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 큰스님께서 갑진년 2024년 새해 들어 불자님들이 새 마음으로 원을 일으키고 대승의 도를 이해하고 실천하기를 바라기에
<법화경> 강설[강의와 해설] 시간을 따로이 마련하시어 2월 14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강의를 하시니..
오늘[2.14, 수]이 두 번째 시간이다.
그런데 사정이 생겨 저녁 8시가 넘어 참석하였을 뿐 아니라 졸음이 쏟아져 스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이 든다.
죄송한 마음으로 이번 시간에 들은 것을 정리해 본다.().
오늘은 <법화경>의 제2. 방편품과 제3. 비유품 내용에 대해 강설하셨다.
1. 방편이란 회삼귀일에서.. 당시 이십여 개 부파의 수행자를 성문승과 벽지불승[연각승] 두 개로 분류하고,
그에 대응하는 대승불자를 보살승이라 하여..
성문승, 벽지불승, 보살승을 3승이라 하고,
<법화경>을 일승이라 하여
앞에 나오는 3승은 모두 일승으로 돌아가니 회삼귀일이라 했다.
처음에 삼승으로 한 이유는..
삼승이라 하여 마치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제자들을 이끈 것은 처음부터 일승을 가르치면 그들이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의 능력에 맞추어 4성제법과 12연기법 그리고 보살행을 각각에게 마치 수행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쳤으나 실은 그것은 방편으로 진실한 골은 4성제와 12연기법을 통해 수행하는 자는 물론
탑과 절을 세우는 불사만 해도, 아이들이 장난 삼아 부처상을 그렸으면 그것이 쌓여 이미 모두가 성불한다는 일승 사상인 것이다.
2. 비유란 회삼귀일에서..
4성제를 수행하는 성문승은 양이 끄는 수레로, 12연기를 수행하는 벽지불승은 사슴이 끄는 수레로, 보살행을 하는 보살승은 소가 끄는 수레에, 그리고 일승은 커다란 하얀 소가 끄는 수레에 비유하고..
불난 집의 장자와 아이들[화택]이란 소재로 회삼귀일 비유를 보여 주셨다.
다만 방편과 비유라 하였지만.. 사실
방편 (지혜)은 곧 진실 (지혜) 이라고 원영스님께서 설명하신다.
방편이 진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더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평소 세존은 소승법과 대승법을 상대 근기에 맞추어 설하셨는데
다른 것처럼 보이는 삼승은 실은
일승법을 향하는 것으로 다른 게 아니다
마치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것처럼
방편은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셋을 다른 것으로만 보고 있다.
모두가 이미 성불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본체[법신]가 성불이란 뜻이다.
만일 근본이 부처가 아니라면.. 부처라는 씨앗이 없더라면 어떻게 부처라는 열매가 생길 수 있겠는가.
우리가 부처가 된다는 것은 우리 속에 부처인 씨앗이 있기에 언젠가 부처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본래 부처이거늘 스스로 부처인 줄 모르고 있는 게 된다.
본래가 부처라는 법신과 그것을 개발하면[보신] 부처가 된다[화신]는 것은..
법신 보신 화신을 설명하는 방편이 된다.().
그러면서 제가 이해한 곳을 밝혀 보겠습니다.().
불보살님의 사무량심인 자비희사는
모든 이를 행복토록 하겠다는 자심,
모든 이의 괴로움과 아픔을 덜어 주려는 비심,
모든 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희심,
모든 이에게 베푼 일에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남으로 부터 받은 피해도 무도 용서한다는 사심을
새삼 새겼습니다.().
제2. 방편품 제3장 2. 를 보면 4성제와 12연기법은 방편으로 진실한 법이 아니라 하시고
4성제 법보다 더 깊고 묘한 법이 있음을 갖오하시니.. 그 자리에 있던 5천명 4부대중이 자리를 떠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떠나는 4부대중을 보며 그들은 오만하고 교만하다고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 바라보면..
서운함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그들은 부처님께 배우러와 4성제와 12연기법을 듣고 새기고 수행으로 실증하려 닦아온 시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그런 가운데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는 부처님 말씀처럼 기쁨을 누리고 있는데..
그것은 방편으로 진실한 지혜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 이상 무엇이 있다는 건지.. 지금까지 노력한 것은 무엇인지..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그 뿐 아니라 스승이신 부처님은 평소 이해로 이끌어 오고 계셨는데 여기서는 권위를 세워 따라오라는 것처럼 말하시니
자리를 뜨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권위로 사람을 이끄는 것은 이웃 종교의 특징일 뿐..
불교는 그런 권위의 종교가 아닌 이해를 매우 중시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아라한이 되었는 지는 누구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다음 생이 없음을 보아 알 수 있는 자력으로 알고 있는데..
<법화경>에서는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고 있습니다. 수기를 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그뿐 아니라 "화택의 비유"를 보면 장자와 그의 아들 2.30 명이 나오는데..
불난 집에서 나온 아들들은 스스로 힘이 아닌 장자가 준비해 논 커다란 흰 소가 끄는 큰 수레를 선물로 받습니다.
자력이라고 알던 불교가 타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저는 궁금합니다.
자리를 떠난 오천 명 제자들은 과연 불교는 자력 종교라는 확신을 얻었는지..
아울러 <법화경>은 타력만 있는 가르침인지..
한번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