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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과학
힘의 힘
구조론은 힘의 과학이다.
힘은 충돌이다.
충돌하면 승부가 벌어진다.
승부가 벌어지면 한쪽이 이긴다.
거기서 결정적인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힘은 밸런스 코어를 이동시킨다.
힘은 밸런스에 숨었다가 갑자기 나타난다.
힘은 밸런스 붕괴로 격발되고 낮은 단계 밸런스로 멈춘다.
힘은 상호작용 파동이 작아진 만큼 빨라지는 각운동량 보존이다.
힘의 특별한 매력은 조절이 가능한 자발성에 있다.
힘이 상호작용 계 내부 밸런스에서 나오는 것이 자발성이다.
밸런스가 마이너스 한 방향으로만 조절되는 것이 방향성이다.
경로를 제한하여 밸런스를 조절하는 것이 통제가능성이다.
힘은 만유에 내재한 조절장치다.
모든 힘의 근원은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밸런스는 낮은 단계에서 복원되므로 경로가 추적된다.
힘은 전체 자원을 한 지점에 몰아준다.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는 성질이 권력의 근거다.
집단이 가진 힘의 크기는 평등한 정도에 비례한다.
내부의 평등으로 힘을 모으고 외부의 차별로 소비한다.
단위를 좁게 잡고 내부를 외부로 보는 것이 소인배의 오류다.
내적 평등과 외적 차별이 사회발전의 동력이자 사회의 모순이다.
안의 평등과 밖의 차별을 가르는 기준은 적절히 조절되어야 한다.
계가 고립되면 외부 도움 없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계가 외부를 향해 부단히 성장하는 동안만 문제가 은폐된다.
부단한 진보를 통해 계는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다.
힘의 과학
구조론은 힘의 과학이다. 인간은 힘에 의해 타격받고 힘에 의해 구원된다. 좋은 것도 힘이고 나쁜 것도 힘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힘이 무엇인지 모른다. 힘의 메커니즘을 정면으로 파헤친 과학자가 없다는 사실이 인류 문명의 맹점이다. 인류의 문명은 의외로 허술한 기반 위에 서 있다.
힘은 조절이다. 상호작용은 조절되어야 한다. 힘은 기능이다. 기능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물리학은 에너지 개념 뒤에 숨는다. 에너지energy의 어원은 '안en에서 일ergy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안에서 일하므로 보이지 않는다. 즉 모른다는 말이다. 힘은 '우리가 모르는 어떤 작용'이라는 의미다. 한심한 일이다. 모르면 알아내야 한다.
에너지는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거리를 속도로 바꾸어 각운동량을 보존한다. 긴 파동을 짧은 파동으로 바꾼다. 씨름선수가 힘을 쓴다면 인체 전체의 힘을 상체로 좁히거나 혹은 상체의 힘을 팔로 좁히는 것이다. 전체 힘을 부분에 몰아주는 각운동량 보존이다. 씨름선수는 무게중심을 낮추어 나의 힘과 상대 힘을 합친 전체 힘을 도출한 다음 둘이 합쳐진 전체의 밸런스를 무너뜨린다.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 안에는 상호작용이 있고 상호작용을 유지하는 것은 밸런스다. 에너지는 큰 것 하나의 밸런스를 작은 여러 밸런스들의 집합으로 바꾼다. 에너지는 상호작용 계 내부 밸런스 조절이다. 힘은 밸런스 형태의 변화다. 각운동량이 거리를 속도로 바뀔 때 힘이 작용한다. 밸런스는 입자로 성립하고, 언밸런스는 힘으로 조절하고, 밸런스의 붕괴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인류는 이러한 존재의 내막을 탐구하지 않았다. 힘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역학이다. 그러나 이름이 그러할 뿐 역학은 힘이 아니라 운동을 해명한다. 역학이 아니라 운동학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힘 자체를 연구한 사람은 없다.
문제는 인과율이다. 현대문명은 수학의 기반 위에 세워져 있고 수학은 인과율의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인과율이 허술하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그냥 그렇다고 선언될 뿐 왜 그런지 해명하지 않는다. 인과율은 인류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해명된 것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무엇이 있나? 사건의 의사결정 구조가 있고 존재의 변화 메커니즘이 있다. 답은 그곳에 있다. 피상적인 관찰로 안 된다. 경험적으로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알아도 정확한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전에는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고백해야 한다. 인류는 인과율을 모른다.
잘 가다가 자빠지는 이유는 신발끈을 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명이 이 지경인 이유는 이 부분에서 기초가 허술하기 때문이다.
힘의 매력
인간은 힘을 원한다. 부자가 탐하는 것은 돈의 힘, 지식인이 탐하는 것은 명성의 힘, 약골이 원하는 것은 체력의 힘, 정치인이 탐하는 것은 권력의 힘, 솔로가 원하는 것은 매력의 힘이다.
나의 힘이 객체에 영향을 미칠 때 인간은 전율한다.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고 쾌감을 느낀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다. 그것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이다. 개인과 집단이 상호작용하고, 인간과 자연이 상호작용한다. 자극하고 반응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상호작용의 형태를 고도화하는 것이 문명의 진보다.
힘은 균형이다. 균형이 있는 모든 곳에 힘이 있다. 힘은 개인에게도 있고 집단에도 있고 자연에도 있다. 마음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힘이 있는가 하면 근육 속에 감추어진 체력의 힘도 있고, 집단이 한 방향으로 일제히 몰려가는 세력의 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힘은 균형과 조절이 필요하다.
세상은 힘으로 시작해서 힘으로 끝난다. 문제는 힘이고 답도 힘이다. 힘은 만유의 조절장치다. 밸런스의 조절 실패로 인해 생겨난 문제는 적절한 힘의 조절로 해결된다. 결어긋남으로 인해 일어난 문제는 결맞음으로 해결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면 모르되 무엇을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힘의 조절을 거쳐야 한다.
힘은 상호작용의 밸런스에 가두어져 있으므로 밖에서 보이지 않는다. 힘은 밸런스에 감추어져 있다가 필요한 때 등판하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다른 것은 들어간 만큼 곧바로 나오는 데 힘은 밸런스에 저장되어 있다가 적절히 조절되어 결정적인 순간에 몰아서 작용하므로 반전의 묘미가 있다.
두 사람이 공을 주고받는데 외부인의 눈에는 공이 보이지 않는다고 치자. 공을 주고받는 속도를 빠르게 해도 외부인은 그 변화를 알 수 없다. 저글링 하는 사람이 돌리는 공의 숫자를 늘려도 외부인은 알 수 없다. 공을 놓치면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이 힘이다. 팽이가 천천히 돌든 빠르게 돌든 외부에서는 알 수 없다. 멀리서 보면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힘은 밸런스를 이용하여 에너지의 크기를 감춘다.
보석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광산에 있다. 황금이 좋다고 하나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다. 외부의 어떤 것은 항상 반대급부가 청구되어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힘은 자기 내부에 비축되어 대기하다가 부르면 즉시 출동한다는 점이 다르다.
자동차의 힘은 엔진에 있고 돈의 힘은 금고에 있다. 지식의 힘은 도서관에 있고 네티즌의 힘은 SNS에 있다. 공통으로 내부에 있다. 누가 게시판에 의견을 올리면 바로 댓글이 달리고 여론이 형성된다. 반면 마차를 끄는 말은 수레 바깥에 노출되어 있다. 망치의 힘은 그 망치를 누가 휘두르는가에 따라 다르다. 외부에 있는 것을 동원하려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내가 자유롭게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것은 매력이 없다.
힘은 힘이 있다. 매력이 있다. 그것은 별도의 동원 절차 없이 내부에서 즉시 작동하는 힘의 자발성이다.
힘의 이로움
힘은 상호작용구조 내부의 밸런스에 가두어져 있다. 밸런스가 유지되면 입자다. 입자가 강체의 성질을 가진다면 힘은 유체의 성질을 가진다. 힘은 입자의 밸런스에 가두어져 있다가 밸런스가 깨져서 유체의 한 곳에 몰아주는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강체의 대칭성과 유체의 비대칭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입자 - 강체의 대칭성, 밸런스를 유지하며 외력에 맞선다.
힘 - 유체의 비대칭성, 밸런스를 무너뜨리며 변화를 일으킨다.
바위를 힘껏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입자의 성질이라면 흔들바위가 흔들리는 것은 힘의 성질이다. 밸런스가 결정한다. 어떤 조건에서 바위가 움직일지를 결정하는 것이 힘이다. 운동은 그 바위가 실제로 굴러가는 것이다.
원시인은 이齒를 좋아한다. 이로 잘근잘근 씹어서 끈을 자른다. 맹수의 이빨을 수집하여 목걸이를 만든다. 돌을 깨뜨리면 모가 난다. 이는 이로움이 있고 모는 쓸모가 있다. 무리가 많이 모이면 좋다. Good의 어원은 '가득'이다. 그릇이 가득 차게 모아서 뾰족하게 이를 만들면 힘이 있다.
힘은 깔때기와 같다. 입구와 출구가 있다. 입구는 넓음으로 힘을 모으고 출구는 뾰족함으로 그 힘을 사용한다. 힘은 입구의 대칭성과 출구의 비대칭성으로 조절된다. 먼저 평등한 밸런스를 만들어 힘을 모으고 다음 불평등하게 밸런스를 무너뜨려서 힘을 사용한다. 방향과 순서의 판단이 중요하다. 공간은 방향을 지정하고 시간은 순서를 지정한다. 선 공간 후 시간이다.
활은 활몸의 평등한 힘을 뾰족한 화살촉에 모은다. 활몸은 대칭이다. 비대칭이면 활이 부러진다. 칼은 무사의 힘을 예리한 칼날에 모은다. 깔때기처럼 둥글게 모은 다음 뾰족하게 좁힌다. 원탁의 기사처럼 둥글게 힘을 모아서 뾰쪽한 칼날을 휘두르는 것이다.
힘은 T자 모양으로 수평과 수직을 교차시킨다. T의 상단은 수평의 대칭이고 하단은 수직의 비대칭이다. 깔때기의 상단은 평등하게 힘을 모으고 하단은 뾰족하게 칼로 찌른다.
수평의 대칭은 넓고 수직의 축은 뾰족하다. 모든 힘의 작용에 입구의 넓음과 출구의 좁음이 있으니 그것이 조절장치다. 수평을 수직으로 바꾸고, 평등을 차별로 바꾸고, 대칭을 비대칭으로 바꾸어 의사결정한다.
도구는 힘의 방향을 바꾼다. 상호작용구조 내부에 도구가 숨어 있다. 수평과 수직이 교차하는 깔때기가 있다. 외부의 간섭 없이 안에서 스스로 작동하므로 조절된다.
모든 문제는 내 앞길을 막는 외부 힘 때문이고 모든 해결은 길을 개척하는 내부 힘으로 가능하다. 신체의 힘은 근육 안에 있고, 전기의 힘은 배터리 안에 있고, 마음의 힘은 정신 안에 있고, 집단의 힘은 의사결정 구조 안에 있다. 힘의 이로움은 내부에 비축되었다가 필요한 때 즉시 동원되는 자발성에 있다.
긍정의 힘
힘의 의미는 자발성에 있다. 상호작용 계 내부에서 자체 동력을 확보하고 스스로 길을 개척한다. 힘이 없으면 외부의 것에 의존해야 한다. 새끼는 어미에게 의존하고, 승객은 운전수에게 의존하고, 객차는 기관차에 의존하고, 기생충은 숙주에 의존한다. 그들은 조절할 수 없다. 힘을 비축할 수 없다.
힘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것이 긍정의 힘이다. 반대로 부정의 힘도 있을 법하다. 공자의 가르침이 긍정의 힘이라면 노자의 생각은 부정의 힘이다. 진실을 말하면 긍정은 힘이 있고 부정은 힘이 없다. 남녀라도 YES를 말하면 침실을 공유하여 월세를 절약하지만, NO를 말하면 데이트 비용만 깨진다.
부정의 힘은 닫힌계를 지정하지 않은 데 따른 양질전환 착각이다. 한 가지 사건의 결과가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될 때 두 사건의 연결부위만 보면 량에서 질로 도약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 양질전환 착각이다. 마치 결과가 원인이 되어 인과율을 뒤집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은 별개의 두 사건이므로 닫힌계가 아니다. 닫힌계 안에서 결과가 원인이 되는 일은 없다.
노자는 이유극강이라고 했다.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돌을 뚫는다? 이는 피상적 관찰이다. 사실은 물을 낙하시키는 중력의 힘이 돌을 뚫은 것이다. 반드시 외부에서 에너지가 들어온다. 에너지의 주인이 사건의 원인이다.
대부분의 궤변이 양질전환 착각을 이용한다. 과거에 내가 너를 구타했기 때문에 네가 단련되어 성공했다는 식이다. 이때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의사결정을 한 사람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힘이 있다 - 긍정적, 능동적, 주체적, 적극적, 주도적 : 답이 있는 사람의 건설적 태도
힘이 없다 - 부정적, 수동적, 의존적, 소극적, 반응적 : 답이 없는 사람의 퇴행적 태도
노자가 주목한 것은 긍정의 힘이다. 물은 중력에 갇혀 자발적으로 힘을 만들어낸다. 직원은 회사에 의존하지만, 회사는 스스로 먹고 사는 자발성이 있다. 의존적인 민중이 모여 자발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한다. 여기서 착각이다. 직원이 의존했기 때문에 회사가 성공한 것이 아니고 경쟁사를 이겨서 성공한 것이다. 민중이 의존했기 때문에 지도자가 탄생한 것이 아니고 집단이 적을 물리쳐서 지도자가 탄생한 것이다. 회사라는 긍정이 먼저 있었고 집단이라는 긍정이 먼저 있었다.
자발성이 먼저다. 기관차가 먼저고 객차가 따른다. 진보가 먼저고 보수가 따른다. 원인이 먼저고 결과가 따른다. 인과관계는 닫힌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별개의 두 사건을 섞어서 판단하면 안 된다. 량이 질로 도약하는 듯이 보이는 경우는 반드시 외부에서 추가로 에너지가 들어온다. 외부의 힘에 의존하므로 자발성의 힘이 아니다.
부정의 해로움
긍정은 자기 내부를 바라보고 부정은 외부를 바라본다. 부정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괴롭힌다. 다른 사람을 자극하여 되돌아오는 반응에서 자기 행위의 동기를 조달한다. 모든 차별주의가 그러하다. '북한이 남침할 거야.' '조선족이 범죄를 저질렀대.' '이게 다 유대인의 음모라니까.' '성소수자가 사회를 타락시키고 있어.' 이는 타인을 자극하여 에너지를 뜯어내는 기술이다.
긍정은 자체 엔진이 있는 강자의 것이고 부정은 자체 엔진이 없는 약자의 것이다. 힘이 없으면 별수 없이 남의 뒤에 묻어가야 하는데 어디에 붙어갈지 판단을 잘해야 한다. 줄을 잘 서야 한다. 미국에 붙어가고 일본에 붙어가자. 보수꼴통 생각이다. 그들은 자발성을 잃었기 때문에 평생 남의 꽁무니 뒤에 붙어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찌꺼기를 주워 먹는 하청문명이다.
세상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이다. 힘이 있는 사람이 선제적으로 상호작용을 일으켜 게임의 주최 측이 되는 것이 힘의 자발성이다. 힘이 없는 사람은 남의 게임에 고용되어 일당벌이 선수로 뛴다. 그들은 항상 불평을 늘어놓는다. 불평할수록 더 많은 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잘 우는 아기가 더 많은 젖을 먹는 이치다. 문제는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노자의 묻어가기 가짜 힘에 솔깃해한다. 현실적으로 힘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 사회는 망한다. 기생충이 번성하면 숙주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절대강자 한 사람에게 붙어가려고 지도자 뒤에 줄을 서다가 독재로 치닫는 중국이 그러하다. 그 배경에 노자의 도교사상이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해방 직전에 친일파가 된 사람이 있다면 줄을 잘못 선 것이다. 남의 기관차에 객차로 붙어가는 사람은 끊임없이 숙주를 의심하고 시험하고 괴롭힌다. 항상 삐딱한 태도로 시비를 건다. 자신이 줄을 잘 섰는지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그런 식으로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세상의 모든 악을 저지른다.
매력은 자발성에 있다. 귀여운 사람은 스스로 귀엽고, 예쁜 사람은 스스로 예쁘고, 똑똑한 사람은 스스로 똑똑하다. 그들은 건설적이고 활기차고 풍성하다. 반면 의존하는 사람은 퇴행적이고 활기가 없고 단조롭다. 그들은 매력이 없고 피곤한 자들이다.
현실적으로 힘이 없다면 뭉쳐서 힘을 만들어야 한다. 높은 단위의 집단으로 올라서야 한다. 개인에게 힘이 없다면 가족으로, 가족에 힘이 없다면 사회로, 사회에 힘이 없다면 인류로 의사결정의 단위를 높여서 자발성을 찾아내야 한다. 팀플레이를 가르치는 공자의 방법으로 가능하다. 노자에게 없는 것은 그 뭉치는 팀이다.
밸런스의 힘
힘은 상호작용하는 계 내부의 밸런스 복원력이다. 힘은 애초에 계를 전제로 한다. 계는 안과 밖의 구분이 있다. 계는 자원을 연결한다. 연결되면 내부다. 힘은 계 내부의 연결된 힘이다. 우리는 계 내부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힘의 자발성에 주목해야 한다.
자연自然이라는 말은 힘의 자발성을 반영한다. Nature의 어원은 '나타난다'는 뜻인데 역시 자발성을 반영하고 있다.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自 나타나서Nature' 내게 손을 내밀고 먼저 인사하는 것이 자발성이다. 자연은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다.
씨앗은 종자 내부의 원인에 의해 자발적으로 싹이 튼다. 태풍은 바다 내부의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소용돌이는 강물 내부의 원인에 의해 일어난다. 문명은 집단 내부의 원인에 의해 진보하고, 사람의 생각도 뇌 안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내부에 힘을 감추고 있다. 자체 엔진이 있고 동력원이 있다. 내부에 힘을 저장하는 밸런스가 있다. 균형자가 있다. 조절장치가 있다.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
조절장치는 한 방향으로 작동한다. 밸런스 조절은 마이너스만 가능하고 플러스는 불가능하다. 동작이 빠른 사람이 느린 사람과 보조를 맞추려고 속도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느린 사람이 빨라질 수는 없다. 물가를 올려서 시장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지만 낮춰서 조절하기는 무리다. 어느 순간 가격이 0에 도달하므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힘의 자발성은 한 방향으로 조절되는 에너지의 방향성에 의해 뒷받침되고 그것은 계의 통제가능성으로 나타난다. 닫힌계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 내부의 유를 밖으로 밀어내서 밸런스를 복원할 수 있으나 그 반대는 없다. 무를 유로 바꿀 수 없다. 계 밖의 것을 가져올 수 없다. 만약 가져왔다면 열린계다. 그 경우는 외부에 의존한 것이다.
힘의 방향성 - 계 내부의 밸런스 조절은 마이너스 방향만 가능하다.
힘이 작용하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외부와 단절된 닫힌계가 성립한다. 계가 닫혔으므로 플러스로는 밸런스를 회복할 수 없다. 배가 항구를 떠나면 그만이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면 그만이다. 그 시점부터 마이너스로만 평형의 회복이 가능하다. 배는 화물을 버리고, 비행기는 연료를 버리고, 기구는 모래주머니를 버려서 균형을 회복한다. 무언가를 잃어 먹는 방법으로만 밸런스가 조절된다. 커플이라도 무언가를 잃어야만 상대와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에너지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회에 걸쳐 밸런스를 조절한다. 질에서 무너진 밸런스는 입자로, 입자에서 무너진 밸런스는 힘으로, 힘에서 무너진 밸런스는 운동으로, 운동에서 무너진 밸런스는 량으로 조절한다. 의사결정 단위는 단계적으로 낮아진다. 전체의 밸런스에서 부분의 밸런스로 의사결정 영역이 좁아진다. 의사결정이 점차 변방으로 밀려난다. 이전에는 나무의 밑동에서 조절되던 것이 이제는 가지 끝에서 조절된다. 말단부는 숫자가 많으므로 점차 조절에 애로사항이 꽃 피게 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힘의 역사
힘을 탐구한 사람은 뉴턴이다. 뉴턴은 운동의 원인으로 힘을 제안했다. 뉴턴이 해명한 것은 운동이다. 힘의 근거에 대해서는 갈릴레이에게 떠넘겼다. 과학자들이 핵심을 얼버무리는 일은 많다. 닥치고 계산이나 하라는 양자역학과 같다. 암흑에너지처럼 확실한 근거를 대지 못하지만, 간접증거를 토대로 수용하는 경우도 있고,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처럼 확실한 화석증거가 있지만 원리가 불완전하다고 씹어버리는 경우도 있고, 칼로릭이나 플로지스톤처럼 적당히 둘러대다가 슬그머니 철회하는 경우도 있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은 99퍼센트 맞지만 한 가지가 해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밟아버리고, 칼로릭이나 플로지스톤은 99퍼센트 개소리지만 써먹을 데가 있다고 은근슬쩍 받아들이는 것이 과학계의 수준 낮음이다.
운동의 원인이 힘이라면 힘의 원인은? 갈릴레이 이후 400년간 인류는 역학의 핵심을 뭉갰다. 갈릴레이의 관성력은 지동설에 대한 반대파의 공격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갈릴레이는 단서를 남겼을 뿐 힘을 설명하지 않았다. 관성력은 잠복해 있다가 의사결정이 일어나는 순간 갑자기 드러난다. 이런 현상은 주변에서 쉽게 관찰되므로 납득은 되지만 실제로 힘이 어디에 잠복하여 숨는지는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힘은 상호작용구조 내부 밸런스의 대칭성에 숨는다. 대칭에 의해 교착되어 있다가 코어가 움직여서 비대칭으로 바뀌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관성력이다.
병뚜껑을 열면 사이다가 뿜어져 나온다.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것이다. 관성력의 의미는 사이다의 탄산가스처럼 은폐된다는 점이다. 힘이 있는데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조절할 수 있다. 밸런스를 조절하여 힘이 튀어나오는 방향과 크기와 속도를 지정할 수 있다. 운전기사가 브레이크를 살살 밟으면 관성력이 조절된다.
힘은 자발성, 방향성, 통제가능성이 있다. 힘이 내부에서 나오는게 자발성, 마이너스 방향으로 나오는 게 방향성, 조절되는 것이 통제가능성이다. 반대로 힘의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임의로 객체를 조절하는 것은 권력이다.
힘의 자발성 - 내부에 비축된다.
힘의 방향성 - 마이너스만 가능하다.
힘의 통제가능성 - 적절히 조절된다.
스프링을 누르다가 손을 떼면 복원된다. 눌린 스프링에 걸린 압력이 힘이다.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로 보면 갈릴레이의 관성력은 스프링을 누르는 압력과 같다. 움직이는 것을 멈춰 세우는 것이 스프링을 누르는 것과 동치다. 힘은 계 내부의 밸런스에 의해 교착된 압력이다. 압력은 상호작용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유체의 간섭이다.
균일한 자원으로 이루어진 유체가 밸런스를 이루었을 때 추가로 에너지를 가하면 밸런스의 중심에 코어가 발생한다. 계에 가해진 에너지의 1파와 2파가 코어에서 만나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계 내부의 모순에 의해 코어가 움직이면 파동이 쪼개져서 낮은 단계의 밸런스로 갈아타는 과정이 우리가 목격하는 힘이다.
유체의 힘
집단이 외력에 맞서 한 덩어리로 움직이면 내부에 압력이 걸린다. 커플이 커플룩을 고집한다면 내부에 사랑이 걸려 있다. 압력이 걸리면 계 내부의 밸런스에 의해 강체로 바뀌어 유체의 성질이 은폐된다. 계 내부의 밸런스가 깨지는 순간 잠복해 있던 유체의 성질이 드러나는 것이 관성력이다.
힘은 집단의 의사결정이다. 집단은 여럿이고 여럿이면 간섭한다. 간섭은 계가 평형에 도달할 때까지 진행된다. 평형에 도달하면 외력에 대해서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새끼 곰이 뒤에서 지켜보는 엄마 곰을 믿고 대담하게 나오는 격이다. 호가호위와 같다. 힘은 집단의 대표성이다. 개체가 집단을 대표한다. 뾰족한 화살 끝이 활몸 전체의 파워를 대표한다.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이다.
밸런스에 의해 부분의 합이 도출되어 2가 1로 행세하며 외부의 1에 맞서므로 힘은 막강해진다. 쪽수 믿고 나대는 자들 많다. 반대로 집단 내부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힘을 쓸 수 없게 된다. 한쪽 다리가 없으면 걸을 수 없다. 한쪽 팔이 없으면 씨름을 할 수 없다. 한쪽 바퀴가 터지면 자동차는 달릴 수 없다.
밸런스는 상호작용 계 안에서 성립하는 유체의 성질이다. 유체는 간섭하고 간섭하면 균일해져서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강체와 같다. 에너지적으로 물질은 강체 아니면 유체다. 밸런스 아니면 언밸런스다. 에너지는 일정한 조건에서 강체가 유체로 변하는 성질이다. 화약의 폭발이 대표적이다.
플라즈마는 유체다. 우주는 유체다. 우리가 강체로 아는 것은 플라즈마가 밸런스를 이루어 강체의 성질을 이차적으로 획득한 것이며 의사결정의 순간에 유체로 돌아간다. 의사결정은 집단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강체는 관찰자와의 균형상태다. 관찰자를 배제하고 객체 내부 사정을 보면 존재는 언제나 유체다. 강체의 집합도 의사결정은 유체를 따른다. 방앗간의 벼는 강체지만 절굿공이에 떠밀려 움직이며 유체의 성질로 도정되어 백미가 된다.
상호작용 계 내부 밸런스의 형태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량이다. 량은 변별된다. 량을 변별하는 것은 운동이다. 운동의 원인은 힘이다. 힘은 은폐된다. 힘을 은폐하는 상자는 입자다. 입자는 강체다. 강체는 밸런스다. 입자에 밸런스를 부여하는 것은 질이다. 질은 균일하다. 균일하면 닫힌계다. 사건은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은 언제나 둘이다. 혼자 상호작용할 수는 없다. 둘이 상호작용하면 유체다. 강체는 상호작용의 밸런스가 외부 관측자에게 관측되는 형태에 불과하다.
방향성의 힘
엎어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수는 있는데 반대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올 수는 없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을 수는 있는데 내가 못 가진 것이 문득 생겨날 수는 없다. 잃는 것은 안에서 내가 결정하지만, 얻는 것은 밖에서 다른 사람이 결정한다. 의사결정권자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실제로는 그 반대로 보이는 현상이 무수히 많다. 엎어진 물을 주워 담는 자가 분명히 있다. 곽상도는 50억을 해먹고도 검사와 판사를 조종하여 능청스럽게 주워 담았다. 이는 열린계다. 열린계는 사건 뒤에 또 다른 사건이 있다. 이는 말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언어도단이다. 축구하는데 일부러 져주고 몰래 토토를 해서 돈을 딴 다음 내가 이겼다고 선언하는 식이다. 게임은 졌지만, 토토 해서 돈을 땄으니 이겼잖아. 이런 것은 궤변일 뿐 과학은 아니다.
에너지의 방향성은 밸런스 중심으로 판단한다. 살을 빼면 균형이 잡히지만, 살이 찌면 배가 나와서 균형이 어긋난다. 마이너스로는 균형이 되는데 플러스로는 안 된다. 부자가 빈자에게 맞춰야지 빈자에게 부자를 따라오라고 하면 안 된다. 황새가 뱁새에게 맞춰야 한다. 범선의 바닥짐을 버리는 한 방향으로만 계는 조절된다.
사건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분리되고, 분리되면 안과 밖의 경계가 드러난다. 의사결정은 내부에서 일어나고 외부를 지향한다. 나무는 외부를 향해 자란다. 건물은 외부로 층수를 올린다. 생물은 외부로 움직인다. 안에서 밖으로 가고, 중심에서 주변으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머리에서 꼬리로 간다. 운동은 화살표가 된다.
힘이 아름다운 이유는 말을 듣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통제가 가능하다. 말을 안 들을 때는 안 듣는다. 순방향이면 복종하고 역방향이면 거스른다. 방향성의 판단이 중요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일제히 틀어진다. 초반 포석을 잘 닦아 놓으면 중반 전투는 무리가 없다. 무리가 있고 순리가 있다. 일은 순리를 따라야 무리가 복종한다.
계는 울타리를 쳐서 집단을 좁은 곳에 가둔다. 뭐든 가둬놓고 한 방향으로 몰아서 조지는 법이다. 살펴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에 가두는 장치와 조지는 장치가 결합하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가두고 다음 조진다. 가두는 것이 도구의 손잡이라면 조지는 것은 날이다.
도구 = 가두기(손잡이) + 조지기(칼날)
다수를 좁은 곳에 가두면 간섭하고 간섭하면 제한된다. 두 갈래 길 중에서 하나를 차단하면 다른 쪽 길로 몰려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방향의 제한을 통해 힘을 통제한다. 힘은 대칭의 구조에 비대칭의 제한을 걸어서 객체를 통제한다. 수평을 수직으로 바꾼다.
인간이 만든 장치는 역회전을 방지하는 장치가 있어서 바퀴의 대칭을 비대칭으로 만든다. 자전거는 뒷바퀴에 라쳇과 폴이 있고 시계는 탈진기 속에 앵커가 있어서 백래시를 막는다. 자전거든 시계든 뒤로 가면 곤란하다.
힘은 공간의 거리가 시간의 속도로 바뀌는 각운동량 보존이다. 각이 공간의 거리라면 운동은 시간의 속도다. 힘은 거리에서 속도로 모습을 바꾸며 그 역은 없다. 힘의 작용은 한 방향이므로 우리는 적절히 기술을 걸어 객체를 통제한다. 원하는 한 지점에 전체의 힘을 몰아서 쏴줄 수 있다.
힘이 한 방향으로 몰려가며 외력을 흡수하여 눈덩이처럼 점점 커지는 성질이 자연에서는 기세로 나타나고, 시장에서는 이윤으로 나타나고, 사회에서는 권력으로 나타난다. 에너지를 한 지점에 몰아주는 메커니즘이 아군의 핵심이 되고 적군의 급소가 된다.
대표성의 힘
활을 쏜다면 활몸은 강체, 활시위는 유체다. 힘은 강체에서 유체로 간다. 강체가 전체라면 유체는 부분의 합이다. 힘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작용한다. 그 과정에 의사결정 단위가 잘게 쪼개진다. 활이 팽팽하게 당겨지면 텐션이다. 활시위에 걸린 압력은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와 같다. 공간과 시간의 등가원리다.
당겨진 화살은 정지해 있지만 활시위 내부 에너지 파동은 고속으로 회전한다. 활몸의 거리가 파동의 속도로 바뀐다. 지렛대를 젖히면 작용점에 힘이 걸린다. 압력이 걸린다. 속도가 걸리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내부에서 파동이 빠른 속도로 왕복한다.
이 원리를 안다면 대전차고폭탄이 만드는 메탈 제트가 두께 1미터인 전차의 장갑을 뚫는 것이 납득된다. 각운동량 보존에 의해 붙잡힌 금속 분자의 고속회전이 쇠를 물어뜯는다. 전문가도 헷갈렸는지 90년대 육군은 탄약병에게 잘못 가르쳤다. 3천 도의 고열이 쇠를 녹여서 전차에 미세한 구멍을 내고 고열을 전차 내부로 들여보내서 전차를 파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틀렸다. 화약의 폭속인 초속 7킬로가 어디로 안 가고 여전히 그곳에 있다. 각운동량보존이다.
성형작약탄 위력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전문가도 설명하지 않고 그냥 먼로 노이만 효과라고 얼버무린다. 성형작약탄 탄두의 깔때기 모양은 각운동량을 모아줄 뿐이다. 실제로 쇠를 물어뜯는 것은 화약의 폭속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는 점이다. 메탈 제트 유체가 덩어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집단이 1로 행세한다. 전체의 힘을 한 점에 몰아준다.
성형작약탄 효과는 세 가지 원리로 설명된다. 첫째 한 방향 모아주기, 둘째 유체 덩어리 유지, 셋째 쇠 물어뜯기다. 이 세 원리가 합쳐지지 않으면 설사 쇠를 파괴한다 해도 밀려 나오는 쇳밥 때문에 메탈 제트가 전진하지 못한다. 메탈 제트가 쇳밥을 잡아먹고 세력을 키우는 것이다. 적군을 생포하여 자기편 병사로 쓰는 것과 같다.
- 힘은 각운동량 보존이다.
- 힘은 강체를 유체로 바꾼다.
- 힘은 거리를 속도로 바꾼다.
- 힘은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
- 힘은 간섭에 의한 방향성이 있다.
쇠붙이가 자석에 붙는 것은 두 금속의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내부 전자들의 회전속도가 빨라진 것이다. 철 원자는 전자들이 한 방향으로 돌기 때문에 자기장의 파동과 동조화된다. 중력도 규명되지 않았을 뿐 원리는 같다. 중력자든 혹은 미지의 어떤 것이든 파동이 동조화 되어 전체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중력이다. 파동은 유체의 성질이고, 유체는 간섭하고, 간섭하면 밸런스가 얻어지고, 밸런스는 전체를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한 방향으로 모이면 중력이다.
에너지는 열역학으로 해명된다. 열은 분자의 회전속도다. 속도는 유에서 무로 갈 뿐 무에서 유로 가지 않는다. 없음은 있음에 무언가를 전달할 수 없다. 있음에서 없음으로는 전달된다. 있음은 전달할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변화는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면서 그 접힘을 잃는 것이다. 접힘이 압력이다. 압력을 잃는다. 압력은 간섭이다. 차곡차곡 접힌 것이 펼쳐지면서 간섭을 잃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사건은 연결을 잃는다. 질에 있는 것이 입자에 없고, 입자에 있는 것이 힘에 없고, 힘에 있는 것이 운동에 없고, 운동에 있는 것이 량에 없다. 우주는 점점 더 없어져서 최종적으로 완전히 사라진다. 우리가 존재라고 믿는 것은 간섭이며 사건의 진행에 의해 단계적으로 간섭이 사라진다. 간섭을 모두 잃으면 우주는 빅 프리즈가 되어 종말을 맞이한다.
의사결정원리
힘의 원인은 입자다. 입자는 강체다. 힘은 강체를 유체로 바꾼다. 강체는 밸런스다. 힘은 강체의 밸런스가 내부 모순에 의해 언밸런스로 바뀌는 것이다. 에너지는 사건 안에서 5회에 걸쳐 낮은 단위의 밸런스로 옮겨 간다. 질에서 입자로, 힘으로, 운동으로, 량으로 밸런스의 단위를 갈아탄다.
질은 결합한다 - 자원을 균일하게 연결하여 상호작용 계를 이룬다.
입자는 독립한다 - 연결된 자원의 대칭성이 밸런스를 이루면 강체다.
힘은 교섭한다 - 계 내부 모순에 따른 불균일로 밸런스가 깨지면 유체다.
운동은 변화한다 - 유체는 약한 고리를 찾아서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량은 침투한다 - 운동이 외부 대상에 침투하여 소멸하면서 변별된다.
몸통 하나가 강체라면 다리 둘의 집합은 유체다. 의사결정은 큰 것 하나가 작은 것 여럿의 집합으로 바뀌는 것이다. 에너지가 작용할 때 큰 것은 내부모순에 의해 깨진다. 강체는 유체로 깨진다. 깨져서 작아진 자원들이 유체를 이루고 닫힌계에 갇혀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것이 힘이다. 유체는 전체가 한 방향으로 움직이므로 큰 힘을 낸다. 크레인의 유압장치가 대표적이다.
기계장치는 지렛대나 도르래를 이용하여 힘을 한 점에 모을 수 있다. 에너지의 파동을 일으켜 유체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지렛대는 큰 것 하나의 힘을 작은 것 여럿의 파동으로 바꾸어 유체의 성질을 얻는다. 칼로 자르지 못하는 통나무가 톱질에는 쉽게 잘린다. 큰 칼날 하나가 강체라면 작은 톱날 백 개의 집합은 상대적으로 유체다.
지렛대는 공간의 힘을 모으고 도르래는 시간의 힘을 모은다. 거리를 속도로 바꾸는 각운동량 보존이다. 공간의 거리와 시간의 속도는 등가원리로 같다. 거리냐 속도냐, 공간이냐 시간이냐는 관측자와의 관계가 다를 뿐 같다. 인간이 세는 단위가 다를 뿐이다.
딸기잼 병뚜껑이 잘 안 열리는 이유는 힘의 전달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깔때기로 힘을 작용점에 정확히 모아줘야 한다. 힘의 전달을 작은 파동으로 만들어야 한다. 유압장치의 작동원리다. 여기에 등가원리가 적용된다. 지렛대의 힘점을 늘리는 것과 작용점을 좁히는 것은 같다. 뭉툭한 칼로 세게 치는 것과 예리한 칼로 약하게 치는 것은 같다.
질 - 입력
입자 - 받침점
힘 - 힘점
운동 - 작용점
량 - 출력
지렛대는 힘점, 작용점, 받침점이 있다. 구조론은 여기에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을 추가한다. 질은 입력, 입자는 받침점, 힘은 힘점, 운동은 작용점, 량은 출력이다.
우리가 쓰는 도구는 받침점, 힘점, 작용점 셋만 있다. 나머지 둘은 주체와 객체에 있기 때문이다. 농부의 쟁기라면 밭을 가는 사람이 주체, 밭이 객체다. 그러나 저울은 풀 세트가 갖추어져 있다. 저울은 받침대, 중심, 접시, 팔, 자(눈금)로 이루어진다. 각각 입력, 받침점, 힘점, 작용점, 출력을 담당한다. 접시로 눈금을 조절한다.
살펴보면 우주 안의 모든 존재가 저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길바닥에 굴러가는 돌멩이도 외력에 맞서 입력, 받침점, 힘점, 작용점, 출력을 담당하는 부분이 있다. 먼지나 티끌이라도 그러하다. 하나라도 포지션이 없으면 깨지기 때문이다.
세력의 힘
자연의 변화는 자원들이 작아지는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게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다. 작은 게 유리하다. 상대가 강하면 작은 것의 집합에 주어지는 이득으로 맞서야 한다. 그것이 세력의 힘이다. 큰 것은 세력이 없고 작은 것의 집합은 세력이 있다.
강체와 유체의 차이다. 강체는 크고 유체는 작다. 강체는 내부 대칭을 유지하는데, 힘의 일부를 쓰지만, 유체는 백 퍼센트 쓴다. 열이 대표적이다. 열의 힘은 백 퍼센트 전달된다. 강체는 형태가 깨지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힘을 쓸 수 있다.
유체의 이득이 사회의 약자 코스프레로 나타난다. 약자는 작고, 작으면 쪽수가 많고, 쪽수가 많으면 기세가 있다. 기세를 등에 업으려고 약자 행세를 한다. 그러다가 영원히 약자로 주저앉는다. 약자의 이득은 대표성을 얻은 한 명에게만 주어진다. 약자 코스프레 해봤자 보통은 좋을 게 없다. 노자의 이유역강이 많은 사람을 버려놓았다.
노자의 약자 지향은 부정적 사고다. 그러나 약자의 우두머리는 강자다. 노자는 약자의 힘을 설파하여 중국을 약자로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약자의 우두머리가 독점하는 강자의 힘과 헷갈린 것이다.
늑대와 개의 차이다. 늑대는 강하므로 서로를 존중한다. 늑대사회는 개보다 평등하다. 젊은 늑대는 연장자의 지혜를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는 서열에 집착한다. 개는 약하므로 사람을 서열 1위로 간주하고 사람에게 복종한다. 평범한 늑대가 평범한 개보다 낫지만, 두목개보다 못하다. 노자는 두목개의 힘을 발견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어떤 사람이 한국에 왔다면 약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한국까지 오는 비행깃값이 있는 사람은 왕자뿐이다. 아프리카 부족 국가의 왕자가 한국에 유학을 온 것이다.
엔트로피의 법칙과 반대로 점점 커지는 변화도 있지만 착시다. 커지는 것은 결과다. 사건의 분석은 닫힌계가 작동하는 원인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원인 측은 내가 통제하기 때문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 측은 의미 없다. 대부분 우연한 행운을 기대하고 결과 측에 매달린다. 그것은 유전자의 계획에 낚인 것이다. 인간의 결과 집착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늘리는 심리적 장치다.
총을 쏘면 탄창이 빈다. 총은 쏠수록 가벼워진다. 반대로 활을 쏘면 과녁은 화살에 맞아 무거워진다. 원인 측의 총은 갈수록 작아지고 결과 측의 과녁은 갈수록 커진다. 결과 측이 커지려면 작아진 부스러기를 모아주는 그릇이 있어야 하므로 열린계다. 그것은 외부의 도움에 의한 것이므로 논외다. 늙은 별은 결국 부서지지만, 그 부스러기는 중력의 그릇에 다시 모인다. 다시 모이는 것은 별이 자체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므로 논외다. 사건의 닫힌계 안에서 내부 모순에 의한 자발적 변화는 무조건 작아진다. 닫힌계 안에서는 작아지는 방법으로만 밸런스를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찍의 끝은 가늘다. 채찍을 휘두르면 끝단의 굵기가 가늘어진 만큼 각운동량 보존에 의해 가속되어 음속을 돌파한다. 옛날에는 채찍의 소닉붐으로 참새를 쫓았는데 이것을 '때기친다'고 했다. 채찍의 끝단이 가늘어지며 의사결정의 단위가 작아지는 대신 세력이 커진 것이다. 작은 것은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숫자가 없으면 속도가 빨라진다.
진화의 정점에는 세력을 이룬 하이에나 무리, 늑대의 무리, 사자의 무리, 사람의 무리가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쪽수로 무리를 짓고 세력을 이룬 것이다. 사람의 세력이 가장 크다. 개미도 세력이 있지만 지하 세계를 지배할 뿐이다.
진보는 세력 확대다. 시스템이 커지고 팀플레이가 진보한다. 개체는 진보하지 않는다. 3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같다. 집단이 다를 뿐이다. 세포는 5억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세포가 모여 세력을 이루는 시스템이 진화한 것이다.
인간은 뇌가 발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손이 발달한 것이다. 인간은 손을 사용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만큼 팀플레이에 가담하는 자원이 늘어났다. 인간을 구성하는 자원 간의 팀플레이가 진보한 것이다. 뇌의 발달은 거기에 밸런스를 맞춘 것이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뇌를 1퍼센트도 사용하지 못한다. 뇌가 하는 일의 99퍼센트는 인체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것이다. 판단과 의사결정은 뇌 용적과 관련이 없다. 뇌의 발달은 손과 언어의 사용에 의한 시스템의 발달에 따른 부수적 효과다. 본질은 인체를 구성하는 자원 간의 세력의 진보다. 스포츠에 비유하면 개인기가 아니라 팀 전술의 발달이다.
전체주의 체제의 수직적 의사결정 구조는 세력을 담보하는 밸런스 조절장치가 없다. 민주주의 체제의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는 세력이 내부적으로 밸런스를 이루는 장치가 있다. 집단 내부의 밸런스가 더 많은 자원을 의사결정에 동원한다. 민주주의는 더 많은 민중의 자발적인 지혜를 집단의 의사결정에 동원한다.
사건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5단계에 걸쳐 내부 밸런스를 이루는 의사결정 단위가 작아져서 보다 유체화 된다. 유체는 작은 것의 집합이다. 내연기관은 큰 석유 입자 하나를 깨뜨려서 작은 가스 입자 여럿으로 바꾼다. 투수는 큰 신체 동작을 작은 팔꿈치 동작으로 바꾸고 다시 더 작은 손가락 동작으로 바꾸는 방법으로 공을 던진다. 언제나 작게 할 뿐 크게 할 수는 없다.
작은 것은 숫자가 많고, 많은 숫자가 일제히 움직이면 공간의 압박을 받아 자원들이 서로 연결되므로 닫힌계가 된다. 닫힌계 안에서 압박에 의해 간섭되고 간섭되면 제한된다. 제한되면 선택지가 감소하여 법칙대로 간다. 단계적인 제한을 통해 우리는 계를 통제할 수 있다.
세력은 갈수록 커지므로 대표성을 가진 사건의 앞 단계가 그만큼 이득을 보는 것이 권력이다. 자녀가 태어나면 부모가 이득을 본다. 신병이 들어오면 고참은 이득을 본다. 질 1이 입자 2, 입자 1이 힘 2, 힘 1이 운동 2, 운동 1이 량 2를 상대하므로 이득을 본다. 눈덩이처럼 숫자가 불어난다. 기세가 된다.
권력은 집단을 잘게 쪼개서 만들어낸 유체의 힘을 서열 1위가 독식하는 것이다. 늑대는 강자이므로 원탁의 기사처럼 서로 평등하고 두목의 힘이 강하지 않다. 늑대가 강체라면 개는 유체다. 개는 약하므로 두목에게 복종한다. 개는 서열 1위가 힘을 독점한다. 인간은 권력을 쥐기 위해 집단을 유체화 시킨다. 독재자는 집단을 약화한다.
평등힘과 다양힘
우주는 밸런스 복원력 하나로 모두 설명된다. 밸런스의 원상회복이 아니고 보다 낮은 단위의 밸런스로 갈아타므로 변화의 경로가 추적된다. 범인은 보나마나 보다 낮은 단계에 가 있다. 질을 잃은 것은 입자에, 입자를 잃은 것은 힘에, 힘을 잃은 것은 운동에, 운동을 잃은 것은 량에 가 있다.
- 의사결정은 전체 밸런스를 부분의 집합 밸런스로 바꾼다.
- 계에 갇힌 유체는 덩어리가 되어 전체 힘을 한 점에 몰아준다.
- 각운동량 보존은 공간의 거리 힘을 쪼개서 시간의 속도 힘으로 바꾼다.
- 지렛대는 거리를 속도로 바꾸어 작은 한 점에 정확히 전달하므로 강력하다.
- 파동은 시간의 증폭 힘에 따른 제곱 힘을 만들어 인간을 놀라게 한다.
힘은 수평으로 조직되고 수직으로 사용된다. 수평의 밸런스가 힘을 만들고 수직의 축이 그 힘을 사용한다. 진보가 주장하는 평등한 그룹은 힘을 만들고 보수가 주장하는 역할 분담은 힘을 소비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힘을 만들고 다음 소비해야 한다. 진보가 앞서가며 길을 열고 보수가 뒤따르며 실익을 챙긴다. 지식인은 길을 여는 진보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사회의 모든 갈등은 이 순서에 합의하지 못하는 데 따른 것이다. 힘의 조직과 그 힘의 사용은 다르다. 내부를 차별하면 활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그 활은 부러진다. 집단이 역할을 나누지 않으면 그 활을 쏠 수 없다. 원인 측은 평등하고 결과 측은 차별한다. 원인은 내부를 바라보고 결과는 외부를 바라본다. 평등은 내부를 향해야 하고 차별은 외부를 향해야 한다. 내부를 차별하므로 집단이 붕괴하는 것이다. 외부를 차별해보지도 못하고 자멸한다.
소인배는 내부를 외부라고 주장한다. 의사결정 단위를 작게 잡아 보다 유체화 시킨다. 차별하는 사람은 자신을 소인배로 규정하고 그 기준에 맞춘다. 질은 평등하고 량으로 갈수록 차별된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이 차별에 몰두하는 이유다.
이항 대립적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하나의 변화가 진행되는 순서다. 깔때기는 넓은 입구로 에너지를 모으고 좁은 출구로 에너지를 소비한다. 입구의 넓음이 평등이라면 출구의 좁음은 차별이다. 출발점은 평등하고 도달점은 차별한다. 대신 도달점은 열린계가 되므로 외부 환경이 개입하여 다양성이 증대되어 차별에 따른 모순은 희석된다.
출발점에서 평등이 없는 집단은 무너진다. 도달점에서 차별이 없는 집단은 외부의 경쟁자에게 패배한다. 차별하지 않으면 힘을 승부처가 되는 한 지점에 몰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완전 평등이 불가능한 것은 외부의 적 때문이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돌고,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운이 나쁜 사람이 희생된다. 그러므로 절대평등은 절대 없다. 강제적 차별과 자발적 차별이 있을 뿐이다. 합의된 차별과 강요된 차별이 있을 뿐이다.
승리한 팀이 환호받고 패배한 팀이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은 사전에 합의된 자발적 차별이다. 자발적 차별을 만드는 것은 평등이다.
도달점에서 차별만 있고 다양성이 없는 집단은 붕괴한다. 누구도 지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손해를 보도록 결과가 미리 정해져 있다면 게임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 신분사회에서 자신이 낮은 계급에 속한다면 차라리 그 사회를 파괴하는 게 낫다. 출발점에서는 평등하게 입학하고 도달점에서는 차별하여 석차를 내지만 선택과목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자신의 게임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을 고르면 된다.
궁극적으로는 외부의 적을 이겨야 집단 구성원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간다. 인간은 환경을 이기고, 자연을 이기고, 경쟁자를 이겨야 한다. 그러한 변화가 진행되는 동안 평화가 유지되며 사회가 진보를 멈추고 정체하면 차별은 필연적이다. 평화의 해답은 부단히 게임을 갈아타는 것이다. 같은 게임을 반복하면 승부가 미리 정해진다. 결국 재벌이 다 먹는다.
나무의 밑동은 획일적이고 가지 끝은 다양하다. 밑동은 닫힌계고, 가지는 열린계다. 가지 끝에는 외부의 참새와 다람쥐와 나비와 벌이 모여든다. 잎과 꽃과 열매가 풍성하다. 밑동의 원인은 획일적일수록 좋고 가지 끝의 결과는 다양할수록 좋다. 거기에 우리가 찾아야 할 균형이 있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원인 측은 일원의 닫힌계고 결과 측은 다원의 열린계다. 구조론은 내부에 감추어진 사건의 원인 측을 해명한다. 결과측 은 외부에 전시되므로 해명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