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슬픔으로 밝히는 시의 진의(眞意)
박진희
고명자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나무 되기 연습(걷는사람, 2023)을 읽는다. 이번 시집에서는 의미와 정서의 깊이를 담보하는 시적 의장들이 돋보인다. 깊은 슬픔을 가로지르는 경쾌한 발성, 행간에서 비어져 나오는 속절없는 그리움, 기호의 경계를 초월하여 대상과 합일되는 언어 등등 그의 시에서는 정서와 의미에 조응하는 다양한 의장들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시인의 시를 읽는 재미이기도 하거니와 읽을수록 더욱 깊고 넓은 의미를 느끼게 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무엇보다도 삶의 구체성에서 구축되는 농밀한 서정성과, 끝내는 그 구체성마저 자유롭게 풀고 마는 상상력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야야, 니는 무슨 짓을 해도 이쁜 거 니는 아나
짱배기에 까마구가 집을 짓드락 디비 자고
눈티 밤티 되드락 울어싸도 이쁘다
야야, 이거 다래라 카는 긴데 함 무 바라
억수로 귀한 기라
쎄그랍다꼬?
가스나, 요래 이쁜 말 안즉 쓰고 노는가베
오야 오야 그래, 쫌 쌔그랍제 몸서리쳐 감서 무 보래이
쌔가 깨춤을 추제? 그기 참맛인 기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고려가요 청산별곡 니 국어 시간에 배았다 아이가
거서 나오는 그 다래인 기라
과실 한 쪼가리도 역사가 있다 아이가
딸아, 니는 지금 조상님들의 한가운데를 사뿐히 걸어가는 기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살어리랏다
산에 드가가 나무 열매 따 묵고 청청(淸淸)하게 살자
껄뱅이라 웃어싸도 멋지다 아이가
그거 아나, 너거 아빠도 그래 살고 싶어 했다
추저분 세상에 발 담그지 말고 쪼매만 묵고 살자
그 맴을 이자 알아 무신 소용이고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리노라
가을빛에 몰캉몰캉 잘 익었데이
니맹키로 예쁜 새댁이가 무슨 짚은 뜻이 있었는가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강원도 청정 산골짝에 드가 키웠다 카드라
요즘 너거들이야 지 살고 잡은 대로 산다 아이가
얼매나 좋은 세상이고
바바라 야야 니도 퍼뜩 시집가 다래 같은 알라 좀 낳아도
-「쌔그랍다는 말」 전문
박목월은 「사투리」라는 시에서 그가 사랑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 “울타리 섶에 피는 이슬마꽃”을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기보다 /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표현했다. 박목월에게 “내 고장의 사투리”는 “나무나 하늘이나 꽃”과 같은 기표에 대응하는 기의나 개념, 즉 사물을 지시하는 기호로서의 언어가 아닌 셈이다. 어느 찰나의 그 ‘밤하늘’처럼 순간성, 고유성을 함의한, 대상 그 자체로서의 언어이자 대상과 원초적 통일을 이루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위 시 또한 동일한 의미망에 자리한다. 이 시의 제목이기도 한 ‘쌔그랍다는 말’은 단순히 ‘시다’라는 의미와 결합하는 기표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경한 사투리로, 기표에서 곧바로 기의를 떠올리는 자동적 인식의 과정을 일탈하는 까닭에, 그것에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먼저 인식된다. ‘쌔그랍다’는 말은 경음으로 발화되지만 ‘딸’과 ‘다래’와 연결되면서 연하고 싱그러우면서도 강인한 느낌을 준다. 시인이 부기한 각주를 통해 ‘시다’라는 의미를 인식한 후에도 이러한 감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 시에서 ‘쌔그랍다’는 ‘다래’의 맛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다래’에 다층적인 시간성이 포회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청산별곡’의 제유로 기능하는데 ‘청산별곡’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산에 드가가 나무 열매 따 묵고 청청(淸淸)하게” 사는 삶과 존재, 곧 자연과 합일된 삶과 자연의 일부로서의 인간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상실된 근원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래’의 맛이란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삶에 대한 감각으로 의미화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적 자아가 ‘딸’에게 ‘다래’를 ‘몸서리쳐 가면서라도 먹어보라’고 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청산별곡’의 삶은 현실에 부재하는 것이자 “너거 아빠”가 갈망했던 삶이기도 하다. “추저분 세상에 발 담그지 말고 쪼매만 묵고 살자”는 의지가 그것인데 서정적 자아는 그 맘을 너무 늦게 헤아리게 됨을 아파하고 있다. ‘청산별곡’의 삶을 표상하는 ‘다래’의 역사는 이렇게 ‘조상님’에서 ‘너거 아빠’, ‘딸’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다래 같은 알라”라는 미래에까지 기투되고 있다. 이 시에서 ‘다래’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성이 혼융되어 자연이라는 근원과 사랑, 그리움, 성찰, 구원, 희망 등의 의미를 발현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고유한 감각이 ‘쌔그랍다’인 것이다.
이 시가 사랑스럽고 명랑하면서도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언어의 기능을 초월하는 시어에 힘입은 바 크다. 이 시집에 실린 많은 시들이 그러하다. 시인의 시에서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지시하는 매개체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념이나 관념이 아닌 구체적 감각에 맞닿아 있으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층적이면서도 조화로운 합일을 이루어 내는 기능을 한다. 시인의 시어는 삶의 본질이랄까 근원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을 분출한다.
무덤의 깊이로 내 마음
을 파내서
너를, 꺼내 버려야 하겠다
두 손 두 발로 빌고 생떼도 써 보고
딱 한 철만 더 살아 달라는 애원을 저버린
너를
바위인 듯
꽃인 듯
포개 살다
너에게서 빠져나오는 길 잃어버렸다
상한 기억의 향기는 저승까지 따라간다 하기에
헌 신발 두 짝 불 위에 올려 주니
한껏 살던 지상이라 오롯이 타오르네
한 허물에 두 몸
하늘이 제 몫이라 데려가 버리네
그래서 행여 못 돌아올까 봐
대문 열어 놓고
조등 걷어 들이니
차진 어둠이 바닥을 치고 오른다
-「그런 방 한 칸」 전문
이 시에서는 무엇보다도 분행 처리가 눈에 띈다. “무덤의 깊이로 내 마음 / 을 파내서”가 그러한데 ‘내 마음’과 목적격 조사 ‘을’ 사이에서 행을 바꿔 통사적 규칙을 파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긴장과 의미의 강조를 위해 시인들은 의도적으로 예기치 않는 곳에서 행갈이를 하곤 하지만 단어에 붙여 쓰는 조사를 분리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파격적인 분행 처리는 독자의 시선을 오래 ‘마음’이라는 시어 앞에 붙들어 두고 시를 읽는 내내 의식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서정적 자아에게 ‘너’는 “바위인 듯 / 꽃인 듯 / 포개 살”고 “한 허물에 두 몸”이라 할 만큼 일체감을 느끼는 존재이다. 그런 ‘너’가 “딱 한 철만 더 살아 달라는 애원을 저버”리고 ‘하늘’로 가버린 것이다. “무덤의 깊이로 내 마음 / 을 파내서 / 너를, 꺼내 버려야 하겠다”는 시구는 서정적 자아의 더할 수 없는 깊은 절망과 상실감을 표현한 탄식이자 그만큼 ‘마음’ 깊은 곳에 ‘너’가 자리하고 있다는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차진 어둠이 바닥을 치고 오”르는 “그런 방 한 칸”이란 ‘너’가 없는 실질적 공간이자 “행여 못 돌아올까 봐 / 대문 열어 놓고 조등 걷어 들이”는 서정적 자아의 ‘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한 땀 한 땀의
시
한 땀 한 땀의
읊조림
졸음은 처녀보다 힘이 세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피댓줄에 머리카락이 감겨들어도
잠은 온다, 뒤통수에서
미싱 대가리와 너희는 용량이 같다
졸지 마라
다섯 달 치 월급 그 까짓거 쫌 기다려 봐라
시간은 바이어스처럼 늘어나 매일매일 새날이니
처녀들아 너희 흰 손가락을 바쳐라
졸음의 특효약
약종이에 베껴 온 시(詩)를 털어 넣고 오물거렸다
무엇과도 섞이지 않으려고 미싱 다이 한쪽에 시를 감춰놓고
혼자 곱씹는 행복 때문에 미안했다
시에는 눈총과 소음 먼지와 잠이 없다
처녀들의 햇무 같은 종아리에
파란 힘줄이 장다리꽃으로 번져 갔다
미싱 발판 죽어라 밟아도 꽃밭에는 닿지 못한다
약봉지처럼 창백한 얼굴에 마른버짐이 퍼져 갔다
땡땡이 가라 월남치마는 불티나게 팔렸다지만
지구의 아줌마들이 환호했다지만
사장은 튀고 말았다
시다, 오바로꾸, 미싱사 언니들은 웅성웅성 뿔뿔이 흩어졌다
공장은 많고, 많고 많은 이 땅에
월급을 떼여도
평화를 찾아 날아가는 비둘기 떼
그럼에도, 시는 분노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평화시장은 가난을 배우는 교실
교복이나 책가방 따위 허울은 필요 없다
시 한 편과 같은
그런 평화
졸음처럼 와 주시길 졸면서 읊조렸다
-「처녀들의 난1 – 시, 눈총, 잠」 전문
나무 되기 연습에는 「국수」 연작이나 「처녀들의 난」 연작 등, 시인이 젊은 시절 평화시장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경험을 소재로 쓴 작품이 여러 편 있는데 위 시도 그중 하나다. 이 시는 특히 시인에게 시가 어떤 의미인지를 밝혀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파란 힘줄이 장다리꽃으로 번져”가는 종아리, “약봉지처럼 창백한 얼굴”, “마른버짐이 퍼져”가는 얼굴, “다섯 달 치” 밀린 월급 등에서 봉제공장 노동자의 현실을 엿볼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잠을 쫓는 약을 먹어가면서까지 일한 덕분에 “땡땡이 가라 월남치마는 불티나게 팔렸”고 “지구의 아줌마들이 환호했다지만” ‘사장’은 월급을 정산하지 않은 채 “튀고 말았다.” 열악한 노동 현실에서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또 다른 시 「처녀들의 난3 – 스무 살은 끝나지 않았다」를 보면 ‘처녀’들은 ‘붉은 머리띠의 전사 언니’의 권유로 “노동조합 가입 신청서에 립스틱 바른 막도장을 찍”는다. “사당동 태림전자 주먹 불끈 처녀들”은 옥상에 올라가 투쟁했지만 ‘전사 언니’는 “우리를 팔아넘기고 튀었”고 “우리는 몽땅 해고되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공장은 많고, 많고 많”으며 “월급을 떼여도” ‘처녀’들은 평화시장의 또 다른 공장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날 뿐이다. 또다시 졸음 쫓는 약을 먹어가며 ‘소음과 먼지 눈총’ 속에서 일을 할 것이다. “평화를 찾아 날아가”지만 ‘평화시장’엔 ‘평화’가 없다. 시인에게 ‘평화’는 ‘평화시장’에 있지 않고 ‘시’에 있었다.
위 시에서 ‘시’는 서정적 자아로 하여금 현실을 견디게 하고 현실을 초월케 하는 무엇이다. “시에는 눈총과 소음 먼지와 잠이 없”고, 착취가 일상화되어 있는 부조리한 현실에서도 “시는 분노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수동적인 체념이나 무기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수출의 역군이라는데 우리도 우리가 아까웠던 거야”(「처녀들의 난2 –봄밤」), “꽃다운 나이를 잊으려 우리는 더 꽃답게 피어나야 했다”(「처녀들의 난3 – 스무 살은 끝나지 않았다」) 등등 그의 시에는 명랑하고도 강인한 저항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가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의식과 정서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시’의 힘일 터이다. 서정적 자아가 “무엇과도 섞이지 않으려고 미싱 다이 한쪽에 시를 감춰놓고 / 혼자 곱씹”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자아의 정서가 “혼자 곱씹는 행복”에서 멈추지 않고 ‘미안함’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느끼는 ‘행복’, 곧 공동체적 유대에 대한 시인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 주고도 모자란 듯 / 몸에서 몸을 꺼내어 서로 먹여 준다”(「황간역에서」)에서 보듯 시인은 곤곤한 현실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에 대한 절망이나 ‘분노’가 아닌, 대상 간의 미안함과 고마움, 애틋함의 정서로 발현시키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터득한 ‘시’의 진의가 아닐까.
나무 되기 연습을 꼼꼼히 읽다 보면 시인이란 시를 ‘쓰는’ 사람이라기보다 시를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명자 시인이 그러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