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노동자 <1편>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아이스케키 통을 메고 영도다리 쪽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의 뒤에서 '아이스케키' 하고 불렀다. 나는 얼른 그 자리에서 아이스케키 통을 내려놓고 아이스케키 하나를 꺼내면서 나를 부른 아이를 쳐다보았다.
그때 그 아이가 말했다. "어! 너 아이스케키 장사 하나?" 나는 나를 알아보는 상대 앞에서 금방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렸다.
"응" 하는 나의 대답은 무슨 죄를 지었을 때처럼 풀이 죽었다. 그 아이도 나의 그런 태도를 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얼른 아이스케키 값을 내밀었다. 나는 "괜찮아"하고 돈을 받지 않겠다고 손을 내 저었다. 그러나 상대는 억지로 돈을 나에게 주고 가버렸다.
그 아이가 떠나자 비로소 내 자신 속에 있던 과거들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내 앞에서 아이스케키를 사먹던 아이는 고향에 있던 초등학교에서 6년 동안 얼굴을 맞대었던 몇 명 안 되는 동창생중의 한 아이였다.
나는 내 초라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어린 마음에 꼭 어떤 고문을 당할 때의 심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쉽사리 반가운 말들이 나오지 않았고 그 역시 내 마음을 보듯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록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그 해 여름 내내 한 낮에는 영도다리 가까운 곳에 있던 육군병원의 뒤편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해서 아이스케키를 팔았다. 물론 내 옆에는 다른 아이스케키 장사들도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려고 해도 나에게는 또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케키 장사는 여름 한철 외에는 장사가 되지 않았다.
무더위가 꺾이자 나는 또 다른 생각들을 해야만 했다. 자꾸만 내 머리 속에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외로운 일들이 쉽게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때쯤 형이 내가 머물던 친척집으로 찾아왔다. 형은 나를 보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했다. 형의 이야기는 영도에 방을 구해서 형수와 살고 있으니 친척집에 있지 말고 형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형의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형과 형수는 영도의 신선동에 작은 셋방 하나를 얻어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는 조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내가 형의 가족과 함께 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골에서 살고 있던 손위의 누나가 머슴살이를 했던 자형과 함께 형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그래서 우리가 살던 작은 방은 며칠 동안 만원이 되었다.
자형은 부산에서 일자리를 구해보겠다고 했고 그래서 날마다 친척이나 고향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자형은 며칠 후 바다를 매립하는 공사판에서 일자리를 얻은 모양이었다. 자형은 누나를 데리고 형이 살던 이웃에 방 하나를 얻어서 이사를 나갔다.
오랜만에 나는 형과 이웃에 살 게 된 누나의 얼굴을 가까이 에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우리는 누구도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나는 형과 한 집에 살면서부터 형이 입던 옷들을 고치지도 않고 그대로 입고 다녔다. 형이 입던 옷은 나에게는 제대로 맞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네 살짜리 나에게 열 살이나 손위인 형의 옷이 맞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입는 바지는 가랑이를 몇 번이나 접어서 걷어올려야 했고, 바지춤은 너무 커서 헝겊 끈으로 허리에 단단히 매어야 했다.
형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아침에 나가면 한밤중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형은 제대로 생활비를 집에 내어놓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날들을 가족들은 형수가 쑨 강냉이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우리가 먹던 강냉이 죽은 끓는 물에 강냉이 가루를 풀어서 휘저어 만든 희멀건 죽이었다. 그나마 점심을 먹게 되는 날은 드물었기 때문에 그마저도 하루에 두 번만 먹어야 했다. 반찬이란 간장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날마다 형수의 눈치만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든 내 몫을 하려고 했다.
나는 동네의 아이들에게서 수경(水鏡)을 빌렸고, 형수에게는 큰 자루를 한 개 구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혼자서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바닷가로 찾아갔다.
내가 다니던 바닷가에는 제대로 난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깎아지른 바닷가 절벽을 조심스럽게 오르내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맨발바닥에서는 땀이 났고, 신고 있던 고무신은 미끄러워져서 금방이라도 내 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며 공포를 느꼈다.
가을의 바닷가에는 인적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닷물이 들 때와 날 때를 기다렸다가 일을 했다.
바닷물이 들 때는 바위 위에 붙어 있던 돌김을 뜯었고, 바닷물이 빠지면 바위 위에 옷을 벗어두고 벌거벗은 몸으로 물 속에 뛰어들어 다시마, 미역, 고동이나 제법 큰 홍합들을 뜯어서 내 몸에 묶여 있는 자루에 집어 넣었다. 내 몸이 물 속으로 한 번 곤두박질을 할 때마다 손에는 다시마나 미역, 고동이나 홍합이 한 움큼씩 쥐어져 있었다.
내가 처음 물질을 나갔다 온 날, 형수와 누나는 내가 해온 해산물들을 보고 믿어지지가 않는 모양이었다. 형수가 어디서 이런 것을 해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산등성이를 넘어서 바닷가로 내려가면 바다 속에 이런 것이 많다고 말했다. 어떤 날은 내가 해 온 물건들을 형수와 누나가 시장에 내어다 팔기도 했다. 나는 겨울이 될 때까지 혼자서 계속 물질을 다녔다.
겨울이 되자 나는 다시 일거리를 찾아서 거리를 헤매어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새로운 일자리를 발견했다.
내가 본 것은 신문 배달원을 모집한다는 포스터였다. 나는 즉시 배달원을 모집하는 신문사의 사무실을 찾아갔고 신문배달원이 되기 위해서 신문사가 요구한 서류들을 구비하여 제출했다. 그리고 나서 한 달쯤 후, 신문사에서 통보가 왔다.
내가 신문배달원으로 일하게 된 사무실은 동광동의 40계단 위에 있던 건물에 있었다. 내가 신문을 배달해야 하는 구역은 동광동 5가에서 영주동 일대였다. 신문은 새벽 5시쯤 도착했다. 나는 이 시간에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었고, 나는 날마다 새벽 4시에 울리는 통금해제 사이렌 소리가 나면 일어나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밤12시에 울리는 통금 사이렌 소리를 통금해제 사이렌으로 잘못 알고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영도다리 옆에 있는 경찰서의 정문에 서있던 경찰 앞에 불려갔다.
"야! 너 지금 어디 가나?"
하고 묻는 경찰아저씨에게 나의 대답은 항상 같았다.
"신문 돌리러 가요"
경찰아저씨가 다시 물었다.
"지금 몇 신데"
"몰라요. 집에서 사이렌 소리를 듣고 나왔어요."
그때서야 질문을 하던 경찰아저씨도 무엇을 느꼈는지 웃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경찰서의 입구에 있는 나무의자에서 새벽4시가 될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사이렌이 울리면 신문사로 달려갔다. 그런 날은 내가 가장 먼저 신문사에 도착했고 한참이 지나서야 사무실의 문이 열렸다.
한 달이 지나자 기대하던 월급날이 되었다. 그러나 그 월급날에는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문을 배달하고 오후에 월급을 받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나의 구역을 담당하고 있던 배달원 감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던 구독료 영수증 중에서 구독료를 잘 내지 않는 구독자의 영수증 몇 장을 내 월급의 금액만큼 떼어 주면서 나에게 수금을 해서 가져가라고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