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쾌락의 샘이다.그러나 천민도 함께 마시는 곳에서는 모든샘에 독이들었다-
-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부턴가 일요일 오전이면 아해들 데리고 동상동 시장통의 칼국수집을 찾는다.
부자지간의 정감이 오가는 실시간적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붕이 군에 언제가노?
'6월달에요'
5월에 간다 안켔나?
'지원한거 불합격처리 됬어요'
등시짜슥..
기둥이 요즘 공부좀 하나?
'예'
성적좀 올랐나?
'아니요'
와?
'모르겠어요'
등시짜슥...
20대초반 출판사의 수금사원 이란걸 했었다.
소위 전통시절, 정치적으로 홀란스럽던 시절이었지만
희안하게도 사람들은 문화에 목말라했다.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해가며 값비싼 전축이란걸 장만해 음악을 들었으며, 몫돈들여 전집류의 책을 구입해서는 독서씩?이나 하는듯했다.
기억하건데 그시절 많이 팔리던 전집류는 "왕비열전, 명교수의 명강의,무슨 무슨 교수의 에세이집"등등 이었다. 글쎄..그때 그사람들 모두가 몫돈들인 만큼의 댓가를 얻었을까?
참고로 말하자면 그때 출판사의 영리구조는 이랬다.
사기성 줄충한 영업사원이 전집류 한질팔면 자신의 몫이 판매가의 3할 이고, 출판사가 챙기는몫이 3할, 나머지 2할쯤으로 수금사원 급여,관리비쯤으로 할당되니 실질적인 책값은 판매가의 2할쯤 된다보면 된다.지금 생각해보면 참 도둑놈들이다.
대청동 미문화원 뒤쪽에 자리하던 작은 출판사였는데 9시에 출근해서는 그날하루 수금해서 도장을 찍어와야하는 일정량의 전표를 지급받고 회사에서 대여해주는 찌그러진 고물자전거 뒷자리에 사은품(영어교제테잎)을 싣고 각자의 구역을 누비며 돈채취?로 구슬땀을 흘리는것이다(꿀벌처럼)
내가 맡은지역은 동래구였는데 그때의 동래구는 그 범위에있어 지금과는 많이다르다.
지금의 해운대구,금정구 등등이 분할되기전이라 거의 부산시의 반을 차지하는 광역구였던것이다.
그시절은 자전거길이란게 없었다.
한술더떠서 막 지하철공사를 시작할즘이라 온거리는 너덜거리는 복강판으로 뒤덮였고, 구석구석 통제된 길들이 많았던지라 운전자들은 차앞에 걸리적거리는 자전거를 보호 해주고싶은 아량은 고사하고 오히려 두둘겨 패주고 싶을만큼 미워했다.
그렇듯 운전자들의 멸시와 증오를 온몸으로 느끼며 또, 한여름의 살인적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힘겨운 페달을 밟았다.
강렬한 햇살에 눈이부셔 살의를 느꼈다는 까뮈의 뫼르소...나는 처절한 이방인이었다.
열한시쯤되면 허기가졌다.회사서 점심값으로 책정된 돈으론 제대로된 밥을 사먹을수가 없었기에(얼만지는 기억하지못한다)늘 칼국수를 먹었다.
지금 그시장들이 다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시절엔 동마다 시장이 있었다.
양정,거제,초읍,동래,사직,수영,산저,오시개...특별한 맛은 기억하지 못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는데 맛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보다는 포만감이 중요했다.
칼국수집 아주머니들은 땀에절은 젊은이라 기특하기도하고 애처롭기도 했을터, 듬븍 담아주시는 칼국수에서 따숩은 정을 느꼈고 미어터지는 포만감을 느꼈다.
해병대 출신이라는 출판사 사장님은 멋쟁이였다.늘 깔끔한 양복차림에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있었다.
30대 중반쯤 되보이는그는 메너도 참 좋아보였다.
어린아이처럼 보일법도한 나에게도 김경렬씨라며 깍듯한 존칭을 썼으며, 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셨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듯했지만, 그 자신감이 결코 도를 넘는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존경스러운 분이셨다.
언젠가 소나기 심하게 내리던날,
전날마신 술이 심하게 부데끼기에 하루 쉬어버렸고, 다음날 출근했더니 메너좋으신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김경렬씨는 날좋으면 출근하고 날궂으면 쉬고... 니 꼴리는대로하나?"
그길로 관뒀다.
뒤에 자투리 급여를 받았는지 어쨌는지는 기억하지못한다.
한 두달반? 점심을 칼국수로 때우던 시절이 있었기에 칼국수에 물릴만도 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뒤로도 칼국수 마다한적이없었고 50이넘은 지금도 아해들을 데리고 칼국수 먹으러 다니는것이다.
아마도 난 칼국수빨 무지 잘받는 밥통을 타고났나보다.
근래에 재래시장을 깔끔하게 재정비해서는 대형마트에 빼앗긴 고객들 발길 되돌려보자는 취지의 새시장?운동이 가열차게 벌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동상동 시장도 한곳에 작은 터를 잡고, 들죽날죽 흩어져있던 칼국수집을 한곳으로 모았으니 이곳이 동상동시장 칼국수 타운이다.
얼핏 눈대중으로 보기에 서너평 남짓한 칸간의 점포들이 도합 아홉칸이라, 나는 늘 9호점을 찾는다.
정에약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찾은집을 단골이라 여기고 한번 단골로정하면 좀처럼 바꾸지않는다.
하지만 난 좀 달랐나보다.
어느날 9호점 찾았더니 할머니가 보이지않기에 한 십분쯤기다렸나?참기힘들었다.
옆집 예쁜아줌마 집에 가마솥은 김이 모락 모락 피어나고 있었고 청량고추 다대기 한대접 수북했으며 행주질이 깔끔한 느낌이었다.
9호점의 뻘쭘해하며 미련떨고있는 군상들을 뒤로하고 8호점가서 맛나게 먹고왔다.
이젠 8호점이 단골이다 싶었는데 담주에 가보니 8호점 아주머니가 안보인다.
어쩔수없이 9호점서 맛나게 먹고왔다.
이젠 다시 9호점이 단골이다 싶었는데 요번주는 아해들이 칼국수 물린다며 항아리 수재비 먹으러 가잔다.
세상 참 변했다.
몇주정도 일요일하루 칼국수 먹는데도 아이들은 금방 실증을 느낀다.
우리 모두가 절대빈곤의 분기점을 넘은지가 몇해나 됐나?
기억 해보면 그리 멀지않은 과거다.
사람들은 이제 매사에 까탈스럽기 그지없다.
벌레먹어 구멍 숭숭뚧힌 유기농체소로 웰빙 식단 만들고,
대기가 미덥지 못하다며 공기청정기로 걸러낸 기체 마시고,
수돗물 더럽다며 기원전 생성됬다는 로키산맥 만년설 녹인 생수마시고...
좀 더우면 에어컨 틀고, 밖에 나갔다오면 손에묻은 병균을 전문적으로 죽인다는 뭔 세제로 씻고...
지랄들을 하고 오도방정을 떤다.
그러면서도 아해들은 약해빠져서 수시로 감기에 걸리며 잔병치레를 해댄다.
요즘 왠지 자꾸 이런생각이든다.
물질이 풍요로워 질수록 인간의 성향은 까다로워지고 또,
까다로워 지는만큼 약해진다는거...
왠지나는 요즘의 세태가 낮설고 미덥지못하다.
언젠가 수입쇠고기 반대운동이 전국민 운동으로 확산된적이 있었다.
그때는 수입쇠고기 반대운동 안하면 수구꼴통 취급받고 무식쟁이 취급받던 사회적 분위기였고,
심지어 어느 젊은 예편내들은 유모차에 애기를 들이밀며 전경들과 대치하기도했다.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뿌듯한 표정이었다. 과연 자기 속으로난 애기들 이었을까?
그러고는 몇해됐나 근래에는 수입쇠고기 전문집이 미어터진다.
얼핏 보기에도 수입쇠고기 못먹어 환장한 군상들이다.
분명 그틈에 유모차 들이밀며 대모하던 젊은 예편내도 끼어있으리라 장담한다.
인권? 당연히 존중 되야한다.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까탈스런 심사를 무슨수로 일일이 존중하며 다독일것인가.
이제 한번쯤 되돌아보며 쓸때없는 까탈을 정리하며 줄여보자.
내 입맛이 지나치게 까탈스러워진건 아닌지,
내새끼 유난떨며 카탈스럽게 키우고 있는건 아닌지,
공영을위한 작은 불이익에 지나치게 민감한 까탈을 부리고 있는건 아닌지...
이쯤하면 수구꼴통의 표본인가?
천만에 말씀,난 수구의 자세로 지킬것이 조또 없는사람이다.
내가 수구꼴통일 이유는 전혀없다.
근래 유행하는말 있드만.
"나는 수구파도, 진보파도 아니다.굳이 분류를 하자면 기분파다"
2010, 봄, 경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