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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카네기 13기의 금일도 여행
2009.10.30. 저녁11시경 성남카네기 13기 원우들을 저 멀리 따뜻한 남쪽 나라까지 싣고 갈 관광버스가 정차중인 율동공원주차장에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매월 한 번씩 보는 얼굴들이지만 반가워서 서로악수하고 포옹을 하고 형님들은 아우들의 등을 두드리며 아낌없는 우정을 과시하였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원우들을 기다리다 무료해진 최군섭회장님과 이기형고문님께서 일단 한잔하면서 기다리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먼저 도착해 기다리던 남현식형님의 지휘하에 정민이 친구와 재경이 아우가 어둠을 밝히고 서있는 관광버스의 라이트불빛아래 효구형님께서 미리 준비한 세꼬시와 우럭회무침을 안주삼아 마시는 소주의 감촉은 가을밤 하늘의 차가운 공기와 어우러져 온몸을 전율하게 하였다.
자정이 다되어 갈 무렵 드디어 성남카네기 20번째 원우인 이현우(13기 카네기 임명숙의 남편으로 13기 원우는 19명이나 20번째 원우로 받아주지 않으면 이혼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20번째 원우로 받아줌)의 도착으로 총28명의 원우들과 가족을 태운 관광버스는 파리한 가로수의 잎 사이로 멀리 보이는 은빛색의 달님을 뒤로 한 채 도심을 미끄러져 경부선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어둠을 가르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관광버스 안에서는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과 도회지를 벗어나고 있다는 홀가분함으로 원우들의 목소리는 너나할 것 없이 들떠 있었고, 버스 뒤 좌석에서는 사과박스를 탁자 삼아 그 위에 전어, 우럭, 세꼬시회를 결들인 2차가 시작되고,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는 형수님들과도 한잔씩 하다 보니 어느덧 새벽4시..., 누군가 내일을 위해 한숨 자야지라는 말에 소등을 하고 모두들 잠을 청했다.
잠시 후, 차량의 경적소리에 놀라 잠을 깨어보니 우리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어느 듯 금일도와 마주보고 있는 약산도의 작은 어촌인 당목항에 도착하였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50분, 이른 새벽이지만 작은 통통배를 타고 잔잔한 물살을 가르고 바다로 향하는 촌부들의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코끝을 스쳐오는 비릿한 갯 내음과 해초냄새는 여느 바다가에서 느껴볼 수 없는 상큼함 그 자체였다. 금일도 출신인 임기출형님께서 이른 새벽 낚시 손님들을 위해 가게 문을 연 탓인지 연신 하품을 해대는 아줌마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낚시도구와 갯지렁이를 산 뒤 페리호에 관광버스를 싣고 금일도로 출발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페리호의 2층 선상으로 몰려나와 은쟁반을 깔아 놓은 듯한 편편한 바다 위에 수줍은 처녀 가슴처럼 봉긋봉긋 떠 있는 이름모를 무인도들, 그리고 포도송이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시마양식장과 전복양식장의 수많은 검은 부표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함성을 지르며 우리일행들을 반겨주는 듯하였다. 바다특유의 소금기를 머금은 이른 아침의 싱그러운 바람은 그동안 도심에서만 길들여 있던 우리들 회갈색의 답답한 가슴을 어느새 푸르디푸른 연두색 물감으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조그마한 산등성이너머로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햇님이 회색빛 하늘과 바다 한켠을 선홍빛으로 물들이며 떠올랐고, 우리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바다한가운데서 맞이하는 일출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말았다.
드디어 금일도의 입구인 일정리(항)에 도착하자 산 밑에 비들기 집처럼 담장하나를 경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시골집의 모습이 금방 집성촌임을 알 수 있게 하였으며 선착장너머 밧줄하나에 의존하여 나란히 정렬해있는 작은 어선들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금일도는 너무 평화로워서 평일도(平日島)라고도 부른단다. 우리들은 모두 금일도의 관문인 일정리 선착장에서 기념사진을 한 컷찍은 뒤, 한반도 땅 끝인 해남에서도 바다 길로 약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금일도에서 출생하여 서울까지 진출하여 활동하고 있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출세한 임기출형님의 금일도에 대한 안내를 시작으로 우리들의 숙소가 정해진 화전리로 향하였다.
우리들의 숙소가 정해진 화전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기여객선이 드나든 항구였기 때문에 읍내에 버금갈 정도로 술집과 식당들이 성시를 이루었는데, 지금은 육지와 가까운 일정항으로 항구를 빼앗긴 탓에 술집과 다방들은 거의 없어지고 몇몇 식당과 다방 한 두 개가 남아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숙소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50분, 시장기를 느낀 우리들은 싱싱한 전복으로 미리 끓여 놓은 전복죽을 배가 부르도록 먹고 나니 밤새 음주가무로 피곤할 법도 한데 오히려 힘이 펄펄 솟아남을 느꼈다.
전복죽으로 속 풀이를 한 우리들은 숙소가 있는 곳에서 약 3.5km거리에 있는 명사십리(신지도에도 있지만, 현지 주민들은 모래가 너무 고아 모래를 밟을 때마다 모래우는 소리가 나는 모래사장이 십리에 이른다고 하여 그렇게 부르고 있었음)로 이동하였는데, 어김없이 산 구비를 돌아 산자락이 끝나는 곳이면 옹기종기 마을들이 모여 있고, 마을 옆 전답에는 파란색의 그물망(골프연습장에 둘러쳐져 있는 그런 그물망을 재활용한다 함)들이 한 없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고 의문이 들던차에 임기출형님께서 파란 그물망은 금일도의 특산물이자 자랑거리인 다시마를 건조하기 위해 펼쳐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파란잔디가 전답을 덮고 있는 것 같아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30년전만 해도 금일도는 김과 미역의 주산지였으나 지금은 다시마가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니 그 생산량이 얼마나 많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금일도의 현재 인구는 약 5000명이지만 2~30년전만 해도 이곳은 인구가 2만명이 넘었다는 임기출형님의 말을 듣고, 이 곳 섬 역시 농촌이나 다름없이 문명의 이기를 찾아 도심으로 떠난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으며, 이 작은 섬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금일도가 살기 좋은 섬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섬 한 폭 판을 가로지른 신작로 길을 따라가다 보니 금일읍소재지인 감목리라는 부락이 나오고 부락 산등성이에 금일고등학교가 있고, 그 옆에는 금일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고등학교가 이런 섬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놀랐다. 명사십리로 가는 길의 양쪽 밭에는 노랗게 익어가는 유자들이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풍작이었고, 들판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하였다.
명사십리에 다다를 즈음 월송리라는 부락이 나왔는데, 그 곳은 바다로부터 바람을 막아내기 위해 마을 입구에 해송을 심었는데, 언뜻 보아도 수령이 약 3~400백년은 되어 보였으며, 달이 해송사이에서 놀다간다고 하여 월송리(月松理)라 부른다고 한다. 월송리를 지나자 우리들의 목적지인 명사십리의 고운 모래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야말로 은빛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였다. 금일도의 명사십리는 남쪽에 위치해 있어 비가오고 난 뒤 맑은 날에는 제주도의 한라산이 보일정도이며, 최남단에 위치하다 보니 날씨가 잔잔했음에도 모래사장을 덮쳐 오는 파도의 정도가 상당히 거칠었다. 여름에 해수욕을 하면서 파도타기를 하면 재미가 그만이란다.
우리들은 모래사장에서 청군백군을 나누어 이어달리기, 기마전, 3단 멀리뛰기, 닭싸움, 단체 줄넘기 등을 하면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릴 적의 향수를 마냥 즐겼으며,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와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명사십리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임기출형님이 태어났고, 또 임기출형님의 작은형이 살고 있는 도장리라는 부락으로 가던 길에 임기출형님의 모교인 금일중학교에 들러 그 곳의 실내체육관을 잠깐 빌린 뒤 실내족구와 베드민턴으로 전날의 과음찌꺼기를 땀으로 말끔이 씻어 냈다. 아담한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금일중학교 교정과 실내체육관을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체육선생님의 인자한 모습이 아직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우리들은 금일중학교를 뒤로 하고 임기웅형님이 바다 한가운데 자식새끼처럼 정성을 기울여 키우고 있는 전복양식장으로 가기 위해 도장리 선착장인 납다지로 향하였다. 납다지는 일제시대 때 공물을 모아 거두어 가는 장소라하여 납다지(納多地)라고 하였다고 한다. 납다지로 가는 길에 도장리 앞 바다에 바지선들이 갯벌을 퍼올리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3종항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섬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이 문명의 발달에 따라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찹찹하였다.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들은 전복을 키우고 있는 가두리양식장으로 가기 위해 모여 있는데, 저 멀리 바다쪽에서 조그마한 동력선이 물살을 가르며 선착장으로 다가왔다. 임기웅형님과 형수님이었다.
우리들은 선착장으로부터 약 2km거리에 있는 가두리양식장으로 가기 위해 구명조끼도 없이 약 1.5톤의 작은 어선에 모두 옮겨탔는데, 바다가 잔잔하였음에도 약간 겁이 났으나 바다에서 나고 자란 임기출형이나 임기웅형님의 태연스런 모습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드디어 우리들은 전복을 키우고 있는 가두리양식장에 도착하였고,거기에는 사람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조그마한 쪽방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쪽방 옆 칸에 만들어 놓은 천연화장실(바다물로 바로 통하는)이 잔잔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임기웅형님과 형수님은 전복이 들어 있는 그물 칸에서 4~5년생 전복을 잡아내어 도마에 올려놓고 썰어주었는데, 썰기가 무섭게 우리들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전복 맛은 도회지에서 먹어보는 그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으며, 낚시꾼들로부터 미리 사 놓았다는 5~6kg은 족히 되어 보이는 도미(6섯마리)는 바다의 여왕다운 아름다운자태로 우리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우리들을 위해 광주수협에서 근무하는 임기웅형님의 둘째아들이 금일도까지 내려와 도미회를 떴는데, 회뜨는 솜씨가 일품이었으며 마음씨 좋게 씩 웃어보이던 수줍은 미소는 도회지의 청년과는 달라 보여 지금도 가슴에 남아있다.
전복과 도미회가 널려 있음에도 낚시를 좋아하는 사랑하는 나의 와이프와 막내아들 주홍이, 그리고 기출이 형님, 김경옥, 박희신형님이 낚시 대를 바다에 넣고 난 잠시 후 와이프의 낚시 대에 25Cm정도 되는 감성돔이 잡혔고, 김경옥은 백조기, 박희신형님은 광어와 고등어를 연거푸 낚아냈지만 정작 큰소리를 뻥뻥치던 기출이 형님은 모래무치 2마리를 잡는데 그쳤다.
오후 3시가 넘어서자 기웅이 형님께서 별미를 맛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더니 숯불위에 은박지를 깔고 그 위에 금일도에서 직접 잡은 꺼먹돼지고기와 전복을 썰어 넣어 전복과 돼지고기를 함께 굽자 전복에서 간간한 맛이 빠져나오면서 돼지고기와 함께 어우러진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좋았으며, 별미에 곁들인 소주는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소주와분위기에 취해 있는 우리들에게 임기웅이 형님께서 전어를 직접 잡는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여 작은 쪽배에 전어 잡이 그물을 싣고 도장리 옆 부락 옆 연지리라는 부락 앞까지 이동한 뒤 길이 약 200m, 폭 약1m되는 그물을 바다에 치더니 배에 시동을 걸어 그물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것을 보고 궁금하여 물어보았더니 그물주변에 있는 고기들을 그물 쪽으로 몰아가기 위한 것이란다. 잠시 후 그물을 거두어 올리니 전어와 숭어들이 하얀 비닐을 드러내며 주렁주렁 달려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아~이곳이 천국이구나‘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숭어와 전어를 잡은 우리들은 개선장군처럼 가두리로 돌아와 전어를 회로 썰어 먹고 숯불에 구어도 먹었으며, 숯불에 구운 도미머리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느 듯 시간은 흘러 햇님은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바닷물에 반사된 석양의 노을은 소주기운에 붉어진 우리들의 얼굴과 마음까지 붉게 만들었다.
우리는 저녁 6시에 다시 배를 타고 금일도로 돌아와 우리가 낮에 신나게 놀았던 명사십리에 솔밭 속에 있는 ‘관광나이트’라는 술집에 도착하였는데, 낮에 느꼈던 명사십리와 밤에 느껴보는 명사십리의 밤바다는 너무 달랐다. 잔잔한 바다에 길게 드리어진 산 그림자와 은은하게 번져오는 어촌의 불빛, 그리고 울렁이는 바다에 은비늘처럼 부서지는 아름다운 달님의 자태, 쏴~~아 하고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우리들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하였다.
관광나이트에 도착하자 우리들을 위해 미리 술과 과일안주가 탁자에 보기 좋게 차려있었고, 천정에는 낡은 반짝이 네온싸인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이런 곳이 관광나이트라니...’웃음이 피식나왔다. 잠시 후 우리들은 임기웅형님과 형수님을 함께 모시고 카네기에서 인상 깊게 보고 느꼈던 형제의식을 치르며 다시한번 카네기 13기 원우들의 깊은 우정과 뜨거운 사랑을 확인하였으며, 밴드마스터아저씨의 흥겨운 반주에 맞추어 부른 노래와 춤, 그리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어울렸던 금일도 밤의 뜨거운 열기가 지금까지도 나의 가슴에 남아 있는 듯하다.
우리들은 밤12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으며, 아침에 눈을 뜨니 어제는 은쟁반 같이 잔잔했던 바다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놓고 요동을 치고 있었다. 우리들은 아침을 바다장어탕으로 속풀이를 했는데, 된장을 풀어 푹~끓어 놓은 장어탕 맛은 정말 일품이었으며, 마당 한쪽 밭에서 자란 상추를 띁어 만들어 준 겉절이 역시 정말 맛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이제 금일도 섬여행을 마치고 육지로 나가기 위해 준비를 하였으며, 끝으로 임기웅형님께 작별인사를 하러 도장리로 갔더니 임기웅형님께서 우리들을 유자 밭으로 안내를 하여 유자와 밀감(귤)을 한 자루씩 따서 관광버스에 올랐으며, 관광버스 앞까지 배웅 나온 임기웅형님과 형수님의 마음씨 좋은 미소를 뒤로 하고 페리호를 타기 위해 일정리항으로 향하였다.
우리들은 일정리항에서 페리호에 관광버스를 싣고 다시 육지와 연결된 약산의 당목항으로 향하였다. 페리호에서 멀어져만 가는 금일도, 오는 사람과 가는 사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을 묵묵히 지켜봐 왔던가. 거센 파도에도 굴하지 않고 천년의 무게로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금일도는 또 언젠가 우리들의 낯익은 웃음소리와 함성소리를 기억하고 반겨줄 수 있을까?
육지와 연결된 약산의 당목항에 도착한 우리들은 서둘러 강진으로 향하였다. 모두들 전날 밤에 너무 즐겁게 놀아서인지 쪽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관광버스 기사께서 강진읍 내에 유명한 식당이 있다며 한식당을 추천해주어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남도의 음식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소화도 할 겸해서 인근에 있는 남미륵사불에 들렀더니 2만5천불상까지 모셔져 있는 유명한 사찰이란다.
상경하는 고속도로가 막히자 전주출신인 김경옥이 국도로 빠지자고 한다. 국도로 빠진 우리들은 임기웅형님께서 고속도로에 가면서 안주하라고 삶아준 문어안주가 부족하자 신작로 한쪽에 버스를 세우고 돼지머리고기와 순대를 샀는데, 마음씨 좋게 생긴 아주머니께서 함지박 가득 머리고기와 순대를 담아주는 것을 보고 아직도 시골인심은 살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명불이 밝혀진 버스 안, 각자 돌아가면서 금일도 MT를 하고 느낌점에 대해 발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복 280마리, 소주 200병, 회 42kg, 돼지 한 마리,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술과 음식을 소화시킨 우리 카네기 13기의 원우들의 에너지와 열정은 존경 그 자체였다. 회장님을 필두로 시작한 노래자랑은 어느 세 우리들을 하나로 만들었으며,흥에 겨워 놀다보니 우리가 떠났던 율동공원이란다. 시계를 보니2009. 11.1.23:00., 우리들은 뜨거운 포옹으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둘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카네기13기 금일도 MT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