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티풀>은 2006년의 어느 차가운 가을 아침,
아이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할 때 내가 손이 가는 대로 튼
CD인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에서 시작되었다.
몇 개월, 전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로스 앤젤레스에서 텔룰라이드 영화제로 가는 길에
‘라벨 피아노 협주곡’ 중 하나를 틀었다.
네 개의 모서리를 통해 보이는 풍경은 숨이 멎을 듯했다.
그러나 라벨 곡이 끝나자 애들 둘이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이 곡이 가진 그 우울한 분위기, 슬픔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아이들이 압도된 것이다.
아이들은 그걸 받아들이거나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느낄 뿐이었다." ---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지금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듣고 있다.
그런데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라벨의 곡인데,
윗 글의 가족처럼 숨이 멎을 듯한 감동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백건우의 피아노 곡으로 다시 듣고 있다.
눈을 감고 다시 집중하고 들어보니...
과연, 그제서야 영화 비우티풀에 나오는 주인공 남자 욱스발의
슬픔과 우울이 떠오른다.
우연히,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암 선고를 받은 가장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 지... 등등의 흔한 스토리인 듯한
영화 소개글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의 받은 작품이라는 것과
영화 표지 남자 주인공의 표정과 눈빛이
불분명하지만 이 영화가 흔하지 않은
뭔가 심상찮은 영화라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뭔가 심상찮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긴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지......
나는 왜 이 지저분하고 갑갑한 영화를 보고 있는 거지......
분명, 저런 끔찍한 장면을 보고 나면
밤에 꿈에 저 장면 속에 들어가 돌아다닐 게 뻔한데...... 왜 나는 이 영화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지.
그런데, 도대체 이놈의 감독은 무슨 뜻으로 이 영화를 만든 거야?
그렇게 골똘하게 노려보자
감독의 의도가 분명하게 읽혀졌다.
감독의 의도는 충분하게 이해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영화감독이 왜 스토리를 그렇게 깔았는지
장면을 깔았는지
이해는 가더라도
그 의도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하고, 불만이 가득한 영화였다.
"삶은 그들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욱스발이다
절망적이고 외로운,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사람." - 감독
욱스발은 조울증 아내와 이혼한 뒤 어린 두 아이를 키우며 산다.
그의 직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온 불법 이민자들을 경찰들로부터 보호해주며
중간 마진을 먹는 것.
즉, 불법 이민자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일정한 부분을 제하고 경찰에게 바치는 일이다.
즉, 약자를 보호해 준다는 포장으로 위장했지만
결국은 착취다.
또 다른 하나는,
죽은 뒤, 하늘나라로 떠나지 못하고
육체의 근처에 머무는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고 수수료를 받는 일이다.
이것 또한 떠도는 영혼을 인도한다는 명목이지만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행위는 신이 준 능력을 장사에 남용하는 행위다.
그러나, 뭐, 다 조금씩 그렇지 않은가......
아침에 두 아이를 베이비시터(중국인 여자)에게 맡기고 하루 종일 두 가지 직업에 종사하다
저녁에 두 아이를 찾아 집으로 데려와 매일 저녁에 먹는 그저그런 똑같은 저녁을 먹이고
피곤한 몸을 눕히고 잘들지만,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아들 때문에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남자.
만약에, 그가 갑자기 죽는다면 그가 돌보는 두 아이와
그에게 얹혀 사는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육체 곁에 머무는 길 잃은 영혼들은 누가 안내하나?
이런 불안한 생각이 들 즈음,
오줌을 누기 힘들었던 욱스발이 아무 생각없이 찾은 병원에서
전립선 쪽의 암인데 이미 말기암이라 몇 개월을 살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욱스발은,
의사로부터 말기 암이라 치료를 하더라도 겨우 몇 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말을
듣고서도 자신은 죽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고 거부한다.
한가하게 죽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거부하는 남자.
나도 그 남자의 의견에 찬성 한표를 던진다.
왜? 우선, 그들의 어린 두 아이들이 아무런 대책이 없다.
혹시 이혼한 아내에게 맡길 수 있을까 싶어 잠깐 함께 생활해 보지만,
여자는 여전히 조울증 환자에다
다른 남자에게 몸을 팔고
술을 마시며 어린 남자 아들을 학대한다.
조울증 치료를 한답시고 병원의 약은 먹지 않고 이상한 형광등 빛을 쬐고 있다.
그가 없으면 두 아이는 거리의 불안하고 대책없는 지옥에 버려지게 된다.
불법 이민자들도 보살펴야 한다.
그가 아니면 경찰로부터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찰에 발각되면 그들은 다시 아무 대책없은 중국으로, 세네갈로 돌아가야 한다.
하늘나라로 떠나지 시체 곁을 맴도는 죽은 영혼들도 인도해야 한다.
왜? 그러한 능력은 욱스발만이 타고난 능력이기 때문이다.
한가하게 죽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하지만,
죽음은 하루하루 그에게 주저 없이 다가온다.
왜?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삶이기에 神은 욱스발의 항의를 받아주지 않는 것인가?
결국, 그는 그의 멘토를 찾는다.
멘토인 여자는 그에게 길 잃은 영혼을 인도하며 돈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고 진단한다.
하늘에서 준 능력을 그저 전달하기만 해야지
돈을 받으면 안됐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경고했는데 욱스발은 무시했다는 것이다.
욱스발은 눈물을 흘리며 깊이 뉘우친다.
그러나 그 멘토로부터 그러한 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욱스발은 여전히
길 잃은 영혼을 인도한 뒤 또 돈을 받는다.
물론, 약간 망설이며 한번은 거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돈을 받는 습관은 설탕을 끊지 못하는 습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며칠 있으면 죽을 것이기 때문에 한푼이라도 모아 두 아이에게 줘야 한다.
이렇듯, 지금까지 살며 매번 했었던 순간순간의 선택이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 불행이 쌓여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다.
설령 그가 죽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는 죽어야 한다.
왜?
그가 매번 기로에서 자유 의지로 선택한 삶이 쌓은
업(카르마) 때문이다.
2년 전만 해도 그는 술과 마약과 여자에 찌든 그런 삶을 살았었다.
그때 이미 암은 씨앗을 뿌리고 뿌리를 내리고 이제 곧 무성한 가지들이 그를 뒤덮을 것이다.
주어진 젊음과 육체
무한할 것만 같은 시간과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설령 약간의 범죄르 저지르고
인생을 낭비하더라도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과 부모가 없는 자유로운 세상
그 쾌락과 그 자유로움을 영원히 만끽하며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상의 원리는 그렇게 만만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먼저 몸이 아프다.
가장 많이 나를 즐겁게 해준 육체가
영원히 나의 쾌락을 위해 늘 함께 해 줄 것만 같았던 육체가
먼저 고통에 빠진다.
육체가 고통에 빠지면 내 주위 인생들의 담장들이 하나 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즐거웠던 만큼의 고통이
어쩌면 즐거웠던 쾌락보다 몇 배의 고통이 덤해져 되갚아야 하는 시간이 시작된다.
그 되갚음에 인간의 항의는 그저 무력한 메아리다.
그 어떤 누구도 그 되갚음에 도망갈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죽는다.
그러나 죽는다고 끝일까?
이 더럽고, 우울하고, 갑갑한 영화의 제목이
아름다움의 단어 '비우티풀' 인지
참 불만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욱스발의 삶에도 아름다운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딸 아이와의 관계다.
아들은 성격이 못되 가끔 혼을 내기도 하지만
딸은 그에게 온전히 사랑이다.
그 딸아이가 비유티풀이라는 영어단어의 철자를 묻는다.
욱스발은 Biutiful, 비우티풀 이라며, 그냥 소리나는 대로 쓰면 된다고 가르친다.
비록, 잘못된 가르침이지만 그 장면에서 욱스발은 너무 행복하다.
또, 세네갈에서 온 이헤라는 여자를 헌신적으로 도와준다.
중간 마진의 착취 없이.
또, 그녀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두 가지 직업을 전전하며 모았던 전부의 돈을 준다.
그 돈을 받고 이헤는 세네갈로 몰래 도망치려 했지만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그 돈은 겨우 1년치의 집값을 치를 돈에 불과하다.
이 상황에서
너무나 할 일이 많은 이 현실에서
욱스발은 죽었다.
죽어서는
젊어서 죽은, 자기보다 어린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가 준 담배 한대를 피우며
욱스발은 아버지를 따라 눈길을 걸어간다.
아마, 언젠가는 그의 반지를 전해 받은 딸아이가
욱스발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욱 힘든 삶의 여정을 거친 뒤에
그 딸 또한 죽어, 욱스발과 함께 걸어갈 눈길이다.
우리는 자유의지에 의해 매번
자기 나름의 합리화를 내세워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자기 편한대로,
자기 이익 위주로,
선택이 되면, 그 선택의 찌꺼기가 쌓여 그 인생을 썩게 하고
결국 그 선택이,
그를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줄 줄 알았던 선택들이
그를 불행하게 하고,
결국 그를 불행한, 돌아설 수 없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를 본 내 나름의 해석이다.
내 나름의 해석이라는 것은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나 라벨 곡이 끝나자 애들 둘이 동시에 울기 시작했다.
이 곡이 가진 그 우울한 분위기, 슬픔의 의미와 아름다움에 아이들이 압도된 것이다.
아이들은 그걸 받아들이거나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느낄 뿐이었다." ---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
알레한드로 감독은 2006년의 어느날 바르셀로나 거리를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그때 차 안에는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의 암울하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곡이 흘러 나왔고
차창 밖 거리에 어둡고 가난하고 침울한 거리를 걸어가는 '욱스발'이라는 남자를 보았고
그 이미지를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비우티풀'이다.
즉, 나는 차 안에 편안하게 가족과 함께 슬픈 음악을 들으며,
바깥 풍경의 감상이다.
내가 편안하고 센치한 상황에서 보이는 차창 밖 세상의 불행과 가난과 슬픔은
묘하고 고즈녁한 아름다움,
바로 '비우티풀' 이다.
그렇게 약간 멀리서 바라봐야 해석되는 풍경과 인생이 있기도 하지만,
"욱스발" 본인은 전혀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다.
찢어지는 고통이다.
전립선 암에 걸려 오줌도 누지 못하는 고통에다
사랑하는 어린 딸과 아들을 아무 대책없이 남겨 놓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고통은
아름다움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