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 crimson이 1969년에 Epitaph(묘비명)이란 노래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했던 것 같다. 나도 젊은 시절 그 노래
를 즐겨 들었다. 그 노래의 핵심은 “ 금이 가고 부서진 길을 기어갈 때, 혼돈이 나의 묘비명이 될 것이다.”(Confusion will be my epitaph, as I crawl a cracked and broken path.)라는 것이다. 이 노래가 자살을 부추기는 노래가 되었다고도 한다.
나는 혼돈이 묘비명이 될 것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혼돈으로 묘비명
을 장식해서는 안 되리라고 본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정립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죽으면 보통의 경우 비석을 세운다. 비석에는 이름, 태어난 날과 죽은 날 그리고 자식들의 이름을 쓴다. 그러나 이름있
는 사람들은 평소 본인의 좌우명이나 하고 싶었던 문구를 쓴다. 한마디로 묘비명을 쓰는데 묘비명은 죽은 사람이 세상에 건내
는 마지막 메시지이다.
여러 사람들의 묘비명을 한 번 살펴 보자.
부처는 ‘태어나는 모든 사물은 덧없으며 결국 죽는다.’
공자는‘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항차 죽음을 어찌 알리요’라고 하며 ‘지는 꽃잎처럼 현자는 그렇게 가는구나’라고 끝맺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괴테는 나에게 ‘더 많은 빛을’,
칸트는 ‘좋다(Es ist Gut.)’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드넓은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무덤 하나 파고 나를 눕게 하소서/ 바다에서 고향 찾은 선원처럼, 산
에서 고향 찾은 사냥꾼처럼."
예이츠의 묘비에는 ‘삶에, 그리고 죽음에 차가운 눈을 던지라/ 마부여 지나가라! (Cast a cold eye, on life, on death. Horse-
man, pass by!’
기행으로 유명한 중광스님은 ‘괜히 왔다 간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성철스님은 ‘내 죄가 수미산보다 높고 크구나. 내가 내 죄를 없애지 못하고 먼저 지옥 간다.’
우리는 얼마나 살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죽은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평가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고,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면 오늘 하루를 의미 없이 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삶은 웰빙이 문제가 아니라, <잘 죽음>이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는 인생인가. 우리는 죽음에 대하여
어떤 준비가 되어 있고 묘비명을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어떻게 죽는 것이 <잘 죽음>인가를 깊이 생각하면
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TIME지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의 한 명인 Elisabeth Kuebler-Ross는 사후(死後) 생명(生命)에 관하여(On life
after death)에서 근사체험(近死體驗)을 경험한(near-death experience) 2만 명을 인터뷰하여 죽음에 대한 정의와 의미를
분석하였다.
죽음의 정의(공통적으로 겪은 것을 토대로 정리)
첫째, 죽음 후에 영혼의 육체이탈 현상을 경험한다.
둘째, 강렬한 빛에 이끌리어 어디론가 끌려간다.
셋째, 자신의 삶이 슬라이드처럼 펼쳐진다. 이것을 보며 희열, 감사, 가슴치는 후회 등 극과 극이 갈리는 현상을 경험한다.
넷째, 꽃밭같이 아름다운 평화롭고 향기로운 곳으로 인도되어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다.
죽음에 대한 정의를 토대로 죽음의 의미를 다음과 분석했다.
첫째, 죽음은 지혜를 배우는 배움의 길이다. 죽음 앞에서 순전한 지혜를 배운다. 멀리 내다 보며 인생을 통달하며 살았는가,
종착지를 향해 푯대를 향해 살아왔는가를 배운다.
둘째, 죽음이란 마지막 성장의 기회이다. 인격, 믿음, 성품, 성장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죽음이 온다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다.
셋째, 죽음이란 마지막 완성의 길이다. 죽을 때가 바로 인격의 완성, 신앙의 완성의 때이다. 임종 때 모습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죽음은 변화와 이동 현상이다. 죽음이란 생명의 또 다른 단계의 변화이며 이동 현상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생
명에 대해 묻고 살아가야 한다.
난 무어라고 내 묘비명을 적을 것인가? 버나드 쇼처럼 ‘이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이럴 줄 알았다.’라고 적을까? 위대한 신학
자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이 자신의 저서 <신국>(The City of God)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종말은 가장 긴 인생도 가장 짧은 인생과 동등하게 만든다.... 죽음은 그 이후 징벌이 있을 때에만 불행이 된다. 그렇
다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죽음이 무엇인가를 묻지 말고, 죽음이 그들을 어디로 데리고 갈 것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죽음의 '정체'가 아니라 죽음의 '방향'(사랑하는 이들이 갔고 또 내가 가야 할)이
아닐까? 이렇듯 죽음 건너편을 생각하고 사는 이들에게 있어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단지 쉼표'(Death is not a period - it's
only a comma.)일 뿐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 앞에선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있는 이곳
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와 시간이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 우리는 나그네이다. 그래서 우리
가 맨 마지막에 가야 할 영원한 고향(본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의 세계, 이 죽음을 넘어서는 본향의 세계를 우리가 믿지 못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만
다. 죽음이란 우리가 집을 떠난 것이 아니라 진짜 집으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소망을 안고 가는가
모두 비우고 가는가
그러나 왜 이미 무엇인가 있었나 착각인가
저는 소망을 안고 가야한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