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사표 휘날리는 武侯祠를 가다 [2010년 02월 02일 (화) 흐림]
- 諸葛亮의 戰略과 泣斬馬謖의 紀綱 - ○ 다시 찾은 해발 300m의 성도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한 음습한 날씨로 리버사이드호텔의 느긋한 아침밥을 먹고 삼국지의 영웅 諸葛亮을 모시는 武侯祠로 간다.
☞ 泗川城 成都에 있는 武侯祠는 西晉 永安 원년 6세기경 창건된 것으로 추정 되며 현존 건물은 淸나라 康熙11년 (1672년) 옛터에 중건한 蜀나라 승상이며 전설의 전략가 諸葛亮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총면적 37,000㎡ 사당으로 劉備殿, 諸葛孔明殿, 三儀廟, 유비의 묘인 惠陵등이 있다. 諸葛亮은 山東省 琅句郡 陽都縣 출생으로 자는 孔明, 시호는 忠武이다. 後漢 말 관직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명성이 높아 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고, 207년 劉備로부터 초빙되어 天下三分地契를 進言하고 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吳의 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군를 대파하는 등의 수많은 전공으로 221년 漢의 뒤를 이은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에는 어린 後主 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吳와 연합, 魏에 항쟁하였으며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 前,後出師表 는 황제와 나라를 보위하는 충정이 담긴 千古의 명문으로 여겨진다. 유비가 그를 초빙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초가에 세 번이나 찾아갔다는 三顧草廬와 그의 용인술을 대표하는 泣斬馬謖, 七縱七擒 등 우리에게 친숙한 고사 성어를 남긴 亂世의 英雄이다.
○ 무후사의 현판인 漢昭烈라고 쓴 대문을 들어서면 唐代의 명재상 裴度가 글을 짓고 書法家인 柳公綽이 글씨를 쓰고 明匠 駑蹇이 비문을 세긴 蜀나라 丞相 諸葛亮의 공덕을 칭송한 명작 三絶碑(蜀丞相諸葛武侯祠堂碑)가 서도기행의 길을 열어준다.
☞ 明良千古(名君良弼 千古垂範)의 무후서 유비전의 扁額
○ 모자란 듯하면서도 넓은 품으로 天下의 人才를 포용하는 劉備의 좌상
○ 孔明殿의 제갈량 얼굴 모습은 지략가의 면모 보다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온후한 기품이 서려있다.
☞ 出師表는 서기 227년 유비가 사망한 후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하여 魏나라를 치러 가기 전에 제갈량이 유비의 아들 황제 劉禪에게 올렸던 충정의 표상인 명문으로 轉出은 선제(유비)께서 이루지 못한 한황실의 부흥을 위하여 선제의 은덕을 입은 신하와 장군들의 충정을 받아들여 공평하고 바른 정치를 펴서 나라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내용이며, 後出師表는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적을 공격해야하는 6개 항목에 걸친 타당성을 적은 글로서 金나라에 항거한 南宋의 명장 岳飛가 무후 사에 들렀을 때 출사표를 보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쓴 비문이다.
○ 劉備殿 오른쪽에 의로운 기운이 하늘 보다 높다는 뜻의 義薄雲天 이라는 편액이 붙은 關羽殿 안에는 황재의 복장을 한 관우 상이 근엄하게 앉아있다.
○ 劉備殿 왼쪽으로 聲串 이라는 편액의 張飛殿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장비의 모습이 이채롭다.
☞三儀廟 : 劉備, 關羽, 張飛의 桃園結義를 기리기 위하여 청나라 강희황제가 새운 사당
○ 3세기 전, 후 중국역사의 한 축을 이루던 蜀漢의 유비와 그 휘하에 모여 들었던 문무백관 28인의 면모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큰 나라의 건국에는 구국의 충신과 용장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확인 하면서 삼국지의 풍물을 재현한 금리거리를 돌아보았으나 依舊한 山川도 아니려니와 문물 또한 옛것이 아닌 현실을 보는 것 이 아쉬울 뿐이다.
○ 점심을 다양한 재료의 야채와 국수, 만두, 돼지고기를 삶은 샤브샤브에 풍곡 주를 반주로 모처럼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오는 날이었다.
○ 저장 목록이 여느 도시 서점 보다 빈약한 성도 신화서점에 들려 몇 권의 서첩과 붓을 구입 하는 것으로 할 일을 한 것처럼 물러나는 것에 비하여 한 가방 가득히 비문 서첩과 사전 등을 망설임 없이 주문하는 벽산선생님의 학문탐구 열의에 경의로 움을 느끼며 15 : 45 杜甫草堂으로 발길을 돌린다.
檀皐추천 0조회 4810.07.03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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