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1. 21
2019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는 워싱턴 내셔널스가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꺾고 창단 50년만에 첫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시리즈 성적 3대 3에서 맞붙은 마지막 7차전. 6회 말까지 휴스턴은 2-0으로 앞서갔다. 홈구장을 가득 메운 휴스턴 팬들은 흥분했다. 2년 만에 다시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가져오는가 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7회 초부터 일어났다. 솔로 홈런으로 1점을 만회한 워싱턴은 경기를 역전시키더니 결국 6-2로 경기를 끝냈다. 워싱턴 내셔널스는 적지(敵地)의 4연승이라는 기적으로 월드시리즈를 품에 안았다.
◇ '햄릿' 3막 1장의 명대사
'페친'(페이스북 친구)인 신문기자는 메이저리그 광팬이다. 월드시리즈 7차전이 끝난 이튿날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재미있는 게시물을 올렸다. 월드시리즈 관련 도시 휴스턴·워싱턴 DC·뉴욕의 유력지 신문 1면 사진을 비교하며 짧은 글을 썼다.
워싱턴 포스트와 휴스턴 크로니클은 비슷한 사진을 실었지만, 제목은 딴판이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1면 제목은 평범했다. At last, Nats are Champs(마침내, 내츠 챔피언이 되다).
▲ 휴스턴 크로니클 1면
휴스턴 크로니클의 카피는 이랬다.
'NOT TO BE'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일까. 혼자서 아무리 끙끙대도 해석이 되지 않았다. 'NOT TO BE'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3막 1장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의 일부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을 끝까지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이 유명한 대사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가장 일반적인 번역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이다. 이 대목은 지금도 번역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독해력 부족을 자책하다가 그 페친에게 카톡으로 SOS를 보냈다. "어떻게 의역해야 하나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페친이 답을 보내왔다.
"(이번은) 인연이 아닌갑다."
순간, 무릎을 쳤다. 머릿속에서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갑자기 햇살이 쨍하는 기분이었다. 휴스턴 크로니클의 카피 데스크는 고민했을 것이다. 양손에 쥔 듯했던 우승을 놓치고 망연자실한 휴스턴 팬들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가. 그런 제목을 뽑아야 한다. 체념의 미학!
▲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햄릿'을 쓴 게 1601년이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햄릿'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명언(名言)과 명구(名句)의 저수지다. 서양에서는 사적 대화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햄릿', '맥베스', '리어왕'을 적절하게 인용하는 것을 최고의 교양인으로 간주한다.
전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75)의 부인은 한국인 김소연 씨(49).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이미 독일과 한국에서 크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슈뢰더는 지난해 초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 씨와의 사랑에 대해 '햄릿'을 언급하며 이렇게 밝혔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여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보내기로 결정한 건 이해를 넘어서는 운명 같은 어떤 것이다."
슈뢰더의 예상치 못한 '햄릿' 인용을 접하고 나는 신문 기사의 그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그 구절은 '햄릿'에서 내가 좋아하는 명구 중의 하나였다. 1막 5장에서 햄릿은 성벽에서 선왕(先王)의 유령을 보고 수하에게 미래를 암시하며 던진 대사다.
멋지게 늙어가고 있는 70대 노신사가 '햄릿'을 인용하며 노년의 사랑을 설명하는 모습은 매우 낯설면서 신선했다. 괴테를 가진 나라의 정치 지도자는 격이 확실히 다르구나!
▲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 구로사와, '맥베스'와 '리어왕'을 찍다
실력 있는 영화감독과 연극연출가들은 셰익스피어를 사숙하며 찬미한다. 그들은 '맥베스' '리어왕' '햄릿' 등을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천재 감독으로 불렸던 오손 웰스가 1948년 흑백영화 '맥베스'를 연출했고, 1971년에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컬러영화 '맥베스'를 세상에 내놓았다.
맥베스는 희곡의 구성과 형식과 내용이 완벽해 감독이라면 누구라도 영화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완벽성으로 인해 감독들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직역(直譯)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
'라쇼몽'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1910~1998)는 맥베스를 탐냈다. 셰익스피어도 멋지게 찍어내는 영화감독이라는 평가를 듣고 싶었다.
문제는 중세 스코틀랜드 배경으로 펼쳐지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깔린 이질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일본화(化)하느냐. 메시지는 그대로 가져오되 직역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일본 역사에 녹여 어떻게 의역할 것인가. 구로사와가 감독한 '맥베스'의 일본판 제목은 '거미집의 성'. 이미 '거미집의 성'에 대한 평가는 끝난 지 오래다. 브리태니커 사전은 '거미집의 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를 일본의 전통 '노(能) 드라마'의 세트와 연기 스타일을 빌려 일본의 고전적 분위기에 맞게 각색한 영화로서, 원작의 한 구절도 직역하지 않고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영화로 각색한 수많은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1957년에 나온 흑백영화이다 보니 화질은 썩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10분이 총알같이 흘러간다. 셰익스피어 희곡의 특징인 현란한 수사(修辭)는 대거 잘려나갔고, 모든 대사와 지문이 시각적으로 단순화되었다. 그런데도 주제와 메시지 전달에 아무런 장애가 없다.
구로사와는 만년인 1985년에 또다시 셰익스피어에 도전한다. 이번엔 '리어왕'이었다. 리어왕의 일본판 제목은 란(亂). 1957년작 '거미집의 성'이 흑백영화로 제작된 데 반해 1985년 작 '란'은 컬러영화로 만들어졌다.
▲ '리어왕'을 각색한 영화 '란'의 한 장면
리어왕이 세 딸이 주인공인데 반해 란에서는 세 아들이 주인공이다. 배경은 크고 작은 영주 가문끼리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이는 전국시대.
이치몬지 가문의 영주는 첫아들에게 권력과 함께 첫 번째 성을, 둘째 아들에게는 두 번째 성을 물려주고 자신은 칭호와 지위만을 갖겠노라 선언한다. 첫번째 성과 두번째 성을 차례로 돌면서 자신은 편안하게 노년을 즐기겠노라 말한다. 형들과는 달리 아버지에게 직언을 한 셋째는 가차없이 파문당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첫번째 성을 방문하면서부터 기대는 산산조각이 난다. 배신감을 느낀 아버지는 둘째에게 찾아가지만 둘째 역시 첫째와 똑같이 아버지를 대한다. 아버지는 차마 셋째아들에게 가지 못한 채 광인이 되어 광야를 떠돈다. 그리고 이런 독백을 한다.
"새알은 더럽지만 뱀알은 하얗고 깨끗하다. 어미새는 깨끗한 알을 품었다. 그러나 어미새는 깨끗한 알에서 부화한 뱀에게 잡혀 먹혔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영화감독 우디 앨런은 "셰익스피어를 영화로 찍을 수 있는 감독은 구로사와밖에 없다"고 말했다. 란과 거미집의 성을 보고나서 나는 수첩에 이런 느낌을 적었다. '구로사와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을 새삼 실감했다.' 우디 앨런의 말은 적합도 99%다.
그 셰익스피어가 2019년 월드시리즈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조성관 / 작가 author@naver.com @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