이 많은 여자다. 「모지랑숟가락」의 당신이다. 어머니고, 이 땅 여자다. 시인은 일련의 작품을 통하여 이 땅 여자들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혀 같은 새순 나와
톱니가 되기까지
한 생을 엎드린 채
푸른 별을 동경했다
서릿발
밀어 올리는
조선의 저 무명치마
― 「냉이」 전문
「냉이」를 통해서 그려지는 자아의 성장은 “혀 같은 새순”→“톱니”로의 전환이고, “톱니”의 날카로운 이미지는 “서릿발”로 연결되며, “서릿발”은 “조선의 무명치마” 이미지로 연결된다. 시인은 결국 「냉이」를 통해 인고의 과정을 겪으며 홀로 서야하는 한국 여인들의 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뉘 고르듯 잡풀 뽑는 왕릉 위의 저 여자
켜켜이 쌓인 시간 호미질로 불러낸다
한 생이 소금꽃 피어 속살이 내비치는
솔 향 담뿍 풀어 어질머리 앓는 한낮
베이고 뜯겨져도 감싸는 풀잎처럼
비바람 끌어안는다면 다시 천년 못 가랴
굽 높은 접시 가득 제단에 올리는 땀
스란치마 한 자락을 찰찰 끄는 그날 바라
덩두렷 봉분에 앉아 알 하나를 품는다
― 「알과 여자―오릉에서」 전문
「알과 여자」에서 여자는 왕릉에 올라 잡풀을 뽑는 일을 하지만 결국에는 대를 잇는 것은 여자들의 일이 아니던가. “베이고 뜯겨져도” 시련 속에 “비바람 끌어안는다면 다시 천년”을 이어갈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여자는 “봉분에 앉아 알 하나를 품”으며 다시 천년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메로 치고 토닥이며 짓이기는 맨발이다
숨구멍 내기까지 무수히 밟아온 길
물레질 둥두렷하게 바람소리 담는다
불인들 뜨거우랴 뼈대 하나 세우는 일
손 없는 날을 받아 서늘한 숨결 돌면
천일염 제 살을 녹여 옹기 가득 단맛이다
금줄 친 한 시절은 가르마도 단정하다
씻고 닦는 젖은 손이 갈라지고 터지는 날
어머니, 파편을 안고 흙의 길을 가고 있다
― 「흙의 길」 전문
「흙의 길」 역시 어머니로서의 도정道程이 그려지고 있다. 그 길은 “메로 치고 토닥이며 짓이기는 맨발”의 길이며, “숨구멍 내기까지 무수히 밟아온 길”이다. “불인들 뜨거”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뼈대 하나 세우”고 하나의 ‘옹기’가 되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옹기가 되어 여기에 “천일염 제 살을 녹여”내는 구실을 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갈라지고 터지”고 “파편을 안고”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흙의 길인 것이다. 흙으로 빚어 옹기가 되고 쓸모를 다하여 소멸되는 흙의 전 과정을 통해 어머니의 삶이며 여자의 삶을 형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브라와 청바지가 뒤엉켜 돌아간다
젖은 숫자 눌러놓고 하프를 켜는 여자
금간 손 엇박을 치며 빨래판을 긁는다
절은 때 씻는 하루 비벼대는 요철 속을
부르튼 물집들이 시나브로 터지는 밤
오그린 발칫잠에도 꿈속 길을 달린다
갸르릉 밭은 소리 리듬을 타다보면
헐거운 솔기 사이 얼핏 뵈는 푸른 하늘
옥탑방 바지랑대 세워
맑은 햇살 당긴다
― 「빨래판」 전문
이 작품에서 ‘빨래판’은 하나의 상징적 기제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여자들의 간단치 않은, 험준한, 삶을 축약적으로 보여준다. 더러운 빨래들을 문지르는 빨래판은 여자 고유의 영역이다. 살살 문지르기도 하지만 때를 말끔히 씻어내기 위해서는 힘을 다하여 박박 문질러야 한다. 그러기에 「빨래판」은 요철의 거친 표면을 지니고 있고 그 거친 면을 오가는 손의 수고로운 노동에 의해서만 쓸모가 있게 된다. “하프를 켜”기도 하고 “엇박을 치”면서 “리듬을 타”기도 하지만 “오그린 발칫잠에도 꿈속 길을 달”리는 간단치 않는 연단의 과정도 겪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빨래판’은 빨래판이자 빨래판 너머의 다른 존재로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여자의 삶이라는 것인데 “절은 때 씻는 하루”를 지나 일생으로서의 여자 삶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삶이 어떠한가. 결코 녹록치 않다. “부르튼 물집들이 시나브로 터지는 밤”처럼 고통과 고난의 밤들로 점철된 삶이다. “오그린 발칫잠에도 꿈속 길을 달”려야하는 고단한 삶이다. 이 땅 여자들의 삶으로서 ‘빨래판’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러한 인식을 통해 그리고자 하는 주제 의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시인은 “헐거운 솔기 사이 얼핏 뵈는 푸른 하늘”의 희망을 주목하며 “옥탑방 바지랑대 세워/ 맑은 햇살 당긴다”라고 하면서 마무리하고 있다. 끝 처리 방식이 마치 “맑은 햇살”에 빨랫감을 빨아 너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이어서 그 절묘함은 더 빛난다. 아무리 어려운 공간의 조각난 삶일지라도 건강하게 일궈나가는 삶이 바로 이 땅 여자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이런 면에서 볼 때 「빨래판」은 에코페미니즘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보아도 무난할 듯싶다.
3. 인력시장과 허풍쟁이 아재, 도시 소시민의 삶
도시 소시민의 고단한 삶 가운데 시인의 시각은 살아 있다. 인력시장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고단한 삶이나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 “뼈도 밸도 다 버리고 허파에 바람 실어”사는 아재들의 삶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별 보는 사내 인력시장 찾는다
막노동 삼십 년에 이력이 날만한데
늘어난 이자만큼이나 졸아든 어깻죽지
팍팍한 건설 현장 새파란 감독 앞에
헛딛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두 다리로
땡초를 화끈하게 푼
콧물까지 들이켠다
알바를 끝낸 자정 꼬불꼬불 끓인 속을
맵짠 생 후후 불며 희망 몇 올 건지려다
면발에 구르는 눈물 고명으로 얹는다
― 「라면 먹는 남자」 전문
고단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삶을 그려낸다. 그 삶을 피상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늘어난 이자만큼이나 졸아든 어깻죽지” “헛딛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두 다리” 등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에 “땡초를 화끈하게 푼 콧물까지 들이”켜는 인간미와 “맵짠 생 후후 불며 희망 몇 올 건지려다/ 면발에 구르는 눈물 고명으로 얹는” 생의 깊이까지도 읽어낸다.
지하철 계단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동전을 기다리는 두 손이 얼어 있다
치솟는 빌딩에 가려 빛을 본 지 오래인 듯
하이힐 찍는 소리 서둘러 멀어진다
단속반 툭 건드리자 통째로 구르는
오늘을 그리는 촉수 화석으로 멎는다
― 「공」 전문
지하철 계단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을 시인은 섬세하게 그려낸다. 제목으로 잡은 「공」은 몇 가지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하나는 무료하고 적막한 ‘공空’의 의미다. 또 다른 의미는 두 손을 기다리는 겸손의 ‘공恭’이다. 다른 하나는 둥글게 굴러가는 ‘공’의 의미다. 동그랗게 몸을 마는 걸인의 모습도 공이지만 “통째로 구르는/오늘을 그리는 촉수”도 공이다.
광복동 대로변서 허리 접는 저 아재
뼈도 밸도 다 버리고 허파에 바람 실어
어정쩡 장승은 싫어 온 몸으로 유혹한다
팔푼이라 조롱하던 눈총을 뒤로 하고
꾀죄죄 절은 청춘 은하에 풍덩 던져
별똥별 건지려는가 웅덩이도 마다않네
꼬부랑 노래 맞춰 피에로는 춤을 춘다
풀무질 날로 해도 허느적 우는 달밤
아지매 생각하는가 허재비 우리 아재
― 「허풍선이」 전문
아재와 허풍선이는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주인공의 삶을 위해 일회용품처럼 썼다가 버려지는 엑스트라로서의 삶이기 때문이다. 자존심이나 오기 같은 것을 다 버리고 “허파에 바람 실어” “꼬부랑 노래 맞춰” 춤을 추는 ‘피에로’. 거친 자리 마다않고, 냉대해도 싫다 않고, 팔푼이라 조롱해도 무심하게 다 무시하고 흐느적흐느적 넘어가는 삶. 그래서 어쩐지 우리와 닮아 있고 친숙한 아저씨들의 삶.
덤으로 주고받던 넉넉한 골목 웃음
공룡마트 올라간 날 굽은 등 숭숭 뚫려
출구도 비상구도 없는 구멍가게 사장님
금이 간 골목길에 황사바람 일고 간다
시린 뼈 훑어내려 관절을 툭툭 치며
‘폐기물’ 스티커 붙여
길바닥에 나뒹군다
맨살의 시멘트 벽 더듬는 촉수 본다
말없이 달라붙은 담쟁이의 저 안간힘
수많은 잎사귀를 끄는
숨소리가 푸르다
― 「폐업하는 날」 전문
그런가 하면 「폐업하는 날」은 “공룡마트”와 불황에 내몰려 폐업하는 “구멍가게 사장님”의 “출구도 비상구도 없는” 암담함을 그린다. 거대자본에 말려 “금이 간 골목길에 황사바람 일고” 있는 도시의 단면을 간명하게 그려낸다. 시인은 이러한 “시린 뼈 훑어내려 관절을 툭툭 치”는 황량한 골목에서 “맨살의 시멘트 벽 더듬는” 담쟁이의 가열찬 몸부림에 주목한다. “말없이 달라붙은 담쟁이의 저 안간힘”에 초점을 맞추며 “수많은 잎사귀를 끄는/숨소리가 푸르다”고 말한다. 초록의 생명성을 통해 민초들이 갖는 진정한 힘의 근원을 짚어냄으로써 삶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놓여있는가를 명확하게 얘기하고 있는 셈이다.
싸움이 격렬해도 뒤돌아 엿을 치며
하루치 점을 보는 안다리를 걸고 있다
부채로 슬쩍 가린 속내 벌겋게 타는데
터질 듯한 시간 너머 생의 반전 일어나는가
쏠리는 응원석으로 철퍼덕 내다꽂는 힘
꽹과리 절로 솟으며
당산나무도 덩더쿵!
― 「손에 땀을 쥐다-단원의 씨름도」 부분
말하자면 이들의 삶을 통해 시인이 나타내고자 하는 단순히 드러내어 이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터질 듯한 시간 너머 생의 반전”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철퍼덕 내다꽂는 힘/ 꽹과리 절로 솟으며/ 당산나무도 덩더쿵!” 할만한 “들배지기에 받아치기 역습”이나 생의 반전이 있기를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는 것이리라.
4. 현실 풍자로서의 사설과 절정의 기법
사설의 속성은 엮음과 풀이에 있다. 줄줄이 엮어나가면서 마음에 맺힌 것을 풀어낸다. 부조리한 현대사회의 군상을 엮어나가기에는 이보다 안성맞춤인 장르가 없을 것이다. 김덕남 시인은 사설의 묘미를 잘 파악하여 현실의 단면을 예리하게 해부해 나간다.
꽃 속의 꿀을 빨던 그 기억 못 잊는가
강남의 룸살롱은 불도 켜지 않았는데 낮술에 불콰한 고관 제 집인 양 드나든다. 의사당 불빛 아래 삿대질은 감초인가 닦달하고 추궁해도 오리발이 대세라네 하나쯤 혼외 자식 바지춤에 감추고. 시상에 21C 대명천지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길동이가 다시 왔나 ‘씨는 못 속인다우’ 죄 없는 판박이에 거품 문 입술들이 퍼 나르는 서울의 강
그믐달 물살에 밀려 물음표로 지고 있다
― 「신 유곽쟁웅」 전문
혜원 신윤복의 그림 「유곽쟁웅遊廓爭雄」의 익살스러운 풍속도를 가져와 현대의 정치권에 일갈을 하고 있다. 기생집 앞에서 사내들이 다투는 것이니 볼썽사나운 풍광임에는 틀림없으나 세상에서 제일 좋은 구경거리는 ‘싸움구경’과 ‘장구경’이라 했으니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싸움을 통해 시인은 “의사당 불빛 아래 삿대질은 감초인가 닦달하고 추궁해도 오리발이 대세라네”에서 보듯 협의에 의한 정치는 하지 않고 싸움으로만 풀려고 하고 잘못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변명으로 일관하는 표리부동한 정치권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다.
초장이나 종장보다 중장이 늘어나는 것이 사설시조의 원형은 아니다. 초장도 종장도 다 늘어날 수가 있다. 그렇지만 현대사설시조에서 중장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 이 늘어남은 어떤 원리를 갖고 있는가.
필자는 일찍이 조운의 「구룡폭포」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이 원리가 반복―열거―절정의 구성 원리를 갖고 있음을 얘기한 바 있다. 이 작품 또한 이 구성 원리를 따르고 있음이 주목된다.
①책상 위 ②깨알들이 ③스멀스멀 ④기어간다
⑤감독관 들어오며 일어서라 줄 바꾸라 도끼눈 쌍심지가 제대로 돌아간다. ⑥옆 사람 답안지를 두리번 일별하고 짧은 치마 스타킹 속 돌돌 만 페이퍼에 볼펜 속 두루마리 귀신같이 꺼내보는 꽃먹물 거동 보소, ⑦남의 글 베끼기는 누워서 떡 먹기요 표절이라 시비해도 낯색 하나 변치않는 먹물아비 줄 세울까 벼룩을 줄 세울까 ⑧천지사방 튀면서도 원조元祖라 침 튀기니
⑨길거리 ⑩원조 간판들 ⑪너도나도 ⑫먹물 튀었네
― 「커닝하는 사회」 전문
중장의 각 마디는 각각 8음보―14음보―12음보―4음보로 셋째 마디의 마지막 부분 “먹물아비 줄 세울까 벼룩을 줄 세울까”는 절정에 해당되면서 극적효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에라잇! 손들아」라는 사설시조에도 이러한 기법이 잘 용해되어 있다. 이 작품은 현대의 제사나 차례의 예법이 조상에 대한 경외심이 없이 형식적이고 편의적으로 변모해가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중장은 보다 길어지고 있는데,
⑤차례상 받으려고 새벽같이 길 나섰지~플라스틱 음식인줄 내 어찌 알았겠누. ⑥점잖은 박 귀신은 택배음식 잔뜩 먹고 ~정 귀신이 붉으락푸르락 침 튀기며 내닫는다, ⑦똑똑한 그 아비라 어깨 으쓱 치켜들며~ 귀신은 자격 없다 뒷발질로 걷어차네 ⑧분통 터진 귀신들 종주먹 휘두르며
ㅡ 「에라잇! 손들아」 부분
마디가 가장 긴 다섯째 마디는 28음보까지 가지만 종장의 마지막 여덟 째 마디는 4음보에 불과하여 장단완급長短緩急의 조절을 효율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반복열거 절정의 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김덕남 시인의 작품에 나타난 시세계를 살펴보았다. 시인의 작품은 섬세한 생태 묘사를 통하여 어설픈 생태시들이 가지고 있는 계몽성 차원과는 전혀 다른 갈앉히고 묵힌 농도 깊은 에코이즘 시를 보여주고 있다. 「꾀꼬리」에서의 “탱탱한” 시적 긴장과 「노루귀꽃」에서의 정감있고 관능적인 표현, 「주산지 왕버들」에서의 깊이 있으면서도 차원이 높은 시적 형상화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모지랑숟가락’과 ‘냉이’와 ‘빨래판’ 등의 시적 소재를 통해 따뜻하고 희생적인, 더 나아가 “혀 같은 새순”→“톱니”→“서릿발”→ “조선의 무명치마”로의 극기적이고 자주적인 여성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력시장과 허풍쟁이 아재 등의 소재를 통해 도시 소시민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시인의 시각은 이들 엑스트라 삶을 통해 “터질 듯한 시간 너머 생의 반전”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하며 희망의 “들배지기에 받아치기 역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의 반전이 있기를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다.
꽃으로
치장하고
나를 향해 오는 이여
페로몬
향에 감겨
세상이 흔들린다
난 이미
두 눈 멀었네
돌아설 길 아예 없네
― 「꽃뱀―나의 시조」 전문
시인은 자신의 창작 행위를 비유하여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예 눈이 멀고 돌아설 길 없으니 더불어 갈 수밖에 없노라고 얘기한다. 이같은 순전한 결기가 깊고도 선명하면서도 주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이루는 기저자질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만의 개성이 무엇인가를 더욱더 고구해보고 어느 작품을 놓고 보더라도 자신의 개성이 잘 드러나도록 균질한 작품을 쓰는 것이 아마 다음의 과제일 것이다. 시인은 평생 그것을 향해 가는 외로운 존재이겠지만 시인의 뜨거운 집념이 이를 분명히 가능케 하리라는 신뢰를 갖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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