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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경 시집-낮술 한잔할래요
책 소개
김옥경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낮술 한잔할래요』는 3부로 나뉘어 담긴 60편의 시들로 삶의 넓고 깊은 세계의 본질을 알아가면서 스스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의 답을 찾아 죽음이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시인의 말
한 발은 정상에 두고
다른 한 발은 광기를 밟고 선 나
온갖 의식과 내가 모르는 무의식 속의 나
위선과 거짓을 혼동하던 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던 언어들로
잠들지 못하던 나
길 밖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나
세 번째 시집으로 주저 없이 뛰어든 나
2024년 게으른 봄날
「시인의 말」 전문
차례
---1부
검은 선들이
목줄
낮술 한잔할래요
종이접기
왜 이리 일찍 피었나
나비란
7. 물비린내
8. 모빌
9. 카페의 사각 유리창 너머의
10. 불면증
11. 데드플라이
12. 태양광 사나이
13. 몬순
14. 여러 개의 그림자
15. 검은 레이스의 길 위에서
16. 맨살에 니트를 걸친 것처럼
17. 외면
18. 유통기한
19. 뿌리의 꿈
20. 슬픔을 건너뛸 때마다
---2부
21. 벼꽃
22. 겨울이 오기 전
23. 밤비가 내고 간 소리
24. 내 기억속의 통리역
25. 나무의 숲
26. 향기에 취하는 방식
27. 세상에서 가장 좁은 골목
28. 반월당역
29. 내 귀에 새가 앉았다
30.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당신이 와있다
31. 부고
32. 물빛시간
33. 풀잎에 베이다
34. Hode Mi Cras Tibi
35. 나비는 무슨 향기를 맡고 왔을까
36. 슬도瑟島
37. 행복은 행복하지 않아요
38. 만약에 되돌릴 수 있다면
39. 구름이 정말 양 같아요
40. 오월
---3부
41. 새의 의식
42. 사하라
43. 실연
44. 해갈을 위하여
45. 먼지가 고요하다
46. 건조한 사랑
47. 독일마을에서 하룻밤
48. 버렸다고 생각한 허물이 다시 내게로
49. 탯줄도장
50. 노을카페를 여는 그 여자
51. 두고 간 편지
52. 황사
53. 잠시 머물다간
54. 신발 속 작은 돌멩이를 털어내고
55. 셧다운
56. 원격조정
57. 무릎을 꿇고 앉으며
58. 부조리
59. 학대
60. 적막이 깊다
■ 해설
‘낮술’로 시의 사막을 건너는 법
김남호(시인, 문학평론가)
1.
김옥경 시인의 페르소나는 위태롭다. 첫 시집부터 그랬다. “가끔씩 젖은 빨래를 꺼낼 때/내 유두는 전류와 내통한다”(「오래된 세탁기」)고 고백하는 여자, “실연의 상처를 견디지 못해/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젊은 사내”(「케사케마스의 죽음」)를 연모하는 여자, “내 머릿속에/이스트 한 봉지를/털어 넣어볼까”(「시인이 시에게」) 망설이는 여자, “여보세요 여보세요/불러도 대답이 없”(「벽에 걸린 여자」)는 여자. 그의 첫 시집 제목은 『벽에 걸린 여자』였다.
두 번째 시집에서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떤 측면에서는 더 위험해 보였다. “아버지,/정녕 제 몸을 원한다면/(…)/나를 가져요/그래야만 저도 짐승이 되어/아버지를 받아들일게요”(「사량도 옥녀봉」). 물론 두 번째 시집 『바다의 전설』은 시집 제목처럼 전설이나 신화에서 시의 서사를 끌어온 것들이니 단순히 인간의 자로 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신화든 전설이든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점에서 시인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세번이라고 했던가. 이번이 그의 세 번째 시집이다.
2.
이번에도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위태롭다. 하지만 이전보다 많이 숙진 느낌이다. 이번 시집의 위태로움은 앞의 두 시집과는 결이 다르다. 첫 번째 시집의 위태로움이 정체성을 찾지 못한 자의 존재론적 방황에서 오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시집의 위태로움은 현실을 피해 전설을 찾아 섬을 떠도는 자의 허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세 번째 시집의 위태로움은 앞의 것들과 어떻게 다른가?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의 위태로움이 변증법적으로 결합됐다고나 할까. 방황과 허무의 늪을 지나 가까스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은 듯한 위태로움이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
굶주린 개들이
밤을 물어뜯으며 돌아다니다
마을로 찾아든 다음 날
늘 묶어둔 것이 안쓰러워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목줄을 풀어주었더니
미친 듯 뛰쳐나가던 녀석
두어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너의 본능을 일깨워주고 간
낯선 정체는 무엇인가?
목줄을 쥔 자와 목줄에 걸린 자
밥줄과 목줄 사이의 곡예에서
넥타이를 던져버린 나처럼
털 묻은 목줄을 벗어놓고 가버린 너는
이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비가 내린다,
동짓달 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텅 빈 너의 밥그릇엔
빗물만 가득하다
- 「목줄」 전문
키우던 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개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에 어둠을 “물어뜯으며 돌아다니”는 “굶주린 개들”이 “마을로 찾아든”다. 이게 사건의 발단이다.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낯선 개들을 보고 묶여 있던 시인의 개는 미친 듯이 날뛰었을 것이고, 안쓰럽고 미안해서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목줄을 풀어”준 게 화근이다. 한번 자유를 맛본 개는 “두어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시인은 생각한다. “너의 본능을 일깨워주고 간/낯선 정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순치된 개를 각성시켜 묻혀있던 야성을 일깨워주었을까?
그러면서 돌아본다. “밥줄과 목줄 사이의 곡예에서/넥타이를 던져버린 나”를. 그러면서 생각한다. 도대체 나의 본능을 일깨워준 낯선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하고. “털 묻은 목줄을 벗어놓고 가버린 너는” 이제 나의 소유물이 아니듯이, 넥타이를 풀어버린 나 역시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결국 ‘나’를 위태롭게 몰아간 원인은 두 가지. 하나는 나의 주위를 얼씬거리는 굶주린 욕망들, 다른 하나는 그런 욕망 때문에 벗어던진 넥타이.
위태롭다는 건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보기에 온전하지 않거나 위험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위험하게 보이는가. 보편과 상식의 선에서 이해할 수 없고, 다음에 이어질 행위에 대해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행위가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위협을 가하기 (혹은 가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위태로워졌는가. 깨어난 자의식 때문에 오랜 사회적 관습과 규율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다.
3.
안주(安住)를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들이나 행복을 절대적 가치로 숭상하는 자들에게 각성(覺醒)이란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다. 각성을 통해 시인이란 존재는 ‘행복할 권리’뿐만 아니라 ‘불행할 권리’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맞닥뜨릴 시간은 순탄할 리가 없다.
깊은 밤, 나는 사막의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가 되어버렸어요
제 그림자로 검게 태운 나이테
참 질기고 질겨 끊어지질 않네요
물이 없어요
수분이 빠져나간 나의 몸이 너무 가려워요
온몸을 빡빡 긁어댑니다
긁힌 자국에서 먼지가 일어나요
먼지가 일어날수록 점점 가려워진 몸
나도 내 몸을 알 수가 없네요
- 「데드플라이」 부분
목줄의 바깥은 자유가 아니라 사막이다. “참 질기고 질겨 끊어지질 않”는 “제 그림자로 검게 태운 나이테”를 목줄 대신 감고 있다. 당연히 물은 없다. “수분이 빠져나간 나의 몸이 너무 가”렵다. 온몸을 빡빡 긁어댈수록 먼지만 풀썩인다. “먼지가 일어날수록 점점 가려워진 몸/나도 내 몸을 알 수가 없”다. “저녁시간이면 눈물이 자꾸 흐른다/눈을 깜박거려 봐도 수건으로 닦아 보아도/사라지지 않고 눈썹마다 바짝 붙어있는 눈물/두 손으로 문질러 본다/눈과 눈 사이 번지는 사방 연속무늬”(「물빛 시간」)의 시간이 기다릴 뿐이다. 안구건조증 같은 시간. 건조할수록 눈물은 주체할 수 없고, 핏발선 눈빛이 될 뿐이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핏발선 눈으로 내가 나를 아파하고 연민한다. ‘낙타’인 내가 ‘선인장’인 나를.
사막에는 전설이 흐르고 있어
그 기억의 끝을 따라가 보며
어둠이라는 사막을 거닐던 당신은
늘 목마른 낙타였지
갈증을 견디기 어려워 마신 술병들이
여기저기 리듬을 타면서 빙빙 돌아다녔지
그러다 마주친 한 여자
온몸에 가시가 잔뜩 돋아있던 그녀
당신은 선인장이라 부르며
문밖에 내어 놓았지
밤에도 낮에도
- 「사하라」 부분
“어둠이라는 사막을 거닐던” 나는 “늘 목마른 낙타”였고, “갈증을 견디기 어려워 마신 술병들이/여기저기 리듬을 타면서 빙빙 돌아다”니다 보면 “온몸에 가시가 잔뜩 돋아있던” 또 다른 나를 만난다. 나는 그런 내가 싫어서 “밤에도 낮에도” 문밖에 나를 내어 놓는다. “낙타와 선인장 사이/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도록/서로의 간격은 점점 멀어지고/죽은 듯 산 듯//가시는 말라 부서지고/쉼표는 마침내/마침표로 바뀌어 버“(「사하라」)린다. 사랑과 이별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쉼표가 마침표로 바뀌는 건 일순간이라는 걸. 자기애(自己愛)라고 다르겠는가.
거짓도 때로는 사랑이 될 수 있다
어느 한순간
예기치 못한 낯선 얼굴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철없는 사랑은 제 그림자를 밟고
얼마나 많은 날을 울었을까
- 「건조한 사랑」 부분
거짓도 때로는 사랑이 될 수 있다. 아니, 사랑은 본래 거짓인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속이기 위해 발명한 환상 같은 게 아니던가.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성적(理性的)일 수는 없는 법. 그러나 모든 사랑은 “제 그림자를 밟고” 우는 “철없는 사랑”일밖에. 사랑이라는 환상이 떠난 자리에는 어김없이 환각이 찾아온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검은 선”(「검은 선들이」)들이 보인다. 식탁 아래도 로봇청소기 옆에도 스펀지 위에도 심지어 발 냄새 제거제 옆에도 불쑥불쑥 나타난다. “머리를 빗다가/화장을 하다가/밥을 먹다가/빨래를 개다가” 맞닥뜨리는 검은 선들. “나의 시간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나와 무관하지 않은 이것”에 집착을 보이며 “무엇이든 물끄러미 바라보는 습성”까지 생긴다. 넋이 나간 사람의 모습이다. 급기야 “검은 선”들은 “실뱀”으로 바뀐다.
내 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아주 작고 투명한 실뱀들이
직립으로 곡선으로 더러는 나선형으로
계곡을 탐험하듯 돌아다니다
벽에 부딪혀서 머리통이 깨져버린다
찢겨진 뱀들의 몸통이 나뒹굴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
머릿속의 절반을 떠다니던 실뱀들
이제 관여하지 않겠다
손을 넣어 끄집어낼 수 없다면
- 「외면」 부분
“머릿속을 기어다는/아주 작고 투명한 실뱀들”의 출몰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의사는 “불면증의 원인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을 줄이라고 하지만, 생각이란 게 줄이고 싶다고 줄여지는가. 생각이라는 괴물은 히드라처럼 머리가 잘린 부분에서 더 많은 머리가 돋아나기 마련이다. 머릿속에 “손을 넣어 끄집어낼 수 없다면” “이제 관여하지 않겠다”고 ‘외면’을 선언하지만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4.
목줄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택한 대가는 이토록 가혹하다. 몸부림과 악다구니를 지나 내가 나에게 지칠 때쯤 체념이 찾아오고, 내가 나를 포기하고 방기하는 그때부터 위태롭다. 위태로움은 안간힘의 결과이다. 통속적(通俗的)으로 비칠지 모르겠으나, 위태로움의 등가물은 술과 눈물이다. 통속이야말로 가장 적나라한 우리 삶의 맨얼굴이 아니겠는가.
(…)
잠든 밤에도 길을 걷는 순간에도
머리에서 발끝으로 떨어지는 슬픔이
바닥에 널브러진 걸레 마냥 구질구질해 보여
누가 볼세라 얼른 치워버린다
사람이 슬픔을 건너뛸 때마다
심장은 얼마나 조였다 늘었다 하는 걸까
소주를 두어 병 마신 어떤 밤
두 다리를 쭉 뻗고
수도꼭지를 끝까지 털어놓은 듯
어느 하루 날 잡아서
실컷 울어야겠다
- 「슬픔을 건너뛸 때마다」 부분
“다 버리고 없는 줄 알았는데/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서, “잠든 밤에도 길을 걷는 순간에도” 흘러 “누가 볼세라 얼른 치워버린다”. “어느 하루 날 잡아서” “소주를 두어 병” 마시고, “두 다리를 쭉 뻗고/수도꼭지를 끝까지 털어놓은 듯” “실컷 울어”보리라 다짐한다. 내 울음만으로는 부족한 나는 남의 울음까지 끌어온다. “오늘의 생이 까놓은 소주/투명하게 흔들리는 술병 속에/K가 울고 있다/조영남의 노래가 그의 눈물을 재촉한다” “낮술로 숙성되어/진하게 퍼지는 사내의 울음이/지하의 습한 벽을 타고 마구 흘러내린다”(「해갈을 위하여」).
아시다시피 낮술은 저녁술이나 밤술의 반대말이 아니다. 낮/밤이 문제가 아니라 처한 상황이 문제다. 더 이상 내가 나를 설득시킬 수 없을 때, 더 이상 내가 나를 납득할 수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버릴 수 없을 때, 이젠 아무것도 다급하지 않을 때 낮술을 찾는다.
찢어진 스타킹처럼 대책 없는 날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걸어둔 작은 카페 입구
-낮술 환영-
카페 유리창에 소금기가 얼룩져있다
약간은 찝찔하고 밍밍한 눈물처럼
느리게 카페의 문을 잡아당긴다
두 개뿐인 탁자 사이로 앉아있던
무료한 시선의 주인 여자
눈빛이 붉다
“어서 오세요”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탁자 위로
팔꿈치를 내린다
“왜 낮술을 마시나요?”
“바다가 너무 새파랗네요”
오늘은 파란 기분
그래서 파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아
- 「낮술 한잔할래요」 부분
맞다. “찢어진 스타킹처럼 대책 없는 날이다”. 무작정 떠돌다가 만난 “바다를 배경으로 걸어둔 작은 카페 입구”에는 구원의 손길처럼 “낮술 환영”이라고 걸려 있다. 카페의 주인은 스스로 손님이 되어 이미 낮술에 취해서 “눈빛이 붉다”. 시인은 묻는다. “왜 낮술을 마시나요?”. 주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답한다. “바다가 너무 새파랗네요”. 바닷물 빛이 너무 새파란 게 낮술을 마시는 이유란다. 낭만적인 이 반응은 차라리 선문답에 가깝다. 문득 시인은 깨닫는다. “오늘은 파란 기분/그래서 파란 것 이외에는/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기로 한다.
이것도 득도(得道)일까? 도(道)라는 것이 ‘소요(騷擾)’를 지우고 ‘고요’를 얻는 경지라면 득도일 것이다. 지금-여기에 집중하며 지나간 시간이나 다가올 시간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도라면 역시 득도일 것이다. 바다가 파랗다고 마시는 사람이 바다가 검다고 안 마시겠는가. 색은 무의미한 핑계일 뿐. 시인은 주인의 맞은편에 앉으며 주문한다. 나도 “낮술 한잔할래요”. 비로소 내가 나를 용서하는 순간이고, 내 욕망을 가여워하는 순간이고, 사막을 건너느라 지친 나를 어루만져주는 순간이다.
여러 날을 앓았다
날카로움에 베인 통증은
광범위 연고를 바르고 발라도
해결되지 않는다
한여름 칼날에 베인 상처가 푸르다
- 「풀잎에 베이다」 부분
시인은 알아챘을 것이다. 나를 괴롭힌 것은 거칠고 살벌한 세상이 아니라 나였다는 것을. 나를 벤 것은 시퍼런 칼날이 아니라 여리디여린 “풀잎”이었다는 것을. 아무리 “광범위 연고를 바르고 발라도” 소용없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피 흘리는 상처가 있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처가 있다면 ‘푸른 상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이 상처는 상처가 아니라 생장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5.
일반적으로 위태롭다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해 보인다는 뜻이어서 부정적이지만, 시에서 위태롭다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아직은 건강하다는 뜻이어서 긍정적이다. 시에서 안정적이라는 건 죽음이다. 오히려 그게 더 위태롭다. 그러므로 김옥경 시의 화자가 보여주는 위태로움은 곧 시인의 ‘건강함’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이때 건강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건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건전과 건강은 다르다. “‘건전’이 집단적 ‘도덕’의 시선에서 ‘선한’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속성이라면, ‘건강’은 개인적 ‘윤리’의 시선에서 ‘좋은’ 것으로 판단되는 어떤 속성”(신형철)이다. 한마디로 건전이 ‘선한 것’이라면, 건강은 ‘좋은 것’이다. 내 욕망을 숨기고 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건전이라면, 내 욕망에 솔직하기 위해 집단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있는 것이 건강이다.
시 쓰기는 내 욕망에 정직하게 답하는 일이고, 그 답을 다시 부정하는 일이다. 그러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깨어있는 의식으로 끝없이 시의 자리를 질문해야하는 시인에게 위태로움은 자기 존재증명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낮술 한잔할래요”라는 이 위태로운 언술은 취기를 빌려 현실을 도피하자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내 안의 사막과 온몸으로 맞서겠다는 자기다짐이 아니겠는가. 부디 김옥경 시인의 ‘낮술’이 “오래도록 비워둔 자리로 시가 찾아”(「적막이 깊다」)오는 소중한 마중물이기를 바란다.
자작시집 엿보기
내 시의 마중물, 아픔과 상처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결정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겪어가면서 살아간다. 저마다 색깔은 다르지만 각자 외로움을 동반한 아픔을 겪으면서 상처를 만들어간다. 그런 상처들은 기쁨을 맛보게 될 행복의 밑거름으로 자리매김을 하여 자신을 보호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또 그런 경험들이 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자신의 가치를 높여서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덕목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상처의 고통과 아픔으로 슬픔에 파묻혀 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져 존재의 허망함을 느낀다. 나 또한 젊은 날을 그렇게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삶의 넓고 깊은 세계의 본질을 알아가면서 스스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의 답을 찾아 죽음이란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내 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아주 작고 투명한 실뱀들이
직립으로 곡선으로 더러는 나선형으로
계곡을 탐험하듯 돌아다니다
벽에 부딪혀서 머리통이 깨져버린다
찢겨진 뱀들의 몸통이 나뒹굴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생식능력이 뛰어났을까
날마다 새롭게 기어오르는 것들로
복잡해진 머릿속이
누워서도 흔들린다
어지러워 잠에 들면 가득 차오르는 꿈
구름처럼 뭉게뭉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떠도는 그것들이
나를 앉혔다 눕혔다 한다
바다의 끝은 어딘가
그 끝에 닿기 위해
뱃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를 홀로 가는 배처럼 나도 항해를 한다
바다 어디쯤에서
오래전 그대가 보낸 물음에 답할 수 있을까
길고 긴 항로,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바다 냄새에 밀려나는 머릿속
감당하지 못한 바다에 두려움을 느낀다
불면증의 원인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입니다
의사는 생각을 줄이라며 처방전을 내어 준다
작은 알약에 그어진 줄
줄 사이로 언뜻 보이는 어린 날의 실루엣
아직 완치되지 못한 상처
그 상처의 트라우마
머릿속의 절반을 떠다니던 실뱀들
이제 관여하지 않겠다
손을 넣어 끄집어낼 수 없다면
-<외면> 전문
부모님의 이혼으로 인해 복잡해진 집안 사정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어 내성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게다가 어머니는 이혼 과정에서 여동생을 데리고 나가서 잃어버렸다.
갓 여섯 살이 된 어린 여동생의 얼굴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많은 시간 동안 찾아보았지만 지금까지 소식이 없기에 동생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들에 대한 상처는 치유하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비밀구역으로 봉쇄되었다. 하지만 숨긴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나의 트라우마로 불면증과 우울로 자해와 자살을 거듭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죽음의 문턱을 넘어와 다시 삶을 시작한 후 나는 두 번 다시는 자살을 꿈꾸지는 않았지만 불면증은 달고 살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이가 많아져도 아직 나는 어린 나이에 머물러 있다.
길바닥에 떨어진 장갑 한 짝
그냥 지나치려다 슬쩍 주워본다
잘 맞을까, 어디 한번 손을 넣어볼까
부잣집 막내딸은 고등학교를 채 졸업하지 못하고
스무 살에 나를 낳았다.
어린 엄마는 반찬값보다 과자 값이 더 많이 들었다
아이처럼 과자를 먹으며 발가락을 까딱거리던 그녀는
검은색을 유난히 좋아해
검은 브래지어와 검은 장갑을 즐겨 하였다
나는 그런 모습이 마냥 싫어서
지금도 검은색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검은 레이스 장갑도 지독하게 싫어한다
길에서 주운 검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죽은 엄마,
엄마의 초상화를 다시 들고 나와
화장터를 지나는 길
당신의 검은 장갑이 불속에서 손을 흔든다
길 위에는
바람도 비도 구름도 없었고
나는 속으로 내 말을 하다가
내가 만든 언어로 엄마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이제 와 눈물을 뿌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는 생각에
나의 연민을 거두어들인다
길 위에서 나는 잠시 철없던 엄마를 만났다
-<검은 레이스의 길 위에서> 전문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이를 낳고 힘든 결혼생활을 하면서 겪은 아픔은 또 다른 아픔을 만들었지만 나는 부모님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면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깨달았기에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을 아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식을 키우면서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와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시를 많이 좋아했던 엄마는 시대를 앞서간 여인이었다고 할까? 그 당시에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스타일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학교를 찾아왔는데 전교생들이 우르르 창으로 몰려가 구경을 하는데 뭔가 하고 바라보니 우리 엄마였다. 웨이브가 진 긴 머리에 짧은 미니스커트에 짙은 화장을 한 엄마의 모습은 마치 배우 같았다. 그런 엄마를 다시 만난 것은 길에서 떨어진 검은 장갑 한 짝 때문이다.
검은 스웨터를 입고 성직자 묘지를 찾는다
커다란 돌 십자가 아래 잠든 성직자
나는 죽은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받는다
죄가 죄인 줄 모르고 지은 나의 죄에 대하여
누군가 때문에 고통받던 내가
나로 인해 고통받았던 누군가
우리는 서로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과하기를 기다렸다
사과받기를 기다렸다
위험한 나의 용서와 위험하지 않은 당신의 용서를 위해
나의 무게로 나를 누른 이기심
극복하지 못했던 나의 절망을
순응하지 못했던 나의 교만을
한때 만난 인연들의 우연이
내 귀를 사로잡던 모든 말들이
오래 머물지는 않더라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니겠지
끝의 또 다른 한쪽은 시작이니까
나를 깨우는 종소리
Hode Mi Cras Tibi
-<Hode Mi Cras Tibi> 전문
대구 남산동에 위치한 성직자 묘지 입구에 적혀있는 라틴어이다. <오늘은 나 내일은 당신>이라는 뜻으로 오늘 죽음이 나에게 찾아왔지만 내일은 당신에게 찾아갈 수도 있다는 의미가 담긴 글이다.
나는 늘 종교를 앞에다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독실한 가톨릭 신자도 아니지만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릴 적 성당 마당에서 뛰어놀았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어떤 곳보다도 성모당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성모당 안에 있는 성직자 묘지에 잠든 사제들의 죽음이 가진 행복스러운 침묵은 삶의 갖은 고통을 치르고 평온한 땅으로 되돌아온 것이기에 그곳에 앉아 있으면 매우 평온함을 느낀다. 그래서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벌받지 않을 정도의 잘못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오는 오해와 다툼까지 고백하여 나의 유죄를 입증하는 곳이기에 지금 내 삶에 주어진 시간 동안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
김옥경 시인 약력
대구 출생.
2013 『시와 사람』으로 등단.
시집 『벽에 걸린 여자』, 『바다의 전설』, 『낮술 한잔할래요』
2017년 대구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 수혜
2019년 부안 디카시 공모전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