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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처는 과연 마음을 연해 생긴 것[심연생]인가?.
<잡. 214. 2법경>에서 12처는 심연생이라고 설하셨는데..
<잡아함경> 속에는 12처를 마음을 연해 생기 것이라는 설법도 있지만..
12처를 세상이 알고 있듯이 6근6경과 같은 존재로 설명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아함경>을 보면.. 12처와 6근경 구별없이..
12처.. 6내처.. 안이비설신의, 6외처.. 색성향미촉법
6근6경.. 6근.. 안이비설신의, 6경.. 색성향미촉법
라고 처나 근경을 사용하지 않고 같은 이름으로 설법되어 있습니다.
석가세존께서는 안처와 색처 또는 안근과 색경 이라고 분명히 구별하지 않고 안과 색으로 설하신 이유는 있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의와 법)인 12처를
6근6경과 다른 마음 연해 생긴 것[심연생]이라 하면.. 그와 같은 설명을 처음 들은 눈푸른 자들은
석가세존은 허황된 주장을 하는 자로 알아,
그의 가르침에 귀를 막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12처는 심연생'이라 하면.. 지금도 그렇듯이 이해하기 너무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러니 이천 오백여 년 전에는 어떻겠습니까?..
그러함에도 근본 불교 시대나 초기 부파불교 시대에는 눈 밝은 제자들은
처와 근경을 분명히 구뱔해서 이해하고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고 스스로 안다[自知 不受後有]" 는 아라한 경지에 이르러도 둘을 구별해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게 되었고..
비씨 2,3 세기 이후 구전으로 전해오던 경을 문자로 기록할 때는 처와 근경을 아예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시대가 된 게 아닌가 합니다.
하여 북방불교의 교과서인 <구사론>이나 남방불교 교과서인 <청정도론>에
12처와 6근6경은 같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게 된 것으로 봅니다.
여기서 궁금한 지점은..
처와 근이나 경을 같은 것이라 하면..
근경이란 말이 있는데.. 왜 세존께서 굳이 처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하셨는지?.. 를 의심하지 않고 있느냐는 겁니다.
하여 <잡. 319경>에 나오는 "일체는 12처" 라는 문장을 보며 "일체는 6근6경"이라 하면 그만인 것을..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불교의 출발은 지금 여기 나입니다.
[지금 여기 나]는 괴로움을 겪고 있는 존재 세계입니다.
이 존재 세계에서 나는 괴로움을 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나는 5온을 존재로 알고 있으니.. 존재로 알고 있는 나를 출발로 삼듯..
존재적인 5온을 설하는 것이 불교의 출발이라는 거지요.
그러기에 근본 불교는 존재 세계에서 법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잡아함경> 시작인 <1. 무상경>에서 5온의 색은 무상하다는 합니다.
이때 색은 존재입니다.
색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생주이멸하는 존재로 무상하다[제행무상]고 들으면 금방 이해할 수 있지요.
이어서 무상하게 존재하는 색은 온통 괴로움이다[일체고] 라고 하십니다.
존재 세계에서 색이란 내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 전부터 있는 괴로움이라면 그것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러기에 당시 우파니샤드나 자이나교는 살아서는 안되고 죽은 후 범아일여나 순수한 지나만 남는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살아있음에도 열반을 성취했다고 하고 있어요.
살아서 일체 고를 멸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색(수상행식) 5온은 온통 괴로움이라 하면..
그런데 어떻게 고를 벗어날 수 있지? 하는 의문이 생겨야 하는 게 아닙니까?^^.
3법인 또는 3특상의 일체고라는 말은..
반어법처럼 일체가 고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벗어나려면 일체고인 존재 세계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제법 무아라는 이어서 나오는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존재 세계의 특징은 존재를 인식하는 자인 자아[아트만]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기에 일체는 주체인 자아와 그 대상인 세계 모두가 됩니다.
마치 내가 빠지면 일체가 없어지는 것처럼 자아가 일체에 포함됩니다.
해서 존재 세계의 키 워드는 나(자아)라는 아트만입니다.
이제 눈치 빠른 이들은 일체가 괴로움인 세계에서 벗어나려면..
나가 없다[무아]는 안아트만의 세계를 떠올리며..
열반을 성취했다는 부처님은 안아트만[무아]을 여기서 깨친 분임을 이해하게 되지요.
중생과 부처는 같은 세계 안에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치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사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습니까?.
요새 영화를 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남나드는 주인공.. 주인공 뿐 아니라 여러 명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사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차원을 넘나들려면 과거의 자기나 현재의 나라는 아트만을 버려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미치던지 아니면 주위 사람들이 미칠 겁니다.
숙명통, 천안통, 누진통 3명을 차례 차례 깨치고 부처님이 되신 석가모니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기뻐할 자아가 없음을 보고 있습니다.
기쁜데.. 기뻐할 자아가 없다..
행복한데.. 행복할 자아가 없다.
존재 세계에 사는 자들을 바라봅니다.
저들은 있다고 여기는 자기[아트만] 안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욕심을 부리고 편안과 자유, 행복을 찾고 있습니다.
차라리 저들이.. 내가 있다고 느끼며 사는 게 더 나은 삶이 아닌지?.
"꽃들에게 희망을" 이란 책 내용은..
주인공 나비 애벌레는 수많은 애벌레들이 걷는 길을 벗어나 나비가 되는 길을 보여주고 있지요.
수많은 애벌레들은 그들은 가는 길이 진리요 생명처럼 여기며 오르고 있지만 그 길은 허망일 뿐이고..
참 진리는 그게 아닌 길이라는 듯..
사회에서 추구하고 요구하고 가르치는 세계..
그 길이 옳은 길이라는 듯.. 인생의 황금기인 청소년기를 초중고등 학창 시절로 보내고 있는 데..
특히 대한민국은 입시 지옥이란 타이틀이 붙어 있듯이
그 시기에 옆에 있는 친구를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만 하는 적처럼 여기며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란 세대가 권력을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금 우리는 그것을 고통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에 고통을 느끼는 자는 힘없는 자이거나 경쟁에서 진 자라며..
"지가 못난 것을 왜 남 탓하는거야" 라고 비난하면서..
비록 지금 여기서 괴로워하든 즐거워하든 젊은이들은 마땅히 진리를 알아야만 할 겁니다.
학교라는 마당은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죠.
그런데 무엇이 옳은 길이고..
무엇이 진리인가요?.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알고 있는 진리는..
보는 것[안근]과 보이는 것[색경]은 독립적인 존재로 두 독립적인 존재가 만나 본다는 일체를 경험한다는 겁니다.
곧 나는 내 눈으로 저기에 있는 이효리를 보고 있다고 안다는 겁니다.
보는 나와 보이는 이효리는 전혀 다른 독립적인 존재로 알면서..
듣고, 느끼고, 아는 기능[의]도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그와 같은 세계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던 석가모니 수행자가 발견한 것은..
볼 때.. 안근이 그대로 작용하는 게 아니라..
안근의 보는 능력을 마음이 가져오고, 색경의 보이는 것을 마음이 가져와 만나는 작용이 일어난다는 발견합니다.().
잠깐,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석가 당시 인도에는 고도의 명상법이 있어서.. 많은 성현들이 출현하고 있었습니다.
명상법 끝에 이르는 수행은 쉽지 않아 평생 수행을 하면서 나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겁니다.
지금 미국 중류층 사회에서는 명상법이 유행처럼 자리하고 있어요.
그들은 그 명상법을 통해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묻지마 총기 사건이라 하여 직접적인 원한이 없음에도 무차별 총격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점점 더 많아 지고 있습니다. 원한이 없다고 하지만 범인은 대상인 사회 전체를 자기 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미 정부는 대처 방법으로 많은 돈을 들여가며 연구를 하도록 하고 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아요.
인간 속에 있는 불만을 조절하는 방법인 명상법을 스스로 닦지 않는 한 어떤 정답도 나오지 않아요.
천안이 있어 인간 개개인 모두를 감시하는 눈이 있고,
그 눈이 본 것을 금방 실천할 수 있는 시스탬이 갖추어진다면? 글쎄요..
지.피.에스를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통한 지.피.에스가 나와도 인간의 마음을 순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왜 이런 말을 길게 하고 있느냐 하면..
존재 세계에서 존재를 그냥 인정하며 명상법을 통해 평화와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말하려는 겁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인도를 예를 들죠.. 석가모니가 나오기 전 인도는 존재 세계만 알면서 살았어요.
석가모니가 나오자 존재 세계가 아닌 법 세계가 있음을 알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일체 괴로움을 멸하려면 도달해야 하는 무아를 깨치지 못하니..
불교에 대한 열의는 식어갔고..
결국 인도에서 불교난 사라지고 맙니다.
그 대신에 존재 세계 명상법이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지요.
미국도 마찬가지구요.
한국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일체 괴로움을 멸할 수 있는 법 세계를 굳이 전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회의는 부처를 이룬 석가모니께서 법 전함을 망설였던 것처럼
현재 진행형이 아닐 수 없어요.
이와같은 분위기 속에 존제 세계를 벗어난 존재 세계가 아닌 새로운 패러다임인 법 세계를 알아보는 겁니다.
존재 세계를 벗어나는 입구는
나와 세계라고 설명하는 독립적인 존재인 6근과 6경이 만나서 작용을 할 때..
마음의 간섭을 통해 새롭게 (안과 색), (이와 성), (비와 향), (설과 미), (신과 촉), (의와 법)인 12처로 변한다는 겁니다.
마음의 간섭은 대상에 욕탐이 없으면 거의 간섭을 하지 않지만..
대상에 욕탐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정도 만큼 왜곡하여 인식하게 됩니다.
인식 작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더 자세히 보도록 합니다.
213. 법경(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을 위하여 두 가지 법을 연설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사유하라.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니라.
이것을 두 가지 법이라 하느니라. 혹 어떤 사문 바라문은 '이것은 둘이 아니다. 사문 구담이 말한 두 가지 법은 둘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대로 말하는 두 가지 법은 그저 말로만 있을 뿐이어서 물어 보아도 알지 못하여 의혹만 더할 것이니, 그것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한다[觸].
접촉을 연해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受]이 생긴다.
緣眼、色,眼識生,
三事和合,緣觸生受,若苦、若樂、不苦不樂
만일 이 느낌의 발생·느낌의 소멸·느낌에 맛들임·느낌의 재앙·느낌에서 벗어남을 사실 그대로 알지 못한다면,
탐욕신(貪欲身)의 접촉을 심고,
진에신(瞋恚身)의 접촉을 심으며,
계취신(戒取身)의 접촉을 심고,
아견신(我見身)의 접촉을 심으며,
또한 모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심어서 자라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하여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모두 발생하게 되느니라.
귀·코·혀·몸도 마찬가지이며, 뜻과 법을 연하여 의식이 생기고,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이 접촉이며...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다시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을 일으키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이 접촉이며,
접촉을 연하여 괴롭거나, 즐겁거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생긴다.
眼縁色生眼識。三事和合觸。觸縁受若苦 若樂不苦不樂
이 모든 느낌의 발생·소멸·맛들임·재앙·벗어남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안다면,
이렇게 안 뒤에는
탐욕신의 접촉을 심지 않고,
진에신의 접촉을 심지 않으며,
계취신의 접촉을 심지 않고,
아견신의 접촉을 심지 않으며,
모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심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모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소멸하면 완전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나니,
귀·코·혀·몸도 마찬가지이며, 뜻과 법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213. 법경>에서 안과 색 등이라 하듯이 12(입)처라고 지칭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기에 법을 6근6경으로 이해하려는 여지가 생깁니다.
그런데 안과 색 등 2법6쌍을 12처로 이해하고.. 12처는 마음을 연해 생긴 것임을 알고 <213경> 전후 경들을 다시 보면..
부처님 설법이 무리가 없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213. 법경> 한역을 보면 연해 일어난다는 연기를 인과 연으로 일어난다는 인연으로 역해 놓고 있어요.
한문 역을 보아도 그냥 연으로 기록해야할 곳에 인연이란 한문이 되어 있어 곤란함을 겪기도 하는 데..
한글 역은 더 한심하게 번역되어 있는거지요.
여기서는 한문 역에 나오듯 인연이 아닌 연으로 바로 잡아 놓았습니다.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언잰가 다시 바르게 한역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안과 색을 연하여 안식을 일으키고, 이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이 접촉이며,
眼縁色生眼識。三事和合觸。
인연(因緣)이라 하려면 '안(眼)이 인(因)이되고 색(色) 연(緣)'이 됩니다.
그런데 마음에 생긴 안과 색은 인이나 인을 조건으로 생긴 연이 아니예요.
생각해 보세요.
망막에 상이 맺혀 있는데..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이 구별될까요?.
아니죠! 그런데 인식되려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있어야만 가능하지 않습니까?.^^.
12연기법을 상기하세요.
마음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무명]
이게 뭐지? [행]하니
그것을 알아보려는 마음인 [식1]이 일어난다.
그 식은 망막에 생긴 상[명색]을 보면서..
상을 보려는 마음[6내입처]가 일어난다.
12연기법의 여기까지 이해가 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작용이 <213. 법경> 내용입니다.
보려는 자인 안입처와 보이는 대상인 색입처가 생기면 보려는 자인 안입처를 생기게 한 마음에
그것을 인식하려는 안식2[과거 경험인 기억]이 일어난다.
하여 안입처와 색입처와 안식2[기억]가 접촉을 일으키니 그것을 3사화합(촉)이라 한다.
내가 앞에 있는 컵을 잡으면 그 느낌이 오지요.
컵을 잡는 건 존재 세계에서 일어나는 행입니다. 그런데
느낌[受]은 위에서 말하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3사화합촉으로 생긴다는 거지요.
싱좌부에서는 12처를 존재로 본다고 했어요.
세존께서 그렇게 설하셨구요.
문제는 존재라면 살아서 멸하는 것은 불가능으로 죽어야만 멸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상좌부에 따르면 수행으로 멸할 수 있는 괴로움이 생긴 인식은 멸할 수 있지만..
괴로움이 생기게 하는 근본 원인인 6근과 6경의 만남을 멸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강물을 마르게 하려면 수원이 되는 지류를 막아야만 하는 데..
지류에 해당하는 6근과 6경의 만남을 막지 못하니..
석가 수행자가 명상법이나 고행을 할 때 수행할 때는 괴로움을 멸한 것 같지만.. 수행에서 깨어나면 다시 괴로움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상좌부에서는 완전한 열반은 몸이 죽어야만 가능하다고 하게 됩니다.
그와같은 주장은 죽은 후 완전한 열반에 들었는지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받게되고..
그 대답은 침묵할 수 밖에 없겠지요.
물론 12처가 마음을 연해 생긴 것이라 것도 문제가 여전히 있어요.
12처가 마음을 연해 생긴 것이므로 수행으로 12처를 멸한 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경에는 12처 멸은 9차제정 수행법에서 마지막 단계인 상수멸정[멸진정]에서 일어난다고 했거든요.
멸진정에 이른 수행자는 부처님 당시에는 기천 명[아라한]이었다고 하는데.. 그 후 점 점 줄어
대중부가 생겨날 때는 없었다는 겁니다.
하여 저처럼 12처가 심연생이라는 것은..
<잡아함경> 안에서 증명하게 되는 겁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12처가 만나면 그것을 알려는 과거의 경험인 6식이 일어나..
안처와 색처와 안식이 접촉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3사화합 또는 3사화합촉이라 하지요.
3사화합 역시 6쌍이 있어.. 18개 법이 있고..
그것을 18계라 하는 겁니다.
그럼 12처의 안처와 18계의 안계는 무엇이 다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