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완성(반야부 경전들)
3. 지혜(반야)와 지혜의 완성 지혜는 안타깝게도 정말 드물지만, 반야(般若, prajñ?)는 그렇지 않다. 이 명백한 역설 때문에 ‘반야’를 ‘지혜’로 번역할 때면 조심스러워진다. 반야는 정신적인 사건, 의식의 상태인데, 보편적으로 인도-티베트 불교도들의 상황에서 이것은 분석과 탐구를 통해 얻어진 의식의 상태를 뜻한다.
『아비달마집론(阿毘達磨集論, Abhidharmasamuccaya)』 에서는 ‘반야의 작용이 의심을 제거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부 불교 저술들은 세속적인 반야를 언급하는데, 이것은 분석을 통해서 문법, 의학 또는 다른 세속적인 기능들을 이해하는 것을 뜻 한다. 이러한 기능들은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종교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저술들은 또한 ‘형이상학적’ 이해라고 칭할 수 있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깊고 예리하며 정밀한 사유를 통해 얻어진 최상의(param?rtha)반야를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반야는 불교 뿐만 아니라 불교와 경쟁적인 관계에 있던 비불교도의 사상체계에서도 보인다. 반야는 분명 의심을 제거한 것이지만 불교도의 관점에서 보면 불완전한 분석의 결과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비바사부에서 언급한 것처럼 거짓 반야(Jaini, 1977)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저술의 주된 관심은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있으므로 반야는 존재의 궁극, 참된 상황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의미한다. 따라서 비대승인 『아비달마구사론소(阿毘達磨俱舍論疏, Abhidhar mako?a Bh??ya)』에서 반야는 단지 아비달마 분석의 종결점을 표시하는 궁극적인 다르마들에 대한 통찰을 의미한다.
그러나 제1장에서 몇몇 비대승 학파들 뿐만 아니라 초기 대승에서도 세계를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다르마들에 대한 가르침을 다르마도 공하다는 법공(法空, dharma??nyat?)으로 배제하였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르마들은 자성이 결여되어 있고 궁극적 실재가 아니며 분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파들에서 아비달마와 결합된 분석은 매우 초기에 종결되었고 따라서 이러한 반야는 불완전한 반야이고 반야바라밀(지혜의 완성)이 아니며 실재하는 반야가 전혀 아니다.
이제 반야는 공성(空性, ??nyat?), 즉 다르마들에 조차도 자성이나 자아가 결여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의식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 반야가 반야부 경전의 주요한 관심사이고, 또한 어떤 비대승 학파에서도 이를 주장한 것으로 보이므로 티베트에 동산부(東山部, P?rva?aila)에 속한 방언인 프라크리트(Prakrit)어로 된 비대승의 반야부 경전이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인도-티베트 전통에서 지혜(반야)는 주로 분석에 의한 이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그 대상에 친숙해지는 것을 곧잘 구분하곤 한다. 예를 들면 누가 갑돌이인지를 아는 것과 실제로 갑돌이를 만나서 즐겁게 노는 것이 다른 것과 같다.
존재 자체를 이해하는 지혜를 말하는 데 있어서 깊은 명상·분석을 통해 존재의 실상을 지적(知的)으로 아는 것(‘아하, 이것이 존재의 실상이구나!’ 하고 아는 것)과 그 경우에 해당할 다르마나 공(空)과 같이 그러한 분석의 결과를 지향하는 ‘불가사의한’ 멸진정(滅盡定)의 체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야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전환점에 직면하게 된다. 반야는 때로 멸진정의 내용인 존재의 실상이자 궁극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섭대승론(攝大乘 論, Mah?y?nasa?graha)』 에서는 지혜의 완성을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kajñ?na)라고 부른다. 이것도 역시 반야이고 지혜이다. 왜냐하면 그것도 여전히 분석의 결과에서 기인한 의식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비록 명상적 분석이 외계 대상을 정화하고, 그것을 초월했을지라도 마음은 명상적 분석의 결과인 한 대상에 집중된 상태인 심일경성(心一境性)으로 남아있다(제3장을 보라).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예들이 분별적인 반면에 이 반야는 무분별적이며 비이원론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분별적인 것과 무분별적인 것은 다르다는 사고에 의해 특정 종파가 성립되었다. 그것은 특히 분석의 결과로는 반야를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모든 분석적이고 분별적인 사유를 끊어 버린 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결과가 반야라는 결론에 이른 동아시아 선사들의 입장으로 나타난다.
중국의 몇몇 종파에서 반지성주의를 특히 강조하고, 개념적인 사고를 배격하는 것을 도교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도덕경』의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 非常道)’ 를 참조하라] 그것은 이에 대한 인도적인 기반과 전례가 있었기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Williams 1980: 특히 25-6).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반야’와 그것의 완성을 분별적 이해와 무분별적 이해가 상호 연결된 형태라고 보았다. 그러나 의미상으로 주목해야할 또 다른 면이 있다. 관점을 옮겨서 명상의 이해 가능한 의미에서, 반야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는 내용 또는 대상이 그러한 궁극적인 자각과 동등한 것 즉, 여기서는 공 자체인 무분별지 그러므로 비이원적인 자각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므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지혜의 완성을 불멸하는 ‘모든 다르마들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붓다들이 나타났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간에’ 어떤 궁극적인 존재가 없는 공(空)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승에서 이해하고 있는 궁극적인 반야와 지혜의 완성인 반야바라밀이 같다고 생각한다. 대승과 비대승의 자료들에서는 불성(佛性)의 완성을 위해 오랜 수행을 하는 보살의 수많은 바라밀 (波羅密)을 언급한다.
가장 흔히 언급되는 것으로는 보시(d?na), 지계(??la), 인욕(k??nti), 정진(v?rya), 선정(dhy?na), 지혜 (prajñ?)의 여섯 가지가 있다. 지혜바라밀은 눈뜬 사람이 장님을 이끄는 것[『입중론(入中論, Madhyam?k? vat?ra)』 6: 2]처럼 다른 바라밀들을 이끌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후대의 주석가들은 지혜바라밀 자체로만 충분하며 다른 바라밀들은 불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기도한다.
월칭은 자신의 『입중론』에서 세속적인 바라밀과 출세간적인 바라밀을 구분하였다(1, 16). 보시를 예로 들어 그 차이점을 보면, 출세간적인 바라밀은 보시하는 자, 보시하는 물건, 보시받는 자의 개념이 없는 보시이다. 즉 그것은 완전한 반야의 관점에서의 보시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지혜의 완성은 세속적 지혜를 초월한 지혜이며 특히 아비달마 학자들과 대승을 연결해 준 지혜이다. 그것은 좀 더 정밀한 분석이 가능하고,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완전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보살의 광대무변하고 자비로운 선행에서 생겨난다는 점에서 아비달마의 지혜를 뛰어넘는다.
4. 무아설(無我說) 에드워드 콘즈는 최초의 반야부 경전이 『보덕장반야경』의 처음 두장 과 『8천송반야경』 가운데 그에 상응하는 장들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보덕장반야경』은 비표준 산스크리트어로 된 게송들이고, 이 게송들이 본래 다른 많은 대승경전들의 모델로서 『8천송반야경』에 삽입되었다고 할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부분들이 최초의 반야부 경전이라는 콘즈의 주장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추후의 연구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이들은 확실히 초기 형태이면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반야 바라밀의 중요한 특징과 교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경전에 오랜 역사성을 부여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 가운데 경전 자체의 권위를 세워야겠다는 직접적인 요구 때문이다. 사실 반야부 경전의 권위를 부정한 보살들도 있었다(예를들면 Conze 1973a: 139 이하). 그들은 악마인 마라에 지배받았다. 그들은 또한 반야부 경전에 대해 중상모략하면서 붓다들도 중상모략 한다.
그러므로 모든 붓다들이 그들을 파문할 것이고, 지옥들에 떨어져서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8천송반야경』에서 붓다 이외의 중요한 설법자는 해공제일(解空第一)인 수보리(須菩提, Subh?ti)이고, 전통적으로 제자들 가운데서 지혜제일로 여겨지며 아비 달마의 후원자였던 사리불(舍利弗, ??riputra)이 아니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반야부 경전의 지혜는 모든 산만한 사유들을 일소시키고 진정한 평화를 낳는 지혜이다. 그러나 그 경전에서는 이 모든 수보리의 가르침들과 다른 스승들이 진리(즉 반야)에 맞게 설법한 것들은 사실 그들을 통해 붓다가 설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실로 경전은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끝맺는다. “이 지혜의 완성(반야바라밀)을 듣고, 이를 받들고, 연구하고, 유포시키며, 반복해서 쓰며, 존경·숭배·찬양·경배하는 중생들은 여래가 있는 곳에서 사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보덕장 반야경』에 서술되었듯이 “그들의 가르침은 오직 붓다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지 그들 스스로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Conze 1973a: 9).
대부분의 대승경전들과 마찬가지로 반야부 경전들은 현학적인 논쟁, 철학적 논쟁에는 빠지지 않았다. 철학적인 논쟁에 대해서는 철학적인 학파들 특히 중관파를 살펴보아야 한다. 반야부 경전들은 진리의 관점에서 행위와 존재의 참된 길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반야바라밀의 모든 주장은 지혜의 완성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며, 즉 절대적으로 자성이나 궁극적인 존재는 없지만 오직 세속제에서만 존속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붓다의 인식에서 발생한 것이다.
모든 실체는 환상 속의 대상과 같은 것이다(『보덕장반야경』 1: 14). 이렇게 승의와 세속이라는 두 차원을 바꾸어 보면 그로 인해 드러나는 명백한 모순들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Conze에게는 실례지만) 지혜의 완성에는 진정한 모순도 없고, 모순된 말도 없다.
반야부 경전의 중요한 존재론적 메시지는 붓다의 무아의 가르침을 모든 사물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무자성으로 확대한 것이다. 그 주장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어떤 것보다 어떤 무엇을 가진다는 다르마들의 ‘자성’(위의 제1장을 보라)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단지 의식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어떤 진실한 독립적인 실체의 견지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포말(泡沫)과 같다. 그들은 (존재론적 으로) 파괴될 운명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부정을 통해 부정하는 일원론적 절대론의 어떤 형태가 아니다. 승의제는 궁극적 실체와 같은 것이 없고, 그런 것은 빨리 버릴수록 더 좋다.
수보리: 나는 심지어 열반조차 환상과 같고 꿈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밖의 것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천신들: 장로 수보리여, 그대는 열반조차도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수보리: (열반보다) 더 뛰어난 어떤 것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환상과 같고 꿈과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Conze 1973a: 99)
누가 이러한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세상의 누구도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진실로 어떤 것도 가르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대승의 철학적 기원은 비대승 부파들에서 주장하는 인무아(人無我, pudgalanair?tmya)에서 대승의 법무아(法無我, dharmanair?tmya), 즉 법공(法空, dharma??nyat?)으로까지의 변화라고 널리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반야부 경전 자체에서 발견되는 가르침의 이미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법무아와 상반되는) 인무아 사상이 아비달마적 해석의 한 특징인 것은 확실하다. 반야부 경전은 분명히 다르마에 자성이 있다는 개념에 반대하지만, 이것이 비대승부파에 대한 반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모든 다르마들이 항상 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제법항유(諸法恒有)를 주장한 아비달마의 학파들과 비대승부파들은 같은 부류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다르마들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교리를 주장한 것은 비대승부파들이었다. 팔리어경전 『숫타니파타』에 공(空)과 유사한 가르침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명상적으로, 그러나 그럴듯하게) 반야부 경전을 찬술했던 이들이 단순한 인무아의 가르침은 위험한 개혁이라고 보았음을 시사한다. 혹은 아마 (누가 알까?) 어떤 아비달마의 접근법을 선호한 사람들 가운데서 찾은 미세한 형태의 집착을 주장하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자만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어쨌거나 월칭이 오온(五蘊) 각각은 물거품, 신기루, 환상 등과 같다고 한 주류 불교도들이 받아들인 경전 (현존하는 팔리어 경전인)의 한 구절을 지적한 것(『입중론소』 1: 8)은 분명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지적은 대승의 몇몇 추종자들에 관한한 붓다가 비대승주의 자들에게 공·인무아뿐만 아니라 법무아도 가르쳤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또한 『8천송반야경』도 참조 바람. Conze 1973a: 167).
둘째, 반야부 경전은 완전한 공이 반드시 비대승의 다르마들에 대한 가르침에 반대하는 대승주의자들의 교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덕장반야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서(善逝)의 제자나, 벽지불(?支佛) 또는 법왕(法王)처럼 되려고 하는 자들이 이 인욕바라밀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각자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은 피안을 향해 움직이지만 눈은 피안을 바라보지 않는다. (Conze 1973a: 13)
『8천송반야경』에서는 “이 불가사의한 법을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 그 누구도 성스러운 삶이라는 과보를 얻거나 유지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앞의 책: 98). 그리고 또 “성문(聲聞)이나 벽지불이나 보살이나 간에 누구나 이 지혜의 완성에 대해 들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혜의 완성 안에서 수행해야만 하고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한다(앞의 책: 84).
여기서 『8천송반야경』이 말하는 것은 지혜의 완성, 즉 공에 대한 이해 없이는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집착을 끊고 조금이라도 성인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존재의 실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다르마에 대한 집착도 집착이다. 따라서 성문승들의 목표는 아라한의 단계이지만, 이 목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르마에 자성이 있다고 가르치는 아비달마를 따르는 사람은 (대승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제한된 목표조차도 얻을 수 없다. 위대한 티베트 학자 총카파(Tsong kha pa, 1357~1419)의 말을 빌리자면 대승의 특징은 제법무아의 가르침이 아니라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완전한 깨달음의 길로 향하는 보살의 광대한 선행과 자비이다.
따라서 아비달마의 주석에서 지혜의 완성이라는 용어는 실제적이고 궁극적인 존재, 즉 다르마들을 찾는 것이다. 초기 반야부 경전들은 미지의 그것으로 표현되는 다르마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으며, 그 대답은 그런 다르마는 찾을 수 없고, 실제로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어떤 지혜도 없으며 최고의 바라밀다도 없다. 보살도 없으며 깨달았다는 생각조차도 없다. 이것을 듣고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보살은 선서의 지혜로 나아간다. (Conze 1973a: 9)
보살은 놀라서는 안 된다. 『8천송반야경』은 이렇게 말한다 세존이시여! 만약 이러한 것을 배울지라도 보살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지지 않고, 그렇다고 무감각하지도 않으며,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면, 포기하지도 낙심하지도, 근심하거나 공포에 떨지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입니다. 이는 지혜의 완성을 배운 마하살입니다. (앞의 책 84)
이 가르침들이 종교적 가르침으로서 얼마나 비범하며, 이 가르침을 처음 접한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가르침을 명상과 삶속에서 실천하려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완전한 포기가 요구된다. 완전한 포기라는 ‘실존적 해방’, 즉 미세한 집착마저도 끊어 버리는 것은 무수한 노력과 적응을 요구하며, 진지하게 고려할 때는 매우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보덕장반야경』은 이것이 바로 진정한 포기라고 말한다.
색수상행식의 오온 어디에도 이들이 쉴 곳은 없다. 집도 없이 방황하므로 다르마들은 이들을 결코 붙잡지 못하며 또한 이들도 그것들을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승자(勝者, 붓다)의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 (앞의 책: 9-10, 13 참조 바람)
언어는 동시대의 독자(혹은 암송자)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집없이 방황한다는 이미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경전들은 이 점을 더욱더 강하게 지적하지만 『보덕장반야경』은 여전히 시적 미묘함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한다. 진정한 포기란 모든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이는 분명히 승단 조직과 같은 사회적 제도에 반영될 수도 있고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는 정신적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 있다. 반야부 경전에서 보살은 산만한 사유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다. 이는 분석의 결과로서의 반야에 대한 산만한 사유의 제거와 결부시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반야부 경전들은 붓다의 비이원론적이고 무분별지라는 관점에서 말하면서 어떻게 보살들이 그런 인식의 단계에 도달하는가에 대해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혜는 분석을 확장하여 공성의 진리를 가능한 한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지혜의 완성을 위한 근원으로서의 지혜가 단순히 산만한 생각들을 끊고, 마음을 공하게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이는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오류일 것이다. 아마 이 오류는 ‘결과와 원인을 혼동한’ 불교해석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총카파가 지적한 대로 정신적 가치, 구원적 가치는 실신 혹은 선정이나 깊은 잠 또는 꿈조차 꾸지 않는 깊은 숙면에서 나왔을 것이다.
물론 불교 부파들이 어떤 사람이 반야부 경전들에서 추정하는 자각의 상태를 얻었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경전들에서 그것을 초래하기 위해 어떤 수행들을 상정하거나 힌트를 주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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