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사람
근대조각의 선구자라고 불리우는 로댕의 걸작 ‘생각하는 사람’ 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자주 보아왔던 조각상이다. 웬만한 초등학교 교정엔 그 조각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그 조각상이 본래 만들어진 연유야 어떻든지 간에 ‘너희들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교육적 차원에서 예산을 투입해 제작해 놓았을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188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미술박물관 문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따라 만들어진 로댕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다. 로댕은 단테의 <神曲>에서 지옥, 연옥, 천국 등 3개 시리즈 가운데 지옥편에서 모티브를 잡고 새 박물관 입구로 ‘지옥의 문’으로 설계하고 제작하게 되었는데 그 ‘지옥의 문’ 상단부에 ‘생각하는 사람’이 위치하고 있다.
시인 릴케는 이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모습의 작품을 보고 ‘모든 힘을 쏟아 사유하고 있다. 온몸이 머리가 됐고 혈관에 흐르는 모든 피는 뇌가 됐다.“ 라고 말했다. 정말 심각하고도 처절하게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모습을 로댕은 잘 묘사해 놓은 것 같다.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탈리아 시인 ’단테‘라는 주장도 있고 로댕 자신이라는 설도 있다. 하여튼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 온갖 고뇌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서양을 대표해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동양을 대표해 우리 한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오른손으로 턱을 고이거나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반가사유상’이 ‘생각하는 사람’과 다른 점은 생기있는 미소와 온화한 표정이다. 모든 고통과 번뇌를 달관한 모습이다.
나는 두 작품을 통해서 서양인과 동양인의 사고방식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인들은 현실적 상황을 피해가기 보다는 오히려 고민하고 도전하고 투쟁하여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본다. 독일 관념론 철학을 완성한 철학자로 평가하는 헤겔은 辨證法을 통해 모순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도전과 투쟁을 합리화 했다고 본다.
그러나 동양인의 사고방식은 어떤가? 노자사상의 핵심은 無爲自然인데 그 의미는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順應하여 살아야 한다’ 는 뜻으로 해석해 본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無碍自在가 또 그런 뜻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해 본다. 般若心經에 色卽是空이라 하였는데 이는 세상의 허망한 것들에 대해 미련을 버리고 초월하라는 뜻이 아닌가? 라고 생각해 본다.
서양과 동양의 사고방식에는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인류역사는 挑戰과 應戰에 의해 발전해 왔다고 하였듯이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달하여 쾌적한 인류문명사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나친 개발의 남용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자연이 인류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연재해로 인해 인류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을 도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폭력혁명을 합리화하고 공산주의를 만들어 인류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네오 맑시즘 등 그 망령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가장 이상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말고 개혁해 나가며 어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도 중요하고 환경에 순응하고 초연한 태도로 살아가는 것도 지혜롭다고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적이 이기적인 사적 욕망을 추구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공익을 위한 것이고 후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인가?를 잘 구분해야 할 것이다.
나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보다는 오히려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한 숭고한 목적을 위해 深思熟考하고 서로가 함께 共生할 줄 아는 참 지혜로은 사람들이 되면 좋겠다. 투쟁을 합리화하는 변증법적 유물론 같은 낡은 투쟁사상을 버리고 전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서로를 먼저 위해주고 긍정적 소통을 할 줄 아는 올바른 지도자들이 되면 좋겠다.
20230803 ilj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