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 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 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중년 여인의 허기증> 중에서
작년 겨울에 읽었던 이야기들을 긴히 쓸 일이 있어 다시 꺼내들었다. 여기서 '쓸 일'이라 함은, 보통의 문해력과 보통의 감수성을 가진 이들에게도 보통의 깨달음 정도는 줄 수 있는 보통 길이 정도의 '보통 이야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간 까다롭기 짝이 없는 이 기준을 단숨에 통과한 이야기를 쓴 작가가 누구일까?
박완서 작가는 내게 그런 문인이다. 내가 초등학생일 적, 엄마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아직도 읽지 않았냐는 핀잔을 들은 게 우리의 첫 만남이다.
물론 그런 핀잔에 굴해 곧장 '보통 이야기'를 읽었을 내가 아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어 시간에 교과서에 실린 '보통 이야기'를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낭독했다. 이후에도 교과서, 문제집, 모의고사 종이 위에서도 박완서라는 이름과 '보통 이야기'를 여러 목적에 알맞게 자주 읽어 내려갔다.
그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내가 한 살을 더 먹으면 꼭 열두 달만큼 더 우려낸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료 본연의 맛이 매력적인 제철 요리 같은 글이었다. 해가 갈수록 정직한 맛이 나는 그 이야기가 그리워 읽었던 이야기를 모른 척 또다시 찾아 읽었다.
이제부터라도 문학이라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작업에 모든 것을 걸어보느냐, 아니면 다시 일상의 안일에 깊숙이 함몰할 것인가를 놓고 나는 고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작가로서의 창조적 능력에 대해서도 회의를 거듭했다. 우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겸, 개발도 할 겸, 하나둘 습작을 시작했다. 지독하게 열심히 했다. 밤잠을 설치고, 입맛을 놓치고, 남의 좋은 글을 읽고 샘을 내고, 발표의 가망도 없는 글을 썼다. 차차 글 쓰는 어려움에 눈 떴다. 자연히 쉽게 쓴 글이 쉽게 당선된 데서 비롯된 내심의 은밀한 오만도 숨이 죽었다. <중년 여인의 허기증> 중에서
여름이 떠나가고 있는 지금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를 다시 읽으며 어느 중년 여인이 작가가 되는 이야기에 오래 머물렀다. 글 쓰는 어려움에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론 조금씩 살이 찌고 있음을 느끼며 보람찼다는 이야기에서 나는 여덟 달만큼 더 깊어진 맛을 느꼈다. 진한 위로의 맛이 났다.
'딱 이 문장!'이라고 고르기엔 자꾸 '아... 여기까지만!'이라며 밑줄이 늘어갔다. 그냥 시원하게 몇 문단씩 묶어 표시해두기로 했다.
숙면한다고는 하지만 꿈이 없는 잠은 뭔가 서운하다. 고기 없는 물이 서운한 것처럼. 고기 없는 물이 아무리 깨끗해도 살아 있는 물이 아닌 것처럼 꿈이 없는 잠은 산 사람의 잠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조금 덜 바빠져야겠다. 너무 한가해 밤이나 낮이나 꿈만 꾸게는 말고, 가끔가끔 단꿈을 즐길 수 있을 만큼만 한가하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계획 밖이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나길 소망하면서 가슴을 두근대고 싶다. 밖에 나갈 땐 정성껏 화장을 하고 흰 머리카락이 비죽대지 않나 살펴 머리를 빗고, 어떤 옷이 가장 잘 어울리나, 이 옷 저 옷 입었다 벗었다 하고 싶다. 예기치 않은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어서. 이렇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아마 밤에도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려서 꾼 것 같은 색채가 풍부한 꿈을. <꿈> 중에서
삶에 어느 정도의 여유가 필요한 지에 대한 질문에 '색채가 풍부한 꿈을 꿀 수 있을 만큼', '오늘 일어날지도 모를 예기치 않은 일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정도의 답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지나친 욕심일까?
자연히 내 집이 제일이다. 자주 여행을 다니는 것도 내 집에 돌아올 때의 감격을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집은 편안한 만큼 헌 옷처럼 시들하기가 십상인데 그 헌 옷을 새 옷으로 만드는 데는 여행이 그만이다. 그러나 때로는 집도 낯설고 불편할 때가 있다. 난방이 잘 된 집에서 배불리 먹고 편안히 빈둥댔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춥고, 배고프고, 고단하고, 집이 붙어 있음으로 생기는 온갖 인간관계까지가 헛되고 헛되어 견딜 수가 없을 때 꿈꾸는 여행은 구태여 경치가 좋거나 처음 가보는 고장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 표표히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는 사람은 복되다. <언덕방은 내 방> 중에서
이 부분은 읽으면서 정말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지 마지막 날을 가장 좋아한다. 그날이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그렇담 구태여 돈을 들여 여행을 떠나지 않는 게 낫지 않냐'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데 그때마다 "아니, 그게 아니라...!"라며 나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젠 이 부분을 인용해 차분히 설명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