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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리를 만나다
세계의 눈
마이너스 관점
어떤 사이코패스가 살인을 저질렀다. 언론은 살인의 동기 찾기에 분주하다. 왜 동기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동기는 플러스다. 동기는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언제라도 내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내부는 통제된다. 내부에서 통제력을 잃어버린 것이 원인이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위치에너지를 잃어먹는 마이너스다. 인간이 범죄중독에 빠지는 것은 사회와의 결속상태를 잃어버리는 마이너스다. 사이코패스의 유전자에서 살인을 막는 브레이크가 망가진 것은 마이너스다. 사이코패스들에 대한 사회의 감시가 약해진 것은 마이너스다.
그에게 특별한 무엇이 플러스 되어 있는지를 묻지 말고 당연히 있어야 할 그 무엇이 왜 마이너스 되어 없는지를 질문하라. 계에 압력이 걸려 있고 어딘가에 빈틈이 있으면 누군가는 반드시 빈틈을 채운다. 집단에 스트레스가 걸려 있고 누군가가 약점을 보이면 누군가는 약점을 찌른다.
사슬이 약한 고리에서 끊어지는 것은 정해진 법칙이다. 시간문제일 뿐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왜 업자들은 부동산 투기를 멈추지 않는가? 정부가 빈틈을 보였기 때문이다.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린 상태에서 어딘가에 빈틈이 있으면 비집고 들어와서 그곳을 채우는 것은 물리학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데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안전장치가 없으면 결국 그것을 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물은 바다로 모이고, 범죄자는 교도소로 모이고, 도박꾼은 정선 카지노로 모인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하고, 절대언론은 절대 폭주하고, 절대 검찰과 절대 기득권도 절대 폭주한다.
세상을 플러스로 볼 것인가, 마이너스로 볼 것인가? 앞에서 유혹하는 것은 플러스이고 뒤에서 등을 떠미는 것은 마이너스다. 앞에서 꼬시는 진보의 평등주의 유혹보다 뒤에서 덮치는 보수의 안보위협이 먹힌다. 앞에서 당기면 뒤로 빼지만 뒤에서 밀면 나가서 한 곡조 뽑는게 인간이다.
앞에서 꼬시는건 심리학이고 뒤에서 등을 떠미는 것은 물리학이다. 심리는 물리를 이길 수 없다. 진보가 보수에 깨지는 이유는 심리전에 기대기 때문이다. 말로 하는 것은 심리고 몽둥이로 하는 것은 물리다. 민주당의 말이 국힘당의 몽둥이에 졌다. 세계관을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게임의 세계관
도박꾼의 돈을 따려는 동기는 가짜다. 일확천금의 꿈은 가짜다. 도박중독에 걸려 뇌가 파괴된 이상 돈을 따겠다는 말은 구실에 불과하다. 도박을 하지 못하게 막는 방해자가 없으므로 도박을 한다. 도박꾼은 물리적 장벽 앞에서만 멈춘다. 동기의 존재가 아니라 방해자의 부재가 원인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외부로부터의 이득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단절이다. 소년이 장성하면 부모 곁을 떠난다. 가정의 보호가 끝나고 사회로 내몰린다. 혼자로는 위태롭다. 이성을 사귀어야 한다. 사회로 내몰리는 일이 없는 부족민은 이성을 사귀지 않는다. 사랑은 문명인의 생존배낭이다.
자연이나 인간이나 집단과 환경의 미는 힘에 의해 떠밀려 가는 존재다. 그것은 호르몬과 무의식의 영역이므로 알아채기 어렵다. 청소년의 이유없는 반항은 특별한 동기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생태적 지위가 바뀐 것이다. 갑자기 집이 불타버렸다. 그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게 더 이상하다.
강물이 바다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니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밀어낸 것이다. 위치에너지 상실에 의해 등을 떠밀린다. 발판을 잃어버리고 추락한다. 강물은 유체다. 유체를 당길 수 없고 밀기만 한다. 세상은 유체이고 근원의 힘은 미는 힘이다. 존재의 근본은 유혹이 아니라 추방이다.
게임이론은 상호의존성을 다룬다. 서로 공유하고, 결속하고, 간섭하며 연결된 것이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이다. 붙은 것이 떨어지는 형태로 사건은 격발된다. 활을 떠나는 화살처럼 모체에서 떨어져 나간다. 소년은 가족에 붙어 있다가 발사된다. 너의 성공을 기대한다며 자식을 발사한다.
자발성의 세계
유체는 마이너스고 강체는 플러스다. 유체는 붙어 있으므로 떨어져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강체는 떨어져 있으므로 붙어야 무슨 일이 일어난다. 떨어지는 것은 마이너스다. 마이너스로 통제하는 유체의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세상은 더러 떨어지고 더러 붙지만 엄밀하게 따져보면 떨어지는게 먼저다. 붙는 것은 이차적인 효과다. 우리는 소년들이 자석처럼 끌려서 사랑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심리적으로 가족에게서 떨어져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는 가족이 등을 떠밀지 않기 때문이다. 캥거루처럼 새끼를 주머니에서 계속 키우면 사랑할 이유가 없다. 한국인은 부모도 있고, 친구도 있고, 동료도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믿고 사귀지 않는다.
떨어진 것이 스스로 붙을 수는 없지만 붙은 것은 스스로 떨어질 수 있다. 결혼은 주변에서 도와줘야 하지만 이혼은 본인들이 알아서 한다. 가을의 낙엽은 스스로 알아서 떨어진다. 봄의 쌔삭은 물과 햇볕이 밀어줘야 자란다.
우리가 찾는 존재의 자발성은 붙은 것에 있다. 유체는 붙어서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고 우리는 그 압력을 조절할 수 있다. 유체의 세계관, 마이너스 세계관, 완전성의 세계관, 자발성의 세계관, 닫힌계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앞에서 유혹하지 않고 뒤에서 미는 척력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앞에서의 유혹은 사람을 동원할 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상호의존성이 작동하면 내가 못해도 상대가 더 못하면 이긴다는 게임의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진보가 깨지는 이유는 페미니즘, 온난화, 성소수자, 탈원전, 정치적 올바름 등 뭔가 동기부여가 된다 싶은 플러스 요소를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흩어버렸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하는 자충수가 되어 패배한다.
보수가 이기는 이유는 나이가 들면 돈 걱정 하나에 등을 떠밀리기 때문이다. 돈 걱정은 유혹이 아니다. 동기가 아니다. 플러스가 아니다. 노인의 재산은 계속 줄어든다. 수명도 줄어든다. 마이너스에 의해 통제되므로 완벽하다.
완전성의 세계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건의 최초 격발자를 찾아야 한다. 추론의 단서는 그곳에 있다. 문을 닫아걸어 외부 교란요인을 차단한 후 내부를 조사하면 진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닫힌계.. 열린계는 외부 변수의 영향을 받아 노이즈가 발생한다.
자발성.. 유체는 내부 압박에 의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스로 움직인다.
완전성.. 내부를 가득 채운 다음 거기서 무언가를 빼는 마이너스로 통제한다.
여기서 완전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맨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부를 빈틈없이 채우고 외부는 확실하게 차단해야 한다. 완전한 자궁에서 완전한 자식이 태어난다. 이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게임이론은 유체이론이며 닫힌계이론이다. 외부 영향이 없이 내부 모순에 의해 결정되는 자발적 변화를 추적한다. 유체의 완전성을 갖춘 사건의 모형을 복제하면 추론하고 창의할 수 있다.
질, 입자, 힘, 운동, 량 순서는 마이너스다. 질은 완전하며 거기서 하나씩 빼면 차례대로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질로 시작하고 입자, 힘, 운동을 거쳐 량으로 끝나는 비대칭 사고를 얻어야 한다.
반대로 질은 입자를 붙잡고, 입자는 힘을 붙잡고, 힘은 운동을 붙잡고, 운동은 량을 붙잡는다. 도둑놈 뒤에 장물아비가 있듯이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자원들을 붙잡아주는 매개와 촉매가 있다.
틀린 생각 - 강체, 플러스, 상대성, 대칭성, 열린계 (앞에서 유혹하는 심리학의 동원)
바른 개념 - 유체, 마이너스, 절대성, 비대칭, 닫힌계 (뒤에서 밀어내는 물리학의 발사)
세계관 갈아타기가 필요하다. 뇌를 표백하고 새로 설계해야 한다. 강체의 관점, 플러스 사고, 대칭적 사고, 열린계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 앞에서 당기는 힘은 가짜다. 그곳에는 방아쇠가 없다.
이법칙의 세계
우리는 대칭적 사고에 익숙하다. 흑백논리, 이분법, 이항대립적 사고, 정치적 프레임 기술은 대칭적 사고에 갇힌 것이다. 탁구시합과 같다. 공을 상대편에 넘긴다. 상대방 말을 받아치고 말대꾸 한다. 상대의 도발에 응수하며 자신을 방어한다.
선수를 두지 않고 후수를 둔다. 외부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주도권이 없으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 당하는 것이다. 사람을 쥐어짜는 깔때기에 빠진 것이다. 손에 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남의 게임에 용병으로 뛰면 이렇게 된다.
다른 것에 빌붙어 살며 하던 일을 반복할 뿐 새로 게임을 시작할 수 없다. 학생의 시험문제와 같다. 남이 만들어준 문제에 답을 찾는 식이라면 발전이 없다. 세상을 향해 능동적으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진짜다. 자신의 게임을 가져야 한다.
모르고 까부는 하수인지 뭔가를 아는 고수인지는 포지션 차이로 알 수 있다. 상대방 말을 받아치며 자신을 방어하려는 자세는 하수의 생존본능이고 정상에 올라 원형을 복제하며 마이너스를 실천하는 자세는 뭔가 아는 고수의 세력본능이다.
내부자 - 열역학 2법칙. 일관되게 손해본다.
외부자 - 열역학 1법칙. 더하고 빼면 제로다.
링 밖에서 보면 더하고 빼든, 지지고 볶든 그것은 링 안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이다. 더하고 빼면 0이다.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다. 게임 안으로 들어오면 더하든 빼든, 지지든 볶든 일관되게 내 주머니에서 돈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부자가 되어야 한다. 내부자는 돈을 지출하므로 권리가 있다. 모든 창의하는 사람에게는 나만의 자궁이 있다. 내 안에서 내 배 아파 내가 낳으므로 권리가 있다. 내가 판을 짜고 게임을 조정한다. 누가 베팅하든 돈을 따는 주최 측 입장이다.
어느 분야든 내부자가 있다. 청중의 자세를 버리고 지휘자 마인드를 얻어야 한다. 관객 포지션 버리고 감독 포지션으로 올라서야 한다. 인류의 문명은 여전히 제로섬이 지배하는 1법칙에 잡혀 있다. 내가 주도하는 2법칙으로 나아가야 한다.
날아가는 화살이 되지 말고 그 화살을 쏘는 활이 되어야 한다. 관객은 양손에 떡을 쥐고 하나를 선택하지만 감독은 선택할 수 없다. 리더는 선택할 수 없고 내부자는 선택할 수 없다. 결정한 다음에는 감당해야 한다. 앞만 보고 걸어가야 한다.
천재의 눈
천재의 방법
뉴턴은 직관으로 운동법칙을 알아냈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도 직관의 성과다. 천재는 직관한다.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다. 그냥 찍는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저것이 아니므로 이거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천재다. 천재는 머리 속에 모형이 있다.
직관은 단순화 한다. 뭐든 처음은 단순한데 외부 영향으로 복잡해진다. 처음으로 되돌리면 된다. 같음에서 다름으로 바뀌는 첫 번째 갈림길을 찾는 것이 직관이다. 직관은 첫 단추만 보고 판단한다. 기차는 궤도에 갇혀 있다. 출발역을 보고 종착역을 안다.
직관은 등가원리를 사용한다. 단순화시키면 패턴이 보인다. 도장이 반복하여 찍힌게 패턴이다. 패턴 반대편에 찍는 도장이 있다. 도장을 찾으면 답을 찾은 것이다. 복잡한 사고과정을 거쳤다면 확실히 안다고 볼 수 없다. 검토해야 할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유체와 강체의 차이다. 유체는 단순하고 강체는 복잡하다. 유체는 파동의 간섭에 의해 내부가 통일되므로 단순하다. 유체는 내부가 가득차서 복잡할 수 없다. 유체는 믿을 수 있다. 강체는 외부 작용에 영향받으므로 모든 변수를 조사해야 한다. 믿기 어렵다.
유체는 내부 간섭에 의해 궤도를 타고가므로 믿을 수 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가는 길이 정해져 있다. 강체는 당구공이 어느 쪽으로 굴러갈지 알 수 없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와도 강체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 수 없다. 천재는 강체를 유체로 바꾼다.
유체의 결속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온다. 소행성은 주변 모든 행성의 영향을 받는다. 소행성을 추적하려면 화성과 금성과 달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낱낱이 계산해서 궤도를 보정해야 한다. 소행성은 열린계다.
유체 - 닫힌계 내부에서 결정한다.
강체 - 열린계 외부에서 전달한다.
천재의 직관은 유체의 자발성을 이용하므로 외부 변수를 무시한다. 총알은 닫힌계다. 화약의 양만 알면 포탄의 사거리를 알 수 있다. 화약이 만드는 가스의 압력은 유체이므로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다.
내부 결정자는 단순하고 외부 전달자는 복잡하다. 천재는 판을 키우고 좁혀서 내부 결정자만 보고 판단한다. 천재가 다 아는게 아니라 알 수 있는 형태로 문제를 변형하는 것이다. 판을 키우면 명백하다.
선거결과를 예측한다면 후보자의 장단점을 나열하고, 점수를 매기고, 가중치를 부여하여 특정 후보의 당선을 짐작할 수 있지만 대략 뻘짓이다. 투표는 유권자가 한다. 유권자의 결속도만 파악하면 된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맞대응 하므로 비슷해진다. 자잘한 변수는 상호작용 과정에 용해된다. 투표소 안 가는 20대의 지지여부는 고려사항이 아니다. 양쪽 정당에 다 투표하는 중도층 하나만 추적하면 된다.
여야 정당은 강체다. 골수 지지자도 강체다. 양다리 걸치고 있는 중도층이 유체다. 대중은 유체다. 민심은 유체다. 입소문은 유체의 성질이다. 강체는 외력의 작용이 결정하고 유체는 내부 결속이 결정한다.
정치인의 오판은 민심을 강체로 착각하고 폭로전과 이합집산에 의한 외부 작용의 영향을 과대표집 했다가 내부 결속력을 놓치기 때문에 일어난다. 내부 결속력이 투표율을 높이면 누가 이길지는 뻔하다.
유체는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다. 기압과 수압과 유압과 열압과 파동압이 있다. 개인의 매력, 시장의 금리, 집단의 권력이 있다. 생물의 진화압, 유권자의 민심압도 있다. 압력이 강한가 약한가만 보면 된다.
과학자나 철학자가 복잡한 사고 과정을 거친다면 외부변수를 추적했다는 말이다. 조수간만의 차를 만드는 변수는 40가지나 되는데 적분기를 사용하여 모두 계산해야 한다. 정확한 계산인지 알기 어렵다.
순항미사일은 외부요인을 무시하고 정확히 길을 찾아가므로 믿을 수 있다. 백 퍼센트 내부에서 결정한다. 유체가 아닌 것은 닫힌계를 걸고 내부의 압력을 높여서 유체로 바꾸면 된다. 투표율을 높이면 된다.
직관의 기술
사람들이 비행기가 뜨는 원리를 모른다. 양력은 본질이 아니다. 그들은 외부를 본다. 비행기는 내부의 원인에 의해 관성의 힘으로 뜨는 것이다. 날개는 각도를 조절할 뿐이다. 비행기는 실속에 의해 추락한다. 추락해도 관성력을 잃어 추락한다.
직관은 간단하다. 유체냐 강체냐다. 외부변수를 내부상수로 바꾸면 된다. 우주 안의 모든 사건은 하나의 의사결정 플랫폼을 공유하므로 모든 탄생은 같다. 최초 탄생지점만 보면 된다. 비행기가 처음 떠오르는 부분만 보면 된다. 그것은 속도다.
외부는 둘이 결정하고 내부는 하나가 결정한다. 범선을 움직이는 외부의 바람은 좌현과 우현에 영향을 미치지만 내부의 키는 둘을 하나로 합친다. 바람이 왼쪽에서 불든 오른쪽에서 불든 상관없이 범선은 전진한다. 핵심 하나가 전부 결정한다.
개인은 매력을 높이고, 집단은 권력을 높이고, 무리는 세력을 높이고, 자본은 이윤을 높이고, 기업은 혁신을 높이고, 커플은 밀당을 높여야 한다. 핵심은 하나다. 공유하는 정도를 높여 외부 간섭을 이기면 된다. 이기는 힘이다. 나머지는 보조한다.
1. 처음은 단순하다.
2. 외부영향에 의해 복잡해진다.
3. 단순화 시키고 방향을 판단하면 된다.
4. 단순화 하는 방법은 유체 내부의 압력 증대다.
5. 공유하는 정도를 높여 외력을 이기면 된다.
세상은 유체다. 둘이 아닌 하나다. 대칭된 둘을 보지 말고 공유하는 축을 보라. 밖을 보지 말고 안을 보라. 각각 보지말고 합쳐서 하나로 보라. 지식은 만유의 같음을 아는 것이다. 중간은 다르지만 처음과 끝은 같다. 공유가 이기는 본질이 같다.
진리의 힘
진리의 맛
진리는 정말이지 가슴 뛰는 단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소년 때는 흥분해서 새벽 1시에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했다. 진리라는 말에는 사람의 목숨을 걸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점차 사어가 되어가고 있다.
진리를 참인 명제로 정의한다면 잘못이다. 참 진眞짜가 붙어 있지만 리理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리理는 결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치는 하나의 근원에서 갈라진 것이다. 진리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므로 흥분하고 마는 것이다.
고아 소년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 소년에게 '사실은 네게도 부모가 있다. 함께 부모를 찾으러 가자'고 말하면 어찌 소년의 가슴이 뛰지 않겠는가? 인간은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알고보니 내게도 부모가 있었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온 곳을 알면 갈 데를 안다. 그럴 때 인간은 전율한다. 한 뿌리에서 난 나무의 가지처럼 갈라졌다가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처럼 본래의 합쳐진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게 진리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하나의 자궁에서 나왔다는게 진리다.
삶이 비참한 이유는 버려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온 것도 이유가 없고 가는 데도 길이 없다. 우연히 왔고 될데로 된다. 가거나 가지 않거나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살거나 살지 않거나 간에 아무 차이가 없다. 그럴 때 인간은 비참을 느낀다.
세 가지 물음
세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첫째 진리는 있는가? 둘째 진리는 참인가? 셋째 진리는 절대적인가?
허튼 소리다. 질문이 틀렸다.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논쟁은 전달자에게 따라붙는 것이다. 진리는 결정자다. 엄마는 참이다. 우주 안에 거짓 엄마는 없다. 거짓 엄마는 유모나 보모나 이모나 고모라고 불러야 한다.
진리는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과정과 내가 앞으로 가야할 여정의 연결이다. 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다. 그래서 내 가슴이 뛰었던 것이고, 그래서 아침에 진리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진리는 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진리가 있다. 어떻든 내가 여기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설사 내가 홀로그램이라고 해도 그 홀로그램이 있는 것이다. 진리는 나와 연결한다. 연결이 있다.
진리는 참거짓을 논하지 않으며, 유무를 논하지 않고,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를 논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떠드는 사람은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내부 결정자가 아닌 외부 전달자의 문제다.
진리는 연결한다. 연결이 있고, 연결은 참이고, 연결은 절대적이다. 거짓 연결이나 상대적 연결은 없다. 암컷과 수컷이 거짓으로 연결되어 출산하는 일은 없다. 내가 이미 태어났다면 내 부모는 죽었든 살았든 있다.
칼이 지구에 있는지 없는지는 논의대상이 아니다. 내가 칼을 쥐었는지 놓쳤는지가 중요하다. 진리를 잡았는냐 놓쳤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진리의 편에 섰는가 혹은 그 반대편을 헤매는가 하는 실천의 문제 뿐이다.
연결의 진리
라디오가 있으면 방송국도 있다. 방송국이 없으면 단말기가 있다고 해도 라디오가 아니다. 라디오가 찾는 것은 하나다. 주파수가 맞는가다. 스피커에서 잡음이 나면 안 된다. 방송국이 있고, 라디오가 켜져 있고, 주파수가 맞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진리 앞에서 인간은 흥분하는가? 왜 그때 나는 전율하였는가? 왜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는가? 왜 잠이 확 달아났는가? 무엇이든 처음 연결될 때는 그랬다. 첫 키스의 추억처럼 말이다. 첫 만남, 첫 사랑, 첫 소풍, 첫 해외여행을 그대 잊을 수 없다.
다른 세계와 처음 연결될 때 인간은 흥분한다. 그것이 인간의 살아가는 힘이다. 진리는 고립된 인간을 넓은 세상과 연결하여 통하게 하는 것이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단계를 거쳐 연결한다. 원인과 결과 두 단어로는 연결에 실패한다.
라디오를 구입만 하면 다 되는게 아니고 주파수를 맞춰야 한다. 질의 방송국에서, 입자의 라디오를 켜고, 힘의 주파수를 맞춰서, 운동의 소리가 흘러나오면, 량만큼 듣는다. 비로소 통한다. 통할 때 심장이 뛴다. 그럴 때 인간은 흥분한다. 전율한다.
인간은 통하는게 진리고, 생명은 호흡하는게 진리고, 자동차는 달리는게 진리고, 문명은 진보하는게 진리다. 미완성의 존재가 진리의 연결에 의해 서로 통해서 하나가 될 때 완성된다. 진리가 인간을 완전하게 한다. 그러므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체는 하나가 더 있다. 그냥 소리가 있는게 아니라 화음이 있고, 그냥 그림이 있는게 아니라 조화가 있고, 그냥 선수가 있는게 아니라 역할이 있고, 그냥 역사가 있는게 아니라 진보하고 있다. 둘을 연결하는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을 얻으면 완전하다.
권력은 인간을 놀래키고, 이득은 인간을 유혹하고, 리스크는 인간을 위협한다. 인간은 게임에 갇혀버린다. 붙잡힌 이상 언제나 게임이 이기고 인간이 진다. 인간은 게임을 업그레이드 하여 게임을 이롭게 해야 약간의 자유를 얻는다. 그것이 진리다.
유체의 힘
결정구조
세상은 구조로 되어 있다. 세상이 구조가 아니면 다른 무엇으로 되어 있다는 말인가? 놀라운 것은 인류의 침묵이다. 인류는 구조를 모를 뿐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뭉갠다. 그러고도 잠이 오는가?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가?
사물의 원자론은 2500년 전에 나온 이야기다. 사건의 원자론은? 사건의 결정단위는? 세상의 근원이 물질이라면 물질에 어떻게 성질이 부여되는가? 원자는 어떻게 성질을 획득하는가? 4원소설과 음양설, 오행설은 그래도 뭔가 설명하려고 용을 쓴다.
현대과학은? 모르쇠다. 창조론은 신에게 문제를 떠넘긴다. 유물론은 생각 자체를 안 한다. 레고블럭은 요철이 있다. 원자는 본드로 붙이나? 신이 물질을 만들고 입김을 불어넣어 성질을 부여하며 두 번 작업한다. 둘을 일치시키는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
1. 세상은 변화한다.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는 것으로 설명해야 한다.
2. 변화는 내부에서 일어난다. 내부의 구조로 변화를 설명해야 한다.
열역학 1법칙에 따라 변화는 생성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이 멈추는 일은 없다. 나란하면 멈춘 듯이 보일 뿐이다. 우주의 기본 요소는 내부에 움직임을 품은 것이며 지금도 움직이고 앞으로도 움직이고 영원히 움직인다. 불생불멸한다.
두 가지 단서를 얻는다. 첫째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변화이며 변화는 변화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외부이며 그러므로 목격되지 않은 내부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 변화를 내부에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구조다.
4차원 결정자 - 유체의 격발, 내부구조, 에너지
3차원 전달자 - 강체의 실행, 외부형태, 물질
4차원 결정자와 3차원 전달자, 내부구조와 외부형태가 있다. 에너지는 내부에서 결정하고 물질은 외부에서 전달한다. 우리는 강체중심, 전달자 중심으로 보는 3차원 사고에 갇혀 있다. 유체중심, 결정자 중심으로 보는 사차원의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보존법칙
에너지보존의 법칙은 변화총량 보존의 법칙이다. 변화는 생겨나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며 자리를 바꿀 뿐이다. 닫힌계 안에서는 거리가 좁혀지고 속도가 빨라지는 한 가지 변화만 일어난다. 우주에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추적할 수 있다.
원자는 내부가 없다고 가정된다. 그럴 리가 없다. 의사결정은 내부에서 일어나는데 말이다. 내부가 없다면 의사결정이 없다. 그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다. 원자론은 우주가 없다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지어낸 말이다.
원자론의 오류 - 내부가 없고, 변하지 않으며, 강체의 형태다.
구조론의 진실 - 내부가 있고, 변화를 결정하며, 유체의 형태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를 설명한다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어긴다. 질량보존의 법칙을 어긴 셈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변하려면 원자의 존재에 변화의 인자가 추가되어야 하므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어긴다. 모든 변화는 있는 것의 자리바꿈이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변화다. 숨은 구조 변화와 드러난 형태 변화가 있을 뿐이다. 힘은 변화를 내부에 숨기고, 운동은 변화를 외부에 드러낸다. 힘은 2를 1로 합쳐 내부를 외부로 바꾼다. 우주에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물질의 성질은 방향전환 형태다.
숨은 변수
유체는 움직이고 움직이면 흩어진다. 흩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것이 있다. 강체는 그냥 존재하고 유체는 붙잡는 힘에 결속되어 있다. 유체는 간섭하므로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린다. 유체를 붙잡는 것이 '숨은 플러스 A'다. 인간의 예상이 빗나가는 이유, 역설이 작용하는 이유다. 유체의 압력을 놓친다.
유체는 하나가 더 있다. 물은 수압이 있고, 바람은 기압이 있고, 기름은 유압이 있고, 열은 열압이 있고, 물체는 질량이 있다. 자원들을 연결하는 것이 있다. 집단은 권력이 묶어주고, 커플은 사랑이 묶어주고, 시장은 이윤이 묶어주고, 생각은 지혜가 묶어주고, 생명은 호흡이 묶어준다. 매개하는 것이 있다.
생선을 자르려면 도마가 필요하고, 밥을 먹으려면 식탁이 필요하고, 화학반응을 일으키려면 촉매가 필요하다. 백금이 수소를 잘 붙잡으므로 수소차를 만들 수 있다. 에너지는 파동압이 붙잡고 있다. 그것이 내부를 균일하게 만들어 전체가 한 방향을 바라보도록 한다. 내부에 질서를 만드는 것이 힘이다.
가만 있어도 질량이 있고, 움직이면 가속도가 있고, 멈추면 각운동량 보존이 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유체의 간섭하고 붙잡는 성질이다. 세상을 강체로 보는 원자론의 사고, 전달자의 사고, 외부지향적 사고를 버리고 세상을 유체로 보는 구조론적 사고, 결정자의 사고, 내부지향적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4차원에는 3차원에 없는 하나가 더 있다. 3차원 구슬은 그냥 있고 4차원 구슬은 실에 꿰어져 있다. 내부 질서에 붙잡혀 있다. 자연의 본래 모습은 4차원이다. 모든 존재는 어딘가에 붙잡혀 있고 잡힌 상태에서만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붙잡히지 않으면 우주유영을 하는 우주인처럼 자세를 바꾸지 못한다.
보이는 손
유체는 하나가 더 있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잘 보인다. 사람이 보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남녀의 사랑은 보인다. 시장의 이윤은 보인다. 금리 변동에 따라 연동되어 일제히 움직이는게 보인다. 집단의 권력도 보인다. 보려고만 하면 수압도 보이고 기압도 보인다.
열압은 잘 보인다. 뜨거운 쇠붙이는 색깔이 다르다. 뜨겁고 차가운 것은 열압을 느끼는 것이다. 에너지는 파동압을 볼 수 있다. 압력이 걸리면 파동의 간섭으로 계 내부가 균일해진다. 파동이 보강되고 상쇄되어 계 내부를 하나의 의사결정단위로 만들므로 하나가 변하면 전체가 변한다.
에너지는 부분이 전체를 대표한다. 이에 통제할 수 있다. 하나를 건드려 전체를 결정한다. 오뚝이는 제 발로 일어선다. 중력이 유체이기 때문이다. 유체의 자발성이야말로 존재의 엔진이라 하겠다. 외부의 작용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에너지의 자발성을 이용하여 우리는 이득을 얻는다.
에너지의 경로를 결정하는 것이 힘이다. 힘은 이기는 길로 간다. 물이 발전기를 이겨야 수압이 발전소의 터빈을 돌릴 수 있다. 그런데 10 대 0으로 이기든 1 대 0으로 이기든 이기는건 같다. 이기면 고체가 액체로 바뀌듯 상이 바뀐다. 이후 돌이킬 수 없다.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라탄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 참가자들이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는 유체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개인은 강체지만 집단은 유체다. 정치판은 특히 민심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과 언론권력, 검찰권력, 기득권이라는 보이는 손의 싸움이다. 유체가 강체를 이긴다. 사실은 민심도 보려고 하면 보인다.
확신의 힘
인간으로 하여금 끝까지 가게 하는 것은 '이론적 확신의 힘'이다. 물체의 중간을 잡으면 양쪽에서 흔들므로 당황한다.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실마리를 잡으면 뒤가 없다. 벽을 등지면 뒤가 없다. 정상에서는 물러설 곳이 없다. 흔들리지 않는다.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단순화의 힘, 원칙의 힘이다.
생각하려면 단서를 잡아야 한다. 단端은 끝단이다. 정상에는 사건의 복제 메커니즘이 있다. 근원에 자궁이 있다. 아기는 거기서 태어난다. 사건의 자궁을 찾으면 다 찾은 것이다.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정상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보통은 원자를 단서로 삼는다. 실패다. 원자는 가리키는 것이지 설명하는게 아니다. 원자는 중간 전달자지 최초 결정자가 아니다. 원자는 탄생의 자궁이 아니라 탄생된 아기다. 원자는 복제하는게 아니라 복제된 것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현장의 변화다. 변화의 근원을 찾아나서야 한다.
원자는 불변이므로 변화의 발단이 될 수 없다. 언제라도 변화가 변화를 복제한다. 변화는 유체의 모습을 가진다. 우주 안에 새로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는 것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모든 변화는 있는 것의 자리바꿈이다. 기존에 있는 변화만이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낸다.
1. 강체는 불변하고 유체는 변화한다.
2.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변화는 변화로 설명된다.
3. 세상은 유체의 결정으로 설명되며 강체의 전달은 보조한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대칭으로 사유한다. 원인과 결과를 찾으면 아귀가 맞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생각을 멈춘다. 틀렸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의사결정이 있다. 의사결정은 비대칭이다. 세상은 대칭의 수레에 비대칭의 결정을 태우고 간다. 대칭의 집배원이 비대칭의 편지봉투를 배달한다.
대칭은 방향이 반대라서 헷갈린다. 엉킨 실을 풀어도 실마리를 잡고 한 방향으로 계속 풀어가야 한다. 대칭을 따라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 풀어놓은 실이 도로 엉켜버린다. 대칭적 사고가 모든 실패의 원인이다. 원인에서 결과로 갔다가 다시 원인으로 되돌아가는 순환의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
힘의 처리
갈 수는 있는데 올 수는 없다. 희망은 그곳에 있다. 에너지는 유체다. 유체는 계를 이루고 내부가 균일화 된다. 한 덩어리가 된다. 에너지는 파동의 간섭에 의해 균일화 되므로 두 방향을 가질 수 없다. 에너지는 뒤가 없다. 대칭성이 없다. 에너지의 일방향성이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강체 - 작용과 반작용 두 방향이다.
유체 - 반작용을 흡수하여 한 방향이 된다.
나무의 가지 끝이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왼쪽과 오른쪽을 오간다. 왼쪽이 오른쪽을 흔들고 오른쪽이 왼쪽을 흔든다. 틀렸다. 사실은 한 차원 위의 줄기가 한 차원 아래 가지를 흔든다. 형과 동생이 싸운다. 형이 동생을 때리고 동생이 형에게 덤빈다. 틀렸다. 부모가 형제에 스트레스를 전가한다.
왼발과 오른발이 다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몸통이 왼팔과 오른팔로 에너지를 내려보낸 것이다. 남북한이 싸우는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중심부의 강대국이 전쟁이 끝나고 남아도는 에너지를 말단의 남북한으로 내려보내서 소모시킨 것이다. 힘의 좌우대칭이 아니라 상하로 비대칭이다.
틀린 생각 -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를 흔들어댄다.
바른 판단 - 몸통이 남는 에너지를 말단부로 보내서 처리한다.
줄기는 가지를 흔들지만 가지는 줄기를 흔들지 않는다. 이기는 힘이 작용한다. 가지가 줄기를 이기지 못하므로 가지의 흔들리는 힘은 줄기에 흡수된다. 힘은 에너지를 수렴하여 언제나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 유체는 강체를 흔들지만 강체는 유체를 흔들지 못한다. 이기는 힘에 결정권이 있다.
힘이 비대칭인 이유는 대칭성이 깨져서 2가 1로 합쳐지는 성질을 힘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공간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는게 힘이다. 공간은 2고 시간은 1이다. 공간에서 시간으로 바뀌면 되돌아갈 공간이 없다. 마주보고 교착된 두 입자의 대칭이 깨져서 하나에 몰아준다.
강체 - 공간 2로 교착되는 대칭성
유체 - 시간 1로 타개되는 비대칭
인류는 힘을 모른다. 뉴턴은 운동으로 힘을 설명하지만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는 순환의 오류다. 인류는 여기서 막혔다. 힘은 입자의 해체다. 힘은 -><- 꼴인 두 방향 교착을 -->의 한 방향으로 바꾼다. 힘의 의미는 조절에 있다. 각운동량 보존이 공간의 거리를 시간의 속도로 바꾸면 조절된다.
우주 안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은 에너지의 비가역성이다. 갈수는 있는데 올수는 없다. 설명은 한 방향으로 가야 순환의 오류를 해결한다.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고 다시 원인으로 결과를 설명하면 두 방향이다. 빛으로 어둠을 설명하고 어둠으로 빛을 설명하면 두 방향 돌려막기다. 곤란하다.
원인과 결과를 통일하는 사건이 있고, 빛과 어둠을 통일하는 광자가 있고, 선과 악을 통일하는 사회성이 있고, 진보와 보수를 통일하는 문명이 있다. 한 차원 위에 하나 더 있다. 대칭의 바퀴에 비대칭의 축을 끼운다. 닫힌계 내부에 태워진 숨은 플러스 A로 비가역적인 변화를 설명해야 한다.
공유효율
힘은 계 내부의 모순을 처리한다. 대칭에 언밸런스가 발생하면 계가 깨진다. 움직이는 것은 가운데가 느리고 가장자리가 빠르다. 모순을 가장자리로 빼면 거리가 속도로 바뀌어 2가 1이 된다. 속도는 공간을 덜 차지하므로 모순이 해소된다. 빠른 놈을 바깥으로 빼면 밸런스가 안정된다.
뱀은 머리와 꼬리 2를 또아리 1로 바꾸어 힘을 발사한다. 공간을 좁혀서 속도를 얻는다. 회오리와 소용돌이가 발생하는 원리가 뱀의 또아리와 같다. 유체는 2인데 1이다. 쇠사슬 두 개를 연결하면 유체다. 사슬은 서로를 공유하므로 효율적이다. 속도는 공간을 공유하여 효율을 생산한다.
수렁에 빠지면 유체가 된다. 자신과 환경이 서로를 공유한다는 말이다. 공유하면 효율적이므로 공유가 이겨서 공유하는 정도가 더 높아지는 것이 더 깊이 수렁에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이 나쁜 상황에 빠지면 더 나쁜 결정을 내리는 이유다. 환경과 더 많이 공유해서 더욱 나빠진다.
생물의 진화도 생태적 지위를 찾아가는 진화압이 걸려서 한 방향으로 전진한다. 돌연변이에 의해 우연히 진화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종은 걸맞는 생태적 지위를 찾아낼때까지 변이를 생산한다. 진화한다는 것은 환경과 공유하는 정도를 높인다는 말이다. 공유가 이기므로 진화한다.
왼발과 오른발을 움직이려면 가운데 몸통이 필요하다. 대칭이 균형을 잡으려면 둘이 공유하는 비대칭의 축이 필요하다. 비대칭이 없으면 둘이 따로 놀아 분리된다. 대칭은 짝수고 비대칭은 홀수다. 모든 움직이는 것에 2와 1이 있다. 2를 1로 바꾸고 거리를 속도로 바꾸어 힘을 조절한다.
생각의 힘
생각을 하다
질, 입자, 힘, 운동, 량만 알려주면 될줄 알았다. 소스만 던져주면 나머지는 인간들이 알아서 하겠지. 쉽잖아. 사실이지 구조론 만큼 쉬운게 없다. 구조론은 복잡한 방정식 문제를 푸는게 아니고 빈 칸에 채워넣는 것이다. 윗칸을 먼저 채우는 점이 각별하다.
린네가 생물을 분류했으므로 나는 무생물을 분류하기로 했다. 생각은 분류다. 분류만 해도 아이디어 쏟아진다. 다만 분류기준이 필요하다. 구슬을 꿰는 실이다. 아이디어가 없는게 아니고 아이디어를 한 줄에 꿰는 분류기준이 없다. 물은 있는데 컵이 없다.
구조론을 알면 아이디어가 풍성해져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섯 배나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분류기준을 얻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분류기준이 숨은 플러스 A다. 그것은 유체의 압력이다. 압력을 조절하면 온갖 재미난 일이 일어난다.
압력이 거리를 속도로 바꿔 공간을 좁히면 온갖 변화가 일어난다. 쓸모가 다양하다. 전쟁에 적용하면 전략이 되고, 시장에 투입해도 수익이 나고, 영화에 투입하면 캐릭터가 살고, 사람에 투입해도 사랑이 된다.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해서 다들 좋아죽는다.
간단하다. 뭐든 두 배 늘리면 된다. 상대가 량을 제시하면 량을 두 배로 늘리는 운동으로 받는다. 상대가 운동으로 나오면 운동을 두 배로 늘리는 힘이다. 힘에 힘을 더하면 입자, 입자에 입자를 더하면 질이다. 다만 더 높은 차원에서 받아야 구슬이 꿰어진다.
인간들에겐 그게 어려운 모양이다. 하긴 쉽다면 진작 다른 사람에 의해 구조론이 나왔겠지. 인간은 구조적 사고에 약하다. 구조는 그냥 눈으로 보면 보인다. 수압이나 기압이나 유압이 안 보이는가? 선생님이 화가 나서 공기가 험악해지는 것이 안 보이냐?
다들 눈치로 알고 코치로 알잖아. 분위기 알잖아. 그냥 공간은 3차원이고 압력이 들어가 쏠리는 공간은 4차원이다. 다른 것은 맞대응 하면 되는데 가속적으로 팽창하는 기세는 입소문처럼 한 번 흐름을 타버리면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잖아.
생각의 기원
어원으로 보면 생각Think은 Thorn, through와 통한다. 그것은 '쏘는Thorn' 것이다. 가시로 찔러 관통through하는 것이 생각이다. 생각은 객체 내부를 꿰뚫는다. 생각하면 가시가 머리속을 찌르며 아이디어가 통과하는듯한 느낌이 든다. 내부에 주목해야 한다.
인류는 생각할줄 모른다. 대신 자극하고 반응한다. 그것은 외부에서 집적대는 것이다. 인류는 외부 환경의 자극에 수동적으로 반응한다.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고 맞대응하는 과정에 아이디어를 얻는다. 전쟁과 경쟁이 진보를 낳지만 그것은 수동적인 사고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하나의 의사결정 플랫폼을 공유한다. 인류가 모르는 것이 그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의사결정구조를 확보하는 것이다. 플랫폼 내부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 인류는 외부에서 손가락으로 객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한다.
국어사전이 엉터리다. 원인은 '결과를 낳는 작용'이라고 하고 결과는 '원인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칭을 막대기로 삼아 객체를 가리킨 것이다. 외부를 가리켰을 뿐 내부를 관통하지 않는다. 외부를 가리켜놓고 내부를 설명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일찍이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 과학적 사유의 첫 단추를 꿰었다. 그런데 잘못 꿰었다. 원자는 저거다 하고 손가락으로 지목하여 가리킨 것이다. 객체 그 자체와 상관없다. 원자는 내부에서 결정된 것을 외부에 전달하는 단위이지 내부의 결정단위가 아니다.
인간은 편지와 집배원을 헷갈린다. 편지는 놔두고 집배원을 끌고 간다. 결정단위와 전달단위를 구분하지 못한다. 인류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른다. 생각할 줄 모른다. 생각은 내부를 관통하므로 내부를 인정해야 하는데 원자는 내부가 없으므로 생각할 수 없다.
유체는 내부에서 결정하고 강체는 외부에 전달한다. 유체가 원인이고 강체는 결과다. 원인을 찾으라고 하면 단단한 것을 찾으려고 한다. 뾰족한 화살이나 단단한 망치를 지목한다. 화살을 쏘는 활이 부드럽고 망치를 휘두르는 근육이 부드럽다는 것을 모른다.
유체 내부냐, 강체 외부냐. 안을 보느냐, 밖을 보느냐. 내부는 전제하고 외부는 진술한다. 인류는 전제와 진술을 하나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질하는 방법을 모른다. 하나의 플랫폼에 올려놓고 분석하는 방법을 모른다. 모른다는 사실부터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 시스템
생각은 인과관계를 추적한다. 그런데 인간은 인과관계를 모른다. 우리가 아는 인과관계는 틀렸다. 원인에서 결정이 나오고 결정에서 결과가 나온다. 원인 > 결정 > 결과다. 원인과 결과가 결정을 공유한다. 공유를 추적하는 것이 생각이다.
원인 > 결정 > 결과
인간은 생각할 줄 모른다. 생각의 도구인 언어를 모른다. 언어의 문법은 전제와 진술인데 전제를 모른다. 머리 속에 테이블을 펼쳐서 전제와 진술을 연결해야 하는데 테이블이 없다. 총이 없어서 쏘지 못하고, 도마가 없어서 요리를 못한다.
생각은 플랫폼이 필요하다. 분자를 붙잡아야 하는데 촉매가 없다. 불을 때려는데 아궁이가 없다. 물을 마시려는데 컵이 없다. 인간은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처럼 직진만 계속한다. 생각하려고 멈추었다가는 늑대에게 잡혀먹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려고 한다. 그 반응을 끊어야 생각할 수 있다. 반응을 생각으로 착각하는게 문제다. 인간은 자신을 코너로 몰아 쥐어짠다. 강한 자극으로 강한 반응을 끌어낸다. 전쟁과 경쟁으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야 생각난다.
‘생각에 관한 생각’의 '대니얼 카너먼'이 말한 시스템 1, 시스템 2를 참고하자. 생각 1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한다. 생각 2는 환경을 장악하고 능동적으로 생각한다. 1은 보여지는 것을 보고 2는 보는 자신을 본다. 생각 2는 도구를 써야 한다.
생각은 둘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하는 것이다. 둘을 비교하려면 공존해야 한다. 공존시킬 테이블이 필요하다. 그것이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질 하나에 입자 둘, 입자 하나에 힘 둘이 축과 대칭으로 짝지어져 도마와 칼로 역할을 나눈다.
사람은 자동차와 배룰 구분할 줄 안다. 자동차를 물으면 '저것이 자동차다' 하고 가리키며 그것을 지식으로 여긴다. 인간은 대칭 위주로 사고한다. 선과 악의 대칭, 음과 양의 대칭, 진보와 보수의 대칭은 모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가리키는 것은 끊어진다. 생각은 연결이다. 가리키는 것은 손가락으로 연결한 것이다. 그것은 거짓 연결이므로 끊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게 하려면 내부의 자체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공유로 연결한다. 공유가 핸들이다.
결정과 전달
자동차를 가리킬 줄은 아는데 운전할 줄은 모른다. 대칭은 아는데 축을 모른다. 무를 자를 줄은 아는데 도마가 없다. 결정된 것을 전달할 줄은 아는데 정작 결정할 줄은 모른다.
선과 악은 전달하고 사회성이 결정한다. 하나의 사회성이 선도 되고 악도 된다. 하나의 문명이 진보도 되고 보수도 된다. 하나의 빛이 밝음도 되고 어둠도 된다. 모든 2는 1이다.
결정은 하나가 하지만 전달은 두 방향으로 간다. 핸들은 하나라도 바퀴의 좌회전과 우회전 두 방향이다. 원인과 결과 둘 사이에 공유하는 하나의 결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원인 - 하나가 둘을 결정하므로 설명해야 한다.
결과 - 설명 필요없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된다.
인류 문명은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반복한 결과다. 개는 배회법으로 집을 찾는다. 냄새가 끊어질때마다 방향을 바꾸면 길을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인류 수준이 개와 비슷하다.
세상은 대칭이므로 이거 아니면 저거다. 방향 바꿔 가리키기로 시행착오를 반복하면 답을 찾는다. 이 하나의 기술로 여기까지 왔다. 허무한 반복 답답하다. 이제 도약해야 한다.
지식 시스템
우리가 아는 세상은 대칭의 세상이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따위 무수한 대칭어가 있다. 대칭은 단순히 객체를 가리킬 뿐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대칭은 총이 아니라 총알이다. 전달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국어사전부터 잘못되어 있다. '젖'은 '유방'이고 '유방'은 '젖'이다. 설명이 아니라 돌려막기다. 이는 단순히 한자어와 우리말을 대칭시켜 사물을 가리킨 것이다. 문제는 21세기에 와서도 인류문명이 여전히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전달하려면 강체로 바뀌고, 결정하려면 유체로 바뀐다. 물은 그릇에 담아서 전달할 수 있다. 그릇은 강체다. 물이 녹거나 얼음이 어는 것은 유체 상태로 일어난다. 모든 의사결정은 유체 상태로 일어난다. 얼음도 내부적으로 유체다.
강체는 나눌 수 있지만 유체는 나눌 수 없다. 기름이나 물이나 플라즈마나 열은 유체다. 떼어놓을 수 없다. 유체에 에너지를 태우면 파동이 만들어지고 파동은 간섭된다. 파동은 내부가 균일해진다. 2가 아닌 1이 된다. 대칭의 코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강체는 법칙에 지배되지 않는다. 전달할 뿐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하는 것은 유체로 바뀌며 그럴 때 일어날 일이 일어난다. 올라갈 팀은 올라간다. 유체의 균일화에 따른 최소작용, 최단경로, 최소시간, 최대효율, 최소비용을 결정한다.
생각 2의 세계로 올라서고 지식 2의 세계로 올라서야 한다. 모드를 바꾸면 된다. 둘씩 짝짓되 둘을 통일하는 손잡이를 만들면 된다. 진보 보수 둘로 설명한지 말고 사회성 하나로 설명하면 된다. 모든 대칭되는 사물 2는 메커니즘 1로 변환할 수 있다.
만유척력
만유척력
근래에 척력으로 나타나는 암흑에너지가 시공간 자체의 성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필자는 40년 전에 만유척력을 발견했다. 모든 힘은 척력이고 인력은 없다. 부력이 없는 것과 같다. 부력은 중력의 반작용이다. 반작용은 힘을 격발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전달하는 운동이다.
힘 = 척력 = 밸런스의 복원력
힘은 계 내부 밸런스에 모순이 발생했을 때 효율적인 형태로 정렬시켜 모순을 해소한다. 모순은 충돌이다. 충돌하면 효율적인 구조가 이긴다. 비효율성이 제거될때까지 자발적인 이동을 멈추지 못하므로 결국 정렬된다.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여 안정되면 멈추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인력은 구조에 갇힌 힘이다. 밀려나서 갈 곳이 없으면 모인다. 물컵에 티끌을 뿌리고 물에 파동을 주면 티끌은 가운데로 모인다. 티끌은 벽까지 밀렸다가 반작용에 의해 가운데로 떠밀린다. 가장 안정된 위치로 이동한다. 지구 중심이 가장 안정된 위치다. 중력은 지구 중심에 떨어진다.
나무를 흔들면 원숭이는 흔들림이 약한 곳으로 이동한다. 멀미가 심한 승객은 앞좌석으로 이동한다. 자동차는 뒷자리가 더 흔들리기 때문이다. 척력은 움직이는 것이 파동의 간섭으로 균일화 되는 것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여 밸런스를 맞추려고 가장자리로 이동하면 척력이다.
척력 - 작은 것은 말단부로 떠밀린다.
인력 - 큰 것은 중심부로 이동하여 붙잡는다.
안정되려면 붙잡아야 한다. 새끼 원숭이는 손가락이 가늘다. 가장자리로 가서 작은 가지를 잡아야 한다. 덜 흔들리는 안쪽을 차지하려고 하지만 안쪽은 덩치가 큰 개코원숭이가 선점했다. 상대적인 비중에 따라 인력도 되고 척력도 되지만 본질은 공간의 밸런스를 찾아가는 척력이다.
무거운 돌은 밑바닥에 가라앉고 가벼운 티끌은 표면에 떠오른다. 농부가 키질을 하는 원리다. 조리로 쌀을 이는 원리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을 밀어내는 척력이 먼저고 무거운 것이 가라앉는 것은 가벼운 것의 이동에 의한 2차 효과이므로 우주는 척력 일원론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지동설이 천동설을 뒤집었듯이 인류는 한 번 더 뒤집어야 한다. 중력은 당기는 것이 아니라 미는 것이다. 당긴다는 말 자체가 거짓이다. 당기려면 잡아야 하고, 잡으려면 다가가야 하고, 다가가려면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손을 내어밀면 민다. 줄다리기는 사실 발로 땅을 미는 시합이다.
우주 안에 당기는 것은 없다. 우주유영을 하는 두 우주 비행사가 상대를 자기쪽으로 당길 수 없다. 줄로 연결하면 당길 수 있지만 줄을 감는 에너지는 궁극적으로 근육 세포 안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반발력이다. 당기는 것은 범선의 키가 힘의 방향을 바꾸듯이 힘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각운동량
갈릴레이의 관성력은 힘이 물체 속에 숨는 성질이다. 그것이 왜 드러나는지를 밝혀야 한다.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다. 궁극적으로는 유체의 각운동량 보존이다. 공간의 거리를 시간의 속도로 바꾸면 공간을 절약한다. 소용돌이를 보면 속도가 빨라진 대신 공간이 남았음을 알 수 있다.
우주 안의 모든 운동은 관성을 만드는 각운동량 보존이다. 질량이든 중력이든 관성력이다. 내부에 각운동량 보존이 작동하며 속도가 빨라진 대신 거리가 좁혀진다. 베르누이 정리다. 햇볕이 공기를 달구면 분자 사이 간격이 넓어져 고속도로처럼 한 방향으로 이동하며 속도가 빨라진다.
척력 - 햇볕에 의해 공기 분자들 사이의 간격이 넓어진다.
인력 - 한 방향으로 움직이면 결맞음에 의해 속도가 빨라진다.
회오리가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는 힘은 인력이지만 그 전에 햇볕이 공기 분자를 진동시켜 충돌시키는 힘은 척력이다. 척력에 의해 계는 불안정해진다. 유체는 균일화 되는 방향으로 힘이 작용한다. 강체도 내부 에너지 파동은 유체다. 각운동량 보존의 결맞음은 거리를 속도로 바꾼다.
계의 압력(질)>코어의 밸런스(입자)>공간의 거리(힘)>시간의 속도(운동)>변화의 인식(량)
힘은 작용 반작용 -><-를 속도 -->-->로 바꾼다. 내부에 교착된 두 방향 거리가 외부에 노출된 한 방향 속도로 바뀐다. 우리가 보는 것은 변화, 변화 앞은 운동, 운동 앞은 힘, 힘 앞은 밸런스, 밸런스 앞은 압력이다. 힘은 압력이 코어에 붙잡힌 밸런스가 깨져서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
삼위일체
진정한 지식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원인을 아는 것이다. 둘째 힘을 얻는 것이다. 셋째 복제하여 낳는 것이다. 각각 사건의 원인과 결정과 결과에 대응된다. 알고 얻고 낳는다. 원리를 알고, 거푸집을 얻고, 대량생산 한다. 무엇이든 그러하다.
시인이 시를 쓰든, 문인이 소설을 쓰든, 작가가 웹툰을 그리든, 인물이 연기를 하든 잘 보면 한가지 확실한 것을 이룬 다음에 대량으로 복제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네컷 만화를 그려도 한 가지 패턴을 얻은 다음 무한반복한다. 도구를 사용하는 셈이다.
이 분야로 악질인 사람은 과거 한국일보에 블론디를 연재한 만화가 칙 영과 그의 아들 딘 영이다. 주인공 대그우드 범스테드가 양 팔에 샌드위치를 잔뜩 올리고 깝치다가 집배원과 충돌하는 내용만 주구장창 그려댔다. 자기표절이지만 그것도 재주다.
알다 - 원인은 유체의 공유
얻다 - 결정은 이기는 힘이
낳다 - 결과는 마이너스 방향
먼저 원인을 알아야 한다. 우주 안의 모든 원인은 공유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공유다. 감기에 걸려도 인체와 바이러스의 공존이 원인이다. 모든 불화는 무언가 겹치고 간섭할 때 일어난다. 남북한이 휴전선을 공유하든 한일이 동해를 공유하든 그러하다.
답을 알았으면 힘을 얻어야 한다. 힘은 도구에서 나온다. 모든 도구는 1이면서 2다. 칼로 두부를 잘라보자. 칼을 한 번 움직였는데 두부에는 두 개의 면이 발생한다. 심판은 한 번 판정했는데 승자와 패자 둘의 운명이 결정된다. 1을 2로 바꾸는게 힘이다.
도구를 장만하여 힘을 얻었으면 복제할 차례다. 무사는 칼을 얻고, 목수는 연장을 얻고, 작가는 연재할 지면을 얻고, 운전기사는 핸들을 잡는다. 알면 도구를 얻고 도구를 얻으면 힘을 가지며 그 다음은 무한복제다. 웹툰만 떠주면 만화공장 공장장 된다.
복제는 무언가를 마이너스 한다. 낳는다. 그럴 때 빠져나간다. 인체는 똥과 오줌이 빠져나간다. 자동차는 매연이 빠져나간다. 모든 도구는 무언가 빠져나가게 되어 있고 속도를 내부에서 조절하게 되어 있다. 볼펜은 잉크가 빠져나가는 량을 조절한다.
이기는 길을 알다.. 원인 - 시스템의 공유
이기는 힘을 얻다.. 결정 - 유체의 숨은 플러스 A
이기는 일을 낳다.. 결과 - 마이너스 전략
답은 정해져 있다. 언제나 공유가 원인이고, 언제나 유체가 힘이고, 언제나 마이너스가 전략이다. 전쟁터의 장수는 무엇을 버릴지 판단해야 한다. 장기를 둔다면 기물을 버린다. 어차피 버려야 한다면 작은 것을 버려서 상대의 더 큰 손실을 유도한다.
셋은 하나다. 공유하면 유체고, 유체는 내부에 압력이 걸려 균일화 되므로 마이너스만 가능하다. 만원버스와 같다. 승객이 가득 차면 일단 한 명이 내려야 한다. 마이너스를 결정하면 플러스는 자동이다. 지하철이라도 내릴 승객이 내리면 알아서 탄다.
절대언어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대칭을 알지만 원인은 언제라도 비대칭의 결정을 거쳐 결과에 이른다. 결정은 노즐과 같아서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다. 원인 > 결정 > 결과다. 자세하게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맞추어 배경, 원인, 결정, 작용, 결과로 나눌 수 있다.
배경(질) - 원인(입자) - 결정(힘) - 작용(운동) - 결과(량)
질, 입자, 힘, 운동, 량 중에 눈에 띄는 것은 입자와 량이다. 운동은 움직이므로 애매하다. 힘은 관성력으로 숨는다. 질은 집합이므로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우리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좋은 입자와 량을 원인과 결과로 친다. 다섯이 모두 원인과 결과인데.
질이 원인이면 입자는 결과, 입자가 원인이면 힘은 결과다. 원인과 결과는 상대적인 포지션이라서 헷갈린다. 우리는 한 가지 원인을 찾으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량의 원인은 운동이다. 운동을 찾으면 원인을 찾았다고 믿고 생각을 정지한다.
헷갈리지 않게 엄격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구분은 상대성의 언어를 버리고 절대성의 언어로 갈아타자는 것이다. 상대성의 언어가 모든 혼란의 주범이다. 그냥 오른쪽 왼쪽 하지 말고 시계방향으로 세시 방향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막연히 원인이 결과되고 결과가 원인 된다고 믿는다. 닫힌계를 걸면 하나의 사건 안에서 결과는 절대 원인이 되지 않는다. 말을 두루뭉수리로 해서 소통이 망하는 것이다. 만약 결과가 원인된다면 다른 사건이며 새로운 에너지 투입이 일어났다.
닭이 알을 낳을 뿐 알은 닭을 낳지 않는다. 언제라도 닭이 먼저다. 낳음이라는 개념이 없으므로 헷갈려서 개소리를 한다. 변화는 시간을 타고 간다. 시계가 뒤로 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 우주는 빅뱅 이후 하나의 커다란 사건으로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활을 쏜다면 활몸을 밀고 활시위를 당긴다. 활몸에 작용하는 힘은 척력이고 활시위에 작용하는 힘은 인력인가? 양손으로 고무줄을 당긴다면 멀리 있는 왼손은 척력이고 가까이 있는 오른손은 인력인가? 개소리다. 인간들이 말을 잘못한다.
힘의 메커니즘은 하나다. 힘은 궁극적으로 밀어서 공간을 확보하는 형태로 밸런스를 복원한다. 축을 가운데 놓고 대칭 둘이 양쪽으로 간격을 벌리면 미는 힘이다. 인력은 없다. 유체의 응집력에 의한 방향전환을 인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척력(질)> 척력의 교착(입자)> 교착의 풀림(힘)> 풀림의 전달(운동)> 힘의 도착이 차례대로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엉킨 실을 풀되 실마리를 잡고 한 방향으로 계속 풀어가는게 정답이다. 모든 힘은 공유에서 오고 변화는 공유의 해제다.
활을 당기면 힘을 공유한다. 활을 쏘면 공유가 풀린다. 활몸과 활시위에 나눠진 힘을 백 퍼센트 화살이 독식한다. 하나가 전부 가져가는게 이기는 힘이다. 씨름선수 두 사람이 동시에 힘을 쓰지만 황소는 그 중에 이긴 사람 한 명이 가진다.
정치판에서 오판이 일어나는 이유다. 중도표는 한 명이 독식한다. 선거 때만 되면 나타나는 자칭 선거전문가와 꾀돌이 책사들이 여러가지 재주를 피우지만 의미없다. 여러 이슈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이슈 하나가 전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진보가 노상 깨지는 이유다. 진보의 유혹은 선택지가 2고 보수의 위협은 선택지가 1이다. 1이 2를 이긴다. 안전을 먼저 확보하고 게임을 한다. 길거리 파이터도 벽을 등진 다음에 싸운다. 진보가 이기려면 외부의 큰 흐름에 묻어가야 한다.
우주 안에 전략은 하나다. 전략을 쓰려면 내부를 채워야 한다. 내부가 가득차면 마이너스만 가능하다. 빈 공간이 있으면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내부를 채운 상태에서 하나를 빼면 그쪽으로 쏠림이 일어나 연쇄적 파급효과로 다 넘어온다.
물탱크가 가득찼을 때 작은 구멍을 뚫는다. 전체의 수압이 한 지점에 걸린다. 거기에 노즐을 설치하고 수도꼭지를 틀면 작은 1의 변화로 전체 100을 통제할 수 있다. 100만 군대가 명령 한 마디로 통제된다. 보수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한다.
호스에 공기가 들어가면 물이 나오지 않는다. 내부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 진보는 이것 저것 시도해서 사람들이 이쪽 저쪽을 쳐다보다가 빈틈이 만들어지고 힘이 전달되지 않는다. 다들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니 명령이 먹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