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불산 미륵암지(四佛山彌勒庵址)의 마애불(磨崖佛)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 윤필암' 들머리에서 '묘적암'을 향해 난 산길을 오르며 한 모퉁이를 더 돌면 오른편으로 넓은 계단이 펼쳐진다. 계단 위 암벽에는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자리하고 있다. 사불산 미륵암 옛터의 마애불은 높이 약 6m에 어깨 너비는 약 2.2m, 무릎 너비는 3.1m이며, 연화대좌(蓮華臺坐)의 높이는 1.3m, 너비는 3.7m이다.
사불산 미륵암지에 대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말 조선초의 대학자인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사불산미륵암중창기’이다. 암자의 창건 시기는 신라시대라고 하나 석벽의 마애불 조성시기는 고려시대이므로 창건 연대와 내력이 모호하며, 현재는 폐사지(廢寺址) 절벽에 마애불만 남아 있다.
아래에 권근의 문집《양촌집》에 수록된 '사불산미륵암중창기'의 원문과 주해를 함께 싣는다.
[원문]
○四佛山彌勒庵重創記, 陽村 權近
大院之嶺。支而迤邐。東南至甫州,山陽二邑界。穹窿而起。頂有巨石浮根而立。四面皆鐫佛我時塊然坐袒。故號四佛山。最一國奉佛者所喜談而欲觀者也。其中峯曰法王。其陽崖石。又鐫慈氏之容。傍置小寺。曰彌勒庵。世傳羅代所創也。庵之北。有妙峯。遙向四佛而峙。羅王望禮四佛處也。世遠屋圮。鞠爲榛莽。前判事白公瑨世居寧海。癸亥之春。避倭負母。間關顚躓。逾歷數郡。聿來玆山之下。越明年。母以病歿。營喪追福。靡有遺力。一日。泣告山僧曰。吾不幸於家鄕被寇。資産焚蕩。椓喪流寓之際。遭罹凶憫。値此大患。每念劬勞生育之德。昊天難報。晝夜㘅恤。欲爲怙恃殫誠竭力。營立精廬。以資冥祐。小申罔極之悲。創鉅痛深。益用䀌然。惟諸德愍而助之。以就予志。僧曰。創立新寺。國有常禁。山有彌勒庵。新羅舊址。久廢不興。盍起而新之。公聞之收涕曰。諾。卽往相之。泉壑淸邃。境壤爽塏。慈像宛然。遺基具存。迺契於心。迺樂以趍。芟剔荒翳。剗除砂土。募緣相費。傾材陶瓦。又慮粮廩或不繼。買田一區。耕耨以給。始於乙丑。終於丁卯。竪屋四楹。翼以重簷。有堂有廚。旣礲且堅。方欲施丹雘而未得。適有遊衲能畫者囊賫眞菜以來。購而請之。繪事亦啚。朱甍碧椽。奐輪可覩。又印妙法蓮經一部。父母恩重經三卷藏置于玆。戊辰正月。落而轉之。己巳正月又轉。欲記顚末。揭壁示後而未也。時余以言事忤省㙜。謫來寧海。白公旣還桑榟。聞予之至。喜曰。吾之志願。於是畢矣。寔來請之。至再益勤。予不得固辭。乃筆其言以誌。嗚呼。世俗事親。苟營喪葬而已爾。白公能盡制。而猶慊然。乃於避冦播蕩之餘。創寺印經。以啚悠久無窮之利。愼終追遠之孝。可謂加於人一等矣。其斡創寺比丘曰惠眼。曰勝孚。斡印經者曰志雲。幷附于末云。
[주해]
○사불산미륵암중창기, 양촌 권근 (주해)
대원령(大院嶺) 한 가닥이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 보주[甫州 : 예천군(醴泉郡)의 옛 이름], 산양[山陽 : 상주목(尙州牧) 소속의 고을]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구부정하게 하늘로 솟아났다. 정상에 밑둥이 박히지 않은 큰 바위가 있는데, 사면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사불산이라 하니, 온 나라의 부처 받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여 구경하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 중간에 법왕봉(法王峯)이 있는데, 남쪽 절벽에 자씨(慈氏 : 미륵보살)의 얼굴을 새겼고 그 곁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 미륵암인데, 전설에 따르면 신라 때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암자 북쪽에 있는 묘봉(妙峯)이 멀리 사불(四佛)을 바라보고 섰으니, 신라 임금이 사불을 망배(望拜)하던 곳인데, 세대가 오래되어 집이 무너져 풀밭이 되었다.
전 판사(前 判事) 백진(白瑨)은 대대로 영해(寧海)에서 살았는데, 계해년(1383) 봄에 왜(倭)를 피하느라 어머니를 업고 이리저리 헤매며 여러 고을을 지나 이 산 밑에 왔었는데, 그 이듬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으니, 상사 치르고 명복(冥福) 빌기에 힘을 다하였다. 하루는 중에게 울며 말하기를,
“내가 불행히도 고향에서 왜구(倭寇)를 만나 가산을 소실(燒失)하고 떠도는 시기에 흉한 운을 만나 이런 큰일을 당했습니다. 매양 고생하시며 낳아 기르신 은덕을 생각하면 하늘과 같아 보답할 길이 없기에, 낮이나 밤이나 근심하며 부모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정결한 집을 마련하여 명복(冥福)을 받으시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망극한 슬픔을 풀려고 하는데, 일이 커서 고통이 많으니 더욱 서럽기만 합니다. 바라건대 여러분께서 불쌍히 여기고 도우시어 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니, 중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절을 새로 짓는 것은 국가에서 정한 금법이 있고, 이 산에 신라 때 있었던 미륵암의 옛터가 오랫동안 묵어 있으니, 그것을 새로 중건하지 않겠습니까?”
공이 이를 듣고서 눈물을 씻으며 좋다고 승낙하고 즉시 가보니, 골짜기가 맑고 깊숙하고 경내의 지형이 시원스러우며, 자씨(慈氏) 불상이 완연하고 옛터가 그대로 남아 있어 비로소 마음에 들었다.
즉시 즐겁게 일을 시작하여 우거진 숲을 베어 내고 모래와 흙을 파내고서, 권선(勸善)하여 경비를 보태어 재목을 수집하고 기와를 구웠으며, 또한 식량이 떨어지게 될까 염려하여 밭 한 구역(區域)을 마련하여 농사를 지어 공급하였다. 을축년(1385)에 시작하여 정묘(1387)년에 끝냈는데, 집 4채에 2중 서까래를 얹고 대청[堂]도 있고 부엌도 있어 잘 다듬어지고 견고하게 건축되었다. 바야흐로 단청(丹靑)을 하려다가 못하고 있는데, 마침 환 잘치는 떠도는 중이 좋은 물감을 가지고 왔으므로, 그려 주기를 청하여 단청을 하니, 주색 대마루와 푸른 서까래가 찬란하여 볼 만했다. 또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1부(部)와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3권을 인출하여 여기다 비치(備置)하였다.
무진년(1388) 정월에 낙성과 함께 경(經)을 외우고 기사년(1389) 정월에 또 경을 외우고서, 그 시종을 기록해서 벽에 걸어 뒷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였으나, 아직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때 내가 일을 말하다가 성대(省臺)를 거슬러 영해(寧海)로 귀양 오니, 백공이 이미 고향으로 돌아와서 내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소원이 이제는 끝나겠다”고 하며 곧 와서 청하기를 더욱 정성스럽게 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할 수 없어 그 말을 써서 기록한다.
아, 세속의 어버이 섬기는 사람들은 구차히 초상 치르는 데만 힘쓸 뿐인데, 백공은 능히 예절을 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왜구(倭寇)를 피하느라 파탕(播蕩)된 나머지에도 절을 중창하고 경문(經文)을 인출하여 영구히 한없는 복을 도모하였으니, 신종추원(愼終追遠 : 상사에 예절을 다하고 제사 때 정성을 다함)하는 효성이 남들보다 한층 더하다 하겠다.
절 중창하는 일을 맡아본 비구(比丘) 혜안(惠眼)·승부(勝孚)와 경문 인출을 맡았던 지운(志雲)도 아울러 끝에 부기(附記)한다.
#1389년 영해 유배지에서 양촌 권근이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