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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01. 21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인민일보>의 1면 헤드라인은 전날 주은래 총리가 알바니아 국경일 초대회에서 발표한 강화 관련 기사가 장식했다. “세계 인민의 반미, 반수정주의 투쟁은 승리에서 승리로 나아가고 있다”는 큰 제목 아래는 중국 언론 특유의 장중한 요약기사가 달렸다.
전 세계는 현재 대(大)격변, 대(大)분화, 대(大)개조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오와 세계인민의 혁명역량은 신속하게 확대되고 있다. 새롭고도 위대한 반미혁명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다! 미(美)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보위하고, 혁명을 수행하고 혁명을 지원하고, 국제무산계급과 세계혁명 인민의 단결을 위호하기 위해선, 반드시 흐루쇼프 수정주의에 반대해야만 한다.
미(美)제국주의에 대한 반대가 특히 강조된 맥락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1964년 8월 베트남북부 해역에서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의 존슨행정부는 베트남에 18만 4천 명의 전투병을 배치했다. 베트남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면서 중국의 언론은 날마다 반미 선전문구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주은래 총리는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흐루쇼프 수정주의에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미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선 우선 수정주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외부의 적”보다도 “내부의 적”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인가? 아마도 주은래는 “반미”보다 “반수”(反修, 반수정주의)가 더 시급한 당면과제라 인식한 듯하다.
이날 주은래의 발언은 당시 소련상황과도 잘 맞물려 돌아간다. 1965년 9월부터 소련에서는 흐루쇼프의 후임 알렉세이 코시긴(Alexei Kosygin, 1904-1980)이 집권하면서 임금인상, 노동복지, 소비재 공급확대 등을 골자로 하는 “1965년 소련경제개혁”을 개시했다. 소련의 과감한 경제개혁은 모택동에겐 수정주의의 악몽으로 다가왔다. 그는 1950년대부터 흐루쇼프의 경제개혁을 "수정주의"라며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그런 맥락에서 주은래의 수정주의 비판은 얼핏 당연한 얘기처럼 들린다.
중국의 현실은 그러나 간단하지 않았다. 유소기와 등소평의 경제개혁이 이미 4년째 착착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65년 11월 한 달 동안의 기사를 훑어보면 뜻밖에도 수정주의 관련 기사는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반제·반수는 최고지도자 모택동의 양대 구호였다. 이미 10년 넘게 사람들은 늘 그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특히나 정치도시 북경의 시민들에게 “반제·반수”는 진부한 상투어일 뿐이었다. 1970년대 한국의 “반공·방첩” 구호 같았다 할까. 한데 어쩐 일인가? 1965년 11월 마지막 날, 바로 그 상투어가 1면 톱기사 헤드라인에 올랐다. 기사를 읽어보면 그다지 중요한 사건은 아닌 듯하다. 주은래 총리는 알바니아 대사관의 초대회에서 의례적 연설을 행했을 뿐이었다. 과연 왜 <인민일보>는 주은래의 반제·반수 발언을 1면의 톱기사로 뽑았을까? <인민일보>에 실린 주은래의 발언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제국주의는 때려잡지 않을 수 없으며, 수정주의는 싸워서 무너뜨리지 않을 수 없다!”
중앙정부에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났는가?
▲ 1965년 중국의 반미 포스터 "제국주의와 일체의 반동은 모두 종이 호랑이다"
2. 요문원(姚文元), 오함을 저격하다!
신문의 전체를 훑어보면 과연 뭔가 심상찮은 조짐이 감지된다. <인민일보> 제5면의 전면과 6면의 하단에는 “학술연구”란에 상해에 주재하는 한 무명 문필가의 문예비평이 게재됐다. 18개의 미주(尾註)까지 달린 200자 원고지 100매에 달하는 긴 글이었다. 그 당시 <인민일보>는 전체 6면의 얇은 일간지였다. 5, 6면에 흔히 문예 관련 기사가 실리곤 했지만, 전면이 통째로 단 한 편의 문예평론에 할애된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저자는 북경이 아니라 상해에서 활약하는 요문원(姚文元, 1931-2005, Yao Wenyuan)이라는 무명의 신예였다. 게다가 이 문제의 평론은 이미 20일 전 상해의 <문회보(文滙報)>에 발표됐던 글이었다. 요문원 비평문의 제목은 “신편 역사극 <해서파>> 비평”이었다. 대체 왜 <인민일>>는 이미 다른 언론에 게재됐던 한 신예 비평가의 긴 평론을 옮겨다 실어야만 했나? 인민일보에 게재된 후 곧이어 전국의 대부분 주요언론이 같은 비평문을 전재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아무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배후에 최고영도자 모택동이 떡 버티고 있음을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또한 이 사건이 치밀하게 기획되고 은밀하게 추진된 “문화대혁명”의 제1막 제1장 첫 꼭지의 방백(傍白)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1965년 11월 30일 인민일보 제5면, 요문원의 비평문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비판" 게재
<해서파관>은 1961년 역사학자 오함이 최고영도자 모택동의 특명을 받고 일곱 차례나 수정해서 완성한 북경 경극단의 경극 대본이었다. <해서파관>이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당시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명사(明史) 연구자 오함에 의해 완성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오함은 역사서 및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의 <해서전>을 참조해서 <해서파관>의 극본을 완성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명나라 수상이었던 서계(徐階, 1503-1583)는 은퇴 후 고향에 돌아가서 살았는데, 그의 아들 서영(徐英)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고, 농민 조옥산(趙玉山)의 아들을 죽게 한 후, 조옥산의 손녀딸 소란(小蘭)이를 납치하는 범죄를 이어간다. 소란의 어머니 홍씨는 관아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현령 왕명우(王明友)는 뇌물을 받고 조옥산을 처형한 후 홍씨를 축출한다. 때마침 응천부의 순무(巡撫)로 부임한 해서는 이 사건을 파헤친다. 이에 서계는 해서에게 접근해서 토지를 헌납하고 속죄하는 타협안을 제시하지만, 해서는 불법으로 점유한 땅은 마땅히 백성에게 돌려줘야 하며 죄를 범한 자는 누구든 반드시 처벌돼야 한다고 선언한다. 격분한 서계는 조정의 신하들을 동원해 해서를 탄핵하게 한다. 새로 부임한 순무 대풍상(戴風翔)은 해서에게 직접 가서 그의 파면을 고하는 황제의 명령서를 내미는데, 해서는 황제의 어인(御印)을 눈앞에 두고도 무뢰한 서영과 현령 왕명우를 참수한다.
극본이 발표되고 경극이 상연된 후, 언론에는 찬사가 이어졌다. <해서파관>은 “풍부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관중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는” 수작이며, “역사연구와 현실참여의 능숙한 결합”이자 “옛날을 빌어 오늘날을 풍자하는” 고위금용(古爲今用)의 전범이라는 칭송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해서파관>을 오함은 전문적인 역사연구를 사회주의 건설의 도구로 활용하고 인민에 복무하는 혁명의 무기로 사용했다는 격찬을 받았다. 경극의 성공에 고무 받은 오함은 1961년 10월부터 1964년 7월까지 북경시위원회 기관지 <전선(前線)>지에 언론인 등척(鄧拓, 1912-1966)과 작가 요말사(廖沫沙, 1907-1991)와 함께 오남성(吳南星)이란 필명으로 풍부한 역사지식을 활용한 60여 편의 풍자성 칼럼을 3년 간 연재한다. 이들의 칼럼은 <삼가촌잡기>라는 제명 아래 연재됐는데,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오함의 대중적 영향력 때문이었을까? 요문원의 비평문은 비단 <해서파관>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맹목적으로 그 작품을 칭송해댄 비평가 집단 전체를 겨냥하고 있었다. 최초 상연 이후 무려 4년이나 흐른 시점이었다. 왜 갑자기 요문원은 <해서파관>의 창작과정, 숨은 의도 및 정치적 목적을 문제 삼고 나섰을까? 실제로 요문원의 비평문을 읽어보면, <해서파관>이 칭송되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오함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성의 흑색선전이라고는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작품 속에 은밀하게 불온한 사상을 뿌려놓았다는 혐의로 잡혀 온 사상범을 법망으로 엮어넣는 검찰 혹은 경찰의 수사보고서를 연상시킨다.
이 역사극 속에서 오함 동지는 해서를 충분히 완벽한 인물로, 고상하고 위대한 인물로 그렸다. 매사에 백성만을 생각하는 해서는 억압당하고 기만당해 울분에 찬 인민의 구원자이다. 그의 신상에선 그 어떤 결점도 찾아볼 수가 없다. 보아하니 해서는 작자의 이상적 영웅이다. 명나라 때 빈곤했던 농민들의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시대 중국인민과 간부들이 학습해야 할 방양(榜樣)이다······.
이 역사극을 다 보고 나면 인민들은 오함 동지가 그려낸 이 영웅의 형상이 과거 봉건시대 해서를 칭송하는 허다한 희곡들, 소설들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고상하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비록 오함 동지가 극본의 단행본 서문에 특별히 역사적 설명을 쓰고 있고, 또 해서파관은 실제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지만, 오함 동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완전히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이 극본을 썼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아니 할 수 없다. 봉건사회의 통치계급 중에서 설마 진짜로 이러한 영웅이 나왔을까? 극중의 “해청천(靑天 , 해서를 칭송한 이름)”은 진짜 “해서”의 예술적 가공인가?아니면 오함동지가 아무 근거도 없이 만들어낸 인물인가?
자신의 영웅을 만들어내기 위해 작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구성을 짰다. "푸른 하늘"(靑天)의 위대한 노인을 등장시키기 위해 작자는 전체 9막 중에서 3막을 할애했다. 제 1막, 제 2막에는 해서가 등장하지 않는다. 극본에서 작자는 서씨일가의 만행을 묘사하는데 필묵을 아끼지 않았다. 서계(徐階)가 엄숭(嚴嵩, 1480-1567)을 타도하고 수상이 된 과정, 퇴임 후 서계 일가가 농민의 토지를 강탈하고, 마을 처녀를 강제 납치하고, 관부에 뇌물을 주고 가난하고 고달픈 농민 조옥산을 때려죽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관가의 공당(公堂)에서 홍아란(洪阿蘭)이 가슴 아프게 비분하여 창천(天蒼)에 울부짖을 때, 한 장의 긴급한 공문이 내려와 해서를 응천부의 순무로 발령한다. 득의양양 날뛰던 관리들에겐 청천벽력이었다. 제3막에서 해서는 편안한 옷을 입고 등장한다. 작가는 해서가 애타게 가슴 졸이던 마을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그를 위해 최고의 존경을 담은 노랫말을 선사한다. 또한 백성들로 하여금 "해청천"에게 온갖 고민과 근심을 토로하게 함으로써 그를 드높이 칭송한다. 공정위관(公正爲官, 공정한 관리된 도리를 이루고), 명단공안(明斷公案, 사건을 현명하게 판단하고). 구비송만(口碑頌滿, 사람들의 입에는 칭송이 가득하고), 미정다단(美政多端, 아름다운 정치가 두리 미치고) 등등.
비록 봉건사회가 상하 모두 관료의 세계이고 도리에 맞아도 돈이 없으면 한치도 나아갈 수 없었다 해도, 울분에 찬 농민들 모두가 신망하는 해청천이라는 고관만은 예외로 그려진다. "해청천은 반드시 우리들의 주인님이 되어주실 수 있다!" 바로 그러한 구름을 덧칠해 달을 부각시키는 홍운탁월(烘雲托月)의 수법을 통해서 작자는 관중으로 하여금 오직 해서만이 고통 받는 농민을 구할 수 있다고 강렬하게 느끼도록 유도한다. 이는 곧 <<해서파관>>이 작자가 말한 대로 "봉건통치 계급의 내부투쟁"을 다룬 작품이 아님을 보여준다. 작자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오늘날 우리들 관중의 눈앞에 농민의 운명을 결정하는 영웅을 그려냈을 뿐이다.
요문원은 요지는 단순하고도 명료하다. 오함이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과장해서 해서를 구세의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오함은 이 작품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했지만, 역사극은 본질적으로 픽션일 뿐이다. 한 편의 픽션 드라마에 대해서 대체 이런 식의 일방적 비판이 가당키나 한가? 청렴하고 결백한 명나라 명신 해서를 칭송했다 한들 그게 왜 잘못이란 말인가? 그런 질문을 예상했던지 요문원은 결론에서 오함의 "사악한 의도"를 직설의 언어로 정면공격한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1961년 우리나라가 연속 3년의 자연재해로 잠시 경제적 곤란을 겪었을 때, 제국주의 각국의 반동파와 현대 수정주의자들이 다시금 중국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한창 고조된 상황에서 우귀사신(牛鬼蛇神, 사악하고 추악한 무리)들이 단간풍(單干風), 번안풍(飜案風)을 일으켰다. 그들은 단간풍의 우월성을 고취하면서 개인주의 경제를 복원하라 요구했다. 이들은 퇴전(退田, 땅을 돌려줌)을 요구했는데, 바로 인민공사를 헐뜯어서 지주부농의 죄악스런 통치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러한 낡은 사회의 노동인민에게 무수한 억울한 사건을 만들어낸 제국주의자들과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사악한 분자 및 우파 등 다섯 부류는 이제 모두 억울한 사건을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인물을 하나 만들어내서 무산계급독재에 대항하려 하고 있다. 그들은 불만을 품고 전복을 꾀함으로써 스스로 다시 무대에 올라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
요문원이 언급한 단간풍과 번안풍은 모두 1962년 중국공산당 제8기 10차 전체회의에서 비판된 "나쁜 풍조"를 의미한다. 그 회의에선 실제로 세 가지 "나쁜 풍조"가 비판되었다. 첫째, 흑암풍이란 1961-62년 사이 중국경제의 어두운 면만 지적하는 풍조를 이른다. 둘째, 단간풍은 1961-1962년 봄에는 전국의 많은 지역에서 소자산가의 방법으로 토지를 경영하는 주자파의 저항을 말한다. 셋째, 번안풍이란 팽덕회 등이 자신들에 대한 당의 판결을 번복하려는 시도를 이른다. 결국 요문원의 비평문은 오함의 <<해서파관>>이 자산계급의 노선을 되살리고 중국공산당의 노선을 전복하려는 반혁명분자의 음흉한 작품이라는 선언이었다. 역사학자 오함의 이마에 반혁명분자의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었다.
▲ 요문원(姚文元, 1931-2005). 1981년 재판 받는 장면. 요문원은 1965년 "신판 역사극 해서파관 비평"을 통해 일약 문화혁명의 주역으로 등장해서 이른바 "4인방"의 한 명으로 맹활약한다. 1976년 9월 모택동이 죽자 다음 달 바로 체포되어 20년 형을 산다. 1996년 석방된 요문원은 조용히 역사를 탐구하다 당뇨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결국 요문원은 역사학자 오함이 팽덕회를 현대의 해서로 만들어서 모택동에 저항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팽덕회가 해서라면, 모택동은 가정황제였다. 올곧은 직언으로 파면된 해서는 가정황제 사후 복권됐다. 파면됐다 복권된 해서처럼 팽덕회 역시 복권되야 한다는 암시로 해석될 수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요문원은 오함이 은밀한 역사적 알레고리를 통해서 팽덕회의 번안풍을 지지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요문원의 뒤에는 최고영도자 모택동이 있었다. 피바람 부는 대반란의 1막 1장이 시작됐다. 서슬 퍼런 대반란의 칼날은 수십 명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계속>
송재윤 / 객원칼럼니스트 (맥매스터 대학 교수)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