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자들에게
본문 성구 : 겔 33:1-9절 말씀 딤후4:12 약4:13-17
유머1. 팔자 좋은 여자
10대 때 : 얼굴이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여자.
20대 때 : 바람 실컷 피우고 시집만 잘 가는 여자.
30대 때 : 남편 잘 만나 덕분에 벤츠 몰고 다니는 여자.
40대 때 : 애들이 재수도 안하고 척척 명문대 붙어주는 복 난 여자.
50대 때 : 쌍꺼풀 수술도 안하고 배도 안 나온 여자.
60대 이후 : 남편이 로또 1등 당첨해놓고 하루 만에 죽어 유산 받은 여자.
유머2. 돈 꿔주면 안 되는 사람
-수학자 : 돈 받으러 가면 돈을 갚기는커녕 갚든 안 갚든 마찬가지라는 점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물리학자 : 수학자가 세운 이론을 실험으로 검증해보고, 이론이 틀렸다는 게 확실하지 않으면 갚지 않는다.
-화학자 : 돈과 성분이 똑같은 물질로 대신 갚을 가능성이 있다.
-생물학자 : 자기가 아니라 복제인간이 돈을 빌렸다고 우긴다.
-천문학자 : 다루는 숫자가 보통 조 단위이다 보니 1억 원과 1원을 똑같이 취급한다.
-통계학자 : 자기 하나 안 갚아도 전체 신용불량자 비율에는 영향이 없다고 생각한다.
유머3. 반말
한 남자가 해수욕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람 살려~사람 살려~! 남자는 가만히 있었다.
사람 살려~사람 살려~! 남자는 못 들은 체 했다.
지나가던 사람이 바다에 사람이 빠진 것을 알고 그 사람을 구해주었다.
“아니...사람이 죽어 가는데 구해주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남자가 하는 말......“저 사람이 반말을 하잖아요!”
유머4. 항아리에 물 붓기
콩쥐가 새 엄마의 명령으로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채워 넣어야 했다.
새엄마와 팥쥐는 파티에 가버리고 콩쥐는 울고 있었다.......
그 때!!!!!!!!!!!!! 두꺼비 한 마리가 와서 “콩쥐야, 파티에 가~!!
내가 물을 대신 채워 줄게~!”"
그래서 콩쥐는 안심하고 파티에 갔다........그런데 갖다 와서 봤더니
항아리에 물이 채워져 있지 않았다!!!!!! 두꺼비가 하는 말.... “깨졌드만”
유머5. 라이스(밥)버거 주세요
우람한 체격의 아저씨가 유리문을 화들짝 열고
들어와 카운터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앞에 서 계시는 아저씨.......
점원 : 주문하시겠습니다, 손님? 아저씨 : 라이스 버거 주세요.
점원 : 손님, 죄송합니다! 지금 라이스 버거가 다 떨어져서 하고 있는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저씨 : 금방 안 돼요?
점원 : 죄송합니다, 손님. 조금 기다리셔야 되거든요.
아저씨 : 아따, 빨리 안 돼요?
점원 : 좀 걸리는데요.이때, 아저씨는 내 골을 때리는 말 한마디!
아저씨 : 왜요? 밥해야 돼요?
한 사람이 홀로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났습니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는데 어느덧 앞은 절벽입니다.
그 상황에서도 절벽 밑에 매달려 있는 칡덩굴을 본 그 사람은 황급히 덩굴을 잡고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호랑이는 아래로 내려오지는 못하지만 절벽 위에 웅크리고 앉은 채 갈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절벽 밑에서는 시커먼 구렁이 한 마리가 또아리를 들고 고개를 쳐들어 이 사람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불운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절벽의 한 구멍 속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각각 한 마리씩 나오더니 칡구덩굴의 중간 부분을 교대로 갉아먹는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된 이 사람 콧등에 갑자기 달콤한 것이 떨어집니다.
그것은 죽은 나무속에 저장된 자연산 꿀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자신이 처한 절대절명의 위기도 잊은 채 떨어지는 꿀방울만을 받아먹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삶이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가는 덧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모든 것을 잊은채 잠시 떨어지는 꿀방울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의 쾌락만을 탐닉한다는 사실을 풍자하는 우리나라의 옛 이야기 입니다.,
물론 여기서 구렁이는 죽음을 나타내며 흰 쥐와 검은 쥐는 교대로 인간의 삶의 날을 갉아먹는 낮과 밤 곧 세월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범죄하여 영원한 멸망을 선고받았으나 그 해결책을 찾기는커녕 순간적인 괘락에 사로 잡혀 잇는 불쌍한 영혼들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선포된 이상 그들은 빠져나갈 길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와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으면서도 자신의 위급한 처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먼저 구원얻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1,그들이 처한 상황을 올바로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위기를 감지하는 동물들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배가 침몰할 위기를 만나거나 혹은
한 지역에 지진의 징후가 나타날 때에는 그 배, 또는 그 지역의 쥐들이 사람마다 훨씬 먼저 알고 도망한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코끼리도 화산 폭발과 같은 재해를 미리 감지하고, 장님인 두더지 조차 자신의 위험을 미리 알아 피신할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에 배해 인간은 어떻습니까? 잠자고 있는 동안 지진이 나서 온 집이 무너져도 알지 못하여 잠든 중에 그냥 죽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 무감각성은 여실히 드러납니다.
노아가 백이십년간이나 방주를 만들며 대홍수를 경고했건만 비가 내려 땅을 덮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들은 어떠했으며 바벨론에 의해 처참히 명망당할 당시의 예루살렘 성의 주민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참으로 한 발 앞도 내다 볼 줄 모르는 어리석고 둔한 자들이 인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분명한 역사적 사실들을 보고 또 듣고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는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렘25:4.7)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은 이미 오래 전에 선포된 말씀이며 또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 복음을 외치며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외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은 아직도 유효합니다.(마 28:18-20),또한 악인에게 경고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가 죄악 중에서 죽었을 때 그 피값을 우리의 손에서 찾으시리라고 하셨던 엄중한 경고(겔33:7-9)
역시 지금도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할 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그들이 현재 처해있는 심각한 위기를 깨우쳐 주어야만 할 것입니다.(딤후4:1-5)
이것이 막다른 골목에 선 영혼을 향한 먼저 구원받은 우리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2, 시급히 생명의 삶으로 돌아서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권유해보면 권유를 받은 사람들 중의 수가 다음에 믿겠다고 말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노방 전도나 축호 전도를 통하여 이러한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일견 다음에 믿겠다는 그들의 말은 아주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보다 는 훨씬 나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 만큼은 내일도, 다음도 용납될 수 없음을 명확히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약 4:13,14). 생각해 보십시오. 정녕 자신의 내일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단언하건대 결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삶을 얻는 것이 해도 되고 하지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라면 모르되, 막다른 , 골목에 놓인 영혼에게 주어진 유일의, 마지막의 선택일진대 어찌 내일이나 다음에 믿겠다는 말을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권면을 항상 기억하며 또한 다음에 믿겠다고 핑계하는 이들에게도 들려주어야 하겠습니다. “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롬 13:11).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고후 6:2). 그렇습니다! 자신의 생사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짜와 시각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다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바로 이 시간에 죽음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촉구하십시오. 과연 그 무엇이 이 일보다 더 시급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3. 기회는 한번 뿐임을 강력히 주지시켜야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눅 16:19-31)를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이 이야기 속의 부자를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생전에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던 그가 죽어서 간 곳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 한 가운데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할 사실은 그는 죽은 후 곧 극심한 고통을 당하였고 그후에는 아무리 애원해도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범죄하여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에 있는 것과 같은 우리 인간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삶을 얻을는지, 혹은 끝내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영원한 멸망에 이를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는 단지 이 세상에 살아있을 그때뿐입니다. 이 한번의 기회를 놓치고 영혼이 그육신을 떠나게 되면 아무리 울며 매달려 애원한다 할지라도 또다른 선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서 어떤 종교가 더 좋을지를 선택해 보겠다고 하는, 참으로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죽었던 사람이 다시 태어날 것을 약속한 사실이 없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라고 단언하여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오직 한번의 생뿐임을 명백히 밝혀줍니다. 그렇다면 이를 아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단지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을 향해 한번뿐인 기회를 놓치기 전에 강력하게 촉구하여 구원의 길을 얻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구원을 얻을 기회도 한번 뿐이요,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 역시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뿐임을 잊지 맙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 사람들은 삶과 죽음, 그것도 영원한 삶과 죽음을 결정지어야만 하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잠시 누릴 즐거움과 쾌락에 빠진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천국이니, 지옥이니, 혹은 영혼이니 하는 말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들도 분명 죄인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성령의 깨우치시으로 말미암아 미리 알고 있는 우리가 해야할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들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하늘의 심판에 대한 분명한 경고의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이 구원을 얻은 성도라 확신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빛을 전해야만 합니다(사 60:1;롬1:14,15;딤후4:1,2). 그러므로 우리는 명심합시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 다음 기회로 미룬다면 그가 이미 죽어 기회를 상실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 우리의 삶이 오늘로서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바로지금, 이번기회에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이에게 생명 얻을 기회를 얻도록 강권합시다 (눅 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