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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새 소리에 졸고 있던 고택들이 깨어나는데
기억과 추억 사이/발길 닿는 데로 여행
2011-11-08 11:35:02
일시: 2011년 11월 5일(토)
여정: 이사동-봉강정사-비파산성-지프재-놈놈놈 촬영지-강바위산-마경산 -공주말
참석인원: 3명
산새 소리에 고택들이 잠시 깨어나는데
내가 큰 우정을 느낀 것은 어려운 등반을 하는 동안이며
산이 무서운 힘으로 저항해 왔을 때다.
-로베르 파라고-
검은 구름장으로 뒤덮인 하늘이 여차하면 소나기를 쏟아 부울 것 같다. 산행을 갈까 말까 하다가 어차피 계획된 일이라 집을 나섰다. 산행을 하다보면 날이 개일 것이란 희망을 품고 도착한 이사동은 전통가옥들로 즐비하다. 대전의 외곽지역에 위치해있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지역이지만 문화재 지킴이들의 발길은 꾸준하다. 이사동에 전통가옥이 즐비한 이유는 아직도 미개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가옥은 없고 소나무 숲에 뒤덮인 낡고 쇠락한 고택들만 눈에 띈다. 500년 전부터 형성된 은진 송 씨들의 집성촌임을 알려주듯 학당이나 재실 등 고택들을 세운 사람들의 성은 거의가 송 씨들이다.
송유의 4대손인 송세협이 세운 절우당이나 한말의 학자 송병화가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지은 학당인 동강정사, 송준길 부친의 시묘를 위해 지은 재실인 우락재 그리고 송국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지은 학당인 사우당 등이다.
“김옥균 생가지”와 “오도산 격전지” 비석이 서있는 버스 종점에서 보면 고택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마을 뒷산엔 다복이 둘러앉은 은진 송씨들의 묘지도 보인다.
사우당, 1642년 송국택의 학덕을 가리기 위해 문중에서 지은 학당
사우당 앞의 폐우물, 줄이 귾어지고 잔뜩 녹인 쓴 도르레만 걸려있다
잠시 벽에 “한천”이라고 새긴 폐우물 앞에 멈춰 선다. 사우당 앞에 위치한 폐우물은 줄이 끊어지고 녹이 잔뜩 쓴 도로레만 허공에 걸려있다. 한천은 말년에 송성준이 이 동네에 기거하면서 월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약처럼 마시면서 사용했던 우물이다. 도르래 위에는 한천명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거기에 적힌 멋진 시 한 구절이 뼛골시린 한천의 물맛을 느끼게 해준다.
산하출천(山下出泉) / 산 아래 샘이 솟네
감한이심(紺寒而深)/ 검푸르게 차면서도 깊어
표음기락(瓢飮其樂)/ 표주박으로 떠 마시는 이 기쁨을
수월전심(水月傳心)/ 샘에 비친 달에게로 마음 전하네
그야말로 절창이다. “검푸르게 차면서도 깊다”는 말은 그 당시 월봉의 물줄기를 받아 고여 있는 물이 얼마나 차고 서늘한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폐우물이지만 그 당시엔 이 우물이 아녀자들의 쉼터가 되었으리라. 이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아녀자들이 학당의 유생들에게 밥을 해주고 날이 더우면 몰래 우물로 나와 등목을 하며 더위를 식히던 유생들의 모습이 꿈처럼 스쳐 지나간다.
낙락장송으로 뒤덮인 봉강정사
광영지 표지석
철대문이 굳게 닫혀있는 사우당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마을길을 따라 직각으로 쌓은 돌담이 키보다 높아 기와지붕만 보인다. 곧게 뻗어 오른 소나무 숲 아래의 기와지붕은 처마선이 버선코처럼 날렵하게 휘어져 쳐다만 봐도 시원하다.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길을 끼고 계속 오른다. 질주하는 차량들이 무척이나 시끄러운 소음을 낸다.
저수지를 쓸고가는 바람이 봉강정사의 솔숲을 흔드는데
저수지 둑 밑에는 광영지라고 새긴 표지석이 눈에 띈다. 표지석 글씨 밑에는 외무장관이라고만 표시되어 있고 이름은 없다. 전직 장관을 지낸 최덕신의 사상문제 때문인 듯하다. 외무부 장관과 육사 교장을 지낸 최덕신은 좌, 우를 넘나들며 찬양가를 부르다가 월북한 사람이다. 그래서 광영지 표지석은 철거되었다가 다시 세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비파산성에서 내려다본 지프재, 시원하게 도로가 뻗어내린다
광영지 표지석에 원망 섞인 눈길을 보내던 사람들도 저수지 둑에 올라서면 환한 표정이 된다. 지금 광영지는 한창 가을앓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울긋불긋 단풍물을 들인 산자락이 저수지 깊은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황갈색으로 물이 든 둑길의 벚나무들도 하염없이 잎들을 떨어내고 있다. 물결위에 떠도는 잎들을 보면 마치 한 무더기의 꽃잎들이 봄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아늑하다.
시간만 된다면 저수지 둑길에 앉아 낚시줄을 드리우고 유유자적 세월을 낚고 싶다.
골짝과 맞닿은 곳에는 소화동천小華洞天이라는 글귀를 새긴 암각화가 있다고 한다. 소화동천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조선을 그 속국으로 보는 사상이다. 이런 사대주의나 모화사상이 얼마나 국가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었는지는 역사가 잘 말해준다.
그래도 이사동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운 듯하다. 아직도 소화동천이라고 새겨진 암반과 광영지 표지석을 철거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저런 불온한 것들도 역사적인 가치로서 보존하는 것일까. 그러나 난 모르겠다. 희환한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워낙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세상이고 보니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세상이다.
봉강정사, 뒷쪽 좌측에 오적당이 있고 우측에 동로사가 있다
광영지
순간 광영지를 잔잔히 쓸고 가는 바람이 물결위에 곱게 익은 잎들을 떨어뜨린다. 반짝이는 물결이 잎들을 껴않고 잔잔한 파동을 내며 흔들린다. 솔내음도 묻어날린다. 돌계단이 촘촘히 놓여있는 영귀대 위 솔숲에서 날아오는 냄새다. 휘늘어진 솔숲 아래에는 낡고 오래된 고택 하나가 숨어있다. 난곡 송병화가 후학들을 강학하기 위해 고종 22년(1896년)에 세운 봉강정사다. 봉강정사의 좌측에는 난곡의 영정을 모신 오적당이 있고 우측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동로사가 있다.
하늘을 치받으며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군락들이 봉강정사를 더 빼어난 풍경으로 만들어준다. 저수지를 쓸고 가는 바람이 봉강정사의 솔숲을 흔드는 길로 들어선다.
둥치 굵은 소나무가 비스듬히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길이 비파산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길은 산능선으로 이어진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산이 한창 가을앓이를 하며 산객들을 맞아주고 있다. 인적이 없는 산길이 적적했는지 산새들이 해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푸드득 하늘로 날아오른다. 흐린 하늘 아래 졸고 있던 고택들이 잠시 깨어난다.
강바위산에서 전망을 보는 돌까마귀 대장님
쉼없이 가랑잎들을 떨어내고 있는 숲 너머로 이사동의 전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덧없어라, 세월이여, 무너진 비파산성
호젓한 능선 길을 타고 한참 올랐더니 참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찬 비파산성이 나타난다. 소호동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비파산성은 성의 모양이 비파라는 악기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비파산성에서 보면 대전의 변두리 지역이 일망무제 한눈에 들어온다.
비파의 머리처럼 툭 튀어나온 구릉지대에서는 대별동이 보이고 다른 구릉지대에서는 비파치에서 시원하게 뻗어 내린 금동길과 놈놈놈 영화를 촬영한 마경산 자락도 흐릿하게 보인다. 험하고 모진 세월에 비파산성의 석축들은 모두 허물어져 있다. 원형으로 남아있는 곳이라곤 하나도 없다. 일행중 한 명이 비파산성을 복원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길잡이 역활을 하던 돌까마귀 대장님이 안타까운 듯 침을 튀기며 일갈한다.
"산성은 복원하면 안돼요. 보문산성이나 계족산성 그게 어디 산성입니까. 한국산성이지요"
현대적인 기술로 깔끔하게 복원한 산성은 이미 산성으로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다. 흉물스럽게 허물어져 있어도 현장 그대로 나둬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비파산성에서 내려왔더니 지프재라고 하는 비파치가 앞을 막아선다. 오른쪽이 대별동 가는 도로고 왼쪽이 소호동으로 뻗어 내리는 금동길이다. 비파치를 지프재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는 6,25때 윌리엄 딘 소장에 관련된 이야기다. 육군 24사단을 이끄는 딘 소장이 북한군에게 좇겨 후퇴하다가 낭떠러지에서 실족 30여 일 동안 산속을 헤매고 다녔는데 딘 소장이 탔던 지프차가 비파치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은 그 때부터 이곳을 지프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파산성, 석축이 무너져 원형을 찾을 수가 없다
놈놈놈 영화 촬영지, 송강호가 말타는 장면을 찍었다
도로를 가로질러 질척한 산길을 오르면 억새 숲에 묻힌 임도와 만나는데 그 임도가 놈놈놈 영화를 촬영한 촬영지다. 놈놈놈은 좋은 놈, 이상한 놈, 나쁜 놈의 세 명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다. 1930년대 만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영화는 오로지 돈만 아는 세 명의 남자.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분) 마적단 두목 박창이(이병헌), 열차털이범 윤태구(송강호) 등이 열연했는데 바로 이 임도에서 송강호가 말을 타는 장면을 찍었단다. 임도를 따라 억새만 나부끼는 이곳이 영화의 장면에 얼마나 적합한지는 모르지만 송강호 혼자 와서 영화를 찍은 덕분에 이곳이 영화촬영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바위투성이로 이루어진 강바위산도 이 길의 난코스다. 강바위산은 구도동과 소호동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이다. 돌출한 바위와 지형이 험하다 보니 깡을 가지고 올라야 한다. 강바위산에서 보면 대별동과 소호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부턴 산길이 없다. 참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산비탈엔 온통 낙엽뿐이다. 낙엽 깔린 산비탈을 헤치며 앞서가는 돌까 대장은 힘이 펄펄 살아있다.
알미산 아래 알미마을 터를 지난다. 전에는 10여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형성했다지만 지금은 황량하게 집터만 남아있다. 닭이 알을 품는다는 알미산의 지형 때문일까. 비록 찬 기운이 휩쓸고 지나가는 집터지만 그 옛날 따스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구수한 연기처럼 솔솔 피워 오른다. 알미교를 통과하여 도착점인 동구 삼괴동 공주말에 닿는다. 공주말은 공주의 마을이란 뜻이다. 옛날에 공주에서 편입된 지역이지만 아직도 공주라는 지명을 고수하는걸 보면 제 고향을 잊지 못하는 순수함 마음 탓이리라.
이사동에서 공주말까지 5시간 정도 산행을 했더니 맥이 탁 풀린다. 뒤돌아보니 아득하다. 울긋불긋 온산을 물들이는 단풍이 엄두가 나지 않던 발걸음을 끝까지 이끈 것이다.
일시: 2011년 11월 5일(토)
여정: 이사동-봉강정사-비파산성-지프재-놈놈놈 촬영지-강바위산-마경산 -공주말
참석인원: 3명
산새 소리에 고택들이 잠시 깨어나는데
내가 큰 우정을 느낀 것은 어려운 등반을 하는 동안이며
산이 무서운 힘으로 저항해 왔을 때다.
-로베르 파라고-
검은 구름장으로 뒤덮인 하늘이 여차하면 소나기를 쏟아 부울 것 같다. 산행을 갈까 말까 하다가 어차피 계획된 일이라 집을 나섰다. 산행을 하다보면 날이 개일 것이란 희망을 품고 도착한 이사동은 전통가옥들로 즐비하다. 대전의 외곽지역에 위치해있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지역이지만 문화재 지킴이들의 발길은 꾸준하다. 이사동에 전통가옥이 즐비한 이유는 아직도 미개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가옥은 없고 소나무 숲에 뒤덮인 낡고 쇠락한 고택들만 눈에 띈다. 500년 전부터 형성된 은진 송 씨들의 집성촌임을 알려주듯 학당이나 재실 등 고택들을 세운 사람들의 성은 거의가 송 씨들이다.
송유의 4대손인 송세협이 세운 절우당이나 한말의 학자 송병화가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지은 학당인 동강정사, 송준길 부친의 시묘를 위해 지은 재실인 우락재 그리고 송국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지은 학당인 사우당 등이다.
“김옥균 생가지”와 “오도산 격전지” 비석이 서있는 버스 종점에서 보면 고택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마을 뒷산엔 다복이 둘러앉은 은진 송씨들의 묘지도 보인다.
사우당, 1642년 송국택의 학덕을 가리기 위해 문중에서 지은 학당
사우당 앞의 폐우물, 줄이 귾어지고 잔뜩 녹인 쓴 도르레만 걸려있다
잠시 벽에 “한천”이라고 새긴 폐우물 앞에 멈춰 선다. 사우당 앞에 위치한 폐우물은 줄이 끊어지고 녹이 잔뜩 쓴 도로레만 허공에 걸려있다. 한천은 말년에 송성준이 이 동네에 기거하면서 월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약처럼 마시면서 사용했던 우물이다. 도르래 위에는 한천명이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거기에 적힌 멋진 시 한 구절이 뼛골시린 한천의 물맛을 느끼게 해준다.
산하출천(山下出泉) / 산 아래 샘이 솟네
감한이심(紺寒而深)/ 검푸르게 차면서도 깊어
표음기락(瓢飮其樂)/ 표주박으로 떠 마시는 이 기쁨을
수월전심(水月傳心)/ 샘에 비친 달에게로 마음 전하네
그야말로 절창이다. “검푸르게 차면서도 깊다”는 말은 그 당시 월봉의 물줄기를 받아 고여 있는 물이 얼마나 차고 서늘한지를 보여준다. 지금은 폐우물이지만 그 당시엔 이 우물이 아녀자들의 쉼터가 되었으리라. 이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아녀자들이 학당의 유생들에게 밥을 해주고 날이 더우면 몰래 우물로 나와 등목을 하며 더위를 식히던 유생들의 모습이 꿈처럼 스쳐 지나간다.
낙락장송으로 뒤덮인 봉강정사
광영지 표지석
철대문이 굳게 닫혀있는 사우당도 적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마을길을 따라 직각으로 쌓은 돌담이 키보다 높아 기와지붕만 보인다. 곧게 뻗어 오른 소나무 숲 아래의 기와지붕은 처마선이 버선코처럼 날렵하게 휘어져 쳐다만 봐도 시원하다.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길을 끼고 계속 오른다. 질주하는 차량들이 무척이나 시끄러운 소음을 낸다.
저수지를 쓸고가는 바람이 봉강정사의 솔숲을 흔드는데
저수지 둑 밑에는 광영지라고 새긴 표지석이 눈에 띈다. 표지석 글씨 밑에는 외무장관이라고만 표시되어 있고 이름은 없다. 전직 장관을 지낸 최덕신의 사상문제 때문인 듯하다. 외무부 장관과 육사 교장을 지낸 최덕신은 좌, 우를 넘나들며 찬양가를 부르다가 월북한 사람이다. 그래서 광영지 표지석은 철거되었다가 다시 세워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비파산성에서 내려다본 지프재, 시원하게 도로가 뻗어내린다
광영지 표지석에 원망 섞인 눈길을 보내던 사람들도 저수지 둑에 올라서면 환한 표정이 된다. 지금 광영지는 한창 가을앓이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울긋불긋 단풍물을 들인 산자락이 저수지 깊은 물속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황갈색으로 물이 든 둑길의 벚나무들도 하염없이 잎들을 떨어내고 있다. 물결위에 떠도는 잎들을 보면 마치 한 무더기의 꽃잎들이 봄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아늑하다.
시간만 된다면 저수지 둑길에 앉아 낚시줄을 드리우고 유유자적 세월을 낚고 싶다.
골짝과 맞닿은 곳에는 소화동천小華洞天이라는 글귀를 새긴 암각화가 있다고 한다. 소화동천은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조선을 그 속국으로 보는 사상이다. 이런 사대주의나 모화사상이 얼마나 국가의 발전에 장애물이 되었는지는 역사가 잘 말해준다.
그래도 이사동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운 듯하다. 아직도 소화동천이라고 새겨진 암반과 광영지 표지석을 철거하지 않는 것을 보면,
저런 불온한 것들도 역사적인 가치로서 보존하는 것일까. 그러나 난 모르겠다. 희환한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워낙 이해관계에 얽매이는 세상이고 보니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세상이다.
봉강정사, 뒷쪽 좌측에 오적당이 있고 우측에 동로사가 있다
광영지
순간 광영지를 잔잔히 쓸고 가는 바람이 물결위에 곱게 익은 잎들을 떨어뜨린다. 반짝이는 물결이 잎들을 껴않고 잔잔한 파동을 내며 흔들린다. 솔내음도 묻어날린다. 돌계단이 촘촘히 놓여있는 영귀대 위 솔숲에서 날아오는 냄새다. 휘늘어진 솔숲 아래에는 낡고 오래된 고택 하나가 숨어있다. 난곡 송병화가 후학들을 강학하기 위해 고종 22년(1896년)에 세운 봉강정사다. 봉강정사의 좌측에는 난곡의 영정을 모신 오적당이 있고 우측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동로사가 있다.
하늘을 치받으며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군락들이 봉강정사를 더 빼어난 풍경으로 만들어준다. 저수지를 쓸고 가는 바람이 봉강정사의 솔숲을 흔드는 길로 들어선다.
둥치 굵은 소나무가 비스듬히 허리를 구부리고 있는 길이 비파산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길은 산능선으로 이어진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든 산이 한창 가을앓이를 하며 산객들을 맞아주고 있다. 인적이 없는 산길이 적적했는지 산새들이 해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푸드득 하늘로 날아오른다. 흐린 하늘 아래 졸고 있던 고택들이 잠시 깨어난다.
강바위산에서 전망을 보는 돌까마귀 대장님
쉼없이 가랑잎들을 떨어내고 있는 숲 너머로 이사동의 전경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덧없어라, 세월이여, 무너진 비파산성
호젓한 능선 길을 타고 한참 올랐더니 참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찬 비파산성이 나타난다. 소호동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비파산성은 성의 모양이 비파라는 악기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비파산성에서 보면 대전의 변두리 지역이 일망무제 한눈에 들어온다.
비파의 머리처럼 툭 튀어나온 구릉지대에서는 대별동이 보이고 다른 구릉지대에서는 비파치에서 시원하게 뻗어 내린 금동길과 놈놈놈 영화를 촬영한 마경산 자락도 흐릿하게 보인다. 험하고 모진 세월에 비파산성의 석축들은 모두 허물어져 있다. 원형으로 남아있는 곳이라곤 하나도 없다. 일행중 한 명이 비파산성을 복원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길잡이 역활을 하던 돌까마귀 대장님이 안타까운 듯 침을 튀기며 일갈한다.
"산성은 복원하면 안돼요. 보문산성이나 계족산성 그게 어디 산성입니까. 한국산성이지요"
현대적인 기술로 깔끔하게 복원한 산성은 이미 산성으로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다. 흉물스럽게 허물어져 있어도 현장 그대로 나둬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다.
비파산성에서 내려왔더니 지프재라고 하는 비파치가 앞을 막아선다. 오른쪽이 대별동 가는 도로고 왼쪽이 소호동으로 뻗어 내리는 금동길이다. 비파치를 지프재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는 6,25때 윌리엄 딘 소장에 관련된 이야기다. 육군 24사단을 이끄는 딘 소장이 북한군에게 좇겨 후퇴하다가 낭떠러지에서 실족 30여 일 동안 산속을 헤매고 다녔는데 딘 소장이 탔던 지프차가 비파치에서 발견되어 사람들은 그 때부터 이곳을 지프재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파산성, 석축이 무너져 원형을 찾을 수가 없다
놈놈놈 영화 촬영지, 송강호가 말타는 장면을 찍었다
도로를 가로질러 질척한 산길을 오르면 억새 숲에 묻힌 임도와 만나는데 그 임도가 놈놈놈 영화를 촬영한 촬영지다. 놈놈놈은 좋은 놈, 이상한 놈, 나쁜 놈의 세 명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다. 1930년대 만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영화는 오로지 돈만 아는 세 명의 남자.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분) 마적단 두목 박창이(이병헌), 열차털이범 윤태구(송강호) 등이 열연했는데 바로 이 임도에서 송강호가 말을 타는 장면을 찍었단다. 임도를 따라 억새만 나부끼는 이곳이 영화의 장면에 얼마나 적합한지는 모르지만 송강호 혼자 와서 영화를 찍은 덕분에 이곳이 영화촬영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바위투성이로 이루어진 강바위산도 이 길의 난코스다. 강바위산은 구도동과 소호동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는 산이다. 돌출한 바위와 지형이 험하다 보니 깡을 가지고 올라야 한다. 강바위산에서 보면 대별동과 소호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부턴 산길이 없다. 참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산비탈엔 온통 낙엽뿐이다. 낙엽 깔린 산비탈을 헤치며 앞서가는 돌까 대장은 힘이 펄펄 살아있다.
알미산 아래 알미마을 터를 지난다. 전에는 10여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마을을 형성했다지만 지금은 황량하게 집터만 남아있다. 닭이 알을 품는다는 알미산의 지형 때문일까. 비록 찬 기운이 휩쓸고 지나가는 집터지만 그 옛날 따스했던 사람들의 마음이 구수한 연기처럼 솔솔 피워 오른다. 알미교를 통과하여 도착점인 동구 삼괴동 공주말에 닿는다. 공주말은 공주의 마을이란 뜻이다. 옛날에 공주에서 편입된 지역이지만 아직도 공주라는 지명을 고수하는걸 보면 제 고향을 잊지 못하는 순수함 마음 탓이리라.
이사동에서 공주말까지 5시간 정도 산행을 했더니 맥이 탁 풀린다. 뒤돌아보니 아득하다. 울긋불긋 온산을 물들이는 단풍이 엄두가 나지 않던 발걸음을 끝까지 이끈 것이다.
일시: 2011년 11월 5일(토)
여정: 이사동-봉강정사-비파산성-지프재-놈놈놈 촬영지-강바위산-마경산 -공주말
참석인원: 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