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의 애국 정신이 담긴 한시
이원걸(문학박사)
서애 류성룡의 유적지 병산서원(안동시 풍천면)
1. 서애의 나라 사랑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은 경북 의성현 사촌리 외가에서 유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이현而見, 호를 서애西厓라고 하였다. 그의 호가 서애로 불리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서애의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하회 마을의 서쪽에는 조그마한 언덕이 있었다. 이 지역은 여름철만 되면, 장마로 낙동강이 범람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러나 하회 마을만은 장마로 인해 마을이 침수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회 마을이 침수되기 전 강물이 서쪽 언덕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애의 호는 수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하회 마을의 ‘서쪽 언덕’에서 비롯된 것인데 공교롭게도 새애는 훗날 성장하여 그의 호에 담긴 뜻처럼 임진왜란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훌륭한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애의 가문은 대대로 하회에서 살아 왔던 안동 지방의 양반 가문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뛰어난 학문과 훌륭한 덕성을 지닌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이어 받았다. 또한 서애의 집안은 영남 사림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직金宗直의 집안과는 친척이었다. 그러므로 서애는 일찍이 가문으로부터 학문과 덕성을 구비한 정치가의 자질을 이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총명과 지혜가 남달리 뛰어났고 일찍부터 학문에 힘썼다. 이처럼 훌륭한 인격과 학문을 완성한 그 훌륭한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을 당한 조국을 위해 헌신한 명재상이었다.
그는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자, 도성의 백성들은 그의 서울 집으로 달려가 울었다고 한다. 그가 청렴결백하고 백성의 고통을 염두에 두었기에 서울의 백성들은 모두 부모의 초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했다. 그리고 인조 7년인 1629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묘는 안동시 풍산읍 수곡리에 있다. 그는 후일, 그를 추모하는 영남의 선비들에 의해 병산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징비록 ]과 [문집 ] 10권․신중록 ]․영모록 ]․관화록 ] 등을 저서를 남겼다.
서애는 퇴계의 문인으로서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특출했지만 그의 큰 업적은 임진란 중에 활동한 정치면에 있다. 임진왜란은 고려 시대의 몽고란과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국난이었다. 그러나 몽고란은 강력한 무인 정권으로서도 끝까지 저항을 계속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들의 지배하에 복종했던 쓰라린 역사를 남겼음에 비하여, 임란은 분열된 당쟁 하의 문인 정권으로서 이것을 버티어 내어 적군을 물리치고 국가의 주권을 회복했던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유성룡은 정치가로서만 아니라 전략가로서도 뛰어났다. 난중에 그는 여러 병법서를 연구하여 군대의 명령 계통을 단일화하고 군대 훈련을 위하여 새로이 훈련도감을 설치하였다. 이외에 그는 조총을 비롯한 무기를 연구하여 이를 제조케 하였다. 또 성곽을 연구하고 지세를 살펴 남한산성을 비롯한 여러 산성을 수축케 하고, 조령에 둔전을 개척하여 충주의 방어를 엄중히 하게 하였다. 서애는 임진란 당시 국정의 온 책임을 한 몸에 지고 애국심에 불타는 민중을 이끌어 조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하였으니, 그는 실로 민족의 지도자이며 구국의 은인이었다. 그의 온건과 타협의 몸가짐이 결국 높은 벼슬을 누리는 밑바탕이 되었고 그의 뛰어난 총명과 판단력은 난국을 수습하는 수완으로 작용하였다. 서애의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시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2. 나라와 백성의 평화를 위해
서애는 뛰어난 경세가이며 군사 전문가였다. 그리고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염려하는 애국지사였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시를 보기로 한다.
내 쇠약함을 차마 말로 다 하랴
다시는 주공께선 꿈에 나타나지 않는구나.
나라 다스리고 백성 구제는 평생의 뜻이건만
얽매이고 위태로운 길 가운데 있네.
吾衰那忍說
不復夢周公
經濟平生志
羈危半道中
스스로 한탄하며 지은 시이다. 자신의 쇠약함을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공자가 주공을 꿈꾸지 못했듯이 자신도 그러하다고 했다.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을 품고는 있지만 가는 길이 막히고 위태로운 가운데 있다고 탄식하였다. 이런 부분에서 서애가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 시는 생질 이찬에게 보낸 시인데, 여기에도 그러한 심정이 담겨 있다.
초라한 시골 마을에 병으로 누웠으니
오는 이 없어 사립문 닫아 두었네.
사그락 거리는 낙엽 멀리서도 들리고
가을 하늘 푸르러 기러기 그림자 시리네.
사람과 사귐에는 등짐이 많으니
오래 벗하기론 청산일레라.
평생의 사업 이루지 못했건만
남은 나날 적음을 근심하네.
窮村猶臥病
寂寞揜柴關
木落秋聲遠
天高雁影寒
論交多白眼
耐久只靑山
未了平生業
還愁歲已闌
시골에 병든 몸으로 누워 있으니 찾아오는 이가 없어 하루 종일 사립문을 닫아 두었다. 가을철이다. 낙엽 소리가 들리고 가을 하늘에는 기러기가 멀리 날아간다. 하늘이 푸르기에 기러기 그림자도 시리다고 한다. 자신의 심회가 담긴 시이다. 사람들과의 사귐은 어긋남이 많지만 푸른 산은 변함이 없다. 평생의 사업을 이루지 못함이 한스럽다고 한다. 남은 생애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근심이라고 한다. 만년에 지은 시로, 평생 동안 보국안민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고 이처럼 표현했다. 이러한 마음은 출타하면서 지은 시에서도 드러난다.
병든 몸 총총히 일으켜 새벽에 행장 꾸려
천 리 노정에 찬 눈 맞으며 가네.
비 갠 뒤 모래와 석양빛의 돌은 띠처럼 얽혀 있고
해질 녘 외로운 구름은 정히 아득하여라.
아홉 번 죽더라도 충효의 서원 잊지 못해
남은 생애에 거듭 고향과 이별했네.
교릉의 도래 솔은 풍상에 시달려
밤 내내 찬 소리만 꿈속까지 드네.
病起悤悤束曉裝
驛程千里遡雱凉
晴沙晩石相縈帶
落日孤雲正杳茫
九死敢忘忠孝願
殘年重別水雲鄕
喬陵松檜風霜苦
半夜寒聲入夢長
병든 몸을 안고 새벽에 짐을 꾸려 천리 길을 눈길 따라 떠난다. 눈비가 섞여 내린 것 같다. 비가 갠 뒤에 모래와 석양빛이 돌처럼 엉켜 있고 구름은 아득하기만 하다. 죽더라도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리라는 서원을 잊지 못한 채 고향과 이별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그네 길에서 감회를 읊은 것이다. 충성과 효도를 열망하는 심리가 담겨 있다. 다음 시는 혹서를 당한 백성들을 염려하는 심정을 표현한 것인데, 그의 애민 정서가 담긴 것이다.
대지가 불타니
좁은 방이 찜통 같구나.
줄기찬 비에 마음 더욱 우울한데
마루 위엔 곰팡이 핀다네.
파리 모기 극성을 부리니
바야흐로 제 철을 만났네.
창가에 누웠다 다시 일어나니
몸이 피곤해 마음도 노곤했지.
맑은 바람 솔솔 불어와
성근 댓가지가 사그락사그락.
묻건대 어디서 왔는고.
오랜 친구와 기약한 것 같아라.
한 번 부니 온갖 짜증 사라지고
거듭 부니 만물이 자라네.
원하기는 맑은 바람 두루 만 리까지 불어가
머물러 백성과 만물을 건강하고 평안하게 해
다시는 혹염이 대지를 불태우지 말기를.
大地困炎溽
斗室如甑炊
積雨更助鬱
堂上生菌芝
蚊蠅不可驅
此物方得時
一窓臥復起
體倦神亦疲
淸風颯然至
泠泠疏竹枝
借問來何自
如與故人期
一吹群慍解
再吹百物滋
我願淸風吹萬里
坐使民物俱康夷
更無酷炎燔坤維
온 대지가 불이 타듯이 말라가고 방안을 찜통처럼 무덥다. 무더위에 이어 장마비가 내려 마루 위에는 곰팡이도 피었다. 파리와 모기도 극성을 부린다. 시인은 창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보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바람이 불어와 무더위를 식히고 비를 걷어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욕심을 부린다. 이 맑은 바람이 온 대지에 불어 백성들과 만물들이 건강하고 평안하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혹염이 대지를 불태우지 않도록 해달라는 희망도 담았다. 이렇듯 그는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3. 전란에 고생하는 백성들이여
임란 가운데 그가 표현한 우국지심의 시를 검토하기로 한다. 다음 시는 전란이 하루속히 평정되기를 염원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어둑어둑한 산에 구름이 일고
망망한 바다에 해가 기우네
이 때 먼 곳으로 출정하니
어느 곳이 집이런가
천지엔 풍상이 몰아치고
전쟁은 오래도록 이어지네
높은 곳에 의지해 길게 읊조리며
묻노니 세상일 어찌 될런지.
黯黯山雲起
茫茫海日斜
此時愁遠役
何處卽爲家
天地風霜苦
干戈歲月多
憑高一長嘯
世事問如何
명나라 장수를 따라 남하하다가 이천을 지나는 길에 말을 타고 가며 지어 종사관 정화백에게 준 시다. 전체 시적 분위기가 어둡다. 어둑한 산에 구름이 피어오르고 망망한 바다에 해가 기운다. 이 무렵 출정하는 마음이 어둡기만 하다. 온 강토가 전란의 위기가 닥쳐 전쟁이 이어진다. 그래서 그는 높은 곳에 올라 시를 읊조리며 탄식한다. 나라와 백성들의 장래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다음 시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담겨 있다.
조씨가 노닐던 곳에
내가 우연히 자리 잡았네.
골이 깊어 사슴도 이따금 보이고
마을과 멀어 사람 만나지 못하네.
산수엔 도리어 고질병 들었고
연하에서 참된 마음 기르고 싶네..
남쪽에는 전쟁으로 가득한데
어느 곳에서 전쟁먼지 피할까.
曹氏曾遊地
吾廬偶卜隣
谷深時見鹿
村遠不逢人
山水還成癖
煙霞欲養眞
干戈滿南國
何處避風塵
단양 장림역에 계곡을 따라 들어가 운암이란 곳에서 느낀 바를 지은 시이다. 조신이란 자가 거쳐하던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골짜기가 깊어 사슴도 보이고 마을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골짜기가 깊다는 의미이다. 산수를 즐기는 고질병이 들고 연하에서 참된 마음을 기르고 싶다 한다. 이렇게 한적하지만 남쪽지방의 전란은 계속 이어진다. 하루속히 이 전란이 끝났으면 하는 희망을 표현했다. 단양에서 지은 시이다.
밤 내내 찬 계곡에 푸른 물 불어나고
골짜기 구름의 세찬 비는 병사의 도롱이 적시네.
사친과 연군에 근심은 바다 같고
국사를 처리할 두려운 마음에 머리털은 희어지네.
이미 공명을 부여잡느라 한마지로를 다했건만
다시 나그네의 눈물만 강에 꽃처럼 흩뿌리네.
이 해에 몸 굽혀 일어난 은거하던 늙은이
묻노니 ‘창생을 어이할꼬?’
一夜寒溪漲綠波
峽雲飛雨濕征簑
思親戀闕愁如海
撫事驚心鬢欲華
已把功名輸汗馬
惟將客淚濺江花
當年枉起東山老
爲問蒼生柰爾何
또 비를 만났다. 밤새 내린 비에 골짜기의 물이 불어났다. 골짜기에 몰아치는 비바람이 병사들의 도롱이를 적신다. 비가 내려도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갈 길을 재촉한다. 어버이를 모시고 임금께 충성을 바치는 마음 간절하고, 국사를 처리하느라고 고심하는 차에 머리털은 희어진다고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를 다하였는데, 감회는 절로 눈물을 지어낸다. 다시 이 백성들을 생각하니 여전히 슬픔이 밀려온다. 백성들의 안정된 삶과 평화로운 삶이 그립기 때문이다. 다음 시는 장편으로, 임란의 참상과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4. 마무리
이런 점에서 서애의 경세적이고 애민적인 자세를 엿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애는 관련 시에서 애국우민적 이념을 표현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이미 사상과 학문 경향에서 충분히 검토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애국자요 경세가적인 면모가 선명하게 보여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