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치 위반
우동식
세상살이에서 중요한 일이 오죽 많으랴. 그중의 하나가 마음을 좋은 방향으로 쓰는 일이 아닐까 한다. 그렇건만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감한다. 그러기에 어느 성인(聖人)은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고 권했나 보다.
그런데, 다행히도 최근에 바람직한 상황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힘으로서 ‘경이로움’과 ‘놀라움’이라는 심리적 체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 외 대상에 감탄하는 것과 관계되는 일이다. 특히 퇴임 후 숲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연으로부터 크고 작은 자극을 받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생전 처음으로 꽃아끼시나무꽃을 보았다. 봄비가 가볍게 내리는 어린이날 아침이었다. 구미와 김천의 접경지역 마을의 민가 마당에서 이 꽃을 처음 발견하고는 신기해서 그저 사진기를 눌러댔다. 비에 살포시 젖은 채로 푸른 잎새 사이에 내민 빨간 얼굴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은근히 매혹적이었다. ‘품위’, 혹은 ‘우아함’이라는 꽃말이 잘 어울린다고 여겼다. 말로만 듣던 ‘빨간 아까시꽃’이 정말 있구나 싶어 흥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에 앞선 4월 초순이었다. 칠곡 가산산성 둘레길 산행 때 만났던 복수초 군락에 대한 감동이 아직 생생하다. 그 꽃은 이 산성의 상층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발견한 것은 ‘남포루’ 근처의 옛 마을 터 윗 부분에 있는 작은 군락이었다. 이른 봄에 발견되는 이 꽃이 보통은 눈 속에서 한두 송이씩 뛰엄뛰엄 찾을 수 있는 데 비하여 거기는 4월 중순이 가까워지고 있는 시점에도 생생하게 피어 꽃밭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더니 성(城)의 중문에서 ‘가산바위’로 가는 산길 가운데 엄청나게 큰 복수초 꽃밭이 펼쳐지는 게 아닌가. 너무나 벅차서 ‘우와!, 우와!’ 하고 경외감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모니카 C. 파커가 그의 저서 『경이로움(wonder)의 힘』에서 밝힌 ‘기대치 위반’의 현장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 만큼 그날의 성벽 산책은 또한 ‘경이로운 산책’이었던 것이다.
아직 나뭇잎들이 피지 않은 무채색의 산속에서 벌어지는 노랑 꽃과 초록 잎의 향연은 세상을 눈부시게 밝혀주고 있었다. 게다가 성터 곳곳에는 땅에 나지막이 앉은 개별꽃의 흰색과 옅은 초록의 자태가 복수초의 향연에 조연을 맡은 듯 배경이 되어 주고 있기도 하여 봄의 산 그림을 더 환하게 해 주었다. 알려진 바로는 여기가 ‘세계 최대의 복수초 군락지’라고 한다. 그 분포의 범위를 보아 그렇게 불려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또한 숲해설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의외의 생태로 내 마음을 울려준 것은 감태나무의 겨울 마른 잎과 솔방울이다. 감태나무는 겨울눈을 감싸 보호하기 위해서 단풍잎을 떨구지 않고 이듬해 4월 중순까지 견딘다. 솔방울은 비가 오면 틈새에 들어 있는 솔씨가 젖지 않도록 감싸 안으면서 쪼그라든다. 두 식물의 아기 사랑, 그 모성애에 고개가 숙어진다.
그런데 이렇게 기대하지 못한 데서 오는 감동은 자연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사람끼리의 관계에서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비록 제 스스로의 뜻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 사이에서 ‘기대치 위반‘을 맞이하여 예상치 못한 긍정으로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루셀 박사는 그것을 ‘놀라움(surprise)’이라 하였다. 그의 저서 『놀라움의 힘』에서는 이와 관련된 많은 사례들을 들려주고 있다.
예컨대, 엄마의 예상치 못한 격려‧칭찬으로 음악을 전공하게 된 딸의 사례가 있다.너태샤가 여덟 살 때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엄마와 함께 할머니 댁을 찾았다. 그녀는 바깥에서만 놀아라는 엄마의 말을 어기고 호기심에 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예쁜 소품들을 만지다가 하모니카를 발견하고는 방 안을 빙글빙글 돌며 불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너태샤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엄마는 뒤죽박죽 어질러진 방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름다운 연주구나! 우리 딸이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네. 할머니가 들었다면 좋아하셨겠다.”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너태샤는 꾸지람을 예상했지만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 그래서 놀랐다. 그녀는 그 순간을 ‘아마 그게 음악에 대한 내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라고 기억했다.
또한 법정스님의 ‘설해목’이라는 수필의 서두에 나오는 ‘더벅머리 학생’ 일화도 같은 경우로 여겨진다. 어느 노승이 친분이 있는 분의 망나니 아들을 맡아 ‘사람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노승이, ‘진저리 나는 훈계’라는 예상을 뛰어넘어 아무런 말도 없이 저녁밥을 지어주고, 발을 씻을 더운물을 떠다 주는 등 다사로운 손길로 환대를 해 주자 더벅머리 학생이 그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경이로움(wonder)이나 놀라움(surprise)을 가져다 주는 기대치 위반은 긍정적인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다. 이것은 지적 호기심과 풍요로운 감정 경험을 통한 의미 찾기를 북돋워서, 실제로 삶의 어려움을 딛고 치유와 성장의 길로 나아가는 울력이 되기에 기꺼이 감사하게 맞이하고 싶다. ‘마음만이 소중하니라.’는 금언을 좇아, 앞으로의 나날도 자주 그런 상황과 함께하기를 소망하고 싶다.
이 다음은 또 어떤 대상들이 나에게 기대치 위반을 선사할지 기다려진다.
--문학공간사, 『文學空間』 통권 418호(2024.9), 90~93쪽.