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리댄스 교실의 왕언니는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가장 화려한 패션 스타일을 뽐냈다. 특히 연극배우 박정자를 연상시키는 언니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그 파동이 성대를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언니가 요즘 연습한다는 가곡 한 자락을 시원하게 뽑을 때면 박수가 절로 터져 나온다. 언니가 칠순 잔치 대신 강남의 한 연회장을 빌려서 반짝이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가곡 독창회와 리셉션 파티를 열었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들려온다.
여느 때 처럼 댄스 수업이 끝나고 탈의실에서 서로 뒤돌아서 옷을 갈아입는데 언니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언니가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줄 것처럼 내 얼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바로 그 박정자 배우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요?”
“네?”
“아침에 라디오에서 들었는데요..”
잠깐 뜸을 들이던 언니가 다시 눈을 반짝이면서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행복은 찾는 게 아니라 결심하는 거래요.”
“아…원효대사 해골 물…”
“난 이제야 알았어요. 정말 마음먹기에 달린 거였어요.”
박정자 언니는 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한 번 끄덕 하더니 금세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다음 일정인 노래 교실을 향해 사라졌다. 언니 목소리의 깊은 울림과는 다르게 내 머릿속은 앵앵거리기 시작했다.
원효대사 해골 물이라니. 원효대사가 한밤중에 비를 피해 들어간 곳이 버려진 무덤이었고, 목이 말라 시원하게 마신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에 고여 벌레가 우글거리는 썩은 물이었다는 걸 알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 근데 원효대사도 결국 아침에 다 토해낸 덕분에 겨우 살아난 것 같은데. 까딱했으면 깨달음이고 뭐고 이유도 모른 채 객사하실 뻔한 게 아닌가. 만약 원효대사가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셨다면 나는 ‘행복은 내 마음에 달렸다’는 말을 듣고 도대체 뭘 떠올릴 수 있었을까?
겨울 바람에 어깨를 웅크리며 집으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 춤을 추며 흘렸던 땀이 빠르게 식어 두피가 시렸다. 코앞에서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들고 인스타그램 앱을 열었다. 친한 동생 정원이가 새벽에 올린 사진과 글이 순식간에 떴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었다. 뇌종양? 검사? 암? 6개월? 이게 무슨 말인가. 다른 사람과 헷갈린 건가. 급하게 화면을 되돌려 이름을 확인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지만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글의 마지막 줄을 읽고 또 읽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멋쩍게 뇌종양만 지지고 퇴원하고 싶었는데. 왜 하필 나일까? 세상에 속은 기분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원이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카톡을 남겼다.
“인스타 보고 전화했어. 어느 병원이야? 통화하자.“
정원은 25년 전 대학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삼수 끝에 입학한 정원은 나 보다 두 살이나 많은 신입 부원이었다. 우리는 한국 대중문화를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주로 영화나 드라마를 분석하는 글을 쓰고 토론을 빙자한 술자리를 거의 매일 가졌다. 그러다 의기투합해서 함께 숨은 걸작 드라마와 영화를 발굴해서 연재하는 웹진을 창간하기도 했다. 나는 편집장, 정원은 부편집장. 기자도 둘 뿐이었지만 매달 기획 회의 부터 마감까지 정원과 함께 하며 세상에 우리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즐거웠다.
“나 요즘 ‘네멋대로 해라’ 폐인이잖아요. 와, 양동근 연기며 대사 하나하나가 뭐 버릴 게 없어 그냥. 누나는 거기서 어떤 게 특히 좋았어요?“
“야, 나보다 나이도 많은 게 왜 계속 누나래, 징그럽게. 그냥 선배라고 하랬지.“
정원은 내 반응은 아랑곳 않고 한 번 드라마 이야기를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었다.
”나는 공효진이 한 말이 되게 와닿았어요. 믿을만 하니까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어서 믿는 게 진짜 믿음이란 말이요. 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띠링~’
고개를 드니 어떻게 집에 도착했는지, 언제 해가 졌는지도 모르게 어두컴컴한 부엌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정원에게 답장이 왔다.
“고마워요. 누나, 곧 통화해요. 오늘 하루 행복하게만 지내요...”
누나는 무슨, 행복은 무슨…씨발. 나는 눈물과 함께 욕을 삼키며 한 자 한 자 답장을 보냈다.
“있잖아, 정원아. 나 오늘 알았는데, 행복은 결심하는 거래. 우리 행복하자.”
첫댓글 고생했어요!
김재은 문우님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기승전결, 내공이 느껴지는, 짧지만 메세지가 강렬한 글이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한줄 요약: 활력이 넘치는 밸리댄스 교실의 왕언니와 뇌종양 판정을 받은 친한 동생 정원이의 대조적인 삶을 통해 행복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
과제 아니더라도 한줄요약 습관화하는 연습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