特別取材
大統領 別莊 淸南臺
最初 內部公開 -충북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꽉 닫힌 鐵門-성급한 觀光客들 허탕
‘59만평 保安區域 檢問所 세 곳 지나서 200m더 들어가야 本館 正門.’
대통령 별장 청남대(충북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소재)가 20년만에 문을 열게 됐다. 1983년 전두환 대통령 당시 세워진 청남대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거치면서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됐다.
국가 원수의 별장인 만큼 청남대는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비밀별장’이었다. 그러나 청남대는 지난 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남대를 지역 주민에게 돌려주겠다.”고 밝힘에 따라 설립 20년만에 지역 주민의 품에 안기게 될 전망이다.
실제로 청와대와 관계부처, 충북도 등도 청남대 개방을 위한 법률 검토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아직 현지 사정은 크게 달라진 바 없다. 노 대통령의 선언이 있은 직후인 지난 7일 청남대 현장을 찾았지만 출입문은 굳게 닫힌 채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청남대 관계자들은 ‘상부의 지시’라고만 밝혔다.
청남대는 1980년 11월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했던 전두환 대통령이 “이런 곳에 별장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 한마디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다. 이 얘기에 관계부처가 곧바로 별장 설립에 나서 3년 만인 1983년 완공됐다.
청남대가 세워진 곳의 주소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 별장지로 조성된 면적은 1백 94만㎡(59만여 평)에 달했다. 물론 이곳은 별장이 세워지면서 1급 보완지역으로 묶였고 군부대가 외곽지역의 경비를 맡았다.
일반인의 출입은 물론 언론 취재도 불가능하게 외부와 철저히 차단되면서 세인들은 청남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했다. 그동안 청남대 내부는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 간간이 외부에 전해질 정도였다.
鐵桶 警備 淸南臺 구멍
鐵條網 出入口 흔드니 열렸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남대를 주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지시한 다음 날인 지난 7일 오후 4시께 충북 청원군 문의면 신대리에 위치한 청남대의 제 2검문소의 육중한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져 있었다. 청와대 경호실 소속 경비병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검문소 입구에 손바닥이 그려진 ‘더 이상 출입할 수 없습니다.’라는 낯선 통행금지 표지판과 상단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가 상하 좌우로 작동하고 있었다. 청남대 관계자와의 유일한 대화 통로는 철문 오른쪽에 붙어 있는 인터폰 뿐.
기자는 청남대 관계자와 인터폰 연락을 시도했다. 우선 신분을 밝히고 청남대 취재를 요청했다. 하지만 경비 대원은 인터폰을 통해 ‘상부에서 아무런 지침도 없었다.’ 라며 취재 불가방침을 알렸다.
전날의 대통령 지시가 아직도 청남대까지 전달되지 않았던 것. 취재진이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하자 경비대원은 “경비 담당관이 바쁜 일 때문에 연락을 할 수 없다.”고만 짧게 답했다.
청남대는 국내 인공호수 가운데 세 번째로 큰 대청호와 울창한 수목에 둘러싸인 천혜의 절경 지역에 자라잡고 있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에서 회남면 방향으로 뻗은 509번 지방도로를 타고 자동차로 15분 정도 달려가야 한다. 청남대는 보안을 이유로 지도에도 표시돼 있지 않다. 도로의 이정표조차도 없다.
처음 찾아가는 이들은 그야말로 주민에게 묻고 물어서 찾아갈 수밖에 없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도 3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본관 건물에 갈 수 있다. 제 1검문소는 문민정부 시절 개방했다. 현재 1검문소에서 3.5㎞ 더 들어간 제 2검문소에서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1검문소에서 2검문소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 1급수라 불러도 무방한 대청호와 도로 양옆의 잘 조성된 가로수가 저절로 감탄을 쏟아내게 할 정도.
대통령의 청남대 지시가 발표된 다음날 2검문소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매스컴을 통해 청남대가 개방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성급한’관광객들이 이곳으로 찾아 온 것. 하지만 청남대는 여전히 ‘개방 불가방침’에 변함이 없다.
청남대와 가까운 청주에서 친구와 하게 온 이 모(26)씨는 “대통령이 청남대를 개방한다고 해서 구경을 왔는데 철문이 닫혀 있어 돌아가는 길”이라며 아쉬워했다. 대전에서 온 권 모(48)씨도 서울서 내려 온 친척 4명과 함께 구경하러 왔다가 헛걸음을 했다. 권씨는 “TV에서 개방한다고 해서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개방 발표만 해놓고 문을 닫아놓은 이유가 뭐냐?”며 불만을 토했다.
청남대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대청호에는 민간인들의 배가 뜰 수가 없다. 항공기도 청남대를 중심으로 4.8㎞, 고도 3㎞까지 비행할 수 없다. 철저한 보안 때문이다.
문의면에 사는 엄진경(45)씨는 “전두환 대통령 시절엔 청남대 마즌편에 있는 현암사에서 청남대가 보인다는 이유로 절을 없애려했다.”는 일화를 전한다.
문의면 마을 주민에 따르면 청남대의 현재 병력은 5개 소대 1백여 명. 여기에 청남대 주변에 있는 군부대에서 함께 경비를 서고 있다고. 경찰도 하루 세 차례 도로 순찰을 하고 있으며 순찰함도 구 차례 정도 대청호를 돌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청남대를 ‘철옹성’에 빗대고 있다.
주민들도 쉽게 접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청남대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대부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철옹성’으로 비유되는 청남대 경비가 예상과는 달리 허술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굳게 닫힌 제 2 검문소와 연결된 철조망을 따라 산등성이로 오르던 중 작은 철조망 출입문 하나를 발견했다. 철문을 가볍게 흔들자 문이 열렸다. 자물통을 열쇠로 잠그지 않았던 것.
나는 그 문을 통과했다. 노 대통령의 청남대 개방의 발언에 따라 ‘철통경비’의 실효성이 사라져버린 때문일까. 산등성이를 타고 3검문소 쪽으로 향했다. 2검문소에서 3검문소까지의 거리는 약 300m. 도로가 아니어서 가시덤불인 산길을 따라가다 보니 3검문소와 연결된 철조망이 또 발길을 막았다.
이곳에선 청남대 본관 건물이 눈에 띄었다. 초록색 지붕인 청남대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가려져 어른 보아서는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3검문소 철조망에 막혀 더 이상 청남대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제 2관문 철조망 출입문이 열려있었던 이유를 묻는 질문에 청남대 경비대장인 배병국 중령은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배중령은 “그곳(제 2검문소 철조망 문)은 우리 청남대 경비대 소관이 아니라 (청남대 인근에 있는)군부대의 경비 책임구역”이라며 “군부대가 작전활동을 하려고 그 문을 열었다가 닫지 않응 것 같다.”고 해명했다.
수도꼭지가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침실의 크기가 200평이 넘는다는 등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장면이 펼쳐져 궁금증을 더해 주기만 했다.
노대통령의 청남대 반환지시가 있었지만 아직 완전한 개방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다. 때문에 청남대 내부 시설이나 구조 등에 대해서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외부 경계가 여전히 철통같은 청남대 본 건물까지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
청남대로 들어가려면 3곳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그 중 일반인에게 개방된 곳은 13번 도로에서 별장 출입문으로 연결되는 1검문소까지다. 원래는 1검문소를 지나 2검문소까지의 거리는 3.5㎞ 정도. 이곳은 지금도 통제 지역이다. 그동안 군인들이 이 지역을 경계했으나 지난 7일 현지 취재과정에서 군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관계자에 따르면 기자들이 많이 찾아와 경비 인력을 철수한 상태라고 말했다.
제 2검문소를 지나 청남대로 들어가는 초입인 3검문소까지의 거리는 약 300m로 생각보다는 짧다. 3검문소는 군인들이 철저히 외부인의 차단을 막고 있다. 3검문소를 지나면 청와대 경호실 소속 경비부대가 입주한 2층 건물과 변전 소 등 부속건물들을 만난다. 청남대 본관 정문은 이곳에서 200m는 더 들어가야 한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청남대인 것.
淸南臺 開放 앞둔 住民들
YS에 속고 DJ에 속고 … 아직 좋아하긴 일러
청남대가 들어선 이후 문의면 일대 주민들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청남대가 들어서기 직전인 지난 80년 3월 문의면 일대는 국민관광 휴양지로 지정됐었다. 하지만 청남대가 들어서면서 이 휴양지 지정 계획은 취소되었다. 주민들은 대청호에 배 한 척 띄우지 못했고 낚시도 금지되었다. 대청호가 상수보호구역으로 지정돼 모든 개발행위도 금지됐다. 국민 휴양지를 기대하며 구입했던 모터보트도 고철덩어리로 변했다. 재산상의 피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렇게 ‘살 수 없는 곳’으로 바뀌자 주민들은 하나 둘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한때 1민 3천여 명이었던 지역 주민은 현재 6천여 a명으로 줄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청남대를 개방하겠다.’고 했지만 번번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청남대 개방 지시’가 내려졌지만 아직 현실화되진 않았다. 문의면 주민들은 이번에는 청남대가 개방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푼 모습이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신중함도 있다.
문의면 미천 2리 김성환(52)이장은 “이번 발표는 주민들의 숨통을 트이게 했다.”면서도 “예전의 통령들도 선거 때는 개방하겠다고 해놓고 청남대를 한 번 다녀간 다음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도 청남대를 한 번 방문한 다음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문의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송기숙씨(여․43)도 “청남대를 개방하겠다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은 것이 어디 한 두 번이냐?”며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지역 주민들은 대체로 ‘청남대 완전개방’을 바라고 있다. 완전개방이란 청남대를 관광지로 개발해 일반인의 관광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
또 유람선 운행이 가능해야 하고 낚시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의면 개발대책 추진 위원장 이찬희(57)씨는 “대통령의 청남대 개방지시는 20년 동안 응어리진 지역 주민들의 한을 풀어준 것.”이라며 ‘완전개방’을 역설했다.
청남대의 개방 수준에 대해선 청와대와 충청북도 청 등 관계기관의 협의가 진행 중이다. 따라서 주민들의 바램대로 ‘완전개방’이 될지 아니면 대통령의 별장으로 활용하면서 ‘부분개방’을 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여기에 대청호를 상수도 보호구역에서 해제할지에 대해서도 과제로 남아 있다. 윤석만 문의면장은 “상수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돼있기 때문에 청남대가 완전 개방이 된다 하더라도 당장 유람선이나 배를 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건축개방도 불가능한 실정이다.” 라고 말한다.
정문을 통과하면 대통령의 휴양시설인 본관이 나온다. 본관 지붕은 지금의 청와대 지붕과 비슷한 초록색 기와로 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주변 소나무와 잘 구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건물은 2층 규모. 1층은 식당과 대통령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의 침실이 있고 2층에는 대통령의 전용 서재와 침실이 있다. 항간에는 “청남대 수도꼭지는 순금이다.”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청남대 설립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헛소문”이라고 했다. 그는 “대통령 침대와 수도꼭지 등은 수입품이긴 하지만 순금은 아니다.”라고 전한다.
하지만 청남대에 사용된 자재는 매우 고급이다. 이탈리아 산 고가 대리석으로 본관 건물을 지었고 건물과 마당 주변에 심어진 조경수는 한 그루에 1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2월 25일 노현무 통령 취임식 날 청남대는 처음으로 문의면 이장단 회원 32명을 포함해 36명의 지역 관계자들이 이곳에 초청됐다. 이 행사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른 것.
그러나 이날 행사에는 관심이 집중된 청남대 본관 내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날 청남대에 다녀온 한 마을 주민은 “식사시간을 포함해 3시간 가량을 둘러보았지만 본관은 보여주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그 이유에 대해 청남대 관계자는 “본관은 대통령님 만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밝혔다. 대신 대통령 산책로와 골프장, 전망대 등은 모두 공개.
본관 주변에 대통령 전용실외 수영장과 스키장, 골프장(2홀), 낚시터 등이 있다. 그리고 울창한 수목과 우거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대청호가 내려다보이는 정자 하나가 나온다. 일종의 전망대인 셈.
또 본관 뒤편으로는 파라솔과 선착장이 마련돼 있고 헬기장도 갖추어져 있다. 군사 정권 시절에는 이곳에 스케이트장도 있었으나 지금은 양어장으로 바뀌었다.
대통령 중에는 낚시를 즐기는 대통령이 있었는데 미리 경비원들이 낚시터 주변에 미끼를 뿌려둔다고 했다. 그래야 고기들이 몰려들어 대통령이 ‘손맛’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청남대 입구에 말 사육을 위한 마굿간이 있었으나 이 시설은 현재 청남대 경비부대 시설로 개조해 사용되고 있다. 또 김대중 시절에는 산책로 주변에 김대통령을 상징하는 인동초가 대거 심어졌었다고 한다.
기사 끝.
2003년 3월 16일 日曜新聞 프리랜서 朴勝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