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영화를 감상하고 이흥근
코로나19로 집에서 인천상륙작전 영화를 TV에서 보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된다. 국제연합군 최고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라임 니슨)는 모두의 반대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해군 인사들이 반대했던 성공확률 5000:1에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격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 장군은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작전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 합참참모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
서울 한강둑에선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북한군에게 빼앗겨 남쪽으로 향하는 무질서한 한 국군 철수 병력과 수 천명 피난민들을 지켜본다.
이러한 전세를 역전시키고 북한군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계획을 수립한다. 북한군을 제압할 수있는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서울을 통과하는 북한군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그는 전략적 기동에 의존하려 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되찾고 북한군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서울과 인접한 곳에 상륙해야 한다. 그 장소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인천항구를 선택한다.
‘크로마이트작전’ 인천상륙작전은 역사상 최고의 상륙작전으로 기록된다. 1950년 9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은 미 제10군단 지휘하에 인천항구 해변에 맹공격을 가했다. 미군은 내륙으로 이동해 서울을 수복했고 부산 교두보까지 연결되는 북한군의 병참선도 차단했다. 이와 동시에 미 제8군은 부산 교두보로부터 돌파 를 개시했다. 이러한 맥아더 장군의 훌륭한 군인정신을 바탕으로 한 기습의 일각으로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섬멸할 수 있었다.
상륙작전은 동해에서 미 군함 미주리호로 삼척 근처에서 상륙작전 준비로 오인시 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간주 된 군산에서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 실시하는 등의 기만 작전으로 시작되었다. 9월 4일 상륙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5일, 작전 개시 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단 하나 인천으로 가는 길이 확보되어야 하는 것뿐이다. 맥아더 장군 지시대로 대북 첩보 작전 X-RAY’에 투입된 해군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는 북한군으로 위장 잠입해 인천 내 동태를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인천 방어 사령관 ‘림계진’에 의해 정체가 발각되는 위기에 놓인 가운데 인천 상륙 함대를 유도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에 나선다. 역사를 바꾼 비밀 연합작전의 시작은 바로 그들이었다.
부평 부개도서관에서 섬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에서 영흥도 십리포를 방문해 영흥도 전적비를 보았다. 6.25 전쟁 당시 영흥도 십리포 지역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정보수집 캠프가 설치되어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초석이 되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2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우리나라 전쟁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1950년 9월 13일 청년방위 대원들이 북한군 대대급 병력을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이 전투에서 순국한 해군 영흥지구 전투 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4인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곳에서 우리 해군과 영 흥면 대한청년단의 숭고한 업적을 기린다.
유엔군과 함께 상륙작전을 앞둔 해병대의 결연한 제2보병사단과 제5 해병전투단은 ‘크로마이트’로 명명된 작전의 강습부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인천에서의 작전은 10만 명의 장병들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제2보병사단은 여전히 북한 공격에 대항하여 부산 교두보에서 치열하게 교전 중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제5 해병전투단을 교전 지역에서 철수시키고 제1해병사단 잔류부대와 합류해 공격에 임하게 했다.
작전 일주일 전 맥아더 장군은 여전히 이번 작전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있는 합동 참모부로부터 작전을 포기할 의사를 묻는 내용의 전보를 받았다. 답신으로 나는 이번 작전의 성공률이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번 작전은 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고 적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믿기에 이 번 작전의 성공률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답변했다. 그의 판단력은 정확했다. 작전이 성공할 것이라는 그의 자신감은 투르만 대통령과 합동 참모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인천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있다.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전쟁 최고 사령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 되었다. 6.25 전쟁 때는 UN군 최고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투르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요즈음 아프가니스탄 끔찍한 영상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공짜로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자신이 자유를 지킬 의지가 없는 나라는 누구도 고귀한 생명을 걸고 지켜주지 않는다는 교훈이다.
오늘 영화를 보며 지난 일들을 회상하니 추억이 되살아난다.
이십 대에 직장 상사의 소개로 아내를 만나 동인천 예식장에서 결혼할 때 인근에 있는 자유공원에서 고등학교 3학년 담임 이성일 선생님과 친구들, 아내 친구들과 맥아더 장군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선생님과 만남이 있을 때 사진을 코팅해서 친구들과 선생님을 드리니 좋아하시던 그때 일이 떠올랐다. 그 당시는 몰랐지만, 영화를 보고 생각하니 세계적인 명장인 맥아더 장군이 마치 우리 결혼을 축하하는 주래 같 이, 뒤에서 장엄하게 서 있다. 우리의 결혼이 맥아더 장군으로 인해 오래 기억되고 위대한 전쟁 사연까지 기억하고 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도 인천이다. 자주 만나니 자연적으로 가까워지고 이년 후에 양가 가족이 만나 약혼을 하고 일 년 후에 결혼하였다. 영화를 보니 이번 결혼기념일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을 찾아가 사진을 다시 찍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지난 2023년 5월 문학산책때 자유공원에 위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민족간의 이념적인 대립이 가져온 큰 상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봅니다. 이유불문하고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압도적인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이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회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