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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파멸과 회복
연구 범위: 창 5:32~9:29
기억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 9:16).
“자네, 요즘 광신자 노아에 대해 들어 봤나?”
“노아, 경건한 노아 말이지?”
“글쎄, 경건한 노아의 경건이 그를 미치게 했다니까, 하늘에서 물이 쏟아질 거라고 하잖아.”
“하늘에서 물이?”
“그래, 홍수가 난대잖아. 그리고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죽일 거래.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야.”
“방주?”
“뭐, 물 위에 뜨는 건데, 배 같은 건가봐. 거기에 들어가는 사람만 비가 내릴 때 살아남는다나. 지금 그걸 만들고 있잖아. 우리 모두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물로 심판을 내리신대. 나 참, 우리가 그렇게 악하진 않잖아, 안 그래?”
“하늘에서 물이라…? 그 점잖은 양반이 어쩌다가 그렇게 됐을까?”
“미쳤다니까. 완전히 율법주의자야.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걸 잘 모른다니까. 표준, 표준, 표준, 오로지 표준만 부르짖어.”
“그 양반 좀 강한 데가 있긴 있지만, 근본은 참 성실하고 곧은 사람이지.”
“그래, 좋아. 하지만 왜 우리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믿어야 돼? 과학자들은 그런 일이 있을 법하지도 않다고 하고, 철학자들은 그런 일이 생기면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거라잖아.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면서 물이 순환되는 거지, 아니 하늘에서 물이 쏟아진단 말이야? 말이나 돼?”
“하긴 … 그래.”
“모든 혈육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 외에 셋을 포함하여 자녀들을 낳았는데(창 5:4), 셋의 계보(家系)는 홍수 전에 하나님께 충성한 이들의 역사를 이룬다. 노아는 이들의 계보를 잇는 사람이었다(28~29절).
창세기 6:1~13에는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게 됩니까?
답:
비록 어떤 주석가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창 6:2)이란 하늘의 존재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석하지만, 문맥과 내용을 살펴보면 셋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딸들’(1절에서 사람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하였음)이란 가인의 자손을 가리키는 것이다. 믿음의 계보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불신자들과 혼인을 맺고 이러한 결연의 위험성에 스스로 노출된 것이다.
이 구절들에서 인간의 사악함이 매우 강하게 묘사되었다. ‘모든’, ‘오직,’ ‘항상’과 같은 단어들을 주목해 보라. 여기에 ‘계획’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앞에서 표현된 (사람을) ‘짓다’(창 2:7)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인데, 여기서는 ‘숙고’(熟考)의 의미가 있다. 구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전반적인 내면의 삶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감정과 의지와 지성의 자리를 가리킨다. 11절에서 13절 사이에 나오는 ‘패괴’와 ‘강포’라는 단어는 5절의 상태와 연결된 것이다.
창세기 6:6~7은 인간의 사악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답: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묘사한 다음,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을 기록했다. 그는 인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여호와에 대해 묘사하였다.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 계신 추상적인 분으로 소개하지 않고, 우리처럼 의지를 가지시고, 죄의 비극을 보시고 탄식하시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이 묘사를 통해 우리는 죄의 유입과 급속한 확산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교훈: 노아 홍수전에 세상의 타락상은 하나님의 탄식을 자아내는 것이었다. 오늘날 세상의 타락한 모습 또한 하나님의 눈물을 자아내기 충분치 않을까?
노아와 은혜의 복음(창 6:8~22)
창세기 6:8을 읽어 보라. 노아는 여호와 보시기에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을 주목해 보라(성경에서 ‘은혜’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나온 곳이다). 은혜는 무가치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과분한 은총을 말한다(롬 4:14~16; 엡 2:5~8; 딤후 1:9).
성경은 노아의 품성과 생애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창 6:9,22; 히 11:7; 벧후 2:5) 노아의 행적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까?(참조 창 9:20~21; 롬 3:23; 요일 1:8)
답:
노아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인이었 믿음과 순종의 생애를 살았다. 이것은 그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은 사실에서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창세기 6:22과 7:5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은 신자의 삶에 나타나야 할 구원하는 참된 믿음, 즉 방주를 지을 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는 믿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답:
패괴(敗壞)와 강포(强暴)가 가득한 중에서 여호와께서는 이 사람 즉 믿음을 분명히 행동으로 보여준 노아를 가지고 계셨다. 이것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오직 은혜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대한 구원의 약속을 받은 모든 사람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점이다. 노아가 아무리 많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가족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홍수로 쓸어버림을 당했을 것이다(참고 히 11:7). 이 사실은 날마다 예수님의 의를 구원의 유일한 소망으로 주장하는 우리 모두에게 훌륭한 실물교훈이 되어야 한다. 순종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교훈: 노아는 비록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 그의 믿음은 순종으로 입증된 진정한 믿음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홍수(창 7:1~16)
창세기 7장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언급된 사실은 노아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까?(창 7:2~3,8, 8:20)
답: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차이점을 분명하게 서술되기 오래 전에 벌써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분해 놓으셨다는 사실은, 분명히 유대 나라가 세워지기 오래 전인 초기 시대로부터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사이의 분명한 구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 7:7~24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에서 홍수로 파괴된 지역이 소규모의 국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전 세계적인 규모였다는 어떤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까?(비교 창 7:19; 단 7:27; 욥 28:24)
답:
대홍수가 땅을 뒤덮자,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 온 세상은 하나님께서 거주할 수 있는 지구로 준비하시기 이전의 상태(창 1:2)로 되돌아갔다. 반복되는 성경상의 진술, 곧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창 7:18~20)는 표현은 홍수가 전 세계적인 대격변이었음을 나타내 준다. 전 세계적인 홍수는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는 홍수 설화와,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화석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홍수가 국부적인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것이었음을 본문은 아주 분명하게 말해 준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성경의 증거가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인 홍수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홍수를 단지 지역적인 사건으로 돌려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교훈: 노아 홍수는 어느 한정된 지역만의 재난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대격변이었다. 세계 곳곳에 분포되어 있는 홍수설화와 화석이 이를 증명해 준다.
잃어버린 세대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와 홍수의 기사를 읽어 보면, 다른 사람들도 방주에 들어갔다거나 심지어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는 내용도 찾아볼 수 없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방주가 노아와 그의 가족과 동물들만을 위해 지어진 것처럼 들릴 수 있다(창 6:13~22). 신약의 다른 구절들은 어렴풋하게나마 다른 암시를 준다(히 11:7; 벧전 3:20; 벧후 2:5). 엘렌 화잇은 물론 노아가 방주를 지은 일은 다가올 사건에 대해 세상에 증거 한 것이었으며, 노아는 “찾을 수 있는 동안에 피난처를 구하도록 그들에게 간청하였다”(부조와 선지자, 97)고 매우 분명히 말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품성과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열망(딤전 2:3~4)을 모두 종합해 볼 때, 그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만 배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 세대가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결국 노아의 편에 선다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당할 각오를 하고, 겸비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의미했다. 그것은 결코 인기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자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특성은 그처럼 사악한 세대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노아의 세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노아의 편에 선다는 것의 의미와, 오늘날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그분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답:
이 모든 것 가운데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시고,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을 위해 우신 동일한 예수께서 노아를 통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에게도 최후의 심판 때(참고 마 24:38~41) 사람들이 쓸어버림을 당하기 전에 방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신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노아 홍수 때 뿐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도 한결같은 사랑으로 구원의 초청을 보내신다. 이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언약의 갱신
방주에서 나오던 날에 노아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창 8:20)
답:
“여기에 모든 후세대를 위한 교훈이 있었다. 노아는 황폐된 지상에 나왔었으나, 자신을 위하여 집을 준비하기 전에,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 그가 소유한 가축은 적었으며 그것들을 보존하느라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만물이 그분의 것임을 인정하는 표로서 즐겁게 그 가축의 일부를 주께 드렸다. 이와 같이 우리의 자원하는 헌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부조와 선지자, 106).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헌신과 경배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반응을 자신의 언어로 적어봅시다. 여기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21~22절)
답:
하나님의 반응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었다. 사람의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셨다(창 6:5). 그런데 홍수 후에도 인간의 악함은 전과 동일하게 진술되었다. 홍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선(善)으로 돌이킬 기회로 삼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슬퍼하신 것이다. 이 구절이 기록된 방식은 참으로 흥미로운데, 노아가 바친 희생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구를 다시는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결심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피의 희생은 약속과 연결된다. 우리를 새 언약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분명히 인간의 선함이 아니라 희생의 의미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악 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홍수로 인한 멸망에서 면하게 해 주신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복음의 원리와 동일하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선한 모습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당신의 자비와 은총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다.
교훈: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피의 희생을 드렸을 때 그와 더불어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을 피할 수 있다.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부조와 선지자, 제7장 ‘홍수’(90~104).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경고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죄를 버릴 마음이 없었다. 널리 퍼진 불신에 압도되어 마침내 그들은 먼저 사귀던 동료들과 합세하여 엄숙한 기별을 거절하였다. 어떤 이들은 깊은 감명을 받고 경고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였으나 희롱과 조소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저들도 같은 정신에 감염되어, 얼마 있지 않아 은혜의 초청을 거부하고 가장 담대하고 무례한 조소자들 중에 가담하였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한때 빛을 받았으나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저항해 온 자들보다 더 무모하고 더 깊은 죄에 빠지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 세대의 사람들 모두가 문자 그대로의 우상 숭배자들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공언하였다. 그들은 우상이 신의 대체물로서, 그것을 통해 백성이 거룩하신 존재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노아의 설교를 앞장서서 거절한 자들은 바로 이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물질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세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이나 그분의 요구들의 신성하고 불변적인 성질을 깨닫지 못하였다. 죄가 보편화됨에 따라, 그것이 점점 더 죄악적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으며, 죄를 처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반대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심판이 지상에 임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부조와 선지자, 95~9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만약 당신이 노아 당시에 살고 있었다면 노아의 기별을 믿지 못할 어떤 이유들을 제시했겠습니까?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이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