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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次 大慧 未來世中 有諸邪智 惡思覺者 離如實法 以見一異 俱不俱相
부차 대혜 미래세중 유제사지 악사각자 이여실법 이견일이 구부구상
다시 다음으로 대혜여 미래의 세간 가운데 있는 모든 삿된 지혜와 나쁜 생각으로 깨달은 이는 여실한 법을 여의나니, 같고 다르고, 구족하고 구족하지 못한 상(相)을 보고,
問諸智者 彼卽答言 此非正問
문제지자 피즉답언 차비정문
모든 지혜로운 이에게 묻는 다면, 그들은 곧 답하기를 이는 올바른 질문이 아니라고 답하여 말하는 도다.
謂色與無常 爲異爲不異 如是涅槃 諸行相所相 依所依 造所造 見所見
위색여무상 위이위부이 여시열반 제행상소상 의소의 조소조 견소견
이른바 색(色) 더불어 무상(無相)은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은 열반(涅槃)의 모든 행상(行相)과 소상(所相), 의(依)와 소의(所依), 조(造)와 소조(所造), 견(見)과 소견(所見),
地與微塵 智與智者 爲異爲不異 如是等不可記事 次第而問
지여미진 지여지자 위이위부이 여시등부가기사 차제이문
지(地)와 더불어 미진(微塵), 지(智)와 더불어 지자(智者)는 다른 것인가, 다르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은 등등의 일들은 해석할 수가 없나니, 차례로 질문하더라도,
世尊說此當止記答 愚夫無智非所能知 佛欲令其離驚怖處 不爲記說
세존설차당지기답 우부무지비소능지 불욕령기리경포처 부위기설
세존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마땅히 해석하여 답하기를 멈추는 도다. 어리석은 범부들은 지혜가 없어 능히 알지 못하나니, 부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놀라고 두려움을 여의게 하고자 말로 해석하여 설하지 않는 도다.
大慧 不記說者 欲令外道永得出離作者見故
대혜 부기설자 욕령외도영득출리작자견고
대혜여 해석하여 설하지 않는 다는 것은, 외도들이 영원히 지은 이(作者)가 있다는 견해를 멀리 여의게 하고자 하신 까닭이로다.
大慧 諸外道衆計有作者 作如是說 命卽是身 命異身異 如是等說名無記論
대혜 제외도중계유작자 작여시설 명즉시신 명이신이 여시등설명무기론
대혜여 모든 외도들은 지은 이(作者)가 있다고 헤아려 이와 같이 말하는 도다. 목숨(命)이 곧 몸(身)이요, 목숨(命)이 다르면 몸(身)도 다르다는 이와 같은 등등의 설을 이름하여 무기론(無記論)이라 하는 도다.
[참고] 사기론(四記論), 사종기론(四種記論)은 어떠한 것인가.
사기론(四記論)은 사종기론(四種記論)이라고도 하는데, 질문(質問)에 대하여 대답(對答)하는 방법(方法)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사기론(四記論)이라고 합니다.
① 결정기론(決定記論)은 질문(質問)에 대한 내용(內容)을 바로 긍정(肯定)하는 방법(方法)을 말합니다.
② 분별기론(分別記論)은 질문(質問)을 몇 가지로 구분(區分)하고 분석(分析)한 후에 몇 개의 경우(境遇)로 나누어 대답(對答)하는 방법(方法)을 말합니다.
③ 힐문기론(詰問記論)은 질문(質問)에 대하여 반문(反問)하는 방법(方法)으로 질문(質問)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明確)하게 정리(整理)한 연후(然後)에 대답(對答)하는 방법(方法)입니다.
④ 지기론(止記論)은 지주기론(止住記論)과 같은 말인데 대답(對答)할 필요(必要)가 없거나 대답(對答)하는 것 자체(自體)가 무의미(無意味)한 질문(質問)에 대하여 침묵(沈默)하는 방법(方法)을 말합니다. 무기론(無記論)도 이에 해당(該當)합니다.
大慧 外道癡惑說無記論 非我教中說 離能所取不起分別 云何可止
대혜 외도치혹설무기론 비아교중설 이능소취부기분별 운하가지
대혜여 외도는 어리석고 미혹되어 무기론(無記論)으로 설하지만, 나의 가르침 가운데는 이러한 무기론(無記論)을 설하지 않는 도다.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여의고 분별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나니, 어떻게 그쳐야 하는 것인가.
大慧 若有執著能取所取 不了唯是自心所見 彼應可止
대혜 약유집착능취소취 불료유시자심소견 피응가지
대혜여 만약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에 집착하면, 오직 스스로의 마음으로 보는 바임을 알지못하나니, 마땅히 그것을 멈출 수 있어야 하는 도다.
大慧 諸佛如來以四種記論爲衆生說法 大慧 止記論者 我別時說 以根未熟且止說故
대혜 제불여래이사종기론위중생설법 대혜 지기론자 아별시설 이근미숙차지설고
대혜여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는 사종기론(四種記論, 질문에 대한 네 가지로 대답하는 형식)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시는 도다. 대혜여 지기론(止記論, 止住記論이라고도 한다. 止記論은 四記論의 하나로 對答할 必要가 없는 無意味한 質問에 대하여 沈默하는 方法을 말한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차별(差別)하게 설할 때, 근기(根氣)가 아직 미숙(未熟)한 중생(衆生)들을 위하여 설법(說法)을 그친 까닭이로다.
復次 大慧 何故一體法不生 以離能作所作無作者故
부차 대혜 하고일체법불생 이리능작소작무작자고
다시 다음으로 대혜여 어떠한 까닭으로 일체법(一體法)이 생기지 않는 것인가. 능작(能作)과 소작(所作)을 여의면, 지은 이(作者)가 없는 까닭이로다.
何故一體法無自性 以證智觀自相共相不可得故
하고일체법무자성 이증지관자상공상불가득고
어떠한 까닭으로 일체법(一體法)은 자성(自性)이 없는 것인가. 증득한 지혜는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관찰(觀察)하여도 얻을 수가 없는 까닭이로다.
何故一體法無來去 以自共相來無所從去無所至故
하고일체법무래거 이자공상래무소종거무소지고
어떠한 까닭으로 일체법(一體法)은 오고 감이 없는 것인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은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고, 이르는 곳도 없는 까닭이로다.
何故一體法不滅 謂一體法無性相故 不可得故
하고일체법불멸 위일체법무성상고 불가득고
어떠한 까닭으로 일체법(一體法)은 멸하지 않는 것인가. 이른바 일체법(一體法)은 성품(性品)과 상(相)이 없는 까닭으로 얻을 수가 없는 까닭이로다.
何故一體法無常 謂諸相起無常性故 何故一體法常 謂諸相起卽是不起
하고일체법무상 위제상기무상성고 하고일체법상 위제상기즉시부기
어떠한 까닭으로 일체법(一體法)은 무상(無常)한 것인가. 이른바 모든 상(相)은 무상(無常)한 성품(性品)으로 일어나는 까닭이로다. 어떠한 까닭으로 일체법(一體法)은 항상(恒常)한 것인가. 이른바 모든 상(相)의 일어남은 곧 일어남이 아니요,
無所有故 無常性常 是故我說一體法常
무소유고 무상성상 시고아설일체법상
있는 바가 없는 까닭이요, 항상(恒常)없는 성품으로 항상(恒常)하나니, 이러한 까닭으로 나는 일체법(一體法)의 항상(恒常)을 설하는 도다.
爾時世尊重說頌言 一向及返問 分別與置答 如是四種說 摧伏諸外道
이시세존중설송언 일향급반문 분별여치답 여시사종설 최복제외도
그 때, 세존께서 거듭하여 게송으로 설하여 말씀하시는 도다. 언제나 일관성(一貫性) 있게 설하고(一向), 되돌려 물어 보고(返問), 분별(分別)하여 설하고, 적절(適體)하게 답하나니(置答), 이와 같은 네 가지의 사종설법(四種說法)으로 모든 외도들을 굴복(屈伏)시키는 도다.
數論與勝論 言有非有生 如是等諸說 一體皆無記
수론여승론 언유비유생 여시등제설 일체개무기
수론(數論)과 더불어 승론(勝論)은 유생(有生)과 비유생(非有生)을 말하나니, 이와 같은 등등의 모든 설들은 일체의 모두가 답할 필요가 없는 무기(無記)로다.
[참고] 수론(數論)과 승론(勝論)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수론(數論)은 모든 현상(現像)을 법수(法數)로 분류(分類)한 설일체유부(設一體有部)의 논서(論書)를 연구한 비담종(毘曇宗)을 일컫는 것입니다.
승론(勝論)은 바이셰시카 학파(學派)로서 모든 현상(現像)은 실(實) 덕(德) 업(業) 동(同) 이(異) 화합(和合)의 육구의(六句意)에 의하여 생성(生成) 소멸(消滅)되고 해탈(解脫)을 위하여 이들 여섯 가지를 이해(理解)하고, 요가 수행(修行)으로 모든 것을 해결(解決)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참고] 무기(無記), 무기론(無記論)이란 어떤 것인가.
무기(無記), 무기론(無記論)에는 여러가지의 의미(意味)가 있지만, 아무런 생각이 없는 멍 때리는 상태(狀態)를 의미(意味)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는 외도(外道)들의 질문(質問)에 대답(對答)할 가치(價値)가 없는 상태(狀態)를 의미(意味)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質問)들은 답할 수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사전(事前)에 자신(自身)이 옳다는 전제(前提)를 깔고 질문(質問)하는 경우(境遇)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自身)들이 절대적(絶對的)으로 받드는 신(神)에 대하여 논쟁(論爭)할 때, 사전(事前)에 자신(自身)이 믿는 신이 존재(存在)한다는 전제(前提)를 미리깔고 논쟁(論爭)하고자 한다면, 그 논쟁(論爭) 자체(自體)가 성립(成立)될 수도 없고 대답(對答)해야 할 가치(價値)도 없기 때문입니다
以智觀察時 體性不可得 以彼無可說 故說無自性
이지관찰시 체성불가득 이피무가설 고설무자성
이러한 지혜로 관찰할 때, 체성(體性)은 얻을 수가 없고, 그것을 설할 수 없는 까닭으로 자성이 없다고(無自性) 설하는 도다.
爾時大慧 菩薩摩訶薩復白佛言 世尊 願爲我說諸須陁洹 須陁洹果行差別相
이시대혜 보살마하살부백불언 세존 원위아설제수다원 수다원과행차별상
그 때, 대혜 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하는 도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들을 위하여 모든 수다원(須陀洹)과 수다원과(須陀洹果)의 수행하는 차별상(差別相)을 설하시어
我及諸菩薩摩訶薩聞是義故 於須陁洹 斯陁含 阿那含 阿羅漢方便相 皆得善巧
아급제보살마하살문시의고 어수다원 사타함 아나함 아라한방편상 개득선교
저와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뜻을 들은 까닭으로 수다원(須陁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의 방편상(方便相)에서 모두 공교(善巧)함을 얻고,
如是而爲衆生演說 令其證得二無我法淨除二障 於諸地相漸次通達
여시이위중생연설 령기증득이무아법정제이장 어제지상점차통달
이와 같이 중생들을 위하여 펼쳐 설하고, 이무아법(二無我法)을 깨달아 두 가지의 장애를 청정하게 제거하고, 모든 보살지의 모양(相)을 점차로 통달하고,
獲於如來不可思議智慧境界 如衆色摩尼 普令衆生悉得饒益
획어여래부가사의지혜경계 여중색마니 보령중생실득요익
여래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혜의 경계에서 갖가지 색의 마니보배 구슬과 같이 두루 중생들이 모두 이익을 얻게하여 주시옵소서.
[참고] 학(學), 무학(無學)은 어떠한 수행 단계인가
1. 학(學) 혹은 유학도(有學道)
번뇌(煩惱)의 습기(習氣)를 아직 다 끊지 못하여, 수도(修道)가 더 필요(必要)한 단계(段階)입니다.
1) 견도(見道, 須陀洹果, 預流果)
견도(見道, 須陀洹果, 預流果)는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현관(現觀)하는 것이 견도(見道)이고 견성(見性)입니다. 범부(凡夫)의 경계(境界)를 떠나 생사(生死)의 그물망(生死網)을 벗어나(出離), 초과(初果)에 머무나니, 수다원(須陀洹)이요, 처음으로 성자(聖者)의 지위(地位)인 예류과(預流果)에 참여(參與)한다는 뜻입니다.
2) 수도(修道, 斯陀含果, 一來果)
수도(修道, 斯陀含果, 一來果)는 사다함과(斯陀含果) 또는 일래과(一來果)라고도 합니다. 사다함과(斯陀含果)는 욕계(欲界)의 번뇌(煩惱)가 아직 남아 있어서, 이 성자(聖者)는 인천(人天)에 한 번만 더 왕래(往來)하면, 반열반(槃涅槃)에 든다 하여 일래과(一來果)라 합니다.
3) 수도(修道, 阿那含果, 不還果)
수도(修道, 阿那含果, 不還果)는 욕계(欲界)의 수혹(修惑, 思惑)과 번뇌(煩惱)를 모두 끊어 욕계(欲界)에 다시 오지 않는다 하여 불환과(不還果)라고 합니다.
2. 무학(無學) 혹은 무학도(無學道)
무학(無學)은 멸진정(滅盡定)을 성취(成就)하여, 더 공부(工夫)할 것이 없는 단계(段階)입니다.
1) 아라한도(阿羅漢道, 阿羅漢果)
아라한도(阿羅漢道, 阿羅漢果)는 멸진정(滅盡定)을 성취(成就)하였기 때문에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달아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도리(道理)를 확실(確實)히 증득(證得)하였습니다. 실아실법(實我實法)을 다 멸진(滅盡)해서 더 알 것이 없는 경계(境界)입니다.
佛言 諦聽 當爲汝說 大慧言唯
불언 제청 당위여설 대혜언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다. 그대들은 자세히 들을 지로다. 마땅히 그대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대혜가 “예” 하고 말하는 도다.
佛言 大慧 諸須陁洹 須陁洹果差別有三 謂下中上
불언 대혜 제수다원 수다원과차별유삼 위하중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다. 대혜여 모든 수다원(須陁洹)과 수다원과(須陁洹果)에는 세 가지의 차별이 있나니, 이른바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이로다.
大慧 下者於諸有中極七反生 中者三生五生 上者卽於此生而入涅槃
대혜 하자어제유중극칠반생 중자삼생오생 상자즉어차생이입열반
대혜여 하품(下品)이라 하는 것은 모든 유(諸有, 三界, 色界 欲界 無色界) 가운데 일곱 번 반복하여 태어나고, 중품(中品)이라 함은 세 번에서 다섯 번 태어나고, 상품(上品)이라 함은 바로 다음 생(次生)에 열반에 드는 도다.
大慧 此三種人斷三種結 謂身見 疑戒禁取 上上勝進得阿羅漢果
대혜 차삼종인단삼종결 위신견 의계금취 상상승진득아라한과
대혜여 이러한 세 종류의 사람들은 세 가지의 번뇌를 결단(決斷)하여 끊는 도다. 이른바 신견(身見, 아견과 아소견), 의(疑, 변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戒禁取見, 도가 아닌 그릇된 계나 법을 지키는 견해)이나니, 더욱 높이 올라가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는 도다.
[참고] 번뇌(煩惱)에서 오리사(五利使)와 오둔사(五鈍使)는 무엇인가.
인간(人間)의 번뇌(煩惱) 가운데 오리사(五利使)와 오둔사(五鈍使)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은 무엇인가. 십번뇌(十煩惱)란 어떤 것인가.
인간(人間)의 번뇌(煩惱)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으로 구별(區別)합니다. 견혹(見惑)을 오리사(五利使)라 말하고 수혹(修惑)을 오둔사(五鈍使)라고 말합니다. 두 가지를 합하면, 십번뇌(十煩惱)가 되는 것입니다. 십번뇌(十煩惱, 十惑)는 근본번뇌(根本煩惱)라 하여 본혹(本惑)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리사(五利使)
신견(身見)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 계금취견(戒禁取見)을 오리사(五利使)라고도 합니다. 견도위(見道位)에서 돈단(頓斷)이라, 이론적(理論的)인 번뇌(煩惱)이기 때문에, 이치(理致)를 이해(理解)하게 되면, 빨리 끊을 수 있다 하여 견혹(見惑)이라고도 합니다.
신견 (身見) | 아견 (我見) | 허망(虛妄)한 나의 존재(存在)를 나라고 고집(固執)하는 견해(見解) |
아소견 (我所見) | 물건(物件) 사람 등을 나의 소유라고 고집하는 견해(見解)입니다. | |
변견 (邊見) | 상견 (常見) | 나라는 존재(存在)가 항시(恒時)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見解)입니다. |
단견 (斷見) | 금생(今生)으로 끝이고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을 부정하는 견해(見解)입니다. | |
사견 (邪見) | 인과(因果)의 법칙(法則)을 무시(無視)하는 견해(見解)입니다. | |
견취견 (見取見) | 틀린 견해(見解)를 옳다고 고집(固執)하고 지키는 견해(見解)입니다. | |
계금취견 (戒禁取見) | 도(道)가 아닌 그릇된 계(戒)나 법(法)을 고집(固執)하고 지키는 견해(見解)입니다. |
* 능가경 제3권(第三卷)에서는 아래와 같이 신견(身見)에 구생기(俱生起, 태어나면서 일어나는 선천적인 번뇌)와 분별기(分別起, 태어난 뒤에 일어나는 후천적인 번뇌)로 구분하여 놓았습니다.
* 능가경 제3권(第三卷)에서는 신견(身見), 의(疑), 계금취견(戒禁取見)의 세가지로 나누었는데, 신견(身見)에는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 의(疑)에는 변견(邊見), 사견(邪見), 견취견(見取見)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둔사(五鈍使)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를 오둔사(五鈍使)라고 합니다. 수도위(修道位)에서 점단(漸斷)이라, 오래 닦아서 천천히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사혹(思惑), 또는 수혹(修惑)이라고도 합니다. 수혹(修惑)은 십지(十地)까지 올라가면서 단계적으로 끊게 됩니다. 현상계(現象界)의 모든 번뇌(煩惱)에 걸쳐 있어서 사혹(事惑)이라고도 합니다.
탐(貪, 탐심貪心)은 탐(貪)하는 마음입니다.
진(瞋, 진심嗔心)은 화내고 성내(城內)는 마음입니다.
치(痴, 치심痴心)은 무명(無明)으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만(慢, 만심慢心)은 남보다 수승(殊勝)하다고 생각하는 아만심(我慢心)입니다.
의(疑, 의심疑心)은 만물의 본성(本性)과 현상을 모르고 의심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