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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에 나타난 增上慢의
법화경 해석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
최 기 표*
Ⅰ. 서 언
법화경은 대표적 대승경전인만큼 번역서가 매우 많다. 세계 각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고 한글 번역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고 각 번역 사이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눈에 띈다. 단순히 문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기본적인 용어 가운데도 통일된 번역을 보이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물론 번역자간에 서로 다른 견해를 갖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할 때는 왜 그렇게 번역하였는가 하는 근거를 밝혀야 하는데 그것이 이행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번역상 문제가 있거나 애매하게 지나친다고 생각되는 사례가 여러 가지 있지만 간단히 서술할 수
있는 것으로서 ‘人非人’과 ‘움직이는 宮殿’, ‘學無學’ 그리고 ‘非有想非無想’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법화경을 정밀하게 사유하지 않고 속독을 하더라도 이상하다고 느끼게 되는 구절들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鳩摩羅什역의 ꡔ妙法蓮華經ꡕ을 저본으로 하여 竺法護역 ꡔ正法華經ꡕ과 梵本 법화경을 비교하여 보려 한다. 아울러 智顗, 吉藏, 窺基, 戒環
등의 주석과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에서 번역한 ꡔ妙法蓮華經諺解ꡕ, 그리고 현대의 각종 번역 등을 참고하여 살펴볼 것이다. 다만 번역본을 참조함에서, 본 소론은 각 용어의 본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할 뿐 어느 번역본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를 가리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현대의 번역본은 일일이 출전을 밝히지 않으려 한다.
Ⅱ. 人非人의 해석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청중의 일환으로서 「서품」을 비롯하여 여러 품에서 人非人이 나온다.
인비인은 대개 여러 대중들을 거명할 때 天龍八部의 끝에 열거된다. 전형적인 문장으로
“爾時會中 比丘 比丘尼 優婆塞 優婆夷 天 龍 夜叉 乾闥婆 阿修羅 迦樓羅 緊那羅 摩睺羅伽
人非人 …”1)에서 보듯이 비구 등 四部衆과 天龍八部가 열거된 뒤 마지막에 거명되는 존재이다.
이에 대한 한글역으로는 ‘인비인’이라고 그대로 한문을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는 번역과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번역이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쪽은 人非人이라는 하나의 존재로 본 것이고 또 한쪽은 人과 非人
이라는 두 존재로 본 것이다.
1.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는 번역
人非人을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으로 번역하면 그것이 팔부중과 별도로 한 중생의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번역자들이
그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으므로 전거를 찾기 위해 먼저 법화경 해석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天台 智顗(538~597)의 ꡔ法華文句ꡕ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긴나라는 眞陀羅라고도 하는데 번역하면 疑神이라고 한다.
사람처럼 생겼지만 뿔이 하나 있으므로 人非人이라고 부른다.
이 내용은 팔부중 가운데 緊那羅를 설명한 부분이다. 즉 긴나라는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과 유사하게 생겼기 때문에 人非人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智顗보다 시대가
약간 늦은 吉藏(549~623)도 이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설명을 하였고 南宋의
法雲(1088~1158)은 ꡔ번역명의집ꡕ에서 “긴나라는 眞陀羅라고도 표기하며 疑神이라고
번역한다”고 智顗의 ꡔ법화문구ꡕ를 인용한 뒤 구마라집의 설명이라면서 “(긴나라는)
중국말로 人非人이라고 하는데 사람같지만 머리에 뿔이 하나 있어 사람들이 보면
‘사람이냐 아니냐’고 의심하므로 (인비인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고 덧붙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는 번역이 이들의 설명에 따른 것이라면 人非人은 바로 긴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긴나라는 天龍八部를 나열하면서 이미 이름이 나오므로
바로 뒤에 따라나오는 인비인이 긴나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따라서 인비인을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이 설명에 의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는 번역의 근거가 될만한 다른 설명으로서 길장의 또 하나의 설이
있다.
그의 ꡔ法華義疏ꡕ에 따르면 “八部의 鬼와 神은 모두 본래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바꾸어 설법을 듣기 때문에 人非人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八部衆은 사람이 아니지만
부처님 설법을 들을 때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법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人非人이라고 부른다는 의미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인비인이란 팔부중과 별개의 존재는 아니고 천룡팔부를 총칭하는 말로서
엄밀하게 번역하면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것도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고 번역하는 근거로는 마땅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어떠한
설명에 근거를 두더라도 人非人을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비인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대상을 갖는 名詞가 아님은 竺法護의 번역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ꡔ묘법연화경ꡕ에서는 팔부중 뒤에 반드시 인비인이 거명되지만 축법호의
ꡔ正法華經ꡕ을 보면 천룡팔부를 나열하고서도 뒤에 인비인을 덧붙이지 않는 용례를
여럿 찾을 수 있다. ꡔ정법화경ꡕ의 범어 원본은 현재 없지만 한문으로는 팔부중 뒤에
인비인이 없을지라도 범어로는 마후라가 뒤에 인비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축법호는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보고 번역과정에서 뺀 것이 아닐까?
2.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라는 번역
그렇다면 인비인을 人과 非人으로 보아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어떤가?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대개 한문본이 아니라 범어본을 저본으로 한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범문 법화경에서 인비인에 해당하는 말을 찾아보면 ‘manuṣyāmanuṣya’라고 되어 있다.7) 이것은 manuṣya(人)와 amanuṣya(非人)의 병렬복합어(Dvandva)로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라고 번역된다. 이를 한문으로 직역하면 ‘人及非人’ 또는 ‘人與非人’이 될 터인데, 사실 이 번역도 한역 법화경에 여러 차례 나온다. ꡔ묘법연화경ꡕ에는 ‘人及非人’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한 번, ‘人與非人’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두 번 있고ꡔ정법화경ꡕ에는 人非人이라는 표기보다는 人及非人이나 人與非人이라는 표기가 더 많음을 볼 수 있다.
이렇듯 범어본 법화경이나 ꡔ정법화경ꡕ을 본다면 인비인은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이라고 번역하는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것은 팔부중 끝에 거명되는 인비인을 별개의 존재로 본 것이 아니고 앞에 나열된 팔부중을 다시 한번 언급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를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은 조선조 세조 때 刊經都監에서 국역한 언해본 ꡔ묘법연화경ꡕ에서 볼 수 있다. 이 번역본은 宋의 戒環이 풀이한 내용과 明의 一如가 集註한 것을 함께 출판한 것인데, 一如가 모아놓은 細字의 주석 가운데 인비인을 ‘사람과 사람 아닌 것’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人非人에 대해서 “八部 가운데는 사람과 귀신과 축생이 있기 때문에 인비인 등이라는 말로써 전체를 맺은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를 맺은 것[摠結]’이라는 말은 앞에 나열된 천룡팔부의 존재를 다시 한번 언급하여 일단락 짓는다는 의미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해석 또한 문제가 있다. 천룡팔부의 구성을 보면 천․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천과 건달바는 天界에 속하고 용과 가루라(금시조)․긴나라․마후라가는 축생이며 야차는 귀신, 아수라는 아수라도에 속하는 무리이다. 즉 천룡팔부 가운데 ‘사람[人]’은 하나도 없고 모두 ‘사람 아닌 것[非人]’ 뿐인 것이다.
그러면 인비인 가운데 人은 천룡팔부의 앞에 나열되는 비구, 비구니 등 사부대중을 가리키는 것이고 非人은 천룡팔부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사부대중을 비롯한 인간을 나열하지 않은 채 팔부중 혹은 이 가운데 몇 가지만 나열한 뒤 人非人이라고 맺는 사례도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11)
팔부중과는 관계없이 그냥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앞에서 사람이나 非人을 열거한 뒤 다시 人과 非人이라고 거명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고,
또 법화경을 통틀어 人非人이나 人及非人이 천룡팔부와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가 없기 때문이다.
인비인은 팔부중 모두나 이들 가운데 몇몇만 열거한 뒤, 꼭 마후라가 뒤에만 나오고 있다.
3. 天龍八部를 맺는 것이라는 해석
그렇다면 人非人을 무엇이라고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는 사람은 天台 智顗이다.
그는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팔부중의 맨 뒤에 거론되는 人非人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긴나라도 역시 … 人非人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인비인을 緊那羅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八部(衆)의 숫자를 맺어주는 말일뿐이다.
다시 말해서 人非人이란 별도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팔부대중을 매듭짓는 수식어일 따름이라는 설명이다. 法雲 또한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ꡔ번역명의집ꡕ에서 “마후라가는 … 각 경전에서 人非人이라고 [뒤에서 수식]하는 이유에 대해 천태는 ‘팔부의 숫자를 맺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인비인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八部衆 가운데 마후라가의 설명에서 소개하는 이유는, 전술하였듯이 인비인이 반드시 팔부중의 마지막에 거명되는 마후라가의 뒤에 덧붙기 때문이다.
인비인이 팔부중을 매듭짓는 수식어라는 智顗의 말은 그것이 우리말의 ‘… 등’이나 ‘… 따위’에
비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말에서 여러 명사를 나열한 뒤 ‘등’이나 ‘따위’를 붙이면 같은 종류의 것이 열거되었음을 나타낸다. 즉 앞의 명사들이 같은 부류임을 보이면서 말을 매듭짓는 역할을 하는 것이 ‘등’이나 ‘따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天龍夜叉 … 摩睺羅伽人非人”은 우리말로 “천․용․야차 …
마후라가 따위”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八部衆 뒤에 거명되는 人非人을 팔부중과 별개의 존재로 보아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으로 번역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인비인을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경우는 그것이 긴나라를 지칭할 때인데 긴나라는 이미 팔부중을 거명하면서 나왔기 때문이다. 인비인을 人과 非人으로 보아 팔부중을 설명한 것이라고 보는 것도 잘못이다. 팔부대중에는 人이 없기 때문이다. ꡔ정법화경ꡕ 등에서 이를 人及非人이나 人與非人으로 번역한 것은 범어 ‘manuṣyāmanuṣya’를 기계적으로 직역한데서 나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팔부중 뒤에 따라나오는 인비인이라는 말은 智顗의 설명대로 앞의 팔부중이 같은 부류로서 열거되었음을 나타내면서 말을
맺는 기능을 하는 수식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앞에서 소개한 吉藏의 견해를 받아들여, 천룡팔부가 평소에는 非人이지만 설법을 들을 때는 모두 사람의 형상을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부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부언한다면, 언해본 ꡔ묘법연화경ꡕ을 보면 해당 내용의 한문을 현토하면서 “…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후라가인비인과 …”로 하고 있다. 이는 인비인을 ‘사람인 듯 아닌 듯한 것’으로서 별개의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천룡팔부, 혹은 마후라가를 수식하는 말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사람과 사람 아닌 것’으로서 팔부중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인지,
아니면 지의와 같이 단순히 말을 맺는 것으로 이해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Ⅲ. 天神이 대동하고 다니는 ‘宮殿’의 의미
ꡔ묘법연화경ꡕ 「化城喩品」 제7에 보면 한량없는 과거에 계셨던 大通智勝佛에 대한 설법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대통지승불이 10소겁의 수행 끝에 무상정등각을 이루자 救一切라고 이름하는 대범천왕을 필두로 수많은 국토의 범천왕들이 각각 ‘궁전과 함께[與宮殿俱]’ 대통지승불을 찾아와 예배 드리고는 그 궁전을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는 내용이 나온다. 궁전이라면 큰 저택일텐데 이것을 이끌고 온다는 것도 이상하고 공양 올린다는 것도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 궁전은 보석으로 치장한
작은 모형이거나 우리가 생각하는 궁전과는 다른 것이라야 할 것이다.
1. ‘궁전’이라는 번역과 ‘탈것’이라는 번역
「화성유품」의 이 내용은 한문으로는 “諸梵天王 與宮殿俱 … 見大通智勝如來 … 各以宮殿 奉上彼佛 …”14)이라고 되어 있다. 한문 자체가 단음절이 아니고 뚜렷하게 ‘宮殿’이라고 두 음절로 되어있기
때문에 달리 번역할 방도가 없고 우리말에 궁전이 있기 때문에 한글 번역본은 대부분 그대로
‘궁전’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물론 궁전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나 의심의 흔적이 대부분 없다. 이런 문제의식 때문인지 이를 달리 번역한 책도 있다. 즉 ‘탈것’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범어본을 텍스트로 하여 번역한 것이므로 해당 범어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궁전에 해당하는 범어는 ‘vimāna’로서명사로 쓰일 때는 ‘천신의 전차’ ‘자동으로 날아가는 수레’ ‘(7층의) 궁전’ 등의 의미로 쓰인다. 이러한 범어의 의미들을 고려할 때 범천들이 천계에서 공중을
나는 수레를 타고 지상에 내려와서 그것을 부처님께 바쳤다고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우므로 ‘탈것’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번역이라고 수긍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천신들의 탈것이라면 이에 해당하는 한자로 車나, 乘, 輦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구마라집은 왜 굳이 ‘宮殿’이라고 번역하였을까? 그리고 그것을 “타고왔다”고 하지 않고 왜 “함께 왔다”고 표현했을까? 참고로 일본의 이와나미 문고에서 ꡔ묘법연화경ꡕ의 일역과 범어본
법화경의 일역을 양면에 나란히 실어 출판한 ꡔ法華經ꡕ에서는 vimāna를 ‘樓閣’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법화경의 각종 주석서를 찾아보아도 여기서 말하는 宮殿의 뜻이 무엇인지, 또는 궁전이 어떻게 날아다니는지에 대해 설명해 놓은 것을 쉽사리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단 한 군데 宋代의 戒環이 그 이유를 밝혀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천신들은 몸을 따라다니는 궁전이 있기 때문에 ‘궁전과 함께’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전거를 밝혀놓지 않아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ꡔ대지도론ꡕ이나 ꡔ대비바사론ꡕ, ꡔ구사론ꡕ 등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천신들은 자신들이 들어가서 사는 대 저택인 궁전을 신통력으로써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인데 이 궁전을 세존께 바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궁전’이라는 번역의 타당성
이제 이 구절에 나오는 宮殿(vimāna)은 ‘(천신이 사는 저택인) 궁전’과 ‘(천신의) 탈것’이라는 두
가지 번역으로 압축되는데 어느 쪽이 더 타당할까? 필자는 궁전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ꡔ正法華經ꡕ도 이 구절을 똑같이 宮殿이라고 번역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범어와 중국어 모두에 능통한 구라마집과 축법호가 범어 vimāna나, 한문 宮殿의 의미를 잘 몰라서 이렇게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번역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을 타고”라는
동사를 사용하지 않고 “…을 대동하고”라고 표현한 것도 이것이 ‘탈것’이라고 보기 어렵게 만든다.
세 번째로 ꡔ대지도론ꡕ에 보면 “日天子는 중생을 가련히 여겨 七寶宮殿을 대동하고 四天下를
돈다”18)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칠보로 장식된 궁전’이 ‘탈것’을 잘못 번역한 것일 가능성은 희박하고, 궁전을 대동한다고 표현한 것은 법화경과 같은 방식으로 천신들의 신통력으로 궁전이 따라다닌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쉽게 수긍이 가기 때문이다. 현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차피 천신이라는 존재가 일상의 경험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이므로 천신들은 복덕이 많아
궁전과 함께 다닌다고,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하다. 인간 사회에도 자동차에
매달고 다니는 이동식 집이 있고, 날아다니는 저택같은 호화 비행기가 있지 않은가.
다시 정리하면, ꡔ묘법연화경ꡕ과 ꡔ정법화경ꡕ에서 공통으로 쓰고 있는 宮殿이라는 용어는 우리말로도 그대로 사용하는 단어이므로 그냥 궁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궁전이 천신을 따라다닌다는 戒環의 주석을 소개하여 이해를 돕고, 나아가 이 주석이 근거하고 있는 경전이나 논서를
찾아 밝힐 필요가 있다.
Ⅳ. 學無學人의 번역
ꡔ묘법연화경ꡕ 28품 가운데 아홉번째 품은 「授學無學人記品」이다. 이 품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난과 라후라를 필두로 2천 명의 제자들에게 미래세에 성불할 것이라고 수기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품의 제목은 ‘學無學人에게 記를 준다[授]’는 것으로 풀이되는데 이 ‘學無學人’은 일반적으로 學人과 無學人으로 해석된다. 즉 聲聞의 聖人들인 四向四果로 본다면 預流向[수다원향]에서
아라한향까지 4향3과는 ‘배울 것이 있는 지위’라는 의미로서 學位 또는 有學位라 하고,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지위’라는 의미로 無學位라고 하는데 이들 두 부류의
제자들에게 수기를 준다는 풀이인 것이다.
1. ‘無學을 배우는 사람’이라는 戒環의 해석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 달리 學無學人을 ‘無學을 배우는 사람’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앞의 學을 ‘有學人’이라는 명사로 본 것이 아니라 無學을 목적어로 하는 동사로 본 것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좀 억지스러워 보이지만 한문 문법적으로 하자가 없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법화경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치는 戒環이기에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구마라집이 번역한 ꡔ묘법연화경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출판된 경전으로 꼽힌다. 그런데 출판된 법화경의 대부분이 宋나라 계환의 주석에 의거하고 있다.예를 들어 조선조 때 간행된 언해본 ꡔ묘법연화경ꡕ은 계환의 주석에 의거하여 해석과 설명을 하고 있고 거기에 참고용으로 諸師들의 주석을 細字로 싣고있는 것이다. 법화경의 주석은 천태대사 智顗의 것이 가장 유명한데 이를 제쳐두고 계환의 주석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이지만, 어쨋든 계환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계환은 ‘授學無學人記’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것은 小聲聞의 대중에게 수기하는 것이다. 舊說에서는 이를 둘로 나누어 學과 無學[에게 수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無學은 바로 아라한으로서 이미 [오백제자수기품에서] 천이백 명에게 수기하는 대목이 있으므로 여기서 거듭 나열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이 것[學無學]은 무학을 배우는 소성문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無學人이란 아라한을 말하는데 아라한에게는 이미 바로 앞 품인 「오백제자수기품」에서 수기를 주었으므로 이 품에서 다시 거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學無學이란 무학을 배우는 사람, 즉 有學의 단계에 있는 소성문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아난과 라후라는 도의 성취가 다른 제자들에 비해 늦은 것으로 알려졌고, 또 계환의 지적대로 「오백제자수기품」에서 아라한 천이백 명에게 수기하는 내용이 나오므로 「수학무학인기품」은 그들보다 한 단계 낮은 성문들에게 수기한다는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보인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수기는 제3 「비유품」에서 수제자인 사리불에게 처음 주어지고 이어 제6 「수기품」에서 가섭․수보리․가전연․목건련에게, 제8 「오백제자수기품」에서 부루나와 교진여 등에게 주어지는 등 근기가 높은 제자들로부터 낮은 제자들에게 차츰 내려가며 주어졌음을 볼 때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다면 학인과 무학인이라 풀이한 데는 어떤 근거가 있는가?
2. ‘學人과 無學人’을 지지하는 해석들
서두에 ‘일반적으로’ 授學無學人記를 學人과 無學人에게 수기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언급하였다.
어째서 이것이 일반적인가 하면 智顗․吉藏․窺基 등 법화경에 대한 주요 주석가들이 모두 이렇게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길장과 규기(632~682)는 각각 「수학무학인기품」을 해설하는 부분에서 學人과 無學人을 전제로 두 용어의 의미에 대해 풀이하고 있고지의 또한 ꡔ法華文句ꡕ에서 학인과 무학인의 다양한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에 더해 “이 2천명이 혹은 학인이고 혹은 무학인인데 동시에 같은 명호로써 수기를 받으니 별도로 한 품으로 삼은 것”이라며 계위가 다른 성문들이 같이 수기를 받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황증거일 뿐 결정적 근거는 되지 못한다.
學이 명사로도, 동사로도 해석되는 한문의 애매성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가 생긴만큼 이에 해당하는 범어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런데 범어 또한 학인과 무학인으로 해석됨을 볼 수 있다. 梵文 법화경의 해당 품을 찾아보면 “anye ca dve bhikṣu-sahasre sātireke śaikṣāśaikṣāṇāṃ śrāvakāṇām …이라 하여 學無學에 상당하는 범어가 ‘śaikṣāśaikṣa’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學․有學聖人 등으로 번역되는 śaikṣa와 無學․無學位 등으로 번역되는 aśaikṣa의 병렬복합어로서
다수 한역 주석자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學人과 無學人’으로 번역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수학무학인기품」에서 學無學人은 (有)學과 無學의 지위에 있는 聲聞
제자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같다. 하지만 지의나 규기보다 후대인 12세기 초에 활동한 계환이 “舊說에서는 이를 둘로 나누어 學과 無學[에게 수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지만”이라고 옛 해석을 검토한 뒤에 다른 의견을 제출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어느 쪽이나 결정적 근거는 없고 정황증거만 있을 뿐이다. 참고로 ꡔ정법화경ꡕ에서는 학인이나 무학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냥 ‘聲聞 二千人’ 혹은 ‘二千 聲聞’이라고 표기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Ⅴ. 非有想非無想의 해석
ꡔ묘법연화경ꡕ의 18품인 「隨喜功德品」은 법화경을 듣고 환희하여 다른 사람에게 그 내용을 전해주는 공덕을 설하는 품이다. 그 전법의 공덕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하는 과정에서 “六趣四生衆生 卵生胎生濕生化生 若有形無形 有想無想 非有想非無想 無足二足四足多足 …”
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중생들의 세계를 六趣[六道]로 분별하고 그 안에서 사는 중생들을 태어나는
방식, 형체의 유무, 想의 유무, 발[足]의 많고 적음 등에 따라 분류하여 일체 중생을 표현한 것이다. 이 가운데 想의 유무로써 중생들을 분별한 有想無想 非有想非無想이 지금 고찰할 소재이다.
1. ‘非有想과 非無想’이라는 번역의 문제
이 구절 가운데 想에 대해서는 번역본에 따라 ‘생각’이나 ‘의식’ 등으로 번역이 다르지만(주석에 표상작용이라고 설명한 번역도 있다) 그것은 차치하고 1차적으로 비유상비무상을 한 대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두 대상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비유상과 비무상으로 번역하느냐, 아니면 비유상비무상으로 번역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비유상과 비무상을 별도로 보면 想의 유무로 중생을 분별할 때 有想․無想․非有想․非無想의 네 종류로 나뉜다는 것이 된다.
여러 번역본을 살펴보면 상당수가 비유상과 비무상을 별도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생각이 있는 것과 생각이 없는 것과 비유상과 비무상과 …”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뿐 아니라 옛날에도 이런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조에 번역된 언해본 법화경에서는 “有想과 無想과 非有想과 非無想과 …”라고 현토한 뒤에 “샹잇니와 샹업스니와 유샹아니니와 무샹아니니와 …”라고 번역하여 비유상과 비무상을 별도로 해석하고 있다. 범어본도 이와 같은 상황이다. 범본 법화경에서 비유상비무상에 해당하는 구절을 찾아보면 “saṃjñino vā 'saṃjñino vā naivasaṃjñino vā nāsaṃjñino …”라고 중간에 vā를 넣어서 비유상과 비무상을 분리하므로써 이들을 네 부류로
보게끔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런 해석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想이 있음․想이 없음․想이 있지 않음․想이 없지 않음으로 되기 때문이다. 즉 내용적으로 非有想은 無想과 같고 非無想은 有想과 같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 상황이 된다. 非有가 바로 無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ꡔ정법화경ꡕ에 같은 구절이 “不有想不無想”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면 된다. 이조차도 수긍할 수 없다면 무상중생과 별도로 비유상중생이 상정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예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다. 그러면 이 구절을 非有想非無想의 한 대상으로 보는 해석은 어떤 근거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어떤 중생을 지칭하는 것인가?
2. ‘非有想非無想 중생’의 의미
비유상비무상을 하나로 보면 “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想이 없는 것도 아닌 [중생]”으로 번역되며
이렇게 해석한 번역본도 몇 가지 있다. 이렇게 보면 想의 유무로 중생을 분류할 때는 想이 있는
중생과 想이 없는 중생, 그리고 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생 등 세 부류로 나뉘게
된다. 이러한 번역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들을 제시할 수 있다.
「수희공덕품」에서와 같이 형체의 유무, 想의 유무, 발의 많고 적음 등으로 중생들을 분류하여
중생계 전체를 지칭하는 용례는 여러 경전과 논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비유상비무상은
전술하였듯이 ꡔ정법화경ꡕ의 ‘不有想不無想’과 ‘非想非非想’(ꡔ아비달마법온족론ꡕ2), ‘非想非無想’(ꡔ잡아함경ꡕ 882경) 등의 다른 표현이 있다. 이들만으로도 이것이 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ꡔ중아함경ꡕ에 보이는 “猶諸衆生 無足二足 四足多足 色無色 有想無想 乃至非有想非無想”이라는 구절이다.
같은 부류의 여러 대상을 나열할 때 ‘乃至’는 가장 마지막 대상 앞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 용법이므로 비유상비무상 앞에 乃至를 붙인 것은 비유상비무상을 한 대상으로 보았다는 증거이다.
吉藏의 해석도 같은 선상에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ꡔ법화의소ꡕ에서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모든 중생들을] 세 문으로 포섭한 것이 有想과 無想과 非有想非無想”30)이라고 하여 비유상비무상을 한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비유상비무상이란 어떤 상태의 중생을 가리키는가? 이것은 ꡔ대지도론ꡕ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권17에서 四無色定 가운데 비상비비상처정의 의미에 대해 “의식[想]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미세하여 느끼기 어렵기 때문에 非有想非無想이라 한다”31)고 답변하고 있다. 이어서 “無想에는 無想定과 滅盡定과 無想天의 세가지가 있다”32)고 無想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모든 중생들을 想의 유무를 가지고 분별하면, 무상정 혹은 멸진정에 든 중생이나 無想天에 거주하는 중생들은 無想중생에 포함되고, 비상비비상처정에 들거나 비상비비상처에 머무는 중생들은 非有想非無想중생으로 분류되며 나머지 중생들은 有想중생이 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若有形無形’의 形에 대해서는 형체, 형태, 육체 등으로 번역한 것이 있고 언해본에서는 얼굴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ꡔ정법화경ꡕ이나 ꡔ중아함경ꡕ ꡔ잡아함경ꡕ ꡔ대지도론ꡕ ꡔ아비달마법온족론ꡕ 등에서 한결같이 形 대신에 色으로 표현하여 (有)色과 無色으로 기술되고 있음을 볼 때 이것은 色이 있는 중생과 色이 없는 중생을 가리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욕계․색계의 중생[有色]과 무색계의 중생[無色]으로 하는 것이 옳다. 다만 색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는 더욱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소리나 냄새 등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색에 포함되는데 현재 사용하는 말 가운데는 이에 적당한 대응어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종합하여 앞의 “若有形無形 有想無想 非有想非無想”을 번역하면, “形色이 있는 [욕계․색계의] 중생이거나 형색이 없는 [무색계의] 중생이거나, 의식[想]이 있는 중생이거나 의식이 없는 중생이거나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중생”이라고 하면 적당할 것이다.
Ⅵ. 맺는 말
ꡔ묘법연화경ꡕ을 읽는 가운데 해석상 문제가 있는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지적한 것은 소소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번역하든 경전의 대의를 이해하는데는 큰 영향이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사소한 용어라도 문법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충분히 검토를 거치고, 의미가 모호할 때는 관련 경론을 찾아 전거를 마련하는 번역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하기에 여기서 시도해본 것이다.
지금까지 검토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천룡팔부의 끝에 거명되는 人非人은 독자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고 천룡팔부를 맺어주는 말일 뿐이라는 것, 천신이 대동하고 다니는 궁전은 탈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궁전이라는 것이 있었다. 또 學無學人은 ‘無學을 배우는 사람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學人과 無學人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非有想非無想은 비유상과 비무상의 두 부류가 아니라 비유상비무상이라는 한 종류의 중생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볼 텍스트나 견해는 찾기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법화경에 주석을 한 여러 학승들의 견해 가운데도 상이한 것이 적지 않고, 우리나라의 법화경 이해에 근간이 되는 계환의 해석에도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 있음을 보았다. 또한 뛰어난 한문 능력을 바탕으로 정밀하게 이루어진 조선조의 법화경 해석이나, 원문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범어본 법화경에도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수많은 번역이 나와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숙고하여 고칠 부분이 많이 남아있는 경전이라고 할 것이다.
주제어 : 묘법연화경, 법화경, 번역, 해석, 人非人, 宮殿, 學無學, 非有想非無想
Several Problems in translating Lotus Sutra
Choe Gi-pyo
Lotus Sutra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 is one of the much translated Sutras. But it has been having the meaning uncleared or translated with no hard ground. Of them, I'd like to narrow down the four terms such as ren-fei-ren(人非人), gong-dian(宮殿), xue-wu-xue(學無學), fei-you-xiang-fei-wu-xiang(非有想非無想) which has been differently translated among Korean versions.
To assert the meaning of them above, I tried to make comparison of Miao-fa-lian-hua-jing(妙法蓮華經) translated by Kumārajīva, Zheng-fa- lian-hua-jing(正法華經) translated by Dharmarakṣa, and sanskrit-version of Lotus Sutra. And the commentaries of Zhiyi(智顗), Jizang(吉藏), Kuiji(窺基), Jiehuan(戒環) and Myo-beop-yeon-hwa-gyeong-en-hae(妙法蓮華經諺解) worked at gan-gyeong-do-gam(刊經都監) in king Sejo(世祖) of Joseon(朝鮮) period are refered as well. So I can reach the conclusion as follow.
First, the term of ren-fei-ren(人非人) classified in the end of the eight classes of supernatural beings(八部衆) is not translated for the object to be called just as, ‘man and non-man’ or ‘a being resembling but not a human’ but the closing words of the eight classes of supernatural beings as ‘etc’. Second, gong-dian(宮殿) carried by Heavenly beings is understood not as the ‘vehicle’ but ‘palace’. Third, in case of xue-wu-xue(學無學), though translating ‘the man who study Aśaiikṣa(無學)’ it is much reasonable to understand ‘Śaikṣa(有學) and Aśaiikṣa’. And the last, fei-you-xiang-fei-wu-xiang(非有想非無想) is verified ‘the beings with neither thinking nor not-thinking’, far from the two objects of one who has ‘not-thinking’ and who has ‘thin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