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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성인
빈첸시오 아 바오로[라] Vincentius A Paulo [프]Vincent de Paul (1581~1660)
성인, 신부. "라자로회"라고 불리기도 하는 "선교사제회"와 "빈센트 드 폴 사랑의 딸회" 설립자.
축일 9월 27일.
생애프랑스 랑드 지방의 프루이에서 가난한 농장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5세 때인 1595년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닥스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당시 그 곳의 유명한 변호사였던 코메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어 경제적 어려움 없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훗날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여러 면에서 코메 변호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1597년 이후 툴루즈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598년에 타르브의 주교좌성당에서 차부제품과 부제품을 받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20세 때인 1600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이후 신학 공부를 계속하여 1604년에 신학 학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듬해 어떤 부인의 기부금을 받기 위하여 마르세유에 갔던 그는, 배를 타고 나르본을 거쳐 돌아오는 중에 이슬람의 해적들에게 붙잡혀 튀니지에서 그만 노예로 팔려 가게 되었다. 먼저 한 어부에게 팔렸다가 뱃멀미 때문에 연금술을 연구하는 노인의원에게 다시 팔려 간 빈첸시오는, 그 노인에게서 여러 가지 병을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으며, 1년이 지나 그 노인이 다른 나라로 가게 되어 어느 배교인에게 넘겨졌다.그 사람은 세 명의 첩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여인이 빈첸시오에게 가톨릭 신앙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이에 감동을 받은 그 여자는 배교자인 남편을 설득하여 마침내 교회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으며,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빈첸시오는 1607년에 그와 함께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의 부특사인 몽토리오 주교 앞에서 회개를 선서하게 하였다. 빈첸시오가 배운 치료방법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몽토리오 주교는 그를 데리고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1년동안 신학을 다시 공부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과로 시작된 교회의 개혁을 목격한 그는, 몽트리오 주교의 소개로 로마의 고위 성직자들과 친분을 맺었고 호의도 많이 받았다. 교황청에서 그를 파견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609년에는 프랑스의 국왕 앙리4세(1589~1610)와 1599년에 이혼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왕비의 파리궁전의 전담 신부가 되었으며, 어느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부터는 재정적인 혜택도 받게 되었다. 빈첸시오는 궁중 생활을 하면서 귀족들의 문학 모임과 과학자들의 모임에 참석하였지만, 노예 생활을 하며 겪었던 고통을 잊지 않고 수입의 일부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사제생활
1610년에 프랑스에 오라토리오회를 설립하러 온 베륄 신부와의 만남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추기경이 된 베륄 신부가 사망할 때까지 그에게서 영적 지도를 받았다. 1611년에 파리 근처의 클리시의 본당 신부로 임명받아 처음으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신자들의 기도 생활에 감동을 받은 그는, 신부로서의 사명감을 재인식하게 되었지만, 얼마 후인 1613년에 베륄 신부의 제안으로 공디 백작의 전속 사제 겸 가정교사로 임명되고 말았다.
왕실 함대 사령관이었던 공디 백작은 금력과 권력을 함께 지니고 있었지만 선한 임품의 소유자였고, 그의 부인은 열심한 신자였지만 세심증으로 인해 빈첸시오의 영적 도움이 필요하였다. 빈첸시오는 교사로 일하면서 그 백작 집의 하인들과 소작인들도 돌보았는데, 이 기간동안에 그는 시골 사람들의 영적·물질적 빈곤을 목격하게 되었다.
공디 백작 내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베륄 신부의 허락을 받아 1617년에 그 집을 떠난 빈첸시오는, 그 당시 생활환경이 매우 어려웠던 리용 근처의 샤티옹 레 돔브읍의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다.
빈첸시오는 보좌 신부와 함께 모범적인 생활과 열성을 다하여 훌륭한 사목적인 성과를 거두었으며, 처음으로 이 마을에 ‘애덕회’를 설립하였다.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항상 그는 신자들에게 본당 내의 궁핍한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돌보아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신자들은 그 집에 가서 봉사를 하곤 하였다.
이에 빈첸시오는 신자들이 봉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규칙을 작성하였는데, 그것이 애덕회였다. 1619년에 빈첸시오는 공디 백작 부부의 간절한 부탁을 받아들여 다시 그 집으로 가게 되었다. 공디 가문에 속한 마을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을 입주 조건으로 내세웠던 그는, 1625년까지 공디 가문의 전속 신부로 생활하면서 여러 마을에서 설교 활동을 하였고 애덕회를 결성하였다.
또 공디 백작이 관할하는 갤리선의 죄수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음을 알고 백작에게 이를 개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백작은 그에게 갤리선 구호 관리관이라는 직책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빈첸시오는 1625년까지 이 일을 계속하면서 노예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병원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편 1618년 파리에서 제네바의 주교인 성 프랑수아 드 살(1567~1622)을 만난 빈첸시오는 그의 온유함과 겸손함에 감동을 받았다. 베륄 신부가 그에게 영적 생활을 가르쳤다면, 프랑수아 드 살 주교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증거한 것이다. 파리에 방문 수도회를 창설한 프랑수아 드 살 주교는, 1619년에 이 수녀회의 영적인 지도를 빈첸시오에게 맡겼다.
수도회의 설립
공디 부인이 사망한 1625년부터 빈첸시오는 가난한 이들, 특히 시골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들의 복음화를 위하여 ‘선교 사제회’를 창립하였다. 선교 사제회는 당시에 사용하지 않고 있던 생 라자로 거리에 있는 나환자 병원인 라자로의 집으로 이사한 후부터는 ‘라자로회’라고 불렸으며, 선교 사제회 신부들은 시골에가서 정해진 기간동안 교리를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하였고, 농번기에는 공디 백작이 파리에 마련해 준 집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수도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선교지마다 가능한 한 애덕회를 구성하려고 노력하였다.
1625년 말에 빈첸시오는 남편이 죽은 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면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고 있던 루이즈 드 마리약(1591~1660)을 알게 되었다.
지도 신부가 되어 달라는 루이즈의 청을 받아들인 그는, 시골의 애덕회를 방문하고 격려하는 일을 1629년부터 그녀에게 맡기고, 1632년 파리에서 매주 화요일마다 성직자들을 위한 모임인 ‘화요회’를 결성하였다. 이 모임에 참여한 신부들 가운데는 보쉬에(1627~1704), 쉴피스회의 창설자인 올리에 등 프랑스 교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30년 전쟁(1618~1648)으로 어려움에 처한 파리와 지방의 수많은 서민들의 구호 사업에도 헌신하였다. 루이즈의 친구가 된 상류층 부인들이 이 일에 협조하게 되자, 1633년에 빈첸시오는 그들을 위한 영적 지침서를 만들어 ‘애덕 부인회’를 설립하였고, 이 단첸의 회원인 귀족 부인들은 매일 병원에 가서 중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아 주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그렇지만 상류층 부인들이 중환자들에게 접근 하는 것을 꺼렸고, 가난한 이들 편에서도 그런 시중을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빈첸시오는 수녀회의 설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루이즈에게 시골의 애덕회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신심이 깊은 처녀들을 찾아보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 당시에 봉쇄 생활을 하던 수녀회와는 다른 ‘애덕의 수녀회’를 창립하여 초대 원장으로 루이즈를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현재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라고 불리는 수녀회이다.
한편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라자로회의 사제 양성을 위해 부제들을 위한 피정을 계획하였다. 피정 기간을 처음에는 15일, 이후에는 3개월로 조금씩 연장하면서 사제로서의 마음가짐과 기도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도록 하였는데, 이 피정은 2년간의 과정으로 발전하여 후에 신학교로 설립되었다.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기 전에 빈첸시오에거 고해성사를 청할 만큼 그는 궁정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으며, 1648년~1652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프롱드의 난 때에는 중재 역할을 수행하면서 이 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서민들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 동안 라자로회는 많은 발전을 하여 영국, 아일랜드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1660년 9월 27일 파리에서 사망하여 라자로회 파리 본부의 모원에 묻혔으며, 1737년 6월 16일 글레멘스 12세 교황(1730~1740)에 의해 시성되었고, 1885년에 레오 13세 교황(1878~1903)에 의해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창립자- 프레드릭 오자남
Ronald Ramson 전교회 신부님의 저서
“프레드릭 오자남과 기도하기” 에서 발췌
프레드릭 오자남은 1813년 4월 23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출생하였으며 그가 세 살이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프랑스 리용으로 이사를 했습니다.프레드릭이 7살 되던 해에 발진티푸스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의 부모는 이미 8명의 자녀를 잃은 경험이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프레드릭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였으며 주님의 은총으로 프레드릭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프레드릭의 아버지는 의사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한밤 중에도 병든 이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외출하는 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프레드릭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오는 지혜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17살이 되었을 때 프레드릭은 신앙의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왜 믿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실망, 좌절, 양심의 가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유혹이 점점 강해져 감에 따라, 프레드릭은 자신이 어둠 속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있는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령께 신앙의 은혜와,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였으며 마침내 신앙의 회의가 끝나자 프레드릭은 자신을 바쳐 신앙을 보호하고 진리를 위해 일하기로 약속 하였습니다.1831년 당시 18세였던 오자남은 더럽고, 음울하고, 사람들로 넘쳐나는 파리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프레드릭은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오자남의 아버지는 아들이 장래 황실법관의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프레드릭은 법을 좋아하지 않았고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꿈은 나중에 이루게 되었습니다.소르본느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프레드릭은 적과 아군을 동시에 만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프랑스 가톨릭의 밝은 면을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강의실과 대학 복도에서는 반가톨릭주의와 반교권주의의 공격을 듣고 느꼈습니다.
교회와 가톨릭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학생들을 놀리고 비웃는 교수들이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프레드릭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믿음이 깊은 학생들과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뭉친 힘과 용기로 신앙의 진실을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1833년 4월 23일 프레드릭의 20번째 생일날 오거스트 타일랑디에르(Augustine Le Tallandier), 프랑소아 랄리에르(Francois Lallier), 펠릭스 클라브(Felix Clave), 쥴 드보(Jules Devaux), 폴 라마슈(Paul Lamache), 프레드릭 오자남(Frederic Ozanam)등 6명의 학생들과 그들의 조언자인 임마뉴엘 베일리(Emmanuel Bailly)가 가톨릭 트리뷴지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오자남은 반대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거기 모인 다른 사람들도 오자남의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합당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음대로 따라야 합니다. 우리 모두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갑시다!” 이렇게 하여 그날 밤 자선을 실천하는 빈첸시오회가 탄생하였습니다. 프레드릭 오자남은 회의 주요 설립자이자 영감을 일으켰고, 회의 정신을 만든 장본인입니다.학생들은 결혼한 성인인 베일리를 회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그는 11년 동안 회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역사연구회와 비슷하게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자선 협의회라고 이름을 정했으며 역사연구회는 사회적 학문적 단체이고 자선협의회는 봉사단체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들은 회의 이름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라고 변경하였습니다. 협의회 명칭은 보통 본당의 개별 단체를 언급하는 것으로서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설립 당시의 빈첸시안들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로잘리 랑뒤 수녀님에게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에 대해 도움과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로잘리 수녀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며 부드러움과 친절함을 가지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초기 회원들이 가난한 이웃들에게 배급표를 바르게 나누어 주도록 수녀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장
놀랄 만큼 빈첸시오회는 퍼져 나갔습니다. 5년간 프랑스 전역에 15개 센터에서 2,000여명 이상의 회원으로 늘어갔습니다. 빈첸시오회는 회원들 안에 있던 불씨를 살렸습니다.
회원들은 자신들의 개별 단체를 협의회라고 하고 자신들은 빈첸시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초기부터 빈첸시안들의 주요한 임무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집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2명씩 짝을 지어 임무를 완수하도록 보내셨던 예수님의 권고대로 가난한 이들을 방문할 때 2명의 회원이 짝을 지어 나갔습니다.
빈첸시오회는 모든 형태의 자선활동을 하였습니다. 음식, 주거, 의복, 땔감 등의 물질적 지원이 필요한 곳을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군인들을 위한 도서관을 세우고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유혈충돌이 일어났을 때, 빈첸시안들은 다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모든 활동을 통해 회원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적 도덕적 복지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프레드릭은 살아있는 동안에 이탈리아, 벨기에,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국, 독일, 미국, 네덜란드, 그리스, 터키, 예루살렘, 스위스, 오스트리아, 멕시코, 캐나다에서 빈첸시오회가 설립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복자 프레드릭 오자남은 “우리의 작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하느님의 섭리라고 간주될 만큼 충분히 대규모로 성장하였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