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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난에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린분들로 전남 보성군 득량면 정흥리 호음동 앞산
학두산에 육공신 불망비 "보성선씨육충절의비" 가 서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정흥리 호음동 마을앞에는 "선씨 6충유장비(宣氏六忠遺庄碑)"가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시 나라를 위해 싸우다 분사한 6명을 기리기 위한 비(碑)이다.여기에 소개된 6명이 "선씨육충"이며 선씨들 가문의 자랑이고 예로부터 고을의 자랑거리였다.최근 향리의 식자들과 선씨들이 새로히 "보성선씨 육충절의비"를 보성군 득량면 도촌리 학두산에있는 숭모제(崇慕齊: 선씨 사당이며 육충에 제향하는곳) 앞에 세우고 6충의 높은 뜻을 기리도록 하였다.이들 6충의 행장을 살펴보면 우리들로 하여금 자못 비분을 느끼게한다.
보성선씨 六忠 은
宣餘慶(무과 , 병마절도사 :선무원종일등공신), 宣弼伯(참봉: 동2등공신) 宣敬伯(무과, 좌랑:동2등), 宣靑元(무과, 훈련봉사:동2등), 宣海壽(무과, 훈련판관: 동2등), 宣麟壽(무과,금군 :동2등) 이다.
이들 모두가 무과 급제한 수재(秀才)들로써 선해수와 선인수는 선여경의 두아들이며 선필백,선경백,선청원은 선여경의 4촌 동생들이다.
이들은 통훈대부 선대덕(宣大德), 현감 후덕, 찰방 달덕 3형제의 자식. 손자들이니 보성선씨 8세
선진기(宣眞起)의 일문(一門)이다.
선여경은 1559년 무과 장원급제하고 선전관,주부,도사 등의 직을 수행하다가 1591년에 외간상(부친상)을 당하여 움막에서 혹한과 혹서에 아량곳하지않고 시묘살이 하던중 1592년 임진난을 맞이하자 불효를 무릅쓰고 상복을 먹물로 염색하여 입고서 종형제들에게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뜻을 말하자 종형제들도 앞다투어 " 사나이가 죽어야할때가 이때이다"하면서 선조 어가를 지키기위해 모두 종군한다. 평양성 전투를 전후하여 이들 6명은 분사하였으며 특히 "임금과 아버지(君.父)의 원수를 모두 죽이지못하고 죽음이 한스럽다"고 선해수,선인수는 피눈물을 쏟고 순절하였다고 전해온다 .
이들은 선씨들이 대대로 보성에 살면서 국가의 혜택을 많이 본 양반가의 책무(노블리스 오블레쥬)를 다한 본보기였으며 선조는 이들을 선무원종공신록에 올리고 동 록권을 하사하였다. 선조의 교명문, 선씨육충 유장비문등에 이분들의 활동상이 나와있다.
※ 유장(遺庄): 어떤분이 남기신 장엄했고 씩씩했던 행적
백이산 호산 아래 망월과 청방 안에 툭트인 동네가 있으니 바로 호음동이다. 이동네가 선씨 육충이 태어난곳으로써 자손들이 살고있다. 대저 임진 계사의 난에 평양을 회복함이 실로 국가 중흥에 직결되는 관건이였다. 이즈음 선병사 여경은 마침 아버지 상중에 있었는데 왕이 의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성된 마음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복을 먹물로 염색하여 입고서 두아들과 세명의 사촌 동생들을 데리고 왕이 머물러있는 곳으로 달려가 명나라 이여송 장군과 더불어 평양성을 탈환하고 결국엔 순절하였도다. 을사(1605년)년에 조정에서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공훈을 정하고 철권을 하사했다. 판관 해수는 그 장자요, 금군 인수는 차자인데 군부의 원수 갚을것을 맹서하여 나섰다가 또한 순절하니 공훈은 이등훈으로 책록되고 참봉 필백과 좌랑 경백은 현감 후덕의 두 아들로써 몸을 내던저 시체 더미속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 삼부자의 시체를 찾아다 묻고 뒤이어 독전을 하다 또한 순절했으며 봉사 청원은 찰방 달덕의 아들로 역시 순절을 하여 모두 이등훈으로 책록되었으니 모두 병사공의 사촌 동생들이였다.아 빼어나고 기이한 봉우리의 우람하고 맑은 기운이 선씨 일가에 모이어 허다한 정충과 의열을 태어나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장한가. 수백년이 지나도 산이 더욱 높아 보이고 물이 더욱 맑아보여 그 강하고 열열한 기상을 우러러 보는듯하구나.병사공의 11대손 정규가 이제 돌을 깎아 그 집앞에 표석을 세우려하면서 규용에게 작문을 요청하니 내 비록 그런 위인은 못되나 나또한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기에 늙고 어두운 핑게로 사양하지 않고 명을 지었다. 옛날 우리 선조의 임진 4월에 감히 하늘을 대항하겠다고 섬 오랑케들이 창궐하였다. 그래서 먼 의주로 임금이 피난을 가시니 육공이 모두 일어나 마음에 맹세하고 순국을 결심하였도다. 곧바로 행재소로 달려가니 백관들이 놀랐다. 명장 이여송이 감탄을 하고 함께 전략을 상의했다. 다음해 1월에 평양을 회복하려고 승승장구 쫒기는 적을 쫓으니 깃발과 북소리 당당하였도다. 부자와 숙질이 앞다투어 순절하니 연광정도 빛을 잃고 대동강도 목이메였도다. 평양인들이 다시 태양을 보니 단서 철권이 천고에 빛이 나는도다. 후손집에 아직도 보존이되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 서성이며 우두커니 바라보는구나. 1954년 늦봄에 연창(죽산) 안규용 지음 |
주) 육충: 선씨 6공신을 말한다. 선무원종공신록권상에 책훈된 28분의 선씨중
판서공 선원지님 후손들이 총 8분인데 선백원(宣伯源)님과 선경룡(宣慶龍) 두분을 제외하니 6공신
이다. 선백원님은 봉사공 선청원님의 형님이 맞으나 보(譜)상의 함자가 伯元인데 녹권에 伯源으로 등록되어있고 선략장군 선정민의 아들이신 선경룡님은 안렴공 후손들 보에도 올라있는 분이라서 족보에는 공신의 기록을 유지하고 총인원에서는 제외하게 되어 6공신이라 명영하게되었다. 선무원종공신록권은 공신을 책정한 교서이기에 당연히 "공신"이라는 공식 호칭이 마땅하나 여섯분들의 장엄한 최후가 "충신"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여 "6충"이라 명명하게되었다.
◎삼국사기의 선씨들
선 광(宣 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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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왕때의 장수 668년 6월 21일 아찬 장순.순정과 더불어 하서주행군총관으로 고구려 원정(삼국사기) |
선 극(宣 極) |
문무왕때 고구려 원정 참여. 668년 나당 연합군의 평양성 포위 공격시 흑악령으로써 큰공을 세우다. 고구려 정복 직후 10월 22일 논공행상시 대운전투 제1공로자로써 일길찬 관등과 벼1,000석을 받다(삼국사기) |
선 복(宣 服) |
태종무열왕때의 군관. 관직은 계금졸. 660년 11월5일 계탄을 건너 왕흥사 잠성(현 부여 울성산성)을 공격하여 700백 여인을 참살하고 전사. 태종 무열왕이 백제에서 돌아와 급찬 벼슬주다 (삼국사기. 동국통감) |
선 종(宣 宗) |
신라 성덕왕때 중시. 벼슬은 이찬. 722년 정월 중시 문림이 죽자 중시에 임명되다. 725년 천변지이를 책임지고 물러나다. 후임에 윤충(삼국사기) |
수 많은 성씨들이 살고 있었을
터인데 선씨들이
왜그리 많이 나타나는가? (4명이면 짧은 역사의 기록에서는
많은 수에 해당하기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씨스템"의 콘텐츠 인물사전에 총 16명의 선(宣)씨 -정확한 표현은 인물명의 맨 앞글자가 "선"인-들이,그중 "선문"이란 분은 성씨가 백제 8대성씨인 진모씨라 밝혀 두었기 15명이 실려있다. 삼국시대 인물 4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성선씨임이 맞다. 삼국시대 인물들도 박사님들이 나중에 "이사람은 선씨가 아니다"고 수정하기 전까지는 모두 선씨로 봄이 자료를 보는 자세이며 타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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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씨들의 동래시기(東來 時期)가 선씨들 족보에 나타난 백제전. 중국 한말(漢末)이 틀림없음이 반증된다.통일 신라 초기에 수많은 선씨들이 한반도 남부 지방에 퍼져 살고있었음도 추측된다.짧지않은 6-7백년 동안 선씨들 씨족은 많이 불어났고 백제 신라의 발전에 일정 역할을 하는 성씨로 태어났다. 해안선을 타고 당초의 기착지였든 전남 남해안에서 경상도 전역까지 그 세기를 넓혀 나갔다. 보성선씨 족보에 보면 경상도 씨족들과 혼인한 사실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런 혼인은 짧은 역사와 교류로는 불가하다본다..선씨들이 꼭 족보에 나타난 시기에 동래하였는가 의문은 비단 선씨뿐만이 아닌 모든 성씨들에게 공통된 문제이기에 거론하는것은 타당치 않고 선씨 선대들 독자적으로 그 싯점을 정확히 분석하고 있었다 보겠다. 고려말 조선초에도 선씨들은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는 1,000년 이상을 한반도에서 버틴 결과이며 삼국 통일의 와중에서 선씨들은 많은 경험과 역할을 하였기에 가능하였다 할 수있다. 선씨들의 아픈 역사도 정리되어야 할것인즉-고려말 명나라 귀화설 있을 수도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숙고하면 기존 세력이 있는데 어떻게 귀화하여 시초의 선씨라 할 수있었겠는가? 물론 선씨는 모두 혈족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서로 부인하지 않는 상황하에서 하는 얘기이다. 이렇듯 역사의 기록으로 선씨들이 상당수까지 가구수가 늘었음을 추측할 수있는데 족보의 기록 상 14세기에 그 수가 많지 않았음을 볼때 고난의 역사 파고를 넘지 못했음을 알 수있다. 역사는 많은것을 알려주지만 기나긴 세월 선씨들이 버텨왔다는것을 분명하게 알려줄 수는 없다 역사는 아주 작은 부분의 기록일 뿐이며 그것이 한계다. 따라서 전사가 역사에 앞섬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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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연)인물사전에 등록된 분들
선거이. 선한.선동기. 선형.선화.선세강. 선약해. 선여경.선윤지. 선정립. 선종완 |
실록.일기속의 선씨들
이름 |
활동시기(추정) |
주요 활동 |
선 존의(存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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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대 중반∼1400년대 초반.태종부터 세종조까지 기록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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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관(통사)에서 출발 대호군(건공 또는 보공 장군) 까지 역임.태종이 직접 전답을 하사 하기도.중국을 왕래하며 임금의 의중 전달 과 중국 정세.정보 입수 등으로 임금들과 독대도 많이 한분. 세종때 중국과의 공물(馬) 마찰을 잘 해결하였음. 장군(대호군)까지 승차. ◎1300년대 하반기 조선 건국 즈음하여 많은 선씨들이 활동하였음을 알수있게함. 임금께 직소한 보고서 세종 14권, 3년(1421 신축 / 명 영락(永樂) 19년) 11월 22일대호군 선존의가 요동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올린 보고 대호군(大護軍) 선존의(宣存義)가 요동으로부터 돌아오면서 도중(途中)에서 보고하기를, “존의(存義)가 요동에 이르러 말을 도사(都司)에게 맡기려고 하니, 도사가 모두 말하기를, ‘늙고 키가 작은 말이 많은 것은 무슨 일인가. ’라고 하므로, 존의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큰 말이 나지 않는 것은 상국(上國)에서 평소부터 다 아는 일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황제의 명령을 우리 전하에게 전하니, 전하께서 즉시 서울과 지방에 명령하여, 문무 백관과 아래로 군민(軍民)까지 독려하여 모두 말을 바치게 하고, 직장관(職掌官)이 정밀하게 골라서 전하에게 아뢰니, 전하께서 또 친히 낱낱이 좋은 것만 가려서, 신(臣) 등에게 주어 금년 안에 다 바치도록 한 것인데, 어찌 오늘 물리침을 당함이 이와 같을 줄 생각했겠습니까. 존의가 길에서 첫 번째 보낸 말이 72필이나 물리침을 당한 것을 보았고, 관(館)에 이르러 또 두 번째 보낸 말이 80필이나 물리침을 당한 것을 보았으니, 만약 그렇다면, 앞에 간 조현(曺顯) 등이 돌아가서 우리 전하에게 아뢰어 조정에 청하여, 관원을 보내어 말을 골랐더 라면 어찌 오늘의 왕래하는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금년 안에 반드시 말을 다 바칠 수 없게 되어, 조정에서 말을 쓸 시기에 어긋날 듯합니다. ’라고 하니, 주(周)·하(夏)의 두 도사(都司)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잠잠히 있다가 의논하여 진무(鎭撫) 왕영(王永)을 불러 말하기를, ‘두 번째 보낸 말을 물리친 것을 우선 버리지 말고 내일 다시 고르라. ’고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두 번째 보낸 말 중에서 물리친 말 60필을 다시 골라서 취하니, 존의가 가지고 간 말 6백 필 중에서 다만 15필만 물리쳤고, 설내(偰耐)가 가지고 간 5백 필 중에서 19필만 물리쳤습니다. 그 이튿날 하직하고 돌아오니, 하 도사(夏都司)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요동에서 말을 너무 많이 물리친다고 말하므로, 다만 18세 이상 된 것과 병들어 쓸 수 없는 것만 물리쳤다. 그대의 전하가 지성으로 말을 바쳤으니, 만 필 중에서 비록 열 필이라도 쓸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어찌 전하의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에 부응(副應)하겠는가. 마땅히 이 뜻으로써 그대의 전하에게 아뢰라. ’고 하였습니다. 존의는 말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친히 말을 골랐을 때에는 어찌 한 필이라도 쓰지 못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수천리 길을 오게 되매, 풀이 마르고 물이 얼었으며, 먹이도 또한 배부르지 못한데 여러 달 동안 험한 길을 지나오니, 말이 병들 것은 의심할 일이 없습니다. ’라고 하니, 하 도사는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존의가 또 보고하기를, “삼위(三衛)의 달적(達賊)이 요동을 노략하여 삼보(三 堡)의 사람을 죽이니, 도독(都督) 무개(巫凱)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쫓았으며, 또 군사를 등록하여 적을 방어합니다.” 라고 하였다. |
지철(之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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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년(고려)∼ 1420년대 추정 1403년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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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정부에서 필요한 물품 구입차 중국에 무역하러가는 사람들 을 선지철(선장)의 배에 태우고 중국에 갔으나 중국의 통제에 걸려 생사를 알지 못하고있어 선처를 요구하였는데 중국 황제의 자유로 운 무역 허락이 있었음 |
윤지(允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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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8(태조 7년)년 기록이므로 1340∼1420년대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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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李鷹:임금의 잠저 시절 원종했던 인물)이 동북면에서 역마(驛馬)를 폭력을 써서 빼았고 전사(傳舍)를 소란케한 죄로 옥사가 일어날 당시 우도정역사(友道程驛使)였는데 정당한 사유 없이 말을 내주었기 태형(笞刑) 당하다 |
무명 선씨 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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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대 하반에서 1400년대 초충반을 사신분 세종 13년(1431) 기록 |
-典書강유(姜濡)의 처 선씨녀의 뜸(초둔) 납품 사건 ※초둔=거적(집,부들 등으로 만든 거적: 뜸이라 하기도) 선씨 아줌마께서 김종서에게 청탁하고 김종서가 수원부사 윤처성에게 압력넣었든 일. 윤처성 또한 선씨 아줌마가 자기의 4촌 대모였기에 허가증을 만들어주고 대신 납부한 초둔값을 받아가게한 사건이다. 이로인해 윤처성만 곤장 100대 맞고 2계급 강등했다. 과부로 살기 힘들어서 무슨일이든 해야했던 강유의 처 선씨. 쌀 9말(요즘으로하면 쌀 한가마? 대두 즉 큰말로하면 두가마 정도, 많아야 30만원) 값에 해당하는 비리. 세종대왕께서 친히 선씨가 공신의 후예 이기때문에 봐줘라 하셨다. 당시의 선씨아줌마가 공신의 후예라하였는데 조선조초의 공신은 1392년(태조 1)의 개국공신, 1399년(정종 1)의 정사공신(定社功臣), 1401년(태종 1)의 좌명공신(佐命功臣), 3종이였다. 선씨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공신이였다는 말씀으로 "후예"라는 표현으로 보아 조부 이상이였을 것이며 공신 책록 당시 나이를 40세 전후로 보면 적어도 1350년 이전 태생으로 볼 수있다. 죽은 전서 강유의 처 선씨의 수원부 초둔 선납사건 작고한 전서(典書) 강유(姜濡)의 아내 선(宣)씨가 수원부(水原府)에서 공납하는 풍저창(豐儲倉) 초둔(草芚)을 대신 납부하고, 그 대가(代價)를 받으려고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에게 청하여 수원 부사 윤처성(尹處誠)에게 서신을 통하였고, 처성이 진성(陳省)을 내어 준 바 있었는데, 그 사실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탄핵해 아뢰기를, “은밀히 남의 무후(無後)한 부녀자에게 후의를 베푸는 것은 이미 금하는 법령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종서가 남몰래 내통하고 글로 청하였으니, 이는 실로 전하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로서 법을 받들어 행하는 뜻이 없는 짓이오니, 율문에 비추어 그 죄를 결단케 하옵시기를 청하오며, 처성은 은밀히 그 4촌 대모(大母)인 선씨와 약속하고 겉으로는 권요(權要)에 있는 사람의 청에 따라서 한 것처럼 가장하여 진성을 내어 줌으로써 민폐(民弊)를 끼치게 하였사오니, 청하옵건대 율문에 의하여 장(杖) 1백에 처하고, 선씨도 역시 함께 율문에 의하여 처벌하게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초둔 값이 얼마나 되는가.”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정흠지(鄭欽之)가 대답하기를, “면포(綿布) 한 끝[一端]으로 3번(番)과 바꾸는데, 지금 수원 초둔의 값는 1번을 쌀 9두(斗)로 계산합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 값이 갑절이나 되기 때문에 다투는 것이다. 전에도 비록 명문화한 법령은 있었으니, 대소(大小)의 사가(私家)에서 각 관아의 공물(貢物)을 공공연하게 선납(先納)하고는 그 값을 민간에게 거두어도 사림(士林)들이 일찍이 허물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서도 역시 인정상 친족 부녀의 소청을 좇았던 것인데, 그 법을 명백히 밝힘에 이르러서 종서가 잘못한 것을 알고 뉘우치면서 즉시 가노(家奴)를 보내서 그 편지를 도로 찾아왔고, 그 글에 이르기를, ‘만약 공의(公義)를 해친다면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하였으니, 마땅히 그 죄는 면해야 하며, 선씨는 공신(功臣)의 후예이니 거론하지 말 것이며, 처성은 2등을 감하여 장(杖) 80에 처하라.”하였다. 정흠지가 또 종서의 죄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곧 직사에 나오라고 명하였다. |
화 (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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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대 초반 활동 (세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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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현령. 역참 책임자들의 잦은 인사발령에 대한 폐해를 상소 세종 2년(1420.영락(永樂) 18년) 11월 5일 정부와 육조에서 여러 도의 수령과 한산인의 건의문을 검토. 정부(政府)와 육조에서 여러 도의 수령(守令)과 한산인(閑散人)으로부터 올려 보낸 여러가지 편의 사항을 함께 의논하여 올리게 하였으니 1. 용인 현령(龍仁縣令) 선화(宣和)가 말하기를, “각도에 있는 역승(驛丞)의 말은, 역이 많으면 10여 역(驛)이나 되는데, 이제 3, 4개월만에나 또는 5, 6개월만이 까닭없이 자주 교체하므로, 비록 일을 할 마음이 있는 자라도 관사(館舍)를 수리한다든가 역리를 살도록 돌보아 주려는 방안을 어느 겨를에 할 수가 없으니, 수령(守令)의 예에 의하여 그들 성적의 우열을 고사하여 자주 교대하지 아니하여 그 폐단을 없애게 하라.”하였는데, 또 여러 사람의 의논은, “여러 도의 역승(驛丞)을 적당히 증설케 하고 《육전(六典)》에 의거하여 그들의 포폄을 고사하기를 수령(守令)의 예(例)와 같게 하라.”지시 |
형 (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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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0년부터 1494년까지 총 104건의 기록이 있음(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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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은 약40년간에 걸처 "형"의 일생이 자세히도 기록되어 있어 가히 자서전적이라 할 수 있음. 주로 북방 수비라는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였으며 정권 창출과도 깊숙히 관여한 것으로 보이며 적개공신 좌리공신에 책훈됨. 최종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 실록에는 기록이 없으나 보광대국숭록대부(영의정 이상 하신분의 품계)를 증직받음.지중추원부사의 최종 관직이 나타나며 유성군에 봉해짐. 대단한 청백리임이 성종과 한명회와의 대화에 나타남. "임금이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한명회(韓明澮)를 불러 묻기를, “누가 절도사(節度使)를 맡을 만한 자인가?”하니한명회가 대답하기를,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형(宣炯)은 재주가 있고 또 청렴하니 쓸 만합니다.” 관계 진출 선씨중 고금을 막론 가장 성공하신 선씨이다.
세조 13년(1467년) 7월 12일이시애 토벌에 수군 사용을 건의한 황해도 절도사 선형의 상서 황해도 절도사(黃海道節度使) 선형(宣炯)이 상서(上書)하기를,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으로 유혹(誘惑)하여 왕인(王人)을 살해하고, 감히 횡역(橫逆)한 짓을 마음대로 하는데, 그가 믿는 자는 반드시 6진(六鎭)의 병졸(兵卒)일 것입니다. 6진(六鎭)의 습속(習俗)이 강포(强暴)하고 우직(愚直)하여 처음에 이시애의 속임수에 빠져서 다투어 수령(守令)을 죽였는데, 지금 문죄(問罪)할 것을 두려워하여 어디에 의탁(儀托)할 것인지 알지 못하다가, 이시애에게 의지하고 붙어서 경각(頃刻)의 목숨을 연장(延長)하려 합니다. 신(臣)의 생각으로서는 앉아서 험령(險嶺)을 지킨다면 달리 입공(入攻)할 길이 없을 것이므로, 저들이 이 때문에 둔취(屯聚)하고 아직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국가(國家)의 위엄(威嚴)으로써 진멸(殄滅)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그러나 더불어 싸워서 살상(殺傷)의 해(害)가 있으면 계교(計巧)로써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6진(六鎭)의 사람들이 본래 수군[舟師]을 싫어하는데, 지난번에 홍상직(洪尙直)이 경성 부사(鏡城府使)가 되니, 민간(民間)에서 와전(訛傳)하는 말에, ‘홍상직이 모반하므로 남도(南道)의 선군(船軍)이 여러 도(道)에 몰래 정박(碇泊)하고 있다.’고 하였고, 또 갑술 연간(甲戌年間) 에 와전(訛傳)하 는 말에, ‘절제사(節制使) 김문기(金文起) 등이 모반(謀反)하니, 남도(南道) 선군(船軍)들이 많이 모였다.’고 하고, 스스로 서로 공동(恐動)하여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마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수군[舟師]를 서로 두려워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이 도(道)의 백성들이 본래 주즙(舟揖)을 알지 못하므로 수군을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이미 육로(陸路)로 입공(入攻)하니, 또 강원도(江原道)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병선(兵船)을 적당히 뽑아서 배가 수천 수백 척이라 일컫고, 연변(沿邊)에 돌아와 정박(碇泊)하여 그 형세(形勢)를 많이 과장(誇張)하고 바로 6진(六鎭)으로 향한다고 성언(聲言)하면 6진(六鎭)의 병졸이 그 집을 생각하여 반드시 멀리서 바라보고서도 와해(瓦解)될 것입니다. 이것은 병법(兵法)에 이른바, ‘형세에 의하여 쳐부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구적(寇賊)은 비록 염려할 것은 못되나, 만약 천주(天誅)를 늦추다가 국경이 맞닿은 여러 오랭캐들로 하여금 틈을 타서 일어나게 한다면, 아마 그 졸지에 멸망시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영 양부(兩府)에 보이니, 많이 선형(宣炯)의 의논이 옳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수군[舟師]을 쓰는 것을 어렵게 여겨 끝내 따르지는 않았다. |
무명 선씨 녀 |
1400년대 중.후반 |
허선의 비리와는 무관하게 과부 선씨로 나타난 분 |
귀령(貴齡) |
1431. 3. 5 기록 |
김천명과 선귀령 등에게 각기 쌀·콩 4석을 하사 전라도 감사가 장흥부(長興府)에서 얻은 청낭간(靑琅玕) 5매(枚)를 바치므로, 이를 발견해 얻은 자인 김천명(金天命)과, 관에 고한 자인 선귀령(宣貴齡) 등에게 각기 쌀 콩 4석을 하사하였다 |
여경(餘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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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대-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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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원종1등공신 (선씨 문중이 보전해온 선무원종공신록권상 1등 공신으로 무과 합격 과보의 기록이 있으며 후손들이 당상교지와 홍패.유지들을 보전해온 기록이 있음. 병마절도사로 고금도에서 전사. 실록에 선조와 군공청과의 대화중에 당상관의 자급이 주어저야 마땅하다는 내용이 나타남. 군공청(軍功廳)이 아뢰기를, “이기남(李奇男)·신여량(申汝梁)·구덕령(具德齡)·나덕신(羅德愼)·이극신(李克新)·송전(宋荃)·이섬(李暹)·위대기(魏大器)·조효남(趙孝南)·선여경(宣餘慶)·이언량(李彦良)은 마땅히 원신(元愼)의 예에 의하여 논상(論賞)하여 전후가 다르다는 원망을 없게 해야 하는데, 당상(堂上)의 중한 자급은 은명(恩命)에 관계되니 상께서 재량하여 시행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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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이(居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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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0년대-임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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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난에 많은 활약을 함. 특히 권율 장군과의 행주산성 협전에서 공을 세움. 진주성 싸움의 원군으로 현지에 도착하였으나 도저히 싸울 형편이 못되어 홍계남과 남원으로 진을 옮긴 사유로 조정의 질책과 탄핵 상소를 받아 많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음. 이순신 장군에게 전략을 조언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 1592년(임진) 만력(萬曆) 20년 11월 1일 :진도 군수 선거이를 전라 병사로 삼다 1596.11.7:상이 이르기를“선거이(宣居怡)는 병이 있는가?”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1597.1.27 신이 선거이(宣居怡)·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永登浦)에 진을 치고 있는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長門浦)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을 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觀望)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 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 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
홍복(弘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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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선각자 정여립을 알고 지내다 정철의 모사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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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정여립(만민 평등의 혁신적인 사상가.반역으로 몰림)의 난에 연루되어 참형을 당함. 정철의 모사로 다른 사람들도 연루시키는 진술을 하였음. 정여립과 알고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매우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낙안 교생 |
덕룡(德龍) |
1609-1610년의 기록 |
ㅇ옥구 현감 당시 어민을 과롭히는 해적에 대한 대처를 소홀히하였다고 지역민들의 상소를 받음 ㅇ전라좌수 우후(병사.수사의 부직으로 병사는 종2품, 수사의 우후는 정4품이다) |
인복(仁福) |
광해4년(1612년) 4월12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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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벽,설간 등의 공초에 나타난 분. 억울함을 당한것 같음 |
득리(得李) |
1618년 4월 8일 기록 |
궁궐 등의 지붕에 사용하는 기와(황와)의 원료인 석자황과 관련된 내용으로 역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무역을 부수적인 임무로 부여받은 내용이 기록됨. 통사 선득리는 1618년 실직을 제수받았음 |
약봉(若奉) |
현종 6년(1665년)의 기록 |
지역 인물을 뽑고자 과거가 시행되었는데 지방 사람들이 합격되지 못하자 차점자 5명이 온양 지방 사람들이였기 이들 중 3명을 합격시킴. |
세강(世綱) |
인조 15년. 병자란(관련 기록(1637.2.26) |
ㅇ 洪州 영장 당시 박건천의 무고 사건에 연루-박건천에게 무고를 유인하여 사형 당하게한 유인죄, 즉 옥사 조정의 장본인으로 정죄할것을 탄핵받았으나 임금이 불응했으나 결국에는 벌을 받음. ㅇ 안동 영장 재직시 교전에 분발하였음을 경상감사가 보고, 좌병사 허완의 중군장으로 쌍령전투에서 분사하다. |
약해(若海) |
인조 8년(1630년) 6월 1일 |
경상좌수사 발령 받음. |
윤지(允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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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말 활동 1300년 하반기 고려 패망 직전 (1382년 이후) 호남 안렴사로 활동.두조정을 섬기지 않은 고려조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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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순조 30년 (1830년) 사액 내리다:선윤지 등 5명을 후손들의 요청으로 "5충"으로 ㅇ순조 31년(1831년.신묘년) 예조의 포상신청 원문: .庚戌朔/禮曹啓言: “故監司宣允祉, 以皇朝學士, 洪武十五年, 奉使東來, 仍籍寶城, 而其後孫節度使若海, 崇禎四年, 奉使入瀋陽, 以片言折服强胡, 安東營將世綱, 丙子虜變, 爲左兵使許完中軍, 到雙嶺戰亡。 以皇朝人子孫, 又爲皇朝, 罵賊殉身, 若是彰著, 請使其後裔, 入參於皇壇望拜之列。” 從之 안렴사(고려조 5-6품의 임기 6개월)에서 감사(조선조때의 벼슬 종2품)로 400년만에 조선조정에서 증직하다. |
모두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이름 |
년. 월.일 |
왕조 (중국 년호) |
내용 |
선세휘(世徽) |
1623년 4월19일 4월21일 |
인조 원년 천계(天啓) |
폐모론 주창자인 선세휘 등을 위리안치하라는 상소 (宣世徽. 爲儒生時, 廢母投疏, 極其兇慘, 辛義立, 賦性兇悖, 締結二字缺與大珩, 合爲一身) |
선경신(敬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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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 9. 16 |
인조 3 |
수문장 선경신등의 부정건 논의 (수문장:조선초에는 정4품, 후기에는 6-9품도있었다) |
선약수(若水) |
1625. 10. 29 |
인조 3 |
온양(溫陽)사는 유학(幼學:공부중) 선약수등의 상소건. 조사토록 지시하다 |
선 한(漢) |
1627 1. 19 4. 4 4. 5 |
인조 5 |
훈련도감에서 300명의 포수 요청시 선한은 후초관으로서 100명 인솔하다. 부원수 정충신이 훈련도감 초관 선한이 상당하였기 소속 군관을 가초관으로하여 대신케하십사하는 건의가 있었고 승락하다 |
선 한(漢) |
1627 4.7 |
인조 5 |
비변사에서 훈련도감 판관인 선한이 상을 당하였기 그가 맡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토록하자는
보고가 있었다 |
선약해 |
1927 12. 31 |
인조 5 |
선약해 함종부사로
승차 하는날 |
선 집(楫) |
1929 6. 9 |
인조 7 |
궁가(宮家)의 세금을 면하게해주었다는 건으로 왕에게 파직할것을 건의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
선약채(若采) |
1930 1. 27 |
인조 8 |
선전관 선약채가 행동거지가 매우
불량함으로 파직시킬것을 건의 |
선약봉(若奉) |
1634 11.16 |
인조 12 |
온양 사는 서생 선약봉등이 상소해왔습니다 하자 상소가 절실하고 자세하다, 해당부서에(6조 중) 조사케하라 |
선세강(世綱) |
1637 2.6 |
인조 15 |
선세강 전사후 포상받다 비변사의 보고: 금번 병란(병자-정묘)에 안동 영장 선세강등은 교전 당일에 몸을 돌보지않고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대단히 가상하며 포상하고 증직해주는것이 마땅합니다. 이는 성상께서 결심하실 사항이기에 감히 보고드립니다. 왕께서 하길: 보고문이 대단히 마땅하도다 시행토록하라. 그들의 자손을 각별히 채용해주고 그중 나이든 부모가있거든 소재처(있는곳)에서 월연금을 마련 지급하고 병이나면 바로 진찰해주고 장례 물품도 주도록하며 가는길을 호송해주어라.하다 (死於國事者甚尠) 安東營將宣世綱等, 交戰之日, 奮不顧身, 力戰而死云。亦極可嘉, 一體褒贈, 未爲不可, 而係是恩命重事, 惶恐敢稟。 傳曰, 啓辭甚當, 依此施行。其子孫各別錄用, 而其中有老親者, 令所在處, 月俸磨鍊題給。如有病患, 趁卽啓知, 葬需題給, 一路護送等事, 亦令一體擧行 |
선 한(漢) |
1637 8. 15 9.11 |
인조 15 |
재령(載寧) 현감 선한 부임키 위해 왕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
선 섭(涉) |
1643 2. 12 |
인조 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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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환 |
1639 |
인조 17 |
선문환 部長 발령 |
선인문 |
1640 |
인조 18 |
격쟁사건에 연루되다. |
선섭(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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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 선섭을 벌줄것을 청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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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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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8 |
인조 18 4/6 사노 남생의 격쟁(r擊錚)사건 수문장 선섭 연루되다. |
선홍원(弘遠) |
12. 20 |
인조 19 |
평양감사의 서목(書目:요점만 따로적어 보고서에 첨가한 지면): 전 현감 선홍원이 군관의 죄상을 은폐(厭避:싫고 꺼리어 피함)한 건은 해당 부서(조)가 전례를 따라 군역(充軍:죄지은 벼슬아치를 군역 복무케 또는 죄지은 평민을 천역군에 편입시키는 형벌)에 처할 사안입니다. |
선집(楫) |
8.3 |
인조 20 |
선집을 수차례 다시 조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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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섭 |
2.12 |
인조 21 |
훈융(訓戎:함경북도 온성군 국경 마을.만주 혼춘 연결 철도의 분기점) 첨사(僉使:=첨절제사, 조선의 각 진영에둔 종삼품 무관 벼슬)로 부임하기 위해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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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섭 |
2.12 |
인조 21 |
선섭 등에게 화살( 弓矢)을 보내라는 전교 |
선집(楫) |
4.6 |
인조 21 |
판관 선집등의 직첩을 돌려주고 다시 논하지말것을 이조와 병조에 시달하다 |
선집 |
10.6 |
인조 21 |
판관 선집의 계미년 춘.하 징계에서 시행되었거나 검토중인 건을 더이상 거론치말것을 이조에 전교 |
선영(宣永) |
4. 5 |
인조 22 |
刑曹粘目。答曰, 依允。吳應民·宣永乙良, 分揀。內下記草 |
선섭 |
2/19 2/24 3/1(3회)
4. 2
|
인조 23 |
훈융(訓戎: 함경북도 온성군의 국경 취락. 두만강 남단. 만주 훈춘과의 철도 연결 기점)첨사 선섭등이 연루된, 차사들의 월경 인삼을 캔 사람들에 대한 조치 관련 |
선홍원 |
12.30 |
인조 24 |
가산군수로 부임하기위해 선홍원이 하직인사 1. 인조 19년/
12월/20일(신유)
宣弘遠의 充軍을 청하는 平安監司의
서목 ○ 平安監司書目, 前縣監宣弘遠, 厭避軍官罪狀, 令該曹照例充軍事。 2. 인조 24년/
12월/06일(무인)
崔惠吉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以崔惠吉爲大司諫, 南重晦爲正言, 元振溟爲掌令, 宣弘遠爲嘉山郡守, 以下缺盧守元爲武平君, 泳爲晉城監, 崔攸之爲承文院副正字, 吳燦爲成均館學正, 都擧元爲成均館學錄, 李坰爲承文院判校, 金佐明爲修撰, 南溟振爲..... 3. 인조 24년/
12월/30일(임인)
宣弘遠이 하직함 ○ 下直, 嘉山郡守宣弘遠。 4. 효종 원년/
03월/02일(을묘)
出待하지 않은
宣弘遠을 罷黜하였으니 朝廷에서 죄상을 處置하게 하기를 청하는
平安監司의 서목
○ 平安監司書目, 順川郡守宣弘遠偃然退在, 不爲出待, 爲先罷黜, 罪狀, 令朝廷處置事。 5. 효종 원년/
03월/02일(을묘)
勅使 일행을 맞이하지 않은
宣弘遠을 罷黜하였으니 該曹에서 口傳差出하게 하여 發送하기를
청하는 備邊司의 계
○ 備邊司啓曰, 卽見平安監司狀啓, 順川郡守宣弘遠, 以勅行不爲出待之故, 旣已罷黜。此時西路守令, 不可一日暫曠, 令該曹當日口傳差出, 卽爲發送, 何如? 傳曰, 允。出備局謄錄 6. 효종 원년/
03월/23일(병자)
李光勉 등의 조율 결과를 보고하는
義禁府의 照本 ○ 禁府, 李光勉議處公事判付內, 分揀。同府宣弘遠元情公事判付內, 分揀。同府照本, 閔仁佺矣濫用民結, 罪杖一百, 徒二年, 年七十以贖告身盡行追奪, 私罪。啓功減一等。已上朝報 7. 효종 5년/
07월/02일
현감宣弘遠 등에게 직첩을 돌려줄것을 명함 |
선 한(漢) |
3.6 |
인조 26 |
선한을 벌주라는 사간원의 보고에 대해 허락치 않았다 |
선진길 |
1653 10. 17 |
효종 4 順治(淸/世祖) 10년 |
충훈부 보고:선진길 등이 충훈부에 방문키로 하였는데 오지않아서 여러번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으니 부득이 서면 회신해야겠다함. 왕이 알았다 하다( 무슨건인지 기록 없음) |
선홍원(弘遠) |
1654 7. 2 |
효종 5 |
현감(縣監) 선홍원등에게 직첩 돌려줄것을 지시 |
선세휘(世徽) |
1655. 3. 13 |
효종 6 |
1654년 가을과 겨울 포폄(시비를 가림)으로 징계중인(居中居下된) 전적 선세휘 등을 모두 논하지 말라하다 |
선달욱(達勖) |
1656 3. 8 |
효종 7 |
선달욱등을 유배시킬것 지시
|
선상윤(尙胤) |
1660 6. 22 |
현종 원년 |
내의원 관원들과 도제조가 선묘조에서 누락된 의관 선상윤등에게 노고를 치하하는 하사품를 내릴것을 주청하였는데 시행할것을 윤허하다 |
선순(蕣) |
1661 6. 22 |
헌종 2 |
인사발령 선순을 사하( 斜下:진도 의신면 사천리의 마을)의 북쪽 북(北)쪽진의 권관(權管: 진.보의 종9품 수장)에 발령 |
선문교(文敎) 선시준(時俊) 선시흘(時屹) |
4. 7 |
헌종 3 |
무과 시험관이 보고하길
|
선형(의 8대손들 이름 자 오기) |
1663. 10. 22 |
헌종 4 |
공신 자손의 잘못된 이름자 있음을
충훈부에서 보고 :
아래표의 안렴공 후손들 중 선형의 8대손 세윤 상윤 이름 두번째글자 윤(胤)자가 철(徹)자로 오기되어있어 수정 부표를 붙였다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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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익(文翊) |
1665. 6. 3 |
헌종 6 |
慶尙道罪人等推案訖, 宣文翊 先立放送 |
선약봉(若奉) |
1665. 6. 15 6. 17
7. 3 7. 28 |
헌종 6 |
6/ 15: 선약봉 등에게 관직 제수할것을 보고 6/ 17 : 선약봉은 등과전 나이가 50세로 법전에따라 6품을 줄것을 이조에서
건의 왕이 승락하다 |
선귀영(貴榮) |
1668 2. 18 |
헌종 9 |
선귀영 효시
당하다 |
선홍복 |
12.21 |
헌종 32 |
정철의 꼬임에 빠저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한 죽음 맞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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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기주(起周) |
1674 |
숙종 즉위 |
다경포(多慶浦: 무안에 있는 포구, 흑산도 출발항 ) 만호(萬戶:4품) 선기주가 부임 하직 인사하다 |
선중보(仲甫) |
1677 12.15 |
숙종3 |
유생들의 전강시의 성적
|
선중보 |
1677 12. 15 |
숙종 3 |
숙종 3년 12월 15일 (정사) 1677년 殿講에서의 성적 우수자에 대한 조치 幼學선중보, 各紙四卷·筆四柄·墨三笏賜給。 |
선방도(邦道) |
1678 8. 4 |
숙종 4 |
선방도의 상소: 양계의 군기와
삼남의 수군(舟師:수군을 달리 이르는 말)를 修改하기를 청하다. |
선방도 |
" |
숙종 4 |
선방도의 軍기지 개혁안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다 "牌招해서 살펴보니 特異하지 않으나
調用함에 過濫되지 않는다 |
선방도 |
1678 9. 2 |
숙종 4 |
김신김이 격쟁(擊錚)을하자 수문장 선방도의 의견을 듣고 치죄하다 當日御營軍金信金稱名人,
自金虎門入來, 差備門外擊錚, 極爲駭愕, 令攸司囚禁治罪, 同門守門將宣邦道, 常時不能禁斷, 以致闌入, 極爲非矣, 推考, 何如? 傳曰, 允。
|
선방도 |
1680 7.22 |
숙종 6 |
선방도 수문장(守門將: 영.정조때부터 수문장의 품계가 6-9품으로 바뀐다. 그 전에는 3-4품이였다) 발령받다 |
선호영(豪英) |
1681 3. 3 |
숙종 7 |
포상및 인사 선호영 등을 품계에 맞게 벼슬을 제수할것을 지시· |
선호걸(豪傑) |
1691 9. 5 |
숙종 7 |
선호걸 수문장(4품) 발령 받다 |
선방도 |
1682 1. 8 |
숙종 8 |
선방도를 무경 선전관(무관인 선전관. 선전관: 당해 관청의 행정업무 특히 형별을 관장하는 매우 요직으로 선전관에 발탁되면 승진이 빨랐다)으로 발령하다
안골포(경남 진해의 옛 수군 기지) 만호(종4품) 근무 명 받다 |
선방도 |
1682 1. 22 |
|
안골포 만호 선방도 부임 하직인사
올리다 |
선호영 |
1270 2. 10 |
숙종 46 |
선호영 장수산(長壽山: 황해도 재령에있다. 높이 747m-황해의 금강이라한다)성의 별장(別將:정7품의 무관) 발령 |
선익방(翊邦·) |
1270 3. 27 |
숙종 46 |
선익방 부사정(副司正: 종7품) 발령 받다 |
선성구 선서구 선이중 선도중 산신구 선정구 선진구 선진명 선진복 선경후 선수귀 선진집 선경대 선진일 선석구 선성대 선몽서 선진희 선한구 선태일
|
1725 6. 11 |
영조 원년 |
신축년 建儲(건저: 왕의 후계자를
정하는 일)때 의혹과 분노를 일으킨 유봉휘(柳鳳輝) 이광좌(李光佐)등의 치죄를 청하는 상소 왕세저로 삼을것을 강력히
요구. 정하는것이 부당하다는 소를
올림 곧 왕세자(王世子)나 황태자(皇太子)를 세우는 것을 말함
소 참여자, 아래 사람들이 포함된
다수 |
선구징 선서징 |
1725 7.25 |
영조 원년 |
1725. 7. 25
상소에 宣龜徵·宣瑞徵
참여 疏錄: 宣龜徵·宣瑞徵 등 |
선의문 |
1725 9. 110 |
영조 원년 |
영조 원년/ 09월/10일(갑진)
상소
참고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
피해도 입히지 않았고 선정을
베풀었기 유임해달라는 글을 보내왔다"고 왕에게 보여주다 |
ㅇ정평(定平)부사: 함남 남부. 옛여진땅 ㅇ 宣威. 尹瓘의 정벌로 고려땅 ㅇ國忌: 임금 왕비 제삿날
ㅇ宬: 서고 성, 장서실 (인명용) ㅇ煌: 빛날황. 輝煌燦爛
ㅇ刑推:죄인의 정상이 때리며 問招
ㅇ拿推: 잡아서 문초 ㅇ削職:
관직을削奪 放送:내쫒다 ㅇ咸從: 평남 지명 魚氏(한종 충주 경흥)의 본관
ㅇ捧: 받들다 섬기다 ㅇ虜: 흉노의 준말。외국인 비하捕虜. 俘虜. 虜亂(병자호란) ㅇ摠戎使:조선조
총융청(5군영중하나)의 수장 종2품 ㅇ行身悖戾 : 몸울가지거나 행동함이 비꼬이고 포악 탐하다 戾(려)
ㅇ부사. 큰곳(대도호부사) 정3품 부윤이라함. 도호부사는 종3품 ㅇ현감 :현령(동5품)이 다스리는곳
보다 작은현 원님(종6품) ㅇ수사: 수군절도사 약칭. 정3품 외관 무관. 6명 병마절도사와 병사(함 평)가 맡은곳도
ㅇ판서 고려 정3(군부사 전리사 예의 판도 전공) 조선 정2(6조)
참판. 조선조 종2 참議. 정3
ㅇ不敍: 서용치 않음. 복직않시킴
ㅇ吏批:이조 주청 재가 받을 사항 ㅇ表僩(굳셀 한) ㅇ哨(步초)官: 조선 종9품 각 초를 거느리던 무관. 초의 위관 ㅇ遞差:관리 임기 만료.
부적으로 교체하는것
ㅇ牌招:임금이 신하 호출시 승지가 목패에 이름을 써서
증빙
ㅇ刷馬(관청용말)疋(필:베를 세는 단위 필)ㅇ體察使(지방에서 군란
일어나면 왕이 파견)
【대호군(大護軍) 선존의(宣存義)】
태종과 세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으면서 통사에서 종3품 대호군(건공.보공將軍)까지 승차하다. 끝없이 중국을 드나들며 외교활동을 펴다. 조선왕조실록에 총 14회의 기록이있는데 모두 왕과 지밀거리에서 일어난 일들이다.참의공(선중의)과 동시대 선대로써 보에 탈락되어있음이 안타깝다.
명나라에 말바치러 가서 당한 수모를 세종께 보고하는 장계(壯啓)이다 ◎세종 3년(1421) 11월 22일 대호군(大護軍) 선존의(宣存義)가 요동에서 귀환 도중(途中) 보고
“존의(存義)가 요동에 이르러 말을 도사(都司)에게 맡기려고 하니, 도사가 모두 말하기를, ‘늙고 키가 작은 말이 많은 것은 무슨 일인가. ’라고 하므로, 존의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큰 말이 나지 않는 것은 상국(上國)에서 평소부터 다 아는 일입니다. 중국의 사신이 황제의 명령을 우리 전하에게 전하니, 전하께서 즉시 서울과 지방에 명령하여, 문무 백관과 아래로 군민(軍民)까지 독려하여 모두 말을 바치게 하고, 직장관(職掌官)이 정밀하게 골라서 전하에게 아뢰니, 전하께서 또 친히 낱낱이 좋은 것만 가려서, 신(臣) 등에게 주어 금년 안에 다 바치도록 한 것인데, 어찌 오늘 물리침을 당함이 이와 같을 줄 생각했겠습니까. 존의가 길에서 첫 번째 보낸 말이 72필이나 물리침을 당한 것을 보았고, 관(館)에 이르러 또 두 번째 보낸 말이 80필이나 물리침을 당한 것을 보았으니, 만약 그렇다면, 앞에 간 조현(曺顯) 등이 돌아가서 우리 전하에게 아뢰어 조정??) 에 청하여, 관원을 보내어 말을 골랐더라면 어찌 오늘의 왕래하는 괴로움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금년 안에 반드시 말을 다 바칠 수 없게 되어, 조정에서 말을 쓸 시기에 어긋날 듯합니다. ’라고 하니, 주(周)·하(夏)의 두 도사(都司)가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잠잠히 있다가 의논하여 진무(鎭撫) 왕영(王永)을 불러 말하기를, ‘두 번째 보낸 말을 물리친 것을 우선 버리지 말고 내일 다시 고르라. ’고 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두 번째 보낸 말 중에서 물리친 말 60필을 다시 골라서 취하니, 존의가 가지고 간 말 6백 필 중에서 다만 15필만 물리쳤고, 설내(偰耐)가 가지고 간 5백 필 중에서 19필만 물리쳤습니다. 그 이튿날 하직하고 돌아오니, 하 도사(夏都司)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요동에서 말을 너무 많이 물리친다고 말하므로, 다만 18세 이상 된 것과 병들어 쓸 수 없는 것만 물리쳤다. 그대의 전하가 지성으로 말을 바쳤으니, 만 필 중에서 비록 열 필이라도 쓸 수 없는 것이 있으면, 어찌 전하의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에 부응(副應)하겠는가. 마땅히 이 뜻으로써 그대의 전하에게 아뢰라. ’고 하였습니다. 존의는 말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친히 말을 골랐을 때에는 어찌 한 필이라도 쓰지 못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수천리 길을 오게 되매, 풀이 마르고 물이 얼었으며, 먹이도 또한 배부르지 못한데 여러 달 동안 험한 길을 지나오니, 말이 병들 것은 의심할 일이 없습니다. ’라고 하니, 하 도사는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라고 하였습니다.”하고, 존의가 또 보고하기를,“삼위(三衛)601) 의 달적(達賊)이 요동을 노략하여 삼보(三堡)의 사람을 죽이니, 도독(都督) 무개(巫凱)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쫓았으며, 또 군사를 등록하여 적을 방어합니다.”라고 하였다. |
○大護軍宣存義還自遼東。 在道報曰: “存義至遼東, 將以馬付都司, 都司僉曰: ‘老且矮小者多, 何也?’ 存義曰: ‘我國不産大馬, 上國素共知也。 自天使傳聖旨, 我殿下卽命中外, 督文武百官下至軍民, 悉令納馬。 職掌官精選而啓于殿下, 殿下又親點, 擇其善者, 然後授臣等以進。 務以今歲之內畢獻, 豈意今日見退之若是乎? 存義路逢初運退馬七十二匹, 到館又見二運退馬八十匹。 若然則前去曺顯等還啓我殿下, 請差官于朝廷而選馬, 豈有今日往來之苦乎? 然則今歲之內, 必不能盡獻, 而朝廷用馬之機, 似乎違矣。’ 周、夏兩都司聞而默然, 良久議之, 呼鎭撫王永曰: ‘二運馬退者, 且不要去, 明日更選。’ 翌日, 更選二運退馬六十匹而取之, 存義所押六百匹, 只退十五匹; 偰耐所押馬五百匹, 退十九匹。 明日辭還, 夏都司曰: ‘若等謂遼東爲退馬過多, 故但退十八歲以上者與殘疾不堪用者。 汝殿下以至誠獻馬, 萬匹之內, 雖一十匹有不可用者, 則豈副於殿下事大之誠? 宜以此意, 啓汝殿下。’ 存義曰: ‘我殿下親選之時, 豈有一匹不堪用者? 第以數千里之路, 草枯水凍, 飼亦不飽, 而累月過嶮, 以致疾病, 不足疑矣。’ 曰: ‘汝之言然矣。’” 存義又報: “三衛達賊摽掠遼東, 殺三堡人, 都督巫凱等率兵逐之, 又簽軍防禦。” |
(선존의님의 다른 기록 요약: 총
14건 중 발췌) ○태종3년(1403) 5월 11일 중국에서 돌아온 선존의에게 밭 15결을 하사하며 경들의 공을 갚기가 어려워 약소하다
하다 주문사 선존의가 명나라에 가다 ○태종 13년(1413 ) 10월
24일 ○태종 16년(1416 병신) 5월 18일 천둥 번개로 선존의(宣存義)의 집 기둥이 벼락을 맞고 ○태종 17년(1417 ) 7월
17일 사은사 통사 선존의 중국 황제가 경녕군을 후대했음을 보고. 상왕이 옷과 말
하사 상왕이 선존의에게 북경에서 경녕군의 행동에 대해 묻다 |
【선씨의 영웅 유성군】
유성군(선형)의 상소문(세조 13년: 1467 년 7월
12일)
수군을 이용하여 이시애난을 평정하자 주장하다 이시애 토벌에 수군을 사용할 것을 주청한 황해도 절도사 선형의 상서 황해도 절도사(黃海道節度使) 선형(宣炯)이 상서(上書)하기를,
“역적(逆賊) 이시애(李施愛)가 어리석은 백성들을 거짓으로 유혹(誘惑)하여 왕인(王人)을 살해하고, 감히 횡역(橫逆)한
짓을 마음대로 하는데, 그가 믿는 자는 반드시 6진(六鎭)의 병졸(兵卒)일 것입니다. 6진(六鎭)의 습속(習俗)이 강포(强暴)하고
우직(愚直)하여 처음에 이시애의 속임수에 빠져서 다투어 수령(守令)을 죽였는데, 지금 문죄(問罪)할 것을 두려워하여 어디에 의탁(儀托)할 것인지
알지 못하다가, 이시애에게 의지하고 붙어서 경각(頃刻)의 목숨을 연장(延長)하려 합니다. 신(臣)의 생각으로서는 앉아서 험령(險嶺)을 지킨다면
달리 입공(入攻)할 길이 없을 것이므로, 저들이 이 때문에 둔취(屯聚)하고 아직 흩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국가(國家)의 위엄(威嚴)으로써
진멸(殄滅)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그러나 더불어 싸워서 살상(殺傷)의 해(害)가 있으면 계교(計巧)로써 쳐부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6진(六鎭)의 사람들이 본래 수군[舟師]을 싫어하는데, 지난번에 홍상직(洪尙直)이 경성 부사(鏡城府使)가 되니, 민간(民間)에서
와전(訛傳)하는 말에, ‘홍상직이 모반하므로 남도(南道)의 선군(船軍)이 여러 도(道)에 몰래 정박(碇泊)하고 있다.’고 하였고, 또 갑술
연간(甲戌年間)에 와전(訛傳)하는 말에, ‘절제사(節制使) 김문기(金文起) 등이 모반(謀反)하니, 남도(南道) 선군(船軍)들이 많이 모였다.’고
하고, 스스로 서로 공동(恐動)하여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마저 있었습니다. 그들이 반드시 수군[舟師]를 서로 두려워하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이 도(道)의 백성들이 본래 주즙(舟揖)을 알지 못하므로 수군을 두려워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이미 육로(陸路)로 입공(入攻)하니, 또
강원도(江原道)와 경상좌도(慶尙左道)의 병선(兵船)을 적당히 뽑아서 배가 수천 수백 척이라 일컫고, 연변(沿邊)에 돌아와 정박(碇泊)하여 그
형세(形勢)를 많이 과장(誇張)하고 바로 6진(六鎭)으로 향한다고 성언(聲言)하면 6진(六鎭)의 병졸이 그 집을 생각하여 반드시 멀리서
바라보고서도 와해(瓦解)될 것입니다. 이것은 병법(兵法)에 이른바, ‘형세에 의하여 쳐부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구적(寇賊)은 비록 염려할
것은 못되나, 만약 천주(天誅)를 늦추다가 국경이 맞닿은 여러 오랭캐들로 하여금 틈을 타서 일어나게 한다면, 아마 그 졸지에 멸망시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명하영 양부(兩府)에 보이니, 많이 선형(宣炯)의 의논이 옳다고 하였으나, 그러나 수군[舟師]을 쓰는 것을 어렵게 여겨 끝내 따르지는 않았다.
.......................................................... 乙亥/黃海道節度使宣炯上書曰: 逆賊李施愛誑惑愚民, 殺害王人, 敢肆橫逆, 其所恃者, 必六鎭之卒。
六鎭習俗, 强悍愚直, 初爲施愛所誣, 爭殺守令。 今懼問罪, 罔知所托,
依附施愛, 欲延晷刻之命。 臣意以爲, 坐守險嶺, 則他無入攻之路,
以故屯聚未散耳。 以國家之威, 殄殲無難, 然與戰而有殺傷之害, 不如以計而破也。 竊意六鎭之人, 素憚舟師。 往者洪尙直爲鏡城府使, 民間訛言: “尙直謀反, 多聚南道船軍, 隱泊諸道。” 又甲戌年間訛言:
“節制使金文起等謀反, 多聚南道船軍。” 自相恐動, 至有垂泣者。
其必以舟師胥動者, 無他, 此道之民, 素不識舟楫, 甚畏舟師爾。 今已陸路入攻, 又令量抄江原道及慶尙左道兵船, 號幾千百艘。 沿邊回泊,
多張形勢, 聲言直指六鎭, 則六鎭之卒, 顧其家必望風瓦解矣。 此兵法所謂: “因勢破之之義也。” 此寇雖不足慮, 若稽天誅, 使連境諸夷, 乘釁而起,
則恐難卒滅矣。
命示兩府, 多以炯議爲是, 然重用舟師,
竟不從。 |
선형 조선왕조실록에 105차례 거론되는 선씨 중 최고의 공직자였다. 변방(주로 북방)의 수장으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청렴 강직한 성품이 실록에 나타난다: 한명회가 성종에게 그가 올곧은 공직자임을 보고한다
(전략)
선형이 이 세 사람을 자기의 군관(軍官)으로 삼으려 하니, 청컨대 구례(舊例)대로
원(願)하는 바에 따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선형은 행실이 이미 청백(淸白)하여
일찍이 수령(守令)이 되어서 일호(一毫)라도 탐취하지 않아 이로써 집이 가난하니, 청컨대 안자(鞍子)를 내려 줌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명하여
흑마포의(黑麻布衣)·나의(羅衣) 각 1령(領)과 안자(鞍子) 1부(部)를 주게 하고 김계종
등도 또한 종행(從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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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이 : 임진난의 고장(孤將) 실록속에 47건의 기록이 있다. 원균과 교체 인물로 거론되기도했다 . 소극적이던 이순신장군을 움직여 전장으로 몰아낸 기록도있다. 병졸(兵卒)없는 병사(兵使)요 부원수, 홀로 생각하고 외롭게 판단하고 기나긴 전쟁 고독과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병마까지 겹첬다. 이분은 결코 조연이 아니고 주연이다. 선무공신이 아닌 선무원종공신1등 임이 너무나 아쉽다
대신.비변사 유사 당상과 함께 왜적 침입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선조 29년(1596) 11월 7일 ) 상이 이르기를, “선거이는 병이 있는가?”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중풍을 앓은 지 오래 되었으므로 일을 시킬 수 없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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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선여경
선진기 일문을 사신(捨身)의 길로 인도한 가문의 리더
공의 함자는 여경이며 자는 경숙, 호는 도암이시다.이조참판을 증직 받으신(아들 여경의 1등훈으로)
대덕님의 둘째 아들로 1540년(중종 35년)에 태어나셨다. 성격이 차분하고 의기가 특별 했으며 일찌기 경사에 능통하셨다.평소에 말씀하시길 "절의를 지킴은 한가닥의 학문이다"하시고 평생의 뜻과 행동은 모두 "충.효" 두자에서 힘을받아 실행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셨기에 옛사람의효도 얘기나, 나라를 위해 목숨을바쳤다는 내용에 접하면 손벽을 치고 몹씨 흥분하시고 감격하셨다.1559년 무과 급제하시어 선전.도사 관직에 이르셨으며 당상관에 올라 병마절도사 임무를 수행하셨다.1591년 상을 당해 지극정성을 다하여 예(禮)를 지켜 상을 치르셨다.1592년 임진난에 풍신수길이 한양을 함락시키자 임금이 피난길에 올랐고 문무의 많은 신하들이 수행하였다.공은 이때에 벼슬없이 상중에 있었지만 충분을 이기지못하고 "지금이 바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한다-는 말을 실행할 때이다 " 하시며 상복을 먹물로 염색하여 입고 일어나 여러 사촌동생들과 두아들들과 함께 선조의 행재(행궁)로 달려가 방어계획을 짜서 올리고 명장 이여송이 평양성 탈환전투시 죽기를 맹서하고 독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끝내 유탄에 맞아 거룩한 순절을 하였으니 이는 당나라의 장순과 허원이 하이난성을 사수했든것에 비해 부끄럼 없는 일이였다. 난이 평정된뒤 1605년 조정 에서 그 충정을 칭찬하고 기리기위해 선무원종공신록에 1등공신으로 기록하였다.
선여경(宣餘慶): 인물사전 내용
선세강의 장엄한 최후를 찍은 사진(인조15년(1637) 2월 26일) 아무리 의로운 일이라하여도 너무나 힘드신 최후였다(비국의 건의로 민영·윤여임·선세강을 포상하고 관작을 추증하게 하다) 비국이 아뢰기를, “방금 경상 감사 심연(沈演)의 장계를 보건대, 우병사 민영(閔栐)은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다해 싸웠는데 군사가 패하게 되었을 때에 군관과 하졸이
부축하여 끼고서 말을 태웠으나 재삼 말을 물리치고 끝내 피하여 도망하지 않았으며, 상주 영장(尙州營將) 윤여임(尹汝任), 안동 영장(安東營將) 등은 교전하던 날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하여 싸우다 죽었다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이 나라를 위하여 죽은 충성은 참으로 가상하기 그지없으니, 모두 포상하고 관작을 추증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고,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는 월봉(月俸)을 제급(題給)하고, 장례 물품 및 상구(喪柩)와 호송하는 일을 일체 시행토록
하라.”하였다
........................................................... 備局啓曰: “卽見慶尙監司沈演狀啓, 右兵使閔栐, 終始力戰, 兵敗之時, 軍官下卒, 扶擁上馬, 則再三却馬, 終不避走。 尙州營將尹汝任、安東營將宣世綱等, 交鋒之日, 奮不顧身, 力戰而死云。 此三人死國之忠, 誠極可嘉, 請竝加褒贈。” 答曰: “依啓。 其子孫錄用, 其有老親者, 月俸題給, 葬需及喪柩護送事, 一體施行。” |
◎懸祖(현조)님들 | ||||||||||||||
諱 | 代 | 주요관직 | 자(字) | 號(호) | 配 | 先代(선대) | 生. 卒 | 登 | 관직 | 행 적 내 용 | 참고 | 훈격 | 기록 | 묘소 |
宣仲吉(중길) | 4 | 절도사(종2품) | _ | _ | 청주韓씨 | 예의판서 원지 장자 | 공민왕 丙申생 | 문과 | 용호위 군기감, |
려말 벼슬 용퇴, 조선 태조시 출사,3대의 국왕 보좌 충성심 발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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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 | 수군절도사 | |||||||||||||
仲義(중의) | 4 | 호조참의 | _ | _ | 중모全씨 | 예의판서 원지 차자 | 공민왕 戊戌생 | 문과 | 통정대부 | 직언으로 물러나온후 조정에서 수차 중용하려해도 불응하다. | ||||
(정3품 당상관) | (1358년) | 호조참의 | 태조 壬申(1392년+태조 원년) 출사, 정종 태종까지 모시다. | |||||||||||
직절(直節)로 세상의 추앙과 존중을 받음.1421년(세종3년) | ||||||||||||||
귀향 향년 64세 | ||||||||||||||
邦憲(방헌) | 5 | 남평현감 | _ | 慕賢齊(모현) | 곡부孔씨 | 중길-이경-한-순손-칙 | 1507년3월20생 | 어려서부터 총명 침착, 성학에 전심하여 현인들을 숭모하였다. |
신방촌 서당동 | |||||
1568년11월7일졸 | 1531년 성균관 출사, 남평현감. 吏民 모두 청백리로 칭송함 | |||||||||||||
廷傑(정걸) | 10 | 남평현감 | _ | _ | 함양朴씨 | 방헌장자 | 1540년4월15생 | 충효 출천하고 지략이 특출 임난시 朴竹川,任三島를 따라 보성서 | 순절 | 節義錄 |
신방촌 서당동 쌍봉 | |||
00년 12월19졸 | 倡義. 군량.기계 담당 공세우고 동생 정민과 별장 상진 등과 함께 순절 | |||||||||||||
廷敏(정민) | 10 | 宣略將軍(종4품) | 達國(달국) | _ | 金씨 | 현감 방헌(9) 차자 | 무과 | 효성 공손, 부모상시 시묘살이, 임난시 각처 전투 참가하여 | 순절 | 증직 | 낙안 개용재 | |||
훈련원 첨정(종4품) | 중길-이경-한-순손-칙 | 적 수십금 베고 유탄으로 숨짐. 조정에서 공을 알고 | ||||||||||||
則은 칙으로 읽어야 | 선략장군(무관 종4품), 훈련원 첨정(종4품)을 추증 받음 | |||||||||||||
餘慶(여경) | 10 | 병사 | 敬淑(경숙) | 道菴(도암) | 고흥柳씨 | 용도-효량-근지-진기- | 중종35년(1540년)생 | 기미 무과 | 선전 주부 도사 | 성격 심중, 의기 특출하였고 경사에 능통하였다. 효성심 충성심 | 순절 | 1등공신 |
선무원종공신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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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절도사) | 참판 대덕차자 | 병마절도사 | 높아, 신묘년 상당하여 임난때 상복에 먹물을 들여 입은후 | |||||||||||
통정대부 | 사촌 동생들과 두아들과 더불어 선조임금을 지키고 유탄에 순절 | |||||||||||||
伯源(백원) | 10 | 봉사 | 敬仲(경중) | _ | 달덕 장자 | 백헌공과 우애 돈독, 6형제가 동시 도보로 행재소 도착 거가를 모심 | 순절 | 2등공신 | 녹권 | |||||
靑元(청원) | 10 | 훈련봉사(종8품) | 敬行(경행) | 栢軒(백헌) | 중의-용도-효량-근지-진기-달덕-< | 명종17년 | 명종을유 | 효우.지략 천부적,붓을던지고 무과합격,임난시 병사공 종형따라 | 순절 | 2등공신 | 녹권 | |||
(1562년)생 | 무과 | 참전,이여송 진중에 합류 적을 막아 평양수복에 공 | ||||||||||||
必伯(필백) | 10 | 참봉 | _ | _ | 장수黃씨 | 힘이 장사, 병사공따라 용만까지 어가 호종하고 순절 | 순절 | 2등공신 | 녹권 | |||||
敬伯(경백) | 10 | 참봉.좌랑 | 敬一(경일) | 休軒(휴헌) | 남평文씨 | 용도-효량-근지-진기 | 1567년10월4생 | 만력무자 | 여경, 청원과 더불어 대가 호위 용만에 이르러 적을 막고 두형이 | 2등공신 | 녹권 | 학두산 | ||
무과 | 순절하자 역전하다 순절. 왕실로 부터 대단한 포상 지시가 있었다. | |||||||||||||
時翰(시한) | 10 | 참모관 | 子擧(자거) | _ | 중의-용도-효신-맹지-정-민중-시한--채동> | 문장을 잘하여 선조에게 즉흥시 올려 유명하였다. 병자호란시 | 郡史 |
송곡면 중동리 | ||||||
안방준 따라 창의. 여산에서 강화소식에 통곡, 벼슬않고 은거 | 隱峰倡義錄 | |||||||||||||
海壽(해수) | 11 | 판관 | 聖觀(성관) | 德齊(덕제) | 廣주李씨 | 여경의장자 | 1565년2월10생 | 용력과 지략 특출, 임난시 부형 모시고 용만까지 호위, 맨손으로 | 순절 | 2등공신 | 녹권 |
도촌 백학등 상재 | ||
적의 무기 빼았아 수십급 죽이고 부친 순절하자 비통함에 군부의 | ||||||||||||||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어찌 살것인가하고 떨처 싸우다 절사 | ||||||||||||||
당시 전리품이 후손의 집에 보관되고있다. | ||||||||||||||
麟壽(인수) | 11 | 금군 | _ | _ | 尹씨 | 여경의 차자 | 무과 | 부형과 여러 종숙 모시고 창의, 적을 막을 방책 상고, | 순절 | 2등공신 | 녹권 | 考묘下 쌍봉 | ||
평양 포위시 다수의 적을 베고 사로잡았다 | ||||||||||||||
慶龍(경룡) | 11 | 참봉 | _ | _ | 정민3남 | 무과 | 형이 순절하자 상복에 먹물들여 입고 영호남에서 전투에 큰공 | 순절 | 공신 | 녹권 | ||||
공격 방어술에 능통하였다 | ||||||||||||||
英吉(영길) | 12 | 군무전임 | 文彬(문빈) | 義齊(의제) | 죽산최씨 | 방헌-정걸-덕명-영길-무익.구익 | 1591년2월20생 | 은봉 安선생이 병자호란시 의병을 일으키자 참모관으로 종사 | 三合墳 | |||||
廣주이씨 | 1654년2월16졸 | 강화소식을 여산에서 듣고 북을 향해 통곡. 의기 호방한 성격으로 | ||||||||||||
예의가 밝음. 신방촌 뚝위에 집짓고 후학 양성과 교우로 주위 칭송 | ||||||||||||||
文煥(문환) | 12 | 통훈대부.黃山찰방 | 子彬(자빈) | _ | 광산김씨 | 방헌-정걸-덕명-문환-석창 | 1598년1월20생 | 무과 | 천성이 정직,절의가 커 모두 알아주다. 병자호란시 임경업 장군의 | 1등공신 | 진무原從공신록권 | 공전등 합장 | ||
금부도사 | 김해김씨 | 1677년11월26졸 | 참모관이되어 군왕에 대한 충성이 지극, 1등 공신 녹권 하사받음 | |||||||||||
翊昇(익승) | 14 | _ | 君徵(군징) | 休庵(휴암) | 능성朱씨 | 후덕-경백-사건-이만-원형-익승-광걸<무현 | 1745년10월13일생 | 천성 순직,재덕과인,효경에 능통. 부모가 병나면 하늘에 代死할것을 | 학두산 | |||||
1788년2월29졸 | 기도하였고 두임금 사망시 조석으로 망곡. 일세의 사표가 되다. | |||||||||||||
震喆(진철) | 15 | 숭정대부,중추부사 | 明甫(명보) | 竹軒(죽헌) | 金寧김씨 | 방헌-정걸덕명-영길-무익-치증-진철-광하 | 1699년3월13생 | 몸가짐이 검약하고 효성이 지극, 평생에 성난 목소리와 변색하는 |
대곡면 족박동 | |||||
1789년2월3일졸 | 일이 없었고 남을 돕는일. 견식 높음과 실행으로 일향이 우러르다 | |||||||||||||
敬魯(경노) | 15 | _ | 明汝(명여) | 梅停(매정) | 성주裵씨 | 여경-해수-여달-산보-계문-경노-희성-시안 | 1685년8월20생 | 효우之行으로 향리의 존경을 받다.극진한 효행과 돈독한 우애로 | 호음동쌍좌 | |||||
1752년10월7졸 | 주위에 많은 감화를 주었다. | |||||||||||||
淑魯(숙노) | 15 | _ | 聖淑(성숙) | 松巖(송암) | 여산宋씨 | 해수-여룡-원량-태문-숙노-광욱-시준< 우상 | 1710년10월11일생 | 외간상을 당하여 3년내에 경대를 벗지않았고 죽을 마시며 피눈물을 | 미력 대룡산 | |||||
1787년4월1일졸 | 흘리고 묘하에 집을 짓고 정과 예를 다하다. 박학하고 행실 돈독 | |||||||||||||
東孝(동효) | 16 | 절충장군 | 淸元(청원) | 農窩(농와) | 진주姜씨 | 방헌-정걸-덕명-영길-구익-한빈-명웅-광언 | 1719년9월16생 | 효제의 도를 다하다. 의리의 한계가 분명하여 향리가 본받다. |
주월산 이월재 | |||||
첨지중추부사 | 1798년2월3일졸 | 궁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의를 베플다. 행동이 정숙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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