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 육신과 성령
1. 신학적 성령론과 신앙적 성령론
성령 문제는 기독교의 난해 문제 중 하나이다. 어떤 실체가 아닌, 바람과 비와 비둘기 등 상징으로 표현되는 성령은, 꼬집어 인간의 지각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러면서도 개인에게 오신 예수님이며, 믿는 자의 양심 속에서 역사하시고, 의지가 그분과 연합할 때 동행하신다. 그리고 예수 믿음의 모든 과정과 은총은 그분께 달렸다. 이렇게 손에 잡히지도 않으면서도 신앙과 구원의 주관자가 되시다보니, 가짜 성령, 거짓 능력으로 교인들을 오도하는 경우도 많다. 성령을 이상한 느낌이나 환영(幻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상한 발성(소위 방언)이나 입신(ecstasy) 같은 별난 이적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역시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 성경을 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로마서 8장의 성령에 대한 말씀을 종합하면 훌륭한 성령론이 된다.
신약에서 성령에 대한 대표적 표현들을 찾아보면, 신령한 기운(氣運)이나 영감 같은 것이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인격자이심을 알 수 있다.
1)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분으로, 인격이 있고, 감정이 있는 분이시다.
2) 신비한 능력이나 기운 같은 힘이 아니라, 교제를 즐겨하고 실제로 도움을 주시는 인격이 있는 분이시다.
3) 이른 비 성령으로, 늦은 비 성령으로 구속 사업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시다.
이상으로 성경에 직접적으로 기록된 지식적 공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활동의 이해, 이런 것을 신학적 성령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개인적으로 깨닫는 경험적 이해, 혹은 심령속의 인격적 감화자로서의 성령 공부를 신앙적 성령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성령의 속성
성령의 주된 임무는 “다른 보혜사”로서, 보혜사이신 예수님의 구속 사업을 우리 개인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공로와 정신을 개인의 형편과 그 당시(當時)에 적용시켜, 받아들이고 실현하도록 하는 일을 하신다(요14:16,17 참조).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면 거의가 이 내용이다. 성령은 우리 심령 속에 들어오시고, 의지와 연합하여 우리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실제로 이끄신다(빌2:13). 그런데도 인격자로서 성령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을 완전히 설명하려면 네 자신이 하나님이 되든지 아니면 성령께서 하나님 되시기를 그쳐야할 것이다“(SDABC, vol.7, 193). 그래서 신앙적 성령론에서는 성령의 본질을 밝히는데 비중을 두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는데 초점을 둔다. “(사도행적 52)
성령(聖靈)은 이름 그대로 거룩한 영이시다. 거룩하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생활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의 도덕보다도 더 선하고, 세상의 교양보다도 더 고상하며, 세상의 사랑보다도 더 거룩한 정신을 넣어주시는 분이다.(살전 4:3). 이런 거룩한 정신이 가장 분명한 성령의 증거로, 거룩하지 않은 것은 성령이 아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적도 일어날 수가 있고, 신비한 체험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특별한 경우일 뿐이고 근본은 성령의 열매가 보여주듯이 성령은 거룩한 인격이다(갈 5:22, 23).
영어에서는 성령을 HOLY SPRIT라고 한다. 거룩한 정신이란 말이다. 성령은 히브리어로 루아흐 코데쉬라고 하는데 헬라어의 하기온 프뉴마와 같다. 둘다 단어적으로는 ‘생기’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충동‘ ’유지해 가는 힘‘ ’할 수 있는 능력‘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께서는 “다른 보혜사”(요14:16)라고도 하셨는데, ’옆에 부름 받은 자‘ ’곁에서 도와주려고 기다리는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나가게 돕는 보이지 않는 손이시다.
성령의 상징 – 바람, 물. 불. 비둘기. 빛. 기름. 비.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는 의사와 약사의 관계와 같은데, 예수님은 구원의 치료를 위해 모든 진단을 하고 처방을 내리셨고, 성령님은 처방대로 약을 지어 개인이 먹고 낫도록 해주신다. 그리고 태양과 햇빛의 관계와도 같다. 이 둘을 분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체이면서도, 엄밀하게는 구별이 있다. 태양은 하늘에 떠서 만상을 비추고 다스리지만 실제로 각 생명체가 살아가고 자라가는 힘은, 자기에게 오는 햇빛으로 탄소동화작용을 통해서 얻는다. 성령은 개인에게 도착한 턔양이다.
이만큼 하고 이제는 영생의 보증자이신 자기 속의 성령님을 확인하는 공부를 해야겠다. 이것이 믿음의 최종적인 목표요 완성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성령의 내재(內在)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비결이요(롬 8:9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증거이다(롬 8:16).
3. 육신과 성령의 구별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고, 마음속에 들어오심은 우리의 마음먹기가 거룩해지는 것이며, 마음의 거룩해짐은 거룩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하와의 예에서 확실히 볼 수 있다. 성령이 거하던 하와의 심령에 악령 즉 육신이 들어오는 과정을 보면서 성령에 대한 이해를 더 확실히 할 수 있다.
1) 우리 심령에 영이 들어오는 첫 과정은 하와가 선악과 앞에 서서 갈등할 때와 같다.
2) 그리고 다음 과정은 이 갈등을 정리하는 단계이다. 자기의가치관, 선호도에 따라 이 갈들을 취사선택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냐 악령이냐, 믿음이냐 불신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그런데 대개는 이 과정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 단계에서 예수님 중심의 결정이냐 자기중심의 결정이냐,, 이타적 선택이냐 이기적 선택이냐, 정의를 위한 판단이냐 이목에 따른 판단이냐, 천국 우선이냐, 세상 우선이냐를 진지하게 살펴야 한다.
“양심은 인간의 정욕의 갈등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것이 거절될 때 하나님의 영은 슬퍼하게 된다.”(5T 120) “우리의 매일의 행위가 양심이 인정하는지 혹은 정죄하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성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선행이라고 여겨지는 많은 행위들도 면밀히 살펴보면 그릇된 동기에서 나온 것들이 많음을 알게 된다. 많은 이들이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덕성으로 칭찬을 받는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는 동기를 살피신다.”(2T 511)
하와는 뱀의 속삭임대로 해보고 싶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양심도 있었다. 그런데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 대신에 뱀의 달콤한 말을 택했다. 주의 말씀과 사랑을 믿는 대신에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기를 부추기는 인본주의의 길을 택했다. 이것이 바로 죄이다. 이렇게 영이 육에 패배하였다. 이때로부터 사람의 본성 자리에 육신이라는 영이 주인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이 육신을 버리고 성령을 다시 모셔들여야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세 번째 과정은, 마음속에 결정한 선택을 실행할 명분과 방법을 구상하는 단계이다. 만지지도 말라는 과일을 뱀은 만지고 있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 말씀 한 번 어겼다고 설마 죽이겠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에다 인용한다). 선악을 분변하고 더욱 지혜로워지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등등으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과정이다. 이렇게 가책을 합리화하는 것을 다른 말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속이는 이런 죄를 남을 속이는 죄보다 더 나쁘게 보신다. 여러 가지 명분을 끌어다가 자기 욕망을 합리화시키고 나면, 불의도 의롭게 보이고, 악도 선처럼 생각된다. 그래서 실행할 담력이 생기는 것이다.
4) 그다음 네 번째 과정은 심령 속의 결정이 드디어 몸으로 실행되는 단계이다.
5) 그리고 몸의 행위까지 다 했어도 또 다음 과정이 있는데, 범죄 후에 그것을 수습하는 행위가 있다. 하와가 자기의 범죄를 변명하고, 동조할 아담을 찾아가서 뱀이 한 유혹을 자기가 한 것과 같다. 그리고 하나님을 피해 숨었고, 들켰을 때는 옷을 벗어서 숨었다고 변명을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결정 선택했으면서도 뱀 핑계를 댔다. 이런 수습행위가 이미 스스로를 정죄(定罪)한다. 스스로 합리화 했던 동기가 떳떳했다면 왜 그렇게 숨고, 남 핑계를 대겠는가?
6) 그런데 5단계까지 이른 잘못이라도, 속죄하고 새로워지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길이 이 길인데, 어떤 일을 뉘우치고 2단계에서 실패한 자신을 슬퍼하고 고치려하면 회개가 되어 용서가 된다. 그런데 2단계 육신의 욕망은 그대로 두고, 4단계의 범죄만 슬퍼하고 결과만 바꾸려하면 그것은 후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믿음차이, 베드로와 유다의 회개차이, 바울과 빌라도의 양심 차이, 야곱과 에서의 기질차이이다. “예수님은 유다가 회개하지 않았고 그의 자복 역시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부인한 일에 대해 마음 찢는 깊은 슬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죄에 대한 공포와 장차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것임을 아셨다.”(DA 722)
4. 성령을 마음에 모심
성령을 마음에 모시는 과정이 꼭 이러하기 때문에, 성도의 첫 번째 의무는, 자기를 합리화 하는지, 정직하게 예수님을 따르는지 자기를 판단하는 일이다. 우리는 죄가 들어오지 못하게 우리의 심령 속을 잘 지켜야 한다(잠 4:24). 자기 속에서 성령의 양심을 따르는 이 선택이 곧 믿음이요, 거듭남이며, 그 결과가 바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