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의 명승지인 합강정(合江亭)
두 줄기 강 머리 흰 백사장/明沙白石合江頭
삿갓 같은 정자가 중봉(中峰)에 빗겨있네/笠樣高亭半樣樓
만호대는 춘몽(春夢)인양 허허롭고/萬戶臺空春一夢
중앙단엔 천추(千秋)에 달빛만 예와 같네/中央壇古月千秋
멀리 나는 기러기 날며 잠기고/飛霞孤鶩簷端沒
단소소리 여운에 취해 해지는 줄 모르는데/短篴長笳日下遊
보이는 산천이 승경(勝景)인지라/望裏山川皆勝狀
예가 바로 인제의 명승이로세./麟城從此擅名休
위 시는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및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낸 부안인(扶安人) 이응규(李應奎)가 지은 <합강정>이란 시다. 합강정은 인제시가지에서 동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에 소재하며, 내린천(內麟川)과 인북천(麟北川)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웠다 하여 이름을 합강정이라 하였다. 인제 8경의 하나인 합강정은 조선 숙종(肅宗) 2년(1676)년에 이세억(李世億:1675~1676)현감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인제의 루정(樓亭) 건립의 효시(曉示)가 되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김창집(金昌輯)의 <동유기(東遊記)>에는
시야가 시원하게 확 트이고 기상도 시원한데다 정자도 아름답다. 정자집은 당형(堂兄)께서 이곳에 재임 시에 지으셨다. 비록 크고 사치스럽지는 않아도 십(十)자 모양에, 뒤 모서리는 방으로 꾸미고 나머지 모두는 망루(望樓)로 지은 그 제도(制度)가 실로 오묘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형(堂兄)은 곧 당시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김창국(金昌國:1696~1698)을 말하는데, 김창국 현감은 숙종(肅宗)의 후궁 숙의(淑儀)김씨의 아비로, 이세억(李世億) 보다 20년 뒤에 현감으로 재임한 것으로 보아 창건(創建)이 아니고, 최초에는 망루(望樓)로 지은 것을 뒤편 모서리 하나를 방으로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하곤(李夏坤)의 <등합강정(登合江亭)>이란 시에도
물이 모여드는 곳에/交會了形水
십자형 정자가 외롭게 서 있네/孤懸十字亭.
라고 읊었다. 어찌했거나 최초의 합강정 모습은 십자형에 5칸이었다는 점에서 건축양식이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 뒤로 박종영(朴宗永:1863~1866) 현감 재임 시에 크게 중수(重修)하였다. 당시의 정자가 훼손된 모습이나 현감의 중수의지가 그의 <합강정기(合江亭記)>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일찍이 괴이하게도 글을 가까이 하기보다 누정(樓亭)을 좋아하였는데, 누정을 좋아하는 까닭에 놀러 다니기를 즐기고, 놀러 다니며 즐기려는 마음만 발동하니 그것이 폐(獘)가되었다.
누정을 설비하는 데는 제 모습을 아주 잃었거나 참 모습을 잃은 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하는데, 어찌 일찍이 문장(文章)이어야 하고, 학문이 넓은 자만이 주관하며, 문장과 누정(樓亭)은 또 어찌하여 일찍이 잃어버린 참 모습으로 돌아가게 됨을 끝내 면하지 못하는가? 이는 뜻있는 선비가 문장을 좋아하지 않고,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물며 누정(樓亭)마저 옛적의 모습을 되찾는 것을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외관(外觀)을 빼어나게 가꾼 정자라도 혹 지나치게 띠 풀로 덮거나 혹 그런 폐단을 기꺼이 편안하게 고치지 않는다면 태수인 나로서 외물(外物)을 버리지 못함이요. 비록 그로 인하여 속사(俗士)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풍류도 없고 아주 넓은 의지도 없는 이라 할 것이다.
현감 박종영은 여동생이 정조(正祖)의 후궁으로 들어가 순조(純祖)를 낳은 화려한 문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권세(權勢)를 멀리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의 나이 60이 다 되는 1863년에 인제 현감으로 부임하였으나, 불평하나 없이 선정(善政)에 힘쓴 문신(文臣)이었다. 박종영이 개축한 이후에도 합강정은 몇 차례에 걸쳐 넘어지고,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여 오다 6.25동란으로 또 유실 되었는데, 1971년 10월에 주우영(朱雨英)군수가 철근 콩크리트조로 복원하였다. 그리고 1995년 5월에는 44번 국도 확포장공사관계로 철거되고, 도로확포장공사가 끝난 1998년 6월 2일에 현 위치에 지금의 합강정을 복원하였다.
300여년이 훨씬 넘는 긴 역사를 가진 합강정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거쳐 갔으며, 이를 소재로 한 시문(詩文)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으며, 선조들이 적어놓은 글을 후손들이 와서 보고 그 감흥을 또 글로남기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합강정 주변에는 중앙단(中央壇)과 미륵불(彌勒佛)이 있고, 물 건너에 마주하고 있는 비봉산(飛鳳山)의 만호대(萬戶臺)를 비롯하여 시인 박인환(朴寅煥)의 시비⦁번지점프⦁슬링샷 등 다양한 현대 체험시설과 볼거리들이 즐비하여 그야말로 종합관광지라 하여도 손색이 없다.
중앙단은 최초에는 내린천 물과 인북천 물이 합류하는 바로 밑에 ‘된숨이버덩’이라고 부르는 2천여 평의 섬처럼 물위에 떠있는 땅에 있었는데, 박종영(朴宗永) 현감이 합강정을 중수하면서, 이용 상의 불편한 점을 고려하여 합강정 부근으로 옮겨놓았다. 최초의 중앙단이 있던 ‘된숨이버덩’은 강원도의 중앙이라고도 하고, 동서로 통하는 길의 중앙이라고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거나 질병이 만연할 때면 도내 관원들이 이곳에 모여 제례를 올렸다고 전하는데, 현재의 제단은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옛 중앙단의 자료를 고증(考證)으로 2001년 7월에 인제군에서 복원한 것이다. 매년 군민의 날을 기념하는 ‘합강문화축전’에는 이곳에서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기원제를 올리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축제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