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사 신문 곽성순] 국내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메르스) 확산 사태는 아직도 진행형이지만, 조금씩 불길이 잡히는 모양새다. 메르스 사태의 종식이 다가올수록 국민들의 관심은 ‘언제 어디서 환자가 또 발생할 것인가’ 같은 두려움에서 ‘도대체 왜 국내에서 메르스가 이처럼 빠르고 크게 확산됐는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더 나아가서 ‘제2의 메르스 사태를 막기 위해선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가고 있다. 앞으로 보건당국과 의료계가 서로 힘을 합쳐 국민들의 이런 물음에 답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감염병만을 위한 재난병원 설립은 안돼
국내에서 메르스가 빠르게 퍼진 원인을 찾아보면 한 두가지가 아니겠지만, 그 중 분명한 한가지는 메르스 같은 신종감염병이 국내에 유입됐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신종감염병에 대처할 수 있는 재난병원이 없다는 점도 시스템 미비 요소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일각에서는 이미 1,000억원을 넘는 재원을 투입해 감염병에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지정 '감염병 전문 재난병원'을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재난의학전문가들은 이러한 방법에 대해 “효용성이 떨어지는 계획”이라고 일축했다.
신종감염병이라는 것이 언제 또 국내에 유입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수백개의 음압병상을 갖춘 의료기관을 만들고 감염병이 유입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예산을 투입해 새로운 감염병 전문 병원을 만들고, 이를 민간에 위탁하는 과정에서 특정 세력에게 특혜를 주려는 속셈”이라는 비난까지 제기되고 있다.
물론 대부분 전문가들은 이보다는 더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대한재난의학회 한 관계자는 “신종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병원을 짓고 이를 운영한다고 생각해보자. 우선 감염병이 유입되지 않았을 때는 말 그대로 병원을 놀려야 하는데, 이게 사실상 낭비다. 또한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의료진은 계속 환자를 봐야 트레이닝도 하고 역할을 하는데, 그런 기본적인 시스템이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메르스 확산 분위기를 타고 전염병 전담 재난병원 설립을 이야기 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라며 “그렇다고 재난병원을 설립해놓고 평상시 일반환자를 보는 것도 재난병원 설립 목적에 반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재난병원 설립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가장 실현 가능한 재난병원 설립방법은 국립중앙의료원(이하 국립의료원)을 활용하는 방안이라고 언급했다.
국립의료원에는 이미 중앙응급의료센터와 외상센터가 있기 때문에 ‘신종감염병센터(가칭)’까지 넣을 경우 국립의료원을 응급, 외상, 전염병관리를 모두 컨트롤 할 수 있는 진짜 ‘국가 지정 재난병원’으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원지동 이전을 계기로 국립의료원을 국가 지정 재난병원화 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권에서도 나오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남인순 의원실 관계자는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해 새롭게 센터를 설립하게 되면 엄청난 예산이 드는 것은 물론, 이 센터가 평상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호해질 수 있다”며 “국립의료원이 감염병에 대응하는 중앙 센터가 되고 각 시도별로 지역 센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중앙의료원은 곧 원지동으로 이전할 것이기 때문에 이전하면서 그와 관련한 설계를 한다면 감염병 예방을 위한 중앙센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며, 이와 관련한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덧붙였다.
NMC내 음압병상, 별도 건물로 만들어야
재난의학 전문가들이 말하는 국가 지정 재난병원 모델은 기존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중앙과 지방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국립의료원과 권역응급의료센터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감염병 관리 시스템을 이식하기만 하면 된다.
우선 원지동 이전이 결정된 국립의료원은 100병상 정도 음압병상을 갖추면 응급, 외상, 전염병 관리를 모두 할 수 있는 기관이 된다. 음압병상은 이전 시 설계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마련할 수 있는데, 전염병 특성상 부지 내 별도 건물을 짓는 방안이 떠오르고 있다.
재난의학회 관계자는 “국립의료원 내 마련하는 음압병상 수는 적어도 권역외상센터의 2배 정도 돼야 한다”며 “그 정도라면 음압병상 100개 정도가 필요하며, 중환자실을 겸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원지동 이전이 결정된 상황에서 부지 내 건물을 새로 지어 음압병상을 따로 만들어야 한다”며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의료기관에서 일반환자와 감염병 환자가 같이 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경험했기 때문에 대규모 음암병상을 따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NMC의 재난대응 경험도 중요
국립의료원도 의료원을 국가 지정 재난병원화 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다. 국립의료원 측에서는 재난의학 전문가들의 의견 외 그동안 의료원이 국가 재난 상황에서 실제 역할을 하면서 축적한 경험이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국립의료원 권용진 기획조정실장은 “재난의 종류는 화학, 바이오테러, 방사선, 핵 등 여러 종류가 있다. 그런 종류에 따라 따로 대응체계를 만드는 것은 비효율인데, 재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중심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라며 “어떤 재난이 발생하더라도 재난상황이라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국립의료원이 그 역할을 했다. 그 재난대응의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권 실장은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중환자 치료다. 응급환자와 중환자를 언제든지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하며, 언제든 활용가능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응급과 외상센터가 이미 들어있는 국립의료원은 민간보다 동원력이 좋다”고 덧붙였다.
권역응급의료센터는 ‘작은 국립의료원’
국립의료원이 중앙에서 시스템의 중심을 잡는다면, 뒤를 받칠 수 있는 곳은 전국에 지정된 권역응급의료센터다. 권역응급의료센터 규모는 국립의료원보다 훨씬 작지만 응급과 외상을 관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국립의료원과 동일하다. 권역응급의료센터에 음압병상을 만들어 감염병 관리를 가능하게 하면, 역시 응급, 외상, 감염병 관리를 한 곳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국립의료원이 국가 지정 재난병원으로서 중앙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전국에 산재한 권역응급의료센터가 ‘작은 국립의료원’이 돼 유기적인 시스템을 갖추는 것인데, 이는 복지부가 추진 중인 재난거점병원 강화 계획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수정을 거쳐 현실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복지부는 이미 지난 3월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재난거점병원화하고 현재 20개소인 권역응급의료센터를 연말까지 41개소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특히 이 계획에는 감염병 관리와 관련해 '의료자원의 선제적 확보’가 포함돼 있다.
권역응급의료센터를 감염병 관리까지 가능한 재난거점병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에 ‘각 권역응급의료센터에 음압병상을 10개 정도 마련한다’는 내용만 포함시키면 된다. 그렇게 되면 국립의료원 내 100개, 40여개 권역응급의료센터에 400개 등 전국 각지에 총 500여개 음압병상이 갖춰지게 된다.
이 정도면 메르스와 같은 신종감염병 사태가 다시 발생한다고 해도 우선 각 지역에 산재한 40곳의 권역응급의료센터에서 초기 대응을 실시하고 국립의료원에서는 즉각 컨트롤 타워가 돼 상황을 지휘, 응급환자 등 필요에 따라 중앙의 음압병상을 활용할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되면 메르스 사태 때처럼 전국의 모든 의료기관이 신종감염병에 노출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국립의료원과 권역응급의료센터가 감염병 관리를 도맡아 하는 것이 시스템화될 경우 환자 발생 시 지체없이 이송하면 되기 때문이다.
3000억이면 중앙+전국 커버 재난병원시스템 가능
국가 지정 재난병원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어느 정도 예산이 투입돼야 하느냐는 것이다. 현재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말하기는 이르지만 대략적인 추산은 가능하다.
별도 건물을 사용해 음압병상 1개를 설치하는데 약 3억5,000만원이 든다고 가정하면, 음압병상 100개를 만들기 위한 예산만 350억원이다. 여기에 각종 장비와 건물 건립비용까지 합하면 대략 1,000억 정도를 생각해야 한다는 게 재난의학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전국 40개 권역응급의료센터에 음압병상을 각각 10개씩 만든다고 하면, 음압병상 설치에 장비비를 포함해 센터 당 50억 정도를 지원해야 한다. 센터 40개에 모두 2,000억원이 필요하다.
재난의학회 관계자는 “국립의료원에 100개, 전국의 권역응급의료센터 40여개에 10개씩 400개 음압병상이 만들어지면 전국적으로 500개가 갖춰지는데, 이 정도면 감염병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며 “음압병상 설치 비용과 각종 장비를 갖추는 것까지 생각하면 2,000억~3,000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관계자는 “1,000억원이 넘는 예산을 들여서 감염병 전문 재난병원을 만들어서 평상시에 운영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지원하는 것이 현실적인 국가 지정 재난병원 건립 방안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력과 제2의 국가 지정 재난병원도 고려해야
음압병상을 갖추고 중앙과 지역이 연결되는 재난 대응 시스템만 잘 구축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다. 감염병 관리와 관련해서는 감염내과 전문의가 필요한데, 전국에 500개 음압병상이 더 생긴다는 것은 그에 비례해 감염내과 전문의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감염학회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 감염내과 분과전문의를 취득한(감염내과 분과전문의 번호가 있는) 의사는 총 191명이며, 한해 배출되는 감염내과 전문의는 10명에서 20명 사이다. 한해 감염내과 전문의가 최대한 많이 배출돼도 20명 이하라는 것이다.
현재 배출된 191명은 전국의 종합병원(총 293개소)에서 근무하기도 모자라다. 여기에 국립의료원과 권역응급의료센터에 음압병상이 설치되고 이를 운용해야 하는 감염내과 전문의가 필요해지면 감염내과 전문의 부족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다.
또 하나 고려해야 할 점은 감염병 대응 과정에서 국립의료원이 오염됐을 때 이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국내에는 좋은 대안이 있다. 군의무사령부에서 운영하는 국군수도병원 등 군의료기관이 그것이다.
재난의학회 관계자는 “군병원의 경우 원래 전쟁이라는 가장 큰 재난상황을 염두에 두고 운영되는 곳”이라며 “국가 지정 재난병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재난병원 설립에 대한 필요성이 고조된 상황에서 낙후된 국군수도병원을 전면 리모델링하고 국립의료원과 같이 재난 상황 시 중앙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감염병 관리 과정에서 국립의료원이 오염됐을 때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은데 이런 우려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군의료기관이 또 다른 축이 돼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군진의학의 새로운 역할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