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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6:7-8절) 청황색 말(馬) 우리 주위에 아직 젊은 나이의 아까운 사람들이 사고나 질병으로 목숨을 잃고, 죽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건물이 무너지거나 혹은 지진(地震)이나 코로나19로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될 때, 우리는 모두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연의 무서움에 대하여 치를 떨 때가 있습니다.
일본을 여행해 보면,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비슷한 것이 많으면서도 다른 부분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일본에는 산에 일체 무덤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부모나 가족이 죽으면, 일단 죽은 사람은 할 수 있는 대로 집에서 먼 곳에, 조용한 곳에, 매장을 해서 쉬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다 보면 산에 온통 무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산에 묻는 것이 아니라 동네 한 가운데 묘지를 만들어서 뼈를 거기에 묻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일본 사람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같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일본의 만화나 소설 같은 것을 보면 죽은 귀신 이야기가 많고 무엇인가 일본 사람들은 죽음을 미화시키고 죽음을 운명으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거의 교회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일본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너무 적습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쓰나미 같은 무서운 재앙을 당하면서도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꾹 참기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 지방에 쓰나미가 덮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사람들이 꾹 참기만 하는 것을 보고 한국 기자들은 일본 사람들에게 참지만 말고 좀 소리를 지르라고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한국 사람들은 어떤 위기나 어려움이 닥쳤을 때, 악착같이 살려고 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기를 탈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우리나라에는 기독교인들이 많기 때문에 위기가 닥치면 모두 하나님 앞에 모여서 합심해서 부르짖으며 기도하는데, 이것이 어마어마한 부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최근 우리 주위에는 유명한 사람들 중에서 죽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때 유명했던 야구 스타가 죽기도 하고, 유명한 목사님이 죽기도 하고, 외국의 유명한 기업가도 병으로 죽기도 합니다.
아랍의 많은 청년들은 테러단에 가입되어 자살해서 죽으면, 천당(天堂)에 간다는 말에 속아서 몸에 폭탄을 감고, 폭발해서 자기도 죽고, 많은 사람들도 죽게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데, 너무나도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피해하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오늘 살아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하늘도 볼 수 있고, 사랑하는 친구들도 만날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인가에 매여서 이 살아있는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사는 생명체들 중에서 가장 쉽게 죽는 것이 곤충(昆蟲)일 것입니다. 곤충들은 너무나 약(弱)해서 사람들이 밟거나, 손바닥으로 치기만 해도 죽고, 심지어 하루살이 같은 경우에는 하루를 부지런히 바쁘게 살다가 무더기로 죽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끔 도대체 이 세상에 곤충(昆蟲)이 왜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곤충(昆蟲)의 세계에는 아직 인간들이 발견하지 못한 놀라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 과학자들은 곤충(昆蟲)의 눈의 구조나 혹은 이동하는 원리 혹은 그 껍질의 색깔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요즘 과학자들은 거의 곤충 크기의 로봇을 만들어서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헬리콥터를 보면, 이미 이것이 잠자리에게서 그 비행원리를 배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잠자리비행기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풍뎅이의 껍질에 있는 그 색깔을 가지고, 페인트에 대하여 연구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파리가 되기 전의 그 구더기를 보고, 너무나도 싫어하지만, 실제로는 구더기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더기는 죽은 시체를 철저하게 분해하는 말끔히 청소를 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英雄)이 죽어도 그는 곧 구더기의 밥이 됩니다. 학자들은 곤충이 없으면 식물들의 수정(受精)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식물들의 수정(受精)에 관여 하는 것은 벌이 주종을 이루지만, 다른 많은 곤충들도 식물의 수정(受精)에 관계를 한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곤충이 없으면, 그 많은 새들이 먹을 양식이 없어지게 됩니다. 곤충은 새들을 살리는 아주 중요한 먹이 사슬이 됩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곤충이 바로 우리 인간들이 죽은 후에 영광스럽게 부활(復活)하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단 배추벌레를 보면, 꼬물꼬물 거리는 것이 너무나도 흉측한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번데기가 되고, 그 다음에는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데, 바로 이 곤충의 세계가 우리가 죽은 후에 부활(復活)하는 생생한 증거 중,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지 언젠가는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죽음의 문제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은 할 수 있는 대로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미루어 놓았다가 갑자기 죽게 되었을 때, 당황해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바로 이해해야만 삶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일곱 인(印) 중에서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 인(印)을 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개의 인(印)은 공통적으로 사람의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 죽음은 모두 다른 죽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羊)에 두루마리 책에서 인봉(印封)을 하나씩 때는데, 뗄 때마다 다른 색깔의 말(馬)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인(印)을 떼니까 흰 말이 나오고, 두 번째 인(印)을 떼니까 붉은 말이 나오고, 세 번째 인(印)을 떼니까 검은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들은 각각 평화와 싸움과 기근의 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인(印)을 뗄 때, 일어난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네 번째 인(印)을 뗄 때에 청황색 말(馬)이 나오는데, 이 말(馬)은 죽음의 말(馬)입니다. 이 말(馬) 뒤에 음부가 따라오게 되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무덤으로 데려가는 말(馬)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인(印)을 뗄 때, 순교를 당한 자들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섯째 인(印)을 떼니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권력을 쥐고, 돈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살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나오게 됩니다.
Ⅰ.청황색 말(馬) 우리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의 숙제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한번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 사람들 평균 수명이 남여 모두 팔십 세를 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암에 걸리지 않고,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으면, 거의 90세 가까이는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100 세 인생?).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피구(避球)를 하면, 사람들을 가운데 세워놓고, 양쪽에서 공을 던져서 사람을 맞춥니다. 그런데 동작이 빠른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지만, 둔한 사람은 빠른 시간 안에 죽어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오래 건강하게 잘 사는데 비하여 어떤 사람은 젊어서 병으로 죽기도 하고, 혹은 원치 않는 사고로 죽을 때도 있습니다. 혹시 전쟁(戰爭)이라도 터지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意思)와 전혀 상관없이 죽어야 합니다. 6:7-8절)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어린 양이 네 번째 인(印)을 떼실 때에 요한이 네 번째 천사의 음성을 듣는데‘오라’고 합니다. 여기서‘오라’고 하는 것은 말(馬)을 탄 사람을 불러내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보니까 네 번째 말(馬)탄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청황색 말(馬)을 타고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말(馬)을 탄 사람의 이름이‘사망(死亡)’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 나오는‘청황색’이라는 단어를‘잿빛 색’으로 번역(飜譯)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즉 여기‘청황색’이라고 하는 것은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죽은 사람의 얼굴색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면, 마치 얼굴에 분(粉)을 발라놓은 것처럼 핏기는 하나도 없고, 아주 창백한 색인 것입니다.
네 번째 말(馬)을 탄 사람의 이름이 사망(死亡)인데, 그 뒤에는 음부(陰府)가 따라왔습니다. 여기서‘음부(저승)’는 무덤을 의미하기도 하고,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에는 음부(陰府)를 무덤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신약에는 믿지 않다가 죽은 사람이 가는 지옥(地獄)을 말합니다.
네 번째 인봉(印封)을 뗄 때, 등장하는 말(馬)탄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죽음의 사자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사자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심지어는 어린아이나, 혹은 아름다운 여성이나,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걸려들기만 하면, 잡아서 음부(저승)에 집어넣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청황색 말(馬)을 탄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나오지 못하고, 천사가‘오라’고 하니까 나타났습니다. 즉 이 죽음의 천사는 하나님이‘오라’고 하시지 않으면, 자기 마음대로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8절)......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그런데 죽음의 천사는 모든 땅을 다 죽이는 권세는 받지 못하고, 땅 사분의 일(4/1)만 해치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즉 이 죽음의 천사는 아무리 사람을 죽이고 싶어도, 땅의 인구 사분의 삼(4/3)은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 사분의 일(4/1)은 대개 믿지 않는 사람의 절반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즉 죽음의 사자가 믿지 않는 사람들만 찾아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찾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사자는 믿지 않는 자라고 해서 모두 다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반만 죽이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람들을 죽게 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즉 죽음의 사자는‘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주로 네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죽게 하는데‘검(劍)’은 전쟁(戰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흉년(凶年)’은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입니다.
그리고‘사망(死亡)’이라는 것은 전염병(傳染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땅의 짐승’은 그냥 여행을 하다가 길에서 사자나 곰이나 독사를 만나서 물려 죽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사고로 죽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죽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하는데 때로는 전쟁(戰爭)이나, 기근(飢饉)이나, 혹은 전염병(傳染病)이나, 사고(事故)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생명을 보장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의 약(約)절반 정도는 때가 되기 전에 청황색 말(馬)을 탄 사람을 보내어서 음부(陰府)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오래 두어도 회개(悔改)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죽음의 공포(公布)를 통하여 남아 있는 절반이라도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두려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의학(醫學)이 발달하고,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延長)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해도 사는 만큼 또 그만한 사람들이 불행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죄(罪)에 대하여 진노(震怒)하고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의학(醫學)을 믿고, 죄(罪)를 지을 것이 아니라, 빨리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언제 어디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너는 그만 살고 이제 네 인생을 결산하자’고 하시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70년이나 80년을 살아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래 살게 하시면, 더 사는 것이고, 그만 살고 오라고 하시면, 즉시 인생을 청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청황색 말(馬)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의 수단으로 주어지는 죽음을 말합니다. 왜 이런 비참한 죽음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 욕심을 위하여 산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끝까지 자기 탐욕(貪慾)을 위하여 달려 나갈 때. 결국 이 청황색 말(馬)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사랑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끔찍한 말(馬)이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눅 17:37).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주검’은 시체(屍體)를 말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도 사람들이 눈물도 흘리지 않고, 회개(悔改)도 하지 않는 자들에게 이 청황색 말(馬)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자들의 죽음은 이런 끔찍한 죽음의 사자(使者)에 의한 심판(審判)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믿는 자들의 죄(罪)는 이미 우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모두 다 가져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시 심판(審判)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信者)들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안식(安息)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그래, 그 동안 이 죄악 세상에서 믿음 생활을 한다고 애를 많이 썼는데 이제는 영광의 나라에서 좀 쉬어라’는 뜻으로 우리를 불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우리 믿는 자들도 너무 일찍 죽을 때, 너무나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그는 벽을 쳐다보면서 심하게 울었다고 합니다. 몰론 히스기야가 자기가 병(病)으로 죽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우리만큼 부활(復活)의 신앙이 약(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죽게 되었을 때, 유다 나라는 너무나도 약(弱)했고, 히스기야는 아직 후계자(後繼者)를 생산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의 나이가 30대 후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제대로 봉사를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야하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해서 울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병(病)으로 죽게 되었을 때, 물론 천국(天國)에 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가장 아쉬운 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너무나도 한 것이 없이 죽으려고 하니까 아쉬울 때가 많습니다. 즉 돈 벌고 공부한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해서 더욱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랑의 봉사를 많이 했을 때, 우리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어도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하루하루가 정말 아슬아슬한 연속(連續)입니다. 왜냐하면 언제 죽음의 사자(使者)가 찾아올지 모르는데, 언제든지 찾아오면, 그것으로 모든 것들은 끝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의 천사가 찾아오면, 죽음을 뒤로 미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음부(陰府)에 가서 영원한 심판(審判)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 암의 망대(望臺)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하여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더 죄(罪)가 많아서 죽은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3:4). 누구든지 사고로 죽을 수 있습니다. 비행기가 추락할 수도 있고, 병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가장 중요한 것이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고, 죽음을 대비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긴급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和解)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확인을 해 둔 후에 공부를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결혼생활을 하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이렇게 홀연히 찾아오는 죽음의 사자(使者)가 아닙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습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죽음 이후에 있는 심판(審判)에 대하여 대비해서 살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Ⅱ.하나님의 백성들의 죽음 예수 믿는 사람들 역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죽지만, 그 죽음의 의미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罪)를 대신해서 죽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도 죽음과 동시에 영원한 음부(陰府)에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사망(死亡)의 권세(權勢)를 깨트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과 동시에 곧바로 영생(永生)으로 가게 됩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의 죽음이라는 것이 이 육신(肉身)의 옷을 벗는 것뿐이고, 우리는 주님과 더욱 가까운 상태에 있게 됩니다. 즉 우리는 때때로 죽음이라는 것이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사망(死亡)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이지, 모두 살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서로 만나거나, 이야기를 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22:32절)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하나님 앞에 다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이 변화 산으로 올라가셨을 때,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산 사람으로 나타났습니다. 9-10절)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하니.” 다섯 번째 인(印)을 뗄 때에 요한이 보니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제단(祭壇)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를 인하여 죽음을 당한 순교자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기를‘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라고 간청(懇請)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네 번째 인봉과 다섯 번째 인봉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네 번째 인봉(印封)은 인간들 자신의 죄(罪)가 넘쳐서 하나님의 죽음의 심판(審判)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돔 사람들이나, 노아 홍수 때,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세속화되어서 정욕(情慾)을 극대화하면서 살 때, 죽음의 사자(使者)가 찾아오게 됩니다. 때로는 이 죽음의 사자(使者)는 사람들에게 허무(虛無)한 마음을 주어서 자살(自殺)충동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쓰나미나 지진(地震)같은 자연의 대 재앙(災殃)으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죽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청황색 말(馬)을 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적(靈的)인 부흥(復興)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미 순교(巡敎)를 당한 성도들이 하나님께 계속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먼저 죽은 성도들이 제단(祭壇)아래서 매일 부르짖으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성도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성도들이 영혼(靈魂)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은 다시 새로운 육신(肉身)을 입기 전에 천사와 같이 빛나고 아름다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육체(肉體)를 가지고 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좋은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정욕(情慾)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그 영혼(靈魂)이 악마(惡魔)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우리가 사탄과의 영적(靈的)인 전쟁(戰爭)에서 밀리지 않고, 잘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받은 순교자들이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를 응원(應援)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사탄의 의도(意圖)를 잘 파악하고, 사탄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주로 사용하는 전략(戰略)은 마치 이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가 전부인 것처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도“...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 4:9).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 결혼도 하지 못하고, 취직도 못하고, 완전히 실패할 것이라고 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는 것이 살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절대로 이 세상은 평안한 세상이 아니고, 영적(靈的)인 전쟁(戰爭)터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고 하셨습니다. 뱀의 특징은 자기 힘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잘 숨어서 다닙니다. 뱀은 다리도 없고, 이빨도 튼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뱀은 다른 동물들과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숨어서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쓸데없이 사람들의 표적(標的)거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드러내어서 세상 사람들을 도전(挑戰)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직장에서나 학교에서 술을 마시게 할 때, 거기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나타내고, 더욱 열심히 그들을 도와주겠다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요즘 청년들에게는 좋은 직장을 가지는 것이 금(金)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요, 신(神)이 내린 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것을 은(銀)메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신앙 때문에 순교(巡敎)하는 것이 금(金)메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순교(巡敎)가 가장 가치가 있습니다. 그 다음 은(銀)메달은 복음을 위해여 감옥(監獄)에 들어가 고문(拷問)을 당하거나, 매를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銅)메달은 예수로 인하여 욕을 먹고, 직장에서나, 집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조금 성공한 것 것을 가지고,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체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앙 때문에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순간에 비해서 하나님의 평가(評價)는 너무나도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도 자신의 명예(名譽)를 더럽히고, 조금 더 생명을 연장하는 사람들이 오래 사람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생명은 짧고, 평가는 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순교자(殉敎者)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의인(義人)으로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 순교자가 생긴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강력한 진리(眞理)의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진리(眞理)를 위해서 죽는 자들을 보면, 진리(眞理)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 시대는 순교(巡敎)를 당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교(巡敎)하는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경제(經濟)가 어렵고, 취직(就職)이 어렵다 하더라도 순교(巡敎)하는 자세로 나가면,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이 옳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수아와 같은 자세로 나가는 것입니다. 즉‘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11절)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그들에게‘흰 두루마기’를 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참한 죽음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면, 비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흰 옷을 입혀서 그들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미군은 전사자(戰死者)의 관 위에 미국 국기를 덮어 놓습니다. 그러면 그 죽음이 영광스러운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관위에 태극기(太極旗)를 덮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眞理)를 위하여 죽음을 당한 자들을 이 세상에서도 의(義)롭게 인정해 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최고의 영광과 상급(賞給)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상(賞)받는 순서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 순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얼마나 귀한 것을 주님을 위하여 포기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자들이 가장 영광스러운 상(賞)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욕심을 버리는 훈련을 해야 상(賞)을 받습니다. 즉 돈도 버리는 훈련을 하고, 명예도 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꾸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Ⅲ.세상을 위해서 산 자들의 최후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고(事故)나 기근(飢饉)으로 죽거나, 고통(苦痛)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신앙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과 짝하여 끝까지 권세를 누리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모두 다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국 최후의 순간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심판(審判)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기에 가장 유복(有福)한 자들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누리고 싶은 것들을 모두 다 누리고, 편안하게 죽는 사람들일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권력자들이며, 돈이 많은 부자들이며,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비참하게 폐기(廢棄)처분 되기 때문입니다.
12-14절)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라에서 옮져지매.” 여섯 째 인(印)은 이 세상에 마지막에 일어날 일을 보여줍니다. 즉 여섯 째 인(印)을 떼니까 이 세상에는 지진(地震)이 일어나면서 모든 땅의 기초(基礎)가 다 흔들려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흔들리니까 이 땅 위에 세워져 있는 인간의 나라나 인간의 문명들은 모두 다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고 맙니다. 해가‘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진다.’고 했는데, 해가 까맣게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달은 핏빛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에게 영광을 받던 달이 얼마나 무서워집니까? 즉 달달 보름달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별들이 떨어지는데, 바람에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듯이 큰 별들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 하늘마저 종이가 말리는 것 같이 없어집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즉 하나님은 어떤 순간에 온 세상을 뒤집어엎으시는데, 그때에는 인간이 가진 제도나, 권세나, 학벌이나, 신분이 휴지조각 같이 아무 소용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라가 망하게 되면, 그때까지 누리고 있던 귀족의 명예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즉 2차 대전, 일본 제국이 망했을 때, 일본의 귀족들은 모두 전범(戰犯)이 되어서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그 전에 이들은 이 세성에서 별처럼 군림했고, 온 세상을 쥐었다 폈다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망하고, 나라가 망하니까 그들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었지만,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 천황은 자기가 신(神)이라고 했지만, 결국 미국의 장군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유고의 밀로셰비치나, 세르비아의 인종 청소를 했던 사람들도 전쟁에서 지게 되니까 모두 수배를 당해서 죄수의 신분으로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 세상은“...불사르기 위하여 보호 하신 바 되었다(벧후 3: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애써 쌓아올린 모든 제도(制度)는 하나님의 진노(震怒)로 한 순간에 모두 다 무너지고 맙니다. 그때 이것만 믿고 살아 온 사람들이 어떻게 될까?
15-17절)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여기에 나타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즉 땅의 임금이나, 왕족들이나, 장군들은 자기 힘을 믿고, 이 세상에서 큰 세력을 떨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힘을 신(神)으로 삼고, 자신의 신화(神化)를 만들면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업신여겼습니다. 또 부자(富者)들은 이 세상에서 돈을 모으는 재미나, 장사하는 재미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재산(財産)을 믿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강(强)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돈과 권력과 지식을 가지고 잘난 체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나타날 때에 크게 두려워하면서 산(山)과 바위에게 우리위에 떨어져 우리를 깔아서 죽게 하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모든 부끄러운 죄들이 온 세상에 모두 다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유명하던 사람이 어느 날 너무나도 좋지 못한 죄(罪)를 지은 것이 들통이 나서 수많은 텔레비전 카메라와 신문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지는 앞에 서게 되면, 정말 바위에 깔려서 죽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 다음날 신문을 보면, 자기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오는데,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려고 하지만, 숨을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 세상에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悔改)하고, 자기 욕심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복(福)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죄(罪)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면, 그때에는 쥐구멍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罪)는 반드시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義)로우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있을 때, 자신의 영원한 운명(運命)에 대하여 확인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 복음(福音)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설계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234장 *구주 예수 그리스도* 씨 뿌리는 자 다음카페 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카톡선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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