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4. 30
지난 4월 20일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날은 복싱 지도자 생활 30년에 종지부를 찍는 날임과 동시에 새로운 30년이 눈앞에 펼쳐진 뜻 깊은 날이기 때문이다. 30년 세월을 함께한 문성길은 나에겐 포장마차 같은 편안한 존재다. 미당 서정주는 자신을 키운건 8할이 바람이라 했듯이 나에게 문성길은 미당의 바람같은 존재다. 이날을 축하해 주기라도 하듯이 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백인철 선배가 오랜만에 내가 근무하는 둔촌동 체육관 근처에 와서 만났다. 50전 47승 43KO승 3패를 기록한 그는 국내 프로복서 중 데뷔 전부터 26 연속 KO퍼레이드를 펼쳐 기네스북에 등재된 국내 유일한 복서다.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그도 어느 덧 내년이면 환갑을 맞이한다. 마침 국가대표 상비군을 출신의 이번 주 복싱비화의 주인공 윤병호와 그의 대학 2년 후배이자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조인주,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플라이급 금메달리스트이자 현 서울시체육회 경기운영부장인 이창환이 차례로 합류해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 WBC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조인주.윤병호, 문성길(왼쪽부터) / 조영섭 관장
윤병호는 고교 2년 선배이자 1985년 월드컵대회 우승자인 오광수(한국체대)가 백인철의 고향후배란 연결고리 때문인지 화목한 분위기 속에 함께 자리를 했다. 그는 아마추어 시절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하지만 불의의 부상으로 복싱을 접었다. 윤병호는 1967년 광주출신이다. 그 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한 원년이다. 월남 파병 특수효과와 맞물려 경제발전에 탄력이 붙으면서 삶에 지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문주란의 돌지않는 풍차, 한명숙의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란 곡들이 공전의 히트를 쳤던 해였다. 작고한 부친께서 합기도계에서 명망있는 거물급 인사였던 관계로 유년시절부터 무술을 연마하여 합기도 공인 4단을 보유한 윤병호는 1981년 11월 중학교 2학년때 광주체육관에 입관하여 복싱을 수련했다. 광주체육관은 대한민국 사설 체육관 중에서 가장 많은 스타복서를 배출한 명문체육관이다. 이재화 관장 휘하에 김광민, 김광수, 김광섭 3형제 복서를 비롯 유옥균, 김동길, 박기철, 이현주, 이남의, 진행범, 김종섭, 정동한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톱복서들이 출현한 대한민국 최고 명문체육관이었다.
▲ WBA 슈퍼미들급 챔피온 백인철과 윤병호 / 조영섭 관장
이러한 이재화 관장의 체계적인 지도를 받은 지 불과 2개월만에 소년체전 전남대표로 발탁된 윤병호는 본선에서 42㎏ 모스키토급으로 출전, 차돌같은 단단한 체구에서 내뿜은 강타와 강철체력을 주무기로 결승에 진출했다. 열띤 타격전 끝에 충남대표 신우영에 고배를 마셨지만 장래성을 인정받았다. 내가 윤병호 경기를 직관한 것은 1983년10월 제64회 인천 전국체전 때였다. 당시 나는 당시 LF급 전북대표로 출전했었다. 바로 아래 체급 CORK급에서 인상적인 파이팅을 보이는 선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전남대표 윤병호였다. 서울대표 김범수와 충북대표 황경섭을 강한 압박권투를 펼치면서 차례로 제압한 경기가 인상적이었다. 윤병호에 패한 두 선수는 2년 후 1985년 루마니아에서 펼쳐진 제3회 세계청소년 대회에 출전한 청소년 대표가 됐다. 김범수는 F급으로 출전해 동메달을, 황경섭은 LF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톱복서였다. 윤병호는 준결승에서 인천대표 서정수와 일전에서 강한 연타를 성공, 한차례 스탠딩 다운을 탈취하며 판정승을 거둔경기는 압권이었다. 그날이 10월 9일 아웅산 참사가 일어난 바로 그날이었다. 서정수는 후에 WBC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변정일을 준결에서 꺾고 결승에선 허영모를 잡고 올라온 소련선수를 제압하며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제대회 5관왕의 금자탑을 쌓은 강타자였다. 결승에서 윤병호는 준결에서 경북대표 이경연을 꺾고 올라온 부산대표 최희용과 손에 땀을 쥐게하는 일대 타격전 끝에 2-3으로 패했다.
▲ 윤병호의 스승인 이재화 광주체육관 관장과 김진영 동국대 감독 / 조영섭 관장
1986년 윤병호는 동국대에 입학했다. 1976년 2월 덕장 김진영 감독을 사령탑으로 창단된 동국대 복싱팀은 황철순을 비롯해서 김정철, 황충재, 정용범, 김광선, 박진선, 유장현, 변정일, 이훈, 조인주, 권만득, 박종심, 김재경 등 스타급 복서들을 쉼없이 베출한 복싱명문학교였다. 밴텀급으로 월장한 윤병호는 그해 킹스컵 은메달 리스트인 박태림(원광대)과 1987년 인도네사아 대통령배 밴텀급 국가대표 오영채(청주사대).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페더급 은메달리스트인 진명돌(호남대) 등 간판급 복서들을 연달아 잡아내며 폭풍질주를 거듭했다. 하지만 67회 전국체전 대학부 결승(밴텀급)에서 부산대표 차홍선과 열띤 타격전 끝에 2-3으로 분패하며 은메달에 머물렀다. 이때 윤병호는 설상가상으로 버팅으로 왼쪽망막이 파열되면서 안타깝게도 그의 복싱인생은 막을 내렸다. 통산전적 41전 36승 19KO 5패, 만 19세의 젊은 나이였다. 눈 앞에 펼쳐진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출전의 꿈이 모닥불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윤병호와 북경아시안 게임 플라이급 금메달 이창환 / 조영섭 관장
불과 2년전인 1984년 3월 후에 WBA J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49승 43KO 1패를 기록한 쇠망치펀치로 무장한 태국의 카오사이 갤럭시와 맞대결을 펼치다 판정으로 패한 필승체육관의 엄재성(56세.)과 그해 9월 후에 WBC LF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40승 35KO 5패를 기록한 멕시코의 헤르만 토레스와 세계랭킹전을 치러 판정승한 88체육관에 황동용이 경기 후 각각 망막파열로 은퇴한 사연이 스쳐간다. 당시 염보현 서울시장이 50만원을 윤병호에 전달해주며 그를 위로해줬다는 후문이다. 염보현 시장도 1948년 전국체전 복싱 LF급 금메달리스트였기에 동병상련의 심정였을 것이다. 의료기술이 뛰어난 미국에선 5체급을 석권한 레너드란 복서가 부르스 핀치와 경기에서 망막파열을 당하고 수술과 함께 1982년 11월 은퇴를 선언하지만 2년 후 재기하여 1987년 4월 헤글러와 미들급 통합타이틀에 도전해 1000만 달러의 파이트머니를 받으며 판정승하는 장면은 극적이었다. 이후 윤병호는 선수생활을 접고 건설업으로 방향전환해 입지를 구축한 사업가로 변신했다. 마치 태양이 갈라진 검붉은 구름을 걷어내고 온화한 햇빛을 비추듯이 그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인생이란 선택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반전드라마를 펼칠 수 있음을 보여준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조명섭 /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아시아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